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0월호

로빈슨 크루소와 글로벌라이제이션

총으로 제압하고 기독교로 교화하라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입력2003-09-26 19:1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8세기 초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는 모험소설이기 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정치소설이다. 만약 우리 선조가 크루소에게 노예의 맹세를 하고 ‘프라이데이’로 창씨개명을 했다면 지금처럼 즐거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로빈슨 크루소와 글로벌라이제이션
    누구나 한번쯤 무인도에서 사는 꿈을 꾸리라.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하여 푸른 하늘, 흰 구름을 보고 시원한 파도 소리만 들으며 사는 꿈을 꾸리라. 더운 여름일수록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그 꿈은 더욱 간절하다. 그러나 그런 삶은 꿈이요 환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무인도는 여전히 우리에게 매력적이다. 필자 같은 세대에게 그 꿈은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것으로 시작됐다.

    물론 요즘 아이들에게는 ‘해리 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더욱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특히 영국의 화려한 시대를 상징하는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 ‘해리 포터’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신비롭고 아름다운 마법의 질서를 보여준다. ‘반지의 제왕’이 보여준 마법세계의 매력도 마찬가지다. 현실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만큼 마법의 환상세계는 더욱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 소설들이 지닌 보수성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특히 글로벌라이제이션 덕분에 후진국 아동들까지 그런 소설을 읽는 것엔 분명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의 효시가 된 소설

    여기서 아이들에게 상상력이나 모험심을 길러준다는 소설의 취지를 문제삼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로빈슨 크루소’를 비롯한 유사소설들이 보여주는 근대 유럽의 문제점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위 글로벌라이제이션이나 자본주의 그리고 근대적 의미의 소설이란 다니엘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1719)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읽히기 시작한 독서의 역사는 한국에 서양문학이란 것이 소개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후로 100년 넘게 ‘로빈슨 크루소’는 영문학은 물론 서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사랑을 받았다.

    ‘로빈슨 크루소’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은 3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그 어떤 작품도 ‘로빈슨 크루소’의 대중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작품으로 디포는 ‘소설의 아버지’가 됐다. 또 다른 평가도 있다.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구현한 최초의 문학작품.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자본주의의 세계화인 제국주의,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효시라고 본다.



    왜 그런가. 크루소가 목숨을 구해준 흑인이 그의 노예가 되겠다고 맹세하는 장면 때문이다. 그날이 금요일이어서 노예는 ‘프라이데이’라는 새 이름을 얻고 주인인 크루소에게 영어와 기독교를 배워 훗날 함께 영국으로 돌아간다. 소설을 통해 디포는 대영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정당하다고 선언한다. 당시 서양인의 눈엔 그 섬이 아프리카이든 아시아이든 마찬가지였으리라. 즉 크루소가 제주도나 독도에 표류했더라도 같은 이야기가 쓰여졌을 것이다. 만약 우리 선조가 크루소에게 노예의 맹세를 하고 ‘프라이데이’로 창씨개명을 했다면 지금처럼 즐거이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오늘날 명화로 꼽히는 베르톨루치의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는 오로지 영국인 가정교사에게만 의지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세계를 멸망시키려 하는 동양인 악당들을 상대로 멋지게 싸우는 ‘007’은 또 누구인가. 암흑 대륙의 대탐험가로 교과서에 등장하는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우정,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는 또 우리에게 무엇인가.

    철저한 제국주의자 크루소

    다시 ‘로빈슨 크루소’로 돌아가 보자. 흔히 크루소를 자본주의 인간의 전형이라 한다. 혼자 바다로 진출한 점에서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개인주의가 발현됐고, 무인도에서 혼자 노동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인 청교도주의의 구현이라 분석한다. 크루소는 난파선에서 금화를 발견하지만 무인도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포기한다. 이를 두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를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 곧 경영을 중시했다’며 근대적 인간의 전형으로 보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이것은 오해다. 크루소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를 대비해 금화를 숨겼다. 귀국 후에도 ‘황금 환상’이라 할 정도로 돈에 매달려 식민지 경영에 앞장선다. 따라서 이 소설은 18세기 중상주의 제국, 영국이 낳은 일종의 황금 환상 소설이다.

    크루소는 서아프리카 기니아의 흑인노예 밀무역 상인이고, 사탕과 연초 플랜테이션의 경영자이며, 동남아시아로부터 중국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무역상이었다. 그야말로 식민 지배망을 형성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인간이다. 그는 노예밀무역을 위해 브라질 북부로부터 당시 기니아로 총칭된 아프리카 북서 해안을 항해하다 난파해 무인도로 흘러들었다. 그 무역로는 영국에 이윤을 공급하는 대동맥이었다. 당대의 경제평론가이자 중상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디포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크루소가 28년간 머문 무인도는 절해고도가 아니라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강 입구에 있는 섬으로 육지가 빤히 바라보이는 위치였다. 그 강의 앞바다가 지금 카리브해이고 원주민은 카리브족이다. 그 섬은 육지에서 카누를 타고 쉽게 왔다갔다할 거리였기에 소설에서도 카리브족이 자주 무인도를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문제는 이들이 식인종이며 식인 파티를 하기 위해 무인도를 찾아왔다고 묘사된 데 있다. 흔히 프라이데이를 흑인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사실 카리브족의 일원이었다. 카리브족이 진짜 식인종이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콜럼버스 이래 유럽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식인종설을 퍼뜨린 것은 크루소가 표류한 17세기 카리브해를 방문한 예수회 신부들이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어 이들은 식인종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이런 변화의 뒤에는 식민화의 역사가 있다. 17~18세기에 걸쳐 카리브족이 살던 지역은 대부분 유럽의 식민지가 됐고 원주민들은 절멸의 위기에 빠졌다. 16세기 말 약 4만명이었던 원주민이 100년 후 4000명으로 격감했다. 원주민의 절멸과 함께 식인종설은 사라졌다. 이들은 죽어서야 오명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초엽에 쓰여진 ‘로빈슨 크루소’는 여전히 식인종설을 주장했다. 이는 무인도가 카리브해에 있고 카리브해는 식인종의 바다이므로 무인도 원주민은 식인종이라고 하는 종래의 허구적 관념을 답습했다. 크루소는 모래언덕에서 발자국을 발견하고 뒤이어 해안에서 사람의 뼈를 발견하며 식인현장을 목격한다. 그러다 식인종의 일원인 프라이데이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식인종설이라는 환상을 다시 현실로 만들어놓았다.

    총과 기독교로 야만인을 멸하라

    하지만 정작 디포가 그린 프라이데이의 외모는 도저히 식인종이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좁은 얼굴과 높은 코는 마치 유럽인 같다. 이 역시 사실과 거리가 멀다. 당시 카리브족은 유아기에 얼굴과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이데이를 아름다운 흑인으로 그린 것은 야만족에 대한 경멸과 동시에 앞으로 문명화될 식민지인으로서 유럽인과 동일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자, 아름다운 외모를 갖춘 프라이데이는 빠른 속도로 유럽화한다. 조리된 산양고기와 빵을 먹고 옷을 입고 영어를 배운다. 또 유럽의 상징이라 할 총기 조작법까지 전수받고 그 총으로 동족을 죽인다. 불과 3년 만에 프라이데이는 크루소를 능가하는 선량한 기독교도로 변모한다.

    그러나 소설에서 이 과정은 20쪽 분량이 채 안 된다. 식인종 발자국을 발견하고 프라이데이가 출현하기까지 크루소의 10년 세월을 서너배 분량으로 자세히 묘사한 것과 대조적이다. 곧 문명화의 가벼움이 식인 관념의 무거움과 놀라운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가벼움은 프라이데이의 철저한 자발성에서 비롯된다. 프라이데이의 문명화란 바로 크루소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 즉 노예화를 의미했다.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관계는 식민지인을 문명화시켜 노예로 삼는다는 당시의 식민관을 그대로 담고 있다. 프라이데이가 본래 이름을 잃고 지배자에 의해 새로운 이름을 얻음과 동시에 크루소도 자신의 이름이 아닌 ‘주인’으로 행세한다. 이같이 크루소와 프라이데이는 관념적으로 순화된 추상적 주종관계로 연결돼 있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어떤 강제도 반항도 긴장도 없이 오직 절대 충성만이 존재한다. 문명화한 원주민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을 기대하는 유럽인들의 환상은 ‘로빈슨 크루소’에서 수없이 드러난다.

    ‘로빈슨 크루소’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환상은 인공낙원이다. 크루소는 무인도를 개척해 나름의 인공낙원을 꾸미지만 언제나 야만족의 위협에 시달린다. 표류 직후 그는 기적적으로 발견한 맑은 물과 엽연초로 연명하다 나중에 난파선에서 식량을 가져와 생명을 연장한다. 이러한 혹독한 자연조건은 장래의 위험과 결핍에 대비한 계획성과 노동을 요구한다.

    크루소는 무인도를 철저히 조사해 먹을 만한 식물들이 풍부하게 존재함을 알게 되지만 결코 낙원이라 부르지 않고 자신이 경작한 공간만을 ‘사람의 손으로 심어놓은 정원’이라 불러 인공성을 강조한다. 그는 어떤 자연식품도 그대로 먹지 않고 일단 옮겨 심어 재배한 뒤에야 먹는다. 따라서 그 낙원은 철저한 인공의 낙원이다.

    게다가 그 낙원은 야만족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해 언제나 위협을 받는다. 야만족을 물리치려면 두 종류의 유럽 제품, 즉 총과 기독교가 필요하다. 총은 저항하는 야만족을 죽이기 위한 것이고 기독교는 순응하는 야만족을 문명화 내지 교화시키는 만능약이다.

    인공낙원의 건설과 야만족의 위협, 그리고 총과 기독교에 의한 배제가 ‘로빈슨 크루소’의 기본구조다. 그것은 바로 비서양에 대한 서양의 사고를 의미한다. 그리고 300여 년에 걸쳐 끝없이 재생산된 ‘로빈슨 크루소류 문학’, 즉 제국주의 문학의 주제가 됐다. 그 놀라운 생명력은 제국주의 또는 식민지주의를 유지시킨 근원적 허구 중 하나와 결부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즉 제국주의자들은 침입자와 원주민을 슬쩍 바꿔치기 했다. 이것이 식민지 창세신화의 기본구조다. 침입자인 서양인이 인공낙원을 건설하고 어느새 원주민을 자처하는 반면, 그곳을 방문한 원주민들은 침입자가 된다. 원주민이 침입자를 물리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빈슨 크루소와 글로벌라이제이션

    16세기 벨기에의 지리학자 오르텔리우스가 그린 세계지도. 18세기에 비로소 오늘날과 유사한 세계지도가 완성된다.

    언제부터 한국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아동용으로 출간됐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어판이 읽히다 해방 후 수없이 번안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서점에는 수십 종의 아동용 ‘로빈슨 크루소’가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동용은 원주민이 식인종이라는 점을 더욱 부각시킨다. 예컨대 식인종 프라이데이가 야만인들에게 잡아먹힐 뻔했으나 다행히 로빈슨의 구원을 받고 충복이 되어 사람 잡아먹는 나쁜 습성을 버린다. 그리고 하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문명인의 생활과 영어를 배워 식인종이 아닌 문명인이 돼 로빈슨을 신같이 숭배하여 영국에 같이 건너가 유쾌한 생활을 하는 아주 재미있는 젊은이로 나온다.

    아동용답게 각색할 필요가 있음을 부정할 생각은 없으나, 소설에서는 꿈으로 나오는 식인종과의 최초 만남이 동화에서는 잔혹한 실화로 과장된다. 또 크루소가 발견한 식인 흔적은 실제 소설에서 몇 줄 되지도 않는데 동화는 오히려 자세하게 묘사한다. 마치 몇 줄이면 충분할 객관적인 사건을 흥미 위주로 부풀려서 보도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왜 원작에도 없는 이런 과장을 서슴지 않은 것일까. 왜 아동문학이 흥미위주의 잔혹문학으로 변질된 것일까. 게다가 아동용은 식인종에 대한 나름의 학설까지 제시한다(아래 예문). 물론 이 부분도 원작에는 없다.

    식인종은 다른 동네와 싸워서 이기면 그 포로를 잡아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신을 믿는 마음이 아주 강해서 일정한 장소를 정하고 그 곳에서 사람을 잡아먹지 않으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섬을 그런 곳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은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서 이미 여러 차례나 이 섬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섬 내부는 파고들지 않고, 그저 포로를 잡아먹기 위해서만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계속되어 마침내 원작에도 없는 ‘사나이의 맹세’로 이어진다.

    ‘저, 잔인한 식인종 놈들! 저놈들의 손에 걸려들어서 비참한 최후를 겪은 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아, 얼마나 비통한 마음으로 잡아 먹혔을 것인가!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저놈들은 불쌍한 포로들을 잡아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불쌍한 포로들의 비명 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 나도 사내가 아닌가. 이 굳센 손으로 그놈들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중략)

    이 날카로운 칼, 이 조총, 이 권총, 그리고 가슴속에도 영국의 남아다운 정신이 깃들여 있습니다. (중략) 이 섬은 나의 영토인 것입니다. 나는 이 섬의 왕입니다.

    야만인에 대한 극단적 적대감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역시 원작에도 없는 황금 및 다이아몬드의 발견과 같은 황당한 장면이나 크루소가 부모를 그리워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제 로빈슨은 부자이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효자이나, 오직 한 가지 식인종만이 문제다.

    제국주의와 글로벌라이제이션

    ‘로빈슨 크루소’를 쓴 지 1년 뒤인 1720년 디포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싱글턴 선장’을 발표했다. 주인공 싱글턴은 상선의 반란사건으로 동료들과 함께 마다가스카르 섬에 상륙한다. 섬사람들은 다행히 식인종은 아니었으나 무지하고 탐욕스럽기는 마찬가지여서 도저히 인간이라 할 수 없다. 이 작품에서도 디포는 아프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가 선장을 통해 설명한 아프리카의 가치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세 가지 특산품- 노예, 황금, 상아-으로 요약되며 그것을 유럽산 값싼 나이프 등과 교환한다.

    당시 아프리카는 아메리카와 달리 낙원은커녕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으로 알려졌으나, 특산품만큼은 막대한 이익을 남겼기 때문에 모험가들은 끊임없이 이 미지의 땅에 도전했다. 싱글턴은 아프리카 횡단계획을 세우고 무기와 탄약을 나르기 위해 수십 명의 흑인을 노예로 부린다. 총의 위력에 압도된 흑인들은 처음부터 유럽인을 숭배하거나 무서워했으므로 도망갈 염려도 없다. 그래서 주인공 싱글턴은 교과서에도 등장했던 탐험가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위대한 대탐험’보다 155년이나 앞서 아프리카 횡단에 성공한다. 단 스탠리 등은 강물의 흐름을 이용해 2년9개월 동안 횡단여행을 했으나 싱글턴은 그 거리의 4분의 1에 불과한 2880km를 1년반 만에 걸어서 답파한다. 그리고 싱글턴 탐험대의 희생자는 단 1명뿐으로, 282명 중 109명만이 생존한 스탠리 탐험대의 희생과 비교할 수 없는 쾌거였다. 소설에서 싱글턴은 스피크가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하기 138년 전에 그곳을 지나간다.

    로빈슨 크루소와 글로벌라이제이션

    ‘로빈슨 크루소’를 원작으로 한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한 장면.

    1726년에 나온 ‘걸리버 여행기’는 ‘로빈슨 크루소’가 일으킨 항해기 붐에 자극받아 쓰여진 가공의 여행기다. 원제는 ‘세계의 여러 먼 나라 여행기’로 각 장마다 지도가 나오는데, 실제 나라와 가상의 나라를 섞어 그렸다. 예를 들어 1부에 나오는 소인국 릴리펏은 수마트라 및 태즈메이니아와 이루는 삼각의 정점, 2부 거인국 브롭딩내그는 북아메리카 대륙 북서 끝, 3부 하늘을 나는 섬나라 라퓨터는 일본 동쪽 해안 어디쯤에 있다. 이는 ‘걸리버 여행기’가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당시의 지리 인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당시 유럽인들이 알게된 세계 극한 지역들에 대한 표현이었다. 크루소의 무인도로부터 걸리버의 이상한 나라까지 대영제국주의 식민문학은 세계를 배경으로 뻗어나갔다.

    유럽 중심의 세계지도 완성

    여기서 위도와 경도로 구분하는 서양 특유의 지리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음악을 포함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서양은 세계를 위도와 경도 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 지도를 창조했다. 기록은 구전과 달리 전달과 반복을 쉽게 한다. 계측기계의 개량, 특히 크로노미터의 발명에 의해 정확한 지도작성이 가능해짐에 따라 애매한 상상도는 사라졌다. 그 결과 세계지도는 유럽이 직접 ‘인식’한 세계의 표상이라는 성격을 갖게 된다. 나아가 인식은 동시에 ‘지배’를 수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세계지도의 완성은 유럽에 의한 세계지배의 완료를 의미했다. 이렇게 유럽은 지구를 하나의 ‘세계’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세계란 어디까지나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제국이었다.

    영국의 해군 장교 제임스 쿡은 세계지도 완성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그는 해군 명령으로 1768년부터 1779년까지 세 차례 태평양을 항해하여 그 지역에 남은 지도상의 공백을 메웠으나 자신이 ‘발견’한 하와이에서 원주민에 의해 살해됐다.

    지도 제작자이자 제국의 군인으로서 그는 조사를 위한 배가 아니라 대포를 장비하고 해병대를 실은 군함을 지휘했다. 그는 정확한 지도제작과 민족지의 기록뿐만 아니라 새로이 ‘발견’한 토지를 영국의 것으로 선언한 결과 무수한 섬과 토지가 ‘프라이데이’처럼 영어이름을 얻었다.

    쿡의 제국주의적 점령은 다른 항해기록과 비교해도 쉽게 드러난다. 쿡보다 1년 앞서 타히티섬을 방문한 한 프랑스인은 이곳을 지상의 낙원이라 묘사했다.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하고 있던 루소식의 ‘자연인’ ‘자연상태’ ‘에덴 동산’ 붐에 기름을 부었다.

    전통음악 대신 찬송가가 울려퍼지고

    그러나 쿡은 타히티 사람들의 무위와 불변의 생활을, 개량과 진보를 원동력으로 하는 근대 유럽의 입장에서 철저히 비판하고 그 섬에는 무역할 만한 생산물이 없으며 항해시 식량을 보급받는 정도의 이용 가치가 있을 뿐이라고 서술했다. 곧 타이티의 가치를 대영제국의 세계지배라는 책략 속에서 파악했을 뿐이었다.

    대신 타히티섬과 달리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는 식민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서술했다. 쿡의 이러한 항해는 국가적 사업이자 비밀로 취급됐고 국가가 독점했다.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인 태평양 모험’이라고 아름답게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항해에 박물학자들이 동행했으나 그렇다고 과학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정치적 목적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그를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개명적인 탐험가라 하기도 어렵다. 그는 항해 도중 저항하는 원주민들에게 대포를 쏘고 그들을 죽였다. 대포와 소총 등 화기의 사용이 엄청나게 빈번했으며 모든 과정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먼저 함대가 정박하면 주로 식량을 구하는 교역을 시작한다. 그러나 쿡 쪽에서 교환품으로 내놓은 철제품의 가치를 모르는 원주민들이 교역을 거부하면 즉시 소총으로 사살하거나 함포 사격으로 위협했다. 일단 화기의 위력을 맛본 원주민 지도자들은 너도나도 화기를 구입한다. 이와 함께 영어와 기독교가 보급되면서 태평양의 섬들은 급속히 유럽화했다.

    그리하여 쿡의 항해가 있은 지 반세기 후 다윈이 이 지역을 다시 방문했을 때는 이미 섬마다 영국과 프랑스의 영사관과 교회가 세워지고, 주민들은 영어로 말하며, 기독교의 전도방침에 따라 전통음악과 무용이 사라지고 오직 찬송가만이 들려왔다.

    우리가 근대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하는 다윈도 제국주의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과거에 식인종의 땅이었던 곳이 ‘문명화’되어 영국풍 농장들이 세워진 것을 보고 감동했다. 또한 1788년 유형 식민지였던 호주의 시드니가 유럽풍 도시로 변한 것을 보고 다윈은 약육강식이라고 하는 동물계의 법칙이 인류에게도 적용됨을 확신하고 영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스스로 축복했다. 이 모든 것이 영국 국민의 박애정신이 실현되었음을 보여주며, 영국 국기를 게양함으로써 이들은 부와 번영과 문화를 얻었다고 굳게 믿었다. 20세기에 와서 그 국기는 영국 대신 미국의 성조기로 바뀌었고, 그 이데올로기는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불리고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초판 이래 중판, 번역, 번안 등 적어도 700종의 아류가 출간됐다. 18세기 세리단이 팬터마임으로 만들었고 19세기에는 오펜바흐가 오페라로, 20세기에 루이 브뉘엘이 영화로 만들어 문학적 가치가 입증됐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시기는 제국주의가 본격화된 18세기 후반부터였다. 1719년 출간 당시 ‘로빈슨 크루소’는 그다지 높이 평가받지 못하다가 18세기 후반에 와서 영국문학을 주름잡은 새뮤얼 존슨에 의해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루소가 1762년 ‘에밀’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소년 에밀에게 주어야 할 유일한 책이라고 했고, 1799년 독일에서 아동용 ‘새로운 로빈슨’이 쓰여진 뒤 이 소설은 유럽의 소년들에게 서바이벌 모험을 가르치고 해외진출과 식민지 건설에 대한 의욕을 북돋우는 최고의 교재로 자리잡았다.

    낙원, 식인종 그리고 기독교

    세기가 바뀌면서 무수한 아류작들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1812년 스위스에서 출간돼 2년 뒤 영역된 ‘스위스인 가족 로빈슨’이었다. 이 책은 그후로도 수 차례 번역, 증보, 개작을 거쳐 국제적인 집단창작 과정을 통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19세기 후반에는 ‘로빈슨 크루소’에 이어 아동문학의 2위 자리를 굳혔다. 잠깐 그 내용을 살펴보자.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재산을 잃은 어느 스위스인 목사가 영국으로 망명하여 가족과 함께 타히티로 선교를 하러 가던 도중 뉴기니아 근해에서 조난을 당해 무인도에 표류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크루소처럼 계획적인 노동에 의해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곳을 ‘행복의 섬’으로 명명한다. 그런데 행복은 그런 종류의 소설이 보여주는 정석대로 식인종 야만인의 출현으로 중단된다. 그러나 프라이데이처럼 그들도 목사의 노력에 의해 기독교도로 개종하고, 유괴됐던 막내아들도 피리를 불어 야만인들을 매혹해서 식인종 추장이 양자로 삼으려 하게 된다. 이 장면은 영화 ‘미션’에서 그대로 재현된 바 있다. 목사 가족은 총 한 방 쏠 필요 없이 위대한 기독교의 힘으로 식인종을 문명화하고 자신들의 경작을 돕게 만든다. 그야말로 무혈 식민지화의 꿈을 실현한 ‘행복의 섬’이었다. 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의 힘을 과장한 관념 극한의 식민지 소설이었다.

    그밖에도 ‘로빈슨 크루소’의 아류는 수없이 많다. 국내에 ‘무인도의 세 소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산호섬’의 줄거리를 보자. 3명의 소년이 낙원 같은 무인도에 표류해 즐거이 살아가나, 식인종의 침입으로 평화를 유린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원주민 마을의 포로가 되지만 원주민들을 개종시켜 무사히 귀국한다는 이야기다.

    1858년에 쓰여진 이 이야기는 ‘로빈슨 크루소’의 낙원, 식인종, 그리고 기독교 포교를 더욱 강화한 반면 로빈슨의 노동 부분을 생략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기 제국주의적 특성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산호섬’으로 불리는 낙원은 그 후 무인도 낙원의 대명사로 소설이나 영화에서 수없이 재현됐다. 이곳에서는 어떤 노동도 필요 없이 완벽한 채집경제가 가능하고 소년들은 다이빙이나 하고 수생동물을 관찰하며 여가를 보낸다. 그들이 만드는 유일한 도구인 보트는 무인도 탈출을 위한 크루소의 카누가 아니라 스포츠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원주민 식인종이 ‘산호섬’에서는 더욱 야만스러워지고 식인장면은 더욱 실감난다. 그리고 이들은 포로만 잡아먹는 게 아니라 동료까지 먹는 극도의 잔인함을 보인다. 이들의 잔인함을 강조할수록 야만인을 교화하는 기독교의 위대함은 빛을 발한다.

    이처럼 식인종을 총 또는 기독교로 물리치는 모험담이 끝없이 재생산되다 19세기 말엽 비로소 식인종을 뺀 순수 해양모험소설이 등장한다. 대표작이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과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에드거 버로스의 ‘타잔’ 등이다.

    그러나 ‘보물섬’ 역시 순수 해양모험소설이라기보다 보물을 둘러싼 잔인한 자본주의 소설인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 못지않다. 주인공 소년은 죽은 해적의 주머니에서 보물섬 지도를 발견하고, 사람들과 함께 그곳을 찾아 떠난다. 그의 모험과 보물 분배과정은 해적질이나 다름없다.

    쥘 베른의 또 다른 작품 ‘80일간의 세계여행’을 읽다보면 모든 것이 돈과 연결된다. 여행의 시작도 돈내기이고 여정에서 부딪히는 난관도 돈으로 해결한다. ‘15소년 표류기’는 무인도에 표류한 상류층 자제들이 자신들이 성장한 유럽사회의 가치관에 따라 멋지게 공동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로 나중에 골딩이 ‘파리 대왕’으로 패러디했다.

    ‘타잔’을 쓴 버로스(1875~1950)는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군인 출신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나 군인이 되고자 했으나 사관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912년 ‘화성의 왕자’라는 공상과학소설로 성공을 거두고 대중작가가 됐다. 이후 내리 11권의 속편을 썼다. ‘타잔’ 시리즈의 첫 작품인 ‘유인원들 속의 타잔’도 같은 해에 시작해 32년 동안 26권이나 썼다. 1918년 영화로 만들어진 후 지금까지 영화, 연극, 라디오 방송극, TV 방영물 등으로 전 세계를 풍미한 작품이다.

    국내 출간된 ‘타잔’의 작품해설에는 오늘날 문화나 문명이 물질 중심으로 발달해온 것에 대한 깊은 반성을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역자는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으로 ‘바이런 시집’을 번역하기도 했다는데 이 해설만 읽으면 마치 ‘타잔’이 바이런의 시처럼 반문명적 정신주의 소설인 것 같다. 과연 그런가?

    ‘타잔’은 타잔의 아버지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국 귀족인 그는, 영국 내 토인들이 고무나 상아로 돈을 벌자는 꾐에 빠져 유럽 다른 나라 군대에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간다. 하지만 이 부부는 유인원의 습격을 받아 죽고, 그의 아들 타잔은 유인원 품에서 자란다. 열두 살이 된 타잔은 어느날 유인원들이 밤새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다가 적을 잔인하게 죽인 후 먹는 ‘덤덤 잔치’를 목격하고 그들을 떠난다. 그 후 타잔은 밀림의 왕이 되고 백인소녀 제인을 만나 문명인이 되어 마침내 문명세계로 돌아간다.

    ‘산호섬’ 또는 ‘15소년 표류기’를 패러디했다고 하는 ‘파리 대왕’은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이 이성파와 본능파로 분열해 대립하다가 구출된다는 내용. 일종의 정치우화이기도 한 흥미로운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도 전통적인 ‘낙원과 식인종’ 모티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8세기 환상에 사로잡힌 크루소 아류들

    여기서 무인도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풍요한 낙원이다. 이곳에서 누구에게나 발언권이 주어지는 민주적 사회의 가능성이 싹트지만 이를 주도한 이성파는 본능파에 밀리고 섬은 폭력의 지배를 받는다. 흔히 이 소설에 대해 인간성의 바닥에 야만성이 도사리고 있다고 하는 골딩의 허무주의적인 인간관을 표현하고 있다고 평가하나 이러한 상식적 이해에는 문제가 있다.

    본능파 소년들의 야만화는 실제의 야만인과 같이 신체에 형형색색의 물감을 칠하고 괴상한 춤을 추는 것으로 시작해 점점 더 흉포해지고, 우두머리는 추장이라 불린다. 이성파 소년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순간 이들은 영국 아이가 아니라 야만인이 된다. 이처럼 ‘파리 대왕’은 순진한 서양 아이들이 무인도에 와서 비서양의 야만인이 되고 비인간적인 잔혹한 일들을 저지른다고 하는, 전통적인 비서양=야만인=식인종의 모티프를 되풀이하고 있다. 무인도에서 자연스럽게 야만적 속성을 익히고 악행을 되풀이하는 ‘비서양=악의 권화(權化)’라고 하는 도식이다.

    ‘파리 대왕’ 다음해에 나온 ‘후계자들’도 낯선 지역에서 원시인들을 만났을 때의 공포, 기아와 피곤 등 잔학성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파리 대왕’의 주제를 반복한다. 단 여기서는 네안데르탈인으로 나오는 원시인들이 평화, 순응, 협조를 체현하고 호모 사피엔스는 그 반대로 설정됐다는 점에서 ‘파리 대왕’과 상반되지만 역시 크루소적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한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은 ‘파리 대왕’이 나온 지 23년 뒤인 1967년 프랑스의 미셀 투르니에가 쓴 소설이다. 방드르디란 프라이데이의 불어식 이름으로 이 소설이 원주민 노예 프라이데이의 시각에서 쓰여졌음을 암시한다. 그는 크루소와 반대되는 순수를 상징하여 디포식 서양문화를 무너뜨리고 크루소와 함께 태양도시를 찾아간다는 식으로 결말이 나지만, 기본 발상은 역시 크루소를 벗어나지 못한다.

    좋은 원주민, 나쁜 원주민의 이분법

    ‘로빈슨 크루소’는 수없이 영화화됐다. ‘007’의 배우인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한 1998년의 영화는 디포 원작임을 강조하면서도 ‘007’영화처럼 주인공의 사랑과 모험을 중심으로 각색했다. 특히 프라이데이와 크루소를 대등한 입장에서 백인과 비백인의 우정을 강조한 점은 원작과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원주민들은 식인종이다. 프라이데이는 사람을 먹으면 강해진다고 생각하고 악어를 신으로 받든다. 그는 크루소가 자신의 하느님을 가르치려 하자 거부하고 떠난다. 크루소는 둘이 사는데도 이렇게 힘드니 종교전쟁이 이해가 된다고 하면서 그래도 유일한 사람인 프라이데이를 그리워한다.

    다시 만난 프라이데이가 백인을 착취자, 노예상이라 비난하자 크루소는 자신의 이름이 ‘주인’이 아니라 ‘크루소’라고 말한다. ‘주인’의 의미를 알게 된 프라이데이는 자신이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며 크루소와 결투를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원작에서는 영어와 기독교를 익힌 프라이데이가 크루소와 함께 영국으로 가지만 영화에서는 크루소가 부상을 당해 프라이데이의 마을로 간다. 그러나 미개한 마을 사람들은 프라이데이와 크루소가 결투를 해서 이긴 자만 살려주겠다고 한다. 불가피한 결투 순간 침입한 나쁜 백인이 프라이데이를 죽이고 크루소는 영국으로 돌아온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좋은 백인’과 ‘나쁜 백인’, ‘좋은 백인’의 친구가 된 ‘좋은 원주민’ 프라이데이와 다른 ‘나쁜 원주민’이 구별된다. 나아가 똑똑한 ‘좋은 원주민’이 머리가 나쁜 다수의 다른 원주민을 쳐부수는 이야기는 원작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구별이 갖는 현대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백인과 원주민이 평등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글로벌라이제이션 자본주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역시 환상일 뿐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