2003년 7월호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임금 주최한 파티에서 기생과 섹스… 장교들간엔 ‘특급 기생’ 쟁탈전

  • 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입력2003-06-25 1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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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사회는 축첩제, 기생제를 근간으로 양반 남성이 성적 욕망을 한껏 충족시킨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였다. 양반 가문에선 간통, 강간이 횡행했다.
    • 특히 조선시대엔 많은 여성이 기생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기생제도는 양반 남성이 피지배 계층 여성을 마음대로 취하는 통로였다.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어우동이란 여인이 있다. 잘 알려진 사람이다(‘왕조실록’에는 ‘어을우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어우동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도 있고 영화도 있다. 조선시대 최대의 성적 스캔들을 일으킨 여인으로, 이 여인의 거침없는 남성편력, 성적 욕망의 표출은 자못 현대인의 관심을 끌었다. 어우동을 테마로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든 작가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성적 억압이 강고했던 중세사회에서 한 여인이 성적 자유를 구가했다면 근대화의 단초가 되는 행동이 아닌가’라고. 이건 그럴 법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어우동을 돌출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뒤집어보면 어우동과 관계를 맺은 남성들이 없다면 어우동 역시 없다.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들은 성리학이란 도덕철학으로 무장한 도덕적인 인간으로 알려져 있다. 어우동의 존재는 양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에 오류가 있음을 암시한다.

    조선시대는 축첩제가 공인되었으나 여성의 투기는 칠거지악으로 금기시되었다. 축첩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그런가 하면 기생제도도 존재했다. 조선시대 남성에게 성적 스캔들은 제도화,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경우에는 축첩제는 커녕 남편 아닌 자와 성관계를 맺으면 철저하게 응징되었다. 불균형이었다.

    어우동에 앞서 어우동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다. 유감동(兪甘同)이다. 이 인물의 일화도 1988년 ‘깜동’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유감동은 세종 때의 실존인물이다. 감동의 아버지는 검한성(檢漢城·일종의 벼슬 이름) 유귀수(兪龜壽), 남편은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였다. 말하자면 감동은 당당한 사족(士族), 즉 양반이었다. 만약 양반이 아니었다면, 감동의 남성편력은 사건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처음 보고된 세종 9년 8월17일의 ‘실록’ 자료에 의하면,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감동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감동이 병을 핑계로 도로 서울로 올라와 방종하게 굴자 최중기가 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방종이라 함은 아마도 성적 방종을 의미할 것이다. ‘실록’은 감동의 사건을 처음 보고하면서, 그가 관계했던 남자로 이승(李升)·황치신(黃致身)·전수생(田穗生)·김여달(金如達)·이돈(李敦) 등 6명의 이름을 밝혔다. 그 외 이름을 숨긴 간통자 역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 사건은 세종 9년 9월16일 최종 종결될 때까지 거의 두 달을 끌었다. ‘실록’ 자료를 정리하여 간통자의 이름을 모아보면, 거의 40명에 가깝다. 그 중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양반들이다. 총제 정효문(鄭孝文), 상호군 이효량(李孝良), 해주 판관(海州判官) 오안로(吳安老), 전 도사(都事) 이곡(李谷) 등이 제법 고관들이었고 장연 첨절제사(長淵 僉節制使)·사직(司直)·부사직·판관·찰방·현감 등의 벼슬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수공업 기술자인 공장(工匠)으로 수정장(水精匠)· 안자장(鞍子匠)·은장(銀匠)도 있었으니 감동은 신분에 상관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던 듯하다.

    간통한 여성은 사형, 상대남은 곤장형

    이효량과 정효문은 양반답지 못한 처신을 했다. 이효량은 감동의 남편인 최중기의 매부이면서 감동과 간통했다. 정효문은 숙부 정탁(鄭擢)이 감동과 간통한 사실을 알면서도 감동과 성관계를 가졌으니, 근엄한 양반이 할 일은 아니었다. 물론 정효문은 정탁과 감동과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고 밝혔으나 사헌부의 조율(照律, 법규를 구체적 사건에 적용하는 것)은 정효문의 변명을 일축했다.

    조선 정부는 남자 40명과 간통한 여인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감동에 대한 문책은 그가 결혼한 여인이라는 데서 시작되었다. 세종 9년 9월16일 사헌부는 감동의 형량을 결정했다. 감동에게 적용된 죄목은 간통이 아니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개가한 자”에 해당하는 처벌이었다. 즉 “유감동이 최중기와 부부로 살 적에 김여달(金如達, 최초의 간통자)과 간통했던 바, 후에 남편과 함께 자다가 소변을 본다는 핑계로 달아나 김여달에게 갔다”는 것이 구체적 죄목이었고, 그 형량은 교형(絞刑), 즉 사형이었다. 이에 반해 감동과 간통한 남성 20명은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곤장 40대, 곤장 100대, 태형 50대, 파면 등 다양했으나 사형에 비하면 처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유감동 사건(1427)이 일어난 지 53년 뒤인 성종 11년에 너무나도 유명한 어우동 사건이 일어났다. 어우동의 이름은 성종 11년 7월9일 처음 나온다. 요지는 이렇다. 의금부가 “어우동이 태강수(泰江守)의 아내였을 때 방산수(方山守) 이란(李瀾)과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와 간통했는데 이는 율이 장(杖) 100대, 도(徒) 3년에 고신(告身, 조정에서 내리던 벼슬아치의 임명장)을 모조리 추탈하는 죄에 해당한다”고 보고하자, 성종은 “장형은 속전(贖錢)을 내게 하고, 고신을 빼앗은 뒤 먼 지방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했다.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이어 같은 해 10월18일 어우동은 결국 사형을 당하게 된다. 이 사이 어우동과 관계된 자료가 적지 않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은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을 밝히고 처벌의 형량을 정함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형량을 정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예컨대 방산수 이란이 어우동과 간통한 사람이라고 지목했던 어유소(魚有沼)·노공필·김세적·김칭·김휘·정숙지의 처벌 문제가 큰 관심사가 되었다.

    사헌부에서는 이들을 철저히 조사해 중벌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성종과 일부 관료들은 방산수가 자기 죄를 가볍게 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일부러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어유소·노공필·김세적은 석방하여 신문하지 않았고, 김칭·정숙지 등은 한 차례 형신(刑訊)하고 석방했다.

    성종의 처분은 논란거리가 되었으나, 끝내 이들에 대한 추가적 처벌은 없었다. 어유소는 병조와 이조의 판서, 좌찬성 등 최고위직을 지낸 중신이었다. 또 방산수와 수산수는 임금의 종친(宗親)이었다. 관직이 높을수록 간통죄에 대한 처벌이 미약했던 것이다. 그 외 간통한 사람들도 처벌을 받기는 하였으나, 모두 가벼운 것이었고 심지어 2년 뒤엔 모두 풀려났다(성종 13년 8월8일).

    상대 남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토록 가벼웠던 데 반해 어우동에 대한 처벌은 앞서 밝힌 대로 극형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우동의 형량을 두고 조선정부 내에선 갑론을박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당초 의금부에서 조율한 어우동의 죄목과 형량은 다음과 같았다.

    “태강수 이동(李仝)이 버린 처 어을우동이 수산수 이기와 방산수 이란, 내금위 구전, 학유(學諭) 홍찬, 생원 이승언, 서리 오종련, 감의형, 생도 박강창, 양인(良人) 이근지, 사노(私奴) 지거비(知巨非)와 간통한 죄는 율이 결장(決杖) 100대에, 유(流) 2000리에 해당한다”(성종11년 9월2일).

    성종이 직접 어우동 교수형 명령

    의금부의 이같은 형량은 법전에 기초한 것이었다. 임금은 이 형량을 두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의견이 두 가지로 갈라졌다. 그 중 한 가지는 의금부의 형량을 그대로 따르자는 것이었다. 정창손(鄭昌孫)의 말을 들어보자.

    “어을우동은 종친의 처이며 사족의 딸로서 음욕(淫欲)을 자행한 것이 창기(娼妓)와 같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태종과 세종 때에 사족의 부녀로서 음행(淫行)이 매우 심한 자는 간혹 극형에 처했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모두 율에 의하여 단죄하였으니, 지금 어을우동 또한 율에 의하여 단죄하소서.”

    극형에 처해야 할 것이지만, 조종(祖宗)의 전례에 따라 정해진 법률에 의해 단죄하자는 것이다. 범죄가 가증스럽다하여 율 밖의 형벌을 적용하면 자의적으로 율을 변경하는 실마리가 된다는 견해도 나왔다(김국광의 견해). 어우동의 죄는 무겁지만 율은 사형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 중론이었다(채수의 견해).

    최종적 결론을 내린 사람은 왕이었다. 성종은 법률 밖의 법률을 따르자는 심회(沈澮) 등의 주장을 따랐다. 성종은 음란 방종에도 불구하고 어우동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징계할 수단이 없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의금부에 사율(私律), 곧 법률에 없는 율을 적용하라고 명하였다. 사형이 결정된 것이다.

    무엇을 사형의 이유로 할 것인가. 10월18일 의금부에서 다시 어우동의 형량을 조정하여 왔다. ‘대명률’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의(比擬)하여, “교부대시(絞不待時)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부대시는 중형이다. 교형에 처하되,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형에는 참형과 교형이 있는 바, 참형은 칼로 목을 베는 것이고 교형은 교살형이다. 원래 사형은 죽은 자의 원기가 천지의 조화로운 기운을 해친다 하여 만물이 생장하는 봄, 여름을 피해 집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범죄의 성격이 모질면 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즉각 처형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교부대시, 참부대시다. 어우동의 교부대시에 대해 다시 의견 조율이 있어 의논이 분분했으나, 성종이 어우동을 죽이기로 결심한 터라 결론이 바뀔 리 없었다. 결국 의금부가 사형을 결정한 바로 그날(10월18일) 어우동의 목에 올가미가 걸렸다.

    어우동이 한 일은 현재의 한국 법률에서도 간통, 즉 범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형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다. 당시 조선의 법률 조문, 현재의 검찰에 해당하는 의금부, 법률 전문가들인 상당수 정부 관료들도 사형은 가혹하다고 본 것이다. 상대한 남성에 대한 처벌과 비교해본다면 더구나 형평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우동은 죽임을 당했고 음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간통죄의 처벌에 임금이 이렇게 깊이 개입한 것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어우동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풍성하지만, 대부분은 관련자들의 처벌 문제에 관한 것이고, 어우동의 남성 편력에 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다. 어우동의 행적은 어우동이 교형을 당한 그 날짜의 실록(성종 11년 10월18일)에 자세히 실려 있다. 이 자료를 근거로 어우동의 행각을 조금만 언급해보자.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朴允昌)의 딸로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과 결혼했다. 태강수 이동은 임금의 종친이다. 어우동은 당당한 사족의 딸로 종친에게 시집을 갔으니, 지체가 높았다. 그러나 “시집가서 행실을 자못 삼가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태강수가 어우동을 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태강수가 은장(銀匠)을 불러 은그릇을 만드는데, 어우동이 은장이에 호감을 품고 계집종 옷을 입고 은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남편이 내쫓았던 것이다. 이것이 어우동이 쫓겨난 내막이지만 자세한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남편에게서 쫓겨나 친정집에 머무르던 어우동을 타락의 길로 이끈 것은 계집종이었다. 계집종은 어우동에게 오종년이란 사람을 소개한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기에 상심하고 탄식하기를 그처럼 하십니까? 오종년이란 이는 일찍이 사헌부의 도리(都吏)가 되었고, 용모도 아름답기가 태강수보다 월등히 나으며 족계(族系)도 천하지 않으니, 배필을 삼을 만합니다. 주인께서 만약 생각이 있으시다면, 마땅히 주인을 위해서 불러오겠습니다.”

    계집종은 오종년을 데리고 왔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후의 ‘실록’은 어우동이 먼저 유혹하거나 혹은 유혹당하기도 하면서 오종년을 시작으로 방산수 이란, 수산수 이기, 전의감 생도 박강창·이근지, 내금위 구전, 생원 이승언, 학록 홍찬, 서리 감의향, 밀성군의 종 지거비 등과 관계를 맺은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

    조선사회는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나라였다.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윤리학이다. 삼강오륜은 그 윤리학의 핵심이다. 이렇게 윤리적이라는 사회에서 유감동과 어우동은 얼핏 돌출적인 존재로 보인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감동과 어우동의 출현은 전혀 돌출적 현상이 아니었다. 세종 18년 4월20일 이석철(李錫哲)이 처제인 종비와 통간한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세종은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간통사건들을 떠올린다.

    “변중량(卞仲良)의 누이동생, 가노(家奴)와 간통. 유은지(柳殷之)의 누이동생이 중과 비밀히 간통하고, 가노 세 사람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꺼려서 다 죽임. 관찰사 이귀산(李貴山)의 아내가 지신사 조서로(趙瑞老)와 간통. 승지 윤수(尹須)의 아내 조씨(趙氏)는 고종사촌 홍중강(洪仲康)과 장님 하경천(河景千)과 통간하였으므로 역시 극형에 처함. 금음동(今音同)과 동자(童子)는 모두 양가의 딸로서 혹은 종형과 통간하고, 혹은 외인과 통간하여 풍속을 문란케 하였으므로, 율에 따라 결죄(決罪)하고 천인으로 내침. 유장(柳璋)의 딸인 안영(安永)의 아내는 고종사촌 홍양생(洪陽生)과 통간. 이춘생(李春生)의 딸인 별 시위 이진문(李振文)의 아내(어리가)는 부사정 이의산(李義山)과 양인 허파회(許波回)와 통간함.”

    구름이 달을 가리자 기생을 더듬고…

    이것들은 세종의 기억에 간직된 것이고 또 사건화된 것이니,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일들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감동과 어우동은 결코 돌출적 존재가 아니었다. 조선사회는 간통이 다반사로 일어난 사회였다. 도덕의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세종 15년 어리가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기록을 참고하자.

    어리가는 병조참판 이춘생의 딸이고 별시위 이진문의 아내였다. 양반 중의 양반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리가는 “양반집 부녀로서 상복(常服)을 입고 길거리를 쏘다니며 함부로 음란한 행동을 하여 이의산과 비첩(碑妾) 소생인 허파회와 간통”했다(세종 15년 11월25일). 사건이 알려진 뒤 어리가는 해진(海珍)에, 이의산은 기장(機長)에 안치되었고, 허파회는 영북진(寧北鎭)에 충군(充軍)되었다(세종15년 12월5일).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사헌부는 이런 말을 한다. “본조(本朝)에서는 사족의 집 부녀는 나갈 때에는 반드시 얼굴을 가리고 수레를 타게 하였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금지하고 막는 것이 지극히 엄중한 것은 여염 부녀자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목적의 도덕적 금제(禁制)가 완강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간통사건이 자주 발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결론은 자명하다. 이슬람의 율법 같은 조선의 도덕적 금제보다 성적 욕구를 분출하려는 남성들의 행동이 훨씬 더 강했기 때문이다.

    성관계란 남녀 둘이 있어야 가능하다. 여자끼리의 성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것은 성적 소수자(小數者)의 일이다. 따라서 감동과 어우동 사건은 여성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남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우동을 성적 이상자라고 한다면(이것이 감동과 어우동을 치죄한 근거였다), 양반계층의 남성들이야말로 더 확실한 성적 이상자였다. 조선시대 왕들은 원하기만 하면 성적 상대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었다. 자식을 많이 보아 왕실을 튼튼히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여성이 임금과 성관계를 갖는 것은 ‘승은(承恩)’, 곧 은혜를 입은 것으로 표현됐고, 그들은 이내 후궁이 되었다. 제왕이 정비(定妃) 이외에 후궁을 많이 차지하는 것을 두고 간통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간통은 제도를 만드는 사람의 권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

    감동과 어우동을 비난하고 처벌했던 양반들의 성 문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흔히 고려 말의 도덕적 타락상을 들지만, 조선 전기 양반들도 고려에 못지않았다. 성종 20년의 일이다. 왕은 의정부·육조 판서·경연 당상·승지·홍문관 예문관 등의 고급관료로 하여금 장악원에 모여 달 구경을 하게 하였다. 음력 8월15일 한가위의 밤이었다. 임금은 술과 음악을 하사했다.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사신의 평이 실려 있다.

    “임금이 근신(近臣)을 우대하여, 은례(恩禮)가 심히 융성하였다. 이날 밤에 여러 신하가 회음(會飮)하였는데, 마침 검은 구름이 달을 가리어 어두컴컴하고 밝지 아니하니, 승지 조극치(曹克治)가 기생을 데리고 청사(廳事)에서 음행(淫行)하였다”(성종 20년 8월15일).

    8월15일은 만월이지만, 마침 구름이 달을 가렸다. 야음을 이용하여 승지 조극치는 임금이 주최한 파티에서 기생과 성행위를 벌였던 것이다. 조극치는 사신에게 비난을 받았지만,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조극치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럴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 동원해 대로에서 기생 쟁탈전

    세종 16년 자료를 보자. 8월에 장마가 열흘 동안 계속돼 벼농사가 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금주령이 내려졌고 왕도 근신중이었다. 이런 때 이순몽(李順蒙)은 경상도 도절제사가 됐고 조종생(趙從生)은 전라도 관찰사로 발령이 났다. 이들은 행사직(行司直) 홍거안(洪居安) 집에 모여 기생과 광대를 불러 풍악을 잡고 술판을 벌였다. 가뭄에 잔치를 한 죄로 두 사람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부임하지도 못하고 벼슬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순몽에 관한 기록에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이순몽은 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의 아들인데, 아버지의 음덕으로 벼슬이 동지총제에 이르렀고, 기해년 대마도 정벌 때에 전공(戰功)이 있어서 자헌(資憲)에 올랐으며, 지난해에 파저강 토벌에서도 노획한 바가 많아서 판중추(判中樞)에 올랐다. 위인이 광음(狂淫)하고 방탕하였는데, 한번은 경상도에 가서 어머니 무덤에 성묘하고 돌아오다가 상주(尙州)의 기생을 데리고 문경현(聞慶縣) 초참(草岾)에 와서 기생과 같이 냇물에서 목욕을 한 뒤 나무 그늘 밑에 끌고 들어가서 크게 외치기를, ‘기생과 행음(行淫)한다’ 하고 곧 행음하였으니, 광탕(狂蕩)함이 이와 같았다”(세종 16년8월5일).

    이순몽보다 더 단수가 높은 인물은 그의 아들 이석장(李石杖)이었다. 이석장은 아버지 이순몽의 첩 보금(寶今)과 통간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증거가 명백한데도 이석장은 자기가 아버지보다 먼저 보금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변명했다(단종 즉위년 6월24일). 이 황당한 사건을 두고 사신은 이렇게 말했다. “이순몽이 황음(荒淫)하여 법도가 없어 가법(家法)이 패하고 무너져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석장과 보금의 통간은 참부대시(斬不待時)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런데 정작 이석장이 죽은 것은 1년이 지난 뒤 옥중에서였다. 그는 보금을 옥중으로 계속 불러 측간(화장실)에 가서 간통하였는데, 그 여자가 또 아이를 배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결국 그 여자는 쌍둥이를 잉태했는데 한 아이의 분만을 마친 뒤 나머지 아이를 해산하던 중 죽었다.

    조극치·이순몽·이석장은 특별한 사례가 아니었다. 조선시대 양반의 성생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양반 사대부는 이념은 도덕적이었으나, 실제 생활에선 결코 도덕적이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 터부시하는 일들도 양반들 사이에선 빈번히 발생했다. 축첩제와 매매춘이 일상화된 형태인 기생제도는 양반들의 일탈적 성생활을 가능하게 한 사회구조적 요인이었다.

    태종 7년에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 이해 12월2일 태종은 대호군 황상(黃象)을 파직시키고, 갑사(甲士) 양춘무(楊春茂) 등 네 사람을 수군(水軍)에 편입시켰다. 수군은 천역(賤役)이기 때문에 수군에 편입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끝장나는 것을 의미했다. 기생 쟁탈전이 그 발단이 됐다.

    황상은 기생 가희아(可喜兒)를 첩으로 삼았는데, 총제(摠制) 김우(金宇) 역시 가희아와 통정한 사이였다. 11월12일 동짓날 가희아가 궁중 잔치에 불려갔다가 잔치가 끝난 뒤 대궐을 나와 황상의 집으로 돌아가는데, 김우가 자기 휘하의 기병(騎兵) 보병(步兵) 30여 명을 보내 대기하고 있다가 가희아를 납치하려 하였다. 그러나 작전(?)이 실패하자, 김우의 병사들은 황상의 집을 포위했고 김우의 부하인 갑사 나원경·고효성 등이 곧장 황상의 내실(內室)에 들어가 가희아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가희아의 옷만 가지고 돌아갔다.

    김우는 다음날에 다시 종들을 보내 이번엔 가희아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일행이 수진방 어구에 이르렀을 때 황상이 말을 달려 뒤쫓아왔다. 그러자 김우가 즉시 부하인 갑사 양춘무·고효성·박동수 등 10여 명과 개인 수행원 20여 명을 출동시켜 황상과 몽둥이 싸움을 벌이게 했다. 군대의 고급장교들이 기생을 차지하기 위해 휘하의 병사를 동원하여 백주대로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었다. 이것은 희대의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기생을 집에 데려와 함께 사는 일 일상화

    가희아의 사건은 결코 일회성 사건이 아니었다. 기생 쟁탈전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성종 13년 1월4일 청풍군(淸風君) 이원이 전 부평부사 김칭과 길거리에서 기생 홍행(紅杏)을 두고 설전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김칭은 구속, 이원은 종부시에서 국문을 당했다. 그런데 처벌 이후에 벌어진 싸움이 더 흥미롭다.

    12일 뒤 두 사람은 한 번 더 싸움을 벌이게 된다. 김칭은 홍행의 집에 가서 이원과 몸싸움을 벌이던 중 이원의 왼손을 깨물어 상처를 냈던 것이다. 옆에 있던 홍행은 김칭이 다칠까봐 이원의 허리를 붙잡았는데 그 바람에 이원의 옷이 찢어졌다. 김칭은 장 100대의 중형을 받았다. 홍행은 장 90대를 맞았다.

    홍행과 이원은 한 차례 전과가 있는 사이였다. 이원은 자신의 칠촌 숙부(七寸叔)인 송림 부정(松林副正) 이효창(李孝昌)의 첩기(妾妓)였던 홍행을 간통한 사건으로 3년 전에 파직된 적이 있었다(성종 10년 7월28일). 이원은 이 사건과 홍행의 집에 가서 김칭과 다툰 사건으로 직첩(職牒)을 박탈당하고 외방(外方)에 부처(付處)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두 달 뒤 김칭은 홍행을 귀양지로 불러들여서 관계를 갖다가 발각되어 다시 처벌되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성종 20년 12월1일에 발생했다. 공조 정랑으로 임명된 이계명(李繼命)의 인사가 합당한 것인가를 두고 논란이 일었는데, 그 이유는 이계명이 기녀를 두고 다른 남성과 다투다가 머리털이 잘린 적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계명은 이러한 구설 때문에 하마터면 벼슬을 얻지 못할 뻔했다. 기생 쟁탈전은 양반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던 셈이다.

    기생이 아닌 민간의 부녀를 겁탈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성종 13년 1월17일 사헌부 보고에 의하면, 안악군수 곽순종(郭順宗)은 신천(信川) 고을 수령과의 잔치에서 관비(官婢) 우동(于同)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한 뒤 우동의 남편을 잡아 가둔 뒤 우동을 밤새도록 범했다.

    부모의 상중에 기생과 관계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성종 18년 11월10일 자료엔 김석이란 자가 나온다. 그는 어머니의 상중에 빈소를 차려놓은 상태에서 기생 백옥아(白玉兒)와 성관계를 가졌다. 세종 28년 12월12일 유연(柳淵)은 아버지 부지돈녕 유중창(柳仲昌)이 죽자, 상중에 있으면서 기생 소진주(小眞珠)를 간통하고는 음악을 벌여놓고 술을 마시며 공공연히 고기를 먹었던 사건으로 국문을 받았다. 최말철(崔末哲)은 국상 중에 기생 천금월(千金月)·중아(中蛾)를 간통하여 과부인 어미 집에 데려다두고, 또 부친의 상중에 의녀(醫女) 월비(月非)를 간통한 사건으로 불충 불효의 죄목으로 귀양을 갔다가 벼슬이 떨어졌다(세조 3년 6월18일).

    이런 류의 사건 중에서 압권은 군기시 주부 이청(李聽)의 경우일 것이다(세종 22년 10월30일). 이청은 무뢰배와 어울려다니는 힘깨나 쓰는 사내였다. 어머니가 병들자 병환을 시중하였으나, 병이 심해지자 시중은커녕 창기 패강아(貝江兒)에게 노래를 시키고 춤을 추게 하면서 술을 마시는 등 걱정하는 빛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가 죽자, 패강아를 집에 숨겨두고 간음하였다.

    사헌부에서 소문을 듣고 집을 수색하자 패강아가 나타나 “이청이 어떤 때에는 저를 종(奴)의 집에 숨기고, 어떤 때에는 빈소(殯所) 옆에 숨겼습니다”고 하였다. 이청의 아버지 이종인(李種仁)은 이때 의금부 지사(知事)였다. 아들의 부도덕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출근했다가 파직되었다. 이청은 전 판사(判事) 이반(李蟠)의 손자이고, 대제학 윤회(尹淮)의 사위였다. 이청과 그의 아내는 가까운 친척인데 이욕(利欲)을 탐내어 혼인했다고 한다. 사신의 평은 이렇다. “이반과 윤회는 다 유자(儒者)이나 이욕의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함이 이와 같았다.”

    어우동과 양반의 성문화
    국상 때는 원래 기생과 성관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말도 되지 않는 법이지만, 법이 있다고 해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실록에도 국상 중에 기생과 관계하다가 처벌된 사례가 무수히 보인다. 예컨대 성종 4년 8월27일 안철손(安哲孫)은 국상(國喪) 중에 감사(監司)로서 관기(官妓)를 마음대로 간통하여 홍주(洪州) 온 고을이 시끄러웠고, 충청도 온 도가 시끄러웠으며, 조정이 떠들썩하여 성상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안철손의 처벌문제를 두고 한동안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기생 쟁탈, 상중의 성행위, 간통, 부녀의 강간 등의 행위는 양반사회에서 상당히 일반화된 일이었다. 기생 점유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황상과 김우의 가희아 쟁탈전이 문제가 된 것은 군사를 동원해 백주대로에서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세상에 알려질 일도 아닌 사건일 뿐이었다. 이 사건을 접한 태종의 말을 들어보자.

    “내연(內宴)에 정재(呈才, 조선 때 대궐 잔치에서 하던 노래와 춤)하는 상기(上妓)를 간혹 제 집에 숨겨두고 제 첩(妾)이라 하여 항상 내보내지 않는 일이 있다. 내가 일찍이 얼굴을 아는 기생도 내연에 혹 나오지 않는 자가 있어, 정재에 결원이 생긴다. 말할 가치도 없는 일이지만, 제 집에 숨겨두고 ‘제 첩이라’고까지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태종 7년 12월2일).

    정재는 궁중의 잔치에서 춤과 노래 등 연예를 보이는 행위를 뜻한다. 이러한 일을 담당하는 기생은 공노비(公奴婢) 신분이다. 개인이 점유할 수 없게 돼 있었다. 따라서 기생의 독점은 불법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궁중의 정재에 필요한 인원을 채우지 못해 임금이 한탄할 정도로 기생을 특정 양반이 배타적으로 점유하는 일이 유행했던 것이다. 며칠 뒤 태종은 사헌부 장령 탁신(卓愼)을 불러 명령하였다.

    “이제 들으니, 상기의 연고로 말미암아 탄핵을 당한 자가 많다고 하는데, 전날 내가 말한 것은 여러 해 동안 제 집에 숨겨두고 외출하지 못하게 하는 자를 가리킨 것이고, 조관(朝官)이 상기를 첩으로 삼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기생을 불법적으로 독점하는 경우가 많아 처벌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반들의 기생 독점은 처벌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세종 원년 평안도 감사 윤곤(尹坤)은 지방관들이 관기(官妓)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엄금할 것을 건의한다. 윤곤이 묘사한 양반 관료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다음은 이를 요약한 것이다. “대소 사신(使臣)이 왕명을 받들고 외방에 나가면, 관기(官妓)와 사랑에 빠져 직무를 전폐하고 욕심이 허락하는 한 즐긴다. 만약 기생과의 즐거움이 흡족하지 않으면, 해당 지방 수령이 아무리 유능하다 해도 험 찾기로 없는 죄를 찾아내어 죄망(罪網)에 몰아넣는다. 지방 수령의 경우도 법을 받들어 백성을 다스리는 이상, 사신이 성적 상납을 요구하면 법에 의해 처리해야 할 것이지만, 서울서 귀한 사람이 오면 강제로 관기와 성관계를 갖게 하며, 순응하지 않는 관기는 무겁게 처벌한다. 더욱 비인간적인 것은 모녀와 자매를 모두 기생으로 만들고, 한 사람이 두루 성관계를 갖는 경우다. 명사들끼리나, 한 고을 안에서 서로 좋게 지낸다는 자들도 기생 하나를 놓고 다투어, 서로 틈이 벌어져 종신토록 다시는 좋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다.”

    지방관리들, 중앙관리들에게 성 상납

    윤곤은 특수한 사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화된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윤곤이 관기 제도 자체를 폐지할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을 제공하는 관기 제도를 존속시키되, 사신이나 귀한 손님이 간음하는 것을 금지하고, 어기는 경우 주객(主客)을 모두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예조에 명하여, 의정부·육조와 상의하여 대책을 만들어 올리게 한다. 후일의 자료를 보건대, 대책은 일단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세종 20년 11월23일 사헌부는 기생을 첩으로 삼는 일을 일절 금지할 것을 요청한다. 다시 기생 점유에 대한 제한책이 나왔던 것이다. 제안 이유를 들어보자.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 ‘관리로서 창가(娼家)에서 자는 자는 장 60대에 처하고, 관리의 자손으로서 창가에 자는 자도 죄가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본국의 대소 관리는 기생으로 첩을 삼아서 음란하고 더럽고 절개가 없다. 뿐만 아니라, 기생 때문에 부부가 반목하고 부자 형제 사이가 벌어지고, 대대로 향화(香火)의 신의와 금석(金石)의 교제를 닦아오던 터이라도 서로 시기하고 몰래 중상하는 경우가 생긴다. 또 탐오(貪汚)하여 장물을 범하는 자들은 대개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기생에 대한 탐닉은 거의 일반화된 일이었던 것이다. 이 제안에 대해 사신은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때에 위로는 대신으로부터 아래로는 선비와 서민에 이르기까지, 기생첩으로 집안 일을 관리하게 하여 적처(嫡妻)와 다름이 없는 자가 꽤 많이 있었으므로, 혹은 이로 인하여 장물죄를 범하기도 하고 혹은 서로 구타하여 상해(傷害)를 입히기도 하여, 서로가 원수가 되어서 선비의 풍속이 불미하였던 까닭으로 이러한 청이 있었던 것이었다.”

    기생을 점유하여 첩으로 만드는 풍조는 가정을 붕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수습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세종28년 5월23일 사헌부 보고에 의하면, 국상(國喪) 중에 어떤 벼슬아치가 기생 만환래(萬喚來)의 집에 들어갔다가 본부(本夫)에게 쫓기어 상복(喪服)까지 빼앗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세종은 “관리가 창기(唱妓)의 집에서 자는 것은 실로 더러운 행동이나, 사풍(士風)이 이를 보통으로 안다”고 개탄하고 있으니, 저간의 사정을 알 만하다.

    세종 28년 1월30일에 다시 기생 점유문제가 불거졌다. 사헌부는 조관(朝官)으로 출사하는 사람이 창기와 관계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요청했다. 우의정 하연(河演)은 “대소 사신(使臣)과 수령들은 음욕(淫欲)을 마음대로 행하여 폐를 끼침이 매우 많았다”고 말한다. 하연 역시 사헌부의 요청을 따라야 한다고 청했지만, 실록은 “끝내 시행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생은 ‘공공재’…법적으론 개인소유 금지

    성종 17년 10월27일에 왕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명령을 내린다. “국가에서 경외(京外)에 창기소(娼妓所)를 둔 것은 노래와 춤을 가르쳐 연향(宴享)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듣건대 우후(虞候)·수령 및 대소 사신들이 사사로이 데려가서 자기 소유로 삼아 주(州)·부(府)의 기생들이 이 때문에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하니, 경은 엄하게 조사하도록 하라.”

    그러나 이런 명령은 그때뿐이고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성종은 1년 뒤 다시 “창기(娼妓)는 본래 노래와 춤을 위해서 설치한 것인데, 조관(朝官)이 한번 지나면서 좋아하여 공가(公家)의 물건을 자기의 사유물로 삼았으니, 이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겠는가. 이같은 무리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모두 추고(推考)하라”고 하고 있으니, 1년 전 명령은 완전히 빈말이 됐음을 알 수 있다.

    관료들이 기생을 독점하는 방법은 이렇다. 사대부가 일단 마음에 드는 기녀를 발견하면 관리에게 부탁해 속신(贖身)해서 자신의 집에 데려온다. 그 대신 자기 집 여종의 이름을 기생 명부에 올린 뒤 죽은 것으로 서류를 꾸민 다음 그 여종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런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아무리 조사해보아도, 서류상으로는 하자가 없게 된다.

    기생이라면 황진이 같은 미인을 연상하지만 이는 현대인의 중세에 대한 낭만적 상상력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기생은 평범한 여인들로 사대부들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시대 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어무적(魚無跡)이 연산군에게 올린 상소다(연산 7년 7월28일).

    “지금 서울 기녀(妓女)와 시골 기녀가 있는데, ‘경국대전’을 상고해 보면 이것은 군인들 가운데 아내가 없는 사람을 위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군인들을 위해서 설치된 것입니까. 가령 군사를 위해 설치된 것이라도 여자가 군중에 있는 것은 병법에서 꺼리는 일이며, 더구나 선왕(先王)의 정치에 군사를 위하여 창기(娼妓)를 두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신이 보는 바로 말하오면, 사대부들의 잔치 때에 노래하고 춤추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무적이야말로 기생 제도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사대부들의 연회 때 노래하고 춤추는 도구가 바로 기생이다. 그는 더 나아가 “창기(娼妓)는 미도(媚道)로써 사람을 홀리기를 여우처럼 하기 때문에 비록 행검이 높고 지조가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음부(陰部) 속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성적 대상임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토지의 넓이와 둘레가 수천 리에 불과한 조선에서, 주(州)와 군(郡)에 수천 명이나 되는 창기”를 없애지 않았을까. 어무적은 여악의 폐단이 불교와 도교보다 10배나 더한데도, 대간(臺諫)·재상·시종(侍從)의 신하들 중 비판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바로 그들이 여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연산군은 이에 대해 답이 없었다. 그 역시 향락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비 출신 여성은 대부분 제도적으로 기생이 되고, 지배계층 남성의 성적 대상으로 공급되는 시스템이었다. 사대부들은 그들을 차지하는 데 골몰했다. 조선 전기의 사대부들은 성적 향락을 맹렬히 추구한 존재들이었다. 감동과 어우동은 이런 분위기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한 인물이었다.

    조선사회의 양반은 성에 관한 한 겉과 속이 달랐으며 도덕적으로도 유죄였다. 그럼에도 악명은 여성들이 뒤집어썼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도 여성들이다. 남성의 경우는 이런저런 이유로 구제되었다. 감동과 간통했던 이효량의 경우만 보아도 양반 출신 감동은 노비가 되었지만, 효량은 고위관직에 다시 올랐다. 실제 감동과 유사한 사건들에서도 대다수 간부(姦夫)들은 가벼운 처벌만 받은 뒤 사면되었다. 공신이라는 등의 이유로 처벌에서 제외되거나 곤장 몇십 대를 맞고 풀려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감동, 어우동의 변명은 들을 길이 없다. 역사는 그들의 변명을 기록하지 않았다. 남성이 언어를 장악하고 역사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의하여 살펴보면, 남성의 권력이 진실의 일단을 내비치기도 한다. 유감동 사건에 관련된 기록 하나를 읽어보자. 유감동에 대해 지사간원사 김학지(金學知) 등은 상소문에서 김여달을 더욱 엄중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유감동 여인의 추악함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는데, 김여달에게 강포(强暴)한 짓을 당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도 부녀들 중에 강포한 자에게 몸을 더럽힌 사람이 간간이 있었지만 모두 시정과 민간의 미천한 무리뿐이었는데, 지금 김여달은 어두운 밤에 무뢰배와 작당하여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 여인을 만나 그가 조사(朝士)의 아내인 줄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하고는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했으니, 이것을 보더라도 유감동이 처음에는 순종하지 않았으며 김여달이 강제로 포악한 짓을 행한 것이 명백하니, 어찌 미천한 무리들이 간통한 것처럼 가볍게 논죄할 수 있겠습니까”(세종 9년 9월29일).

    모든 것은 김여달의 강간행위로부터 시작됐다. 유감동이 김여달에게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후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었던 셈이다. 김여달은 감동의 남편 최중기가 있는 집까지 드나들면서 계속 성폭행을 하고, 마침내는 유감동을 데리고 도망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유감동은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었고, 이후의 행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역사는 유감동의 이러한 복잡하고 처절한 심리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어우동의 경우는 어떤가? 어우동이 교형을 당하던 날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성종 11년 10월18일). “사람들이 자못 어을우동의 어미 정씨(鄭氏)도 음행(淫行)이 있었을 것이라 의심하였는데, 그 어미가 이런 말을 하였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

    어우동의 어미는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성욕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강하게 표현될 수도 있고, 약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 어우동은 비난의 대상이 될지언정 죽음의 대상이 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여, 여자(女子)들이 음행(淫行)을 많이 자행한다. 만약에 법으로 엄하게 다스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징계(懲戒)되는 바가 없을 텐데, 풍속이 어떻게 바루어지겠는가. 옛사람이 이르기를, ‘끝내 나쁜 짓을 하면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다. 어을우동이 음행을 자행한 것이 이와 같은데, 중전(重典)에 처하지 않고서 어찌하겠는가”(성종 11년 10월18일).

    성종은 어우동을 사형에 처한다는 판정을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풍속이 아름답지 않아 여자들이 음행을 많이 자행한다”는 판단에는 모순이 내포되어 있다. 성은 쌍방적 행위다. 남성들이 도덕적 행위만 하는데 여성들이 음행을 자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성에 탐닉한 쪽은 지배계층 남성들이었고, 이들이 음행을 많이 자행한 결과 여성들의 음행이 늘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책임을 여성에게만 물어 단죄를 했으니 이러한 판단은 모순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극단적 ‘남성 양반’ 중심체제였다. 남성중심주의는 일부일처제를 넘어 남성의 성욕을 충족시킬 수단을 제도화했다. 즉 축첩제와 기녀제는 남성의 성욕을 무한대로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였던 것이다. 여성의 음행을 비판하면서도 양반관료들은 조건이 허락하는 한 축첩했고, 기녀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어우동을 사형시킨 성종은 왕비 3명(폐비 윤씨 포함), 후궁 10명을 두고 있었다. 후궁은 본질적으로 왕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존재였다.

    양반들의 축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축첩제도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축첩제도에서 ‘서얼(庶孼)’이 태어났고, 이 때문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서얼차대’ 현상이 발생해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지만 조선조가 끝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감동과 어우동을 낳은 것은 남성의 성적 욕망이었으나, 감동과 어우동은 다시 남성에 의해 단죄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성종에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성적 향락을 왕에게로 독점시켰다. 성종대의 궁중과 사대부들은 소비와 향락에 들떠 있었다. 연산군의 방종은 퇴폐적 향락분위기의 연장이었으나 연산군은 그러한 향락을 독점하려 하였기에 사대부들에 의해 축출되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퇴폐문화 개혁도 실패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조광조(趙光祖)가 이끄는 기묘사림이 등장하여 도덕주의 정치를 표방하면서 이러한 지배층의 퇴폐문화를 단속하려 했다. 예컨대 조광조 세력은 기생제도를 폐지시켰다. 하지만 훈구세력의 반발로 기묘사림이 축출되면서 가장 먼저 부활한 것이 바로 기생제도였다. 선조 때부터 기묘사림의 후예인 사림의 정치가 시작되었다. 흥미로운 일은 성적 문제와 관련된 사건들이 이 시기부터 왕조실록에서 사라졌다는 점이다.

    “내(이언인)가 일찍이 허벅지에 종기가 나서 누워 있는데, 구씨가 와서 아픈 곳을 묻고 인하여 종기를 문지르면서 음욕(淫慾)의 빛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또 와서 종기를 만지다가 드디어 음근(陰根)에 미치기에 내가 발로 찼습니다. 그 뒤 내 병이 나은 어느 날 어두운 밤중에 구씨가 나를 불러 밀과(蜜果)를 주어 먹게 하고 인하여 침방(寢房)으로 끌고 들어가서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어우동이 되어 죽더라도 정욕을 참을 수 없다’고 하므로 드디어 간음하였고, 그 뒤에는 매양 틈을 타서 간음하였습니다. 하루는 구씨가 내게 말하기를, ‘내가 오랫동안 월경이 없으니, 아마도 임신한 것 같다’ 하므로, 내가 그 말을 듣고 곧 고향으로 돌아갔었습니다”(성종 17년 1월22일. 덕성군(德城君)의 처 구씨가 조카 이인언(李仁彦)과 간통한 내막을 보고한 내용의 일부).

    중종 이후엔 성에 관련된 사건들이 실록에서 없어졌다. 그러나 축첩제와 기생제도는 중종 이후에도 계속됐고, 조광조와 같은 개혁 세력들이 다시는 권력을 잡지 못했으며 조선 중·후기 세도정치의 과정에서 부정부패와 퇴폐행위가 만연했다.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볼 때 중종 이후 성 문제와 관련된 사건이 지배계층 내부에서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거나 그 발생건수가 현격히 줄었기 때문에 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현상은 그대로인데 현상 자체를 더 이상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 중·후기는 성 담론을 추방함으로써 ‘양반의 성’에 더욱 위선적인 이미지를 덧씌운 듯하다.

    (‘강명관의 조선사회 뒷마당’은 이번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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