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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함께 떠나는 중국여행 ⑤

‘롼링위(阮玲玉)’

낭만의 올드 상하이, 홍콩인에겐 곤혹스러운 추억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롼링위(阮玲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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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롼링위(阮玲玉)’

193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 롼링위의 불꽃 같은 삶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린 영화 ‘롼링위’.

상하이는 1910년대 말부터 전성시대를 맞아 1930년대에 절정에 이른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청나라는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저우 등 5개 항을 개항하기로 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개항한 5개 도시 가운데 상하이는 창강(長江)과 바다가 만나는 교통 요충지인데다 풍부한 생산력을 갖춘 강남을 배후 지역으로 지니고 있어 서구인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불과 30∼40년 만에 상하이는 중국에서 제일가는 도시, ‘동양의 파리’가 됐다.

당시 상하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근대적인 도시였다.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구 근대 문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지역이었다. 상하이 거리에는 한편으로는 선진적이고 세련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퇴폐적이고 세기말적인, 다소 이중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그것이 조숙한 근대 도시이자 식민지 도시인 상하이의 숙명이었고, 그 숙명이 상하이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올드 상하이는 바로 그런 매력을 지닌 곳이다. 최고급 음악회와 초대형 신식 영화관, 경마장과 댄스홀, 아편굴, 기생집과 매춘굴, 서커스 등이 상하이의 상징이었다.

21세기 세계 제1의 도시

그런 동양의 파리가 침체의 길로 접어든 것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특히 1941년 영미 공동조계와 프랑스 조계가 일본군에 점령당한 뒤부터다. 그러다 일본이 패전하고 1949년 공산 정권이 들어서면서 올드 상하이의 전성시대는 막을 내린다. 요즘 중국에서 올드 상하이 열풍이 부는 것은 그렇게 막을 내린 상하이의 전성시대가 다시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 정책이 채택된 이후 상하이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다시금 전성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아마도 2010년 상하이엑스포를 전후하여 상하이는 제2의 전성시대를 맞을 것이다. 19세기에 파리가 세계 제1의 도시였고, 20세기에 뉴욕이 그러했다면, 21세기에는 상하이가 세계 제1의 도시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상하이가 뉴 상하이의 새로운 전성시대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관진펑(關錦鵬) 감독의 영화 ‘롼링위(阮玲玉·국내 개봉작명 ‘완령옥’, 1991)’는 올드 상하이 전성시대에 상하이 영화계의 최고 여배우이던 롼링위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롼링위는 16세에 영화계에 데뷔해 상하이 최고의 여배우가 된 뒤 올드 상하이의 절정기인 1935년에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영화가 다루는 롼링위의 마지막 6년은 상하이의 절정기이기도 한데, 영화는 그런 절정기의 상하이를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여실하게 재현한다. 이 영화가 중국인은 물론 해외 관객으로부터 호응을 받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올드 상하이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 때문이다. 영화는 상하이 영화계를 중심으로 당시 영화인의 사교 문화와 댄스 홀, 옛 노래, 신여성이 즐겨 입던 치파오(旗袍) 등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

롼링위는 어머니가 부잣집 하인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주인의 도움을 받아 여학교를 다닌 신여성이었다. 그러던 중 주인집 아들 장다민(張達民)이 그를 마음에 두게 되고, 이를 안 주인은 롼링위 모녀를 쫓아낸다. 어머니와 함께 쫓겨난 롼링위는 생계가 막막해지자 학교를 그만두고 배우의 길에 들어선다. 그리고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 역할을 실감나게 연기해 순식간에 최고의 배우가 된다.

그 사이 롼링위는 주인집 아들과 동거를 했다. 주인집 아들은 갑자기 죽은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술과 노름으로 탕진하고 롼링위에게 돈을 요구했다. 결국 1933년 두 사람은 동거를 끝내고 각자의 길을 간다. 그로부터 4개월 뒤, 롼링위는 광둥성 출신의 사업가와 사귀기 시작한다.

그런데 옛 주인집 아들이 롼링위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계속 돈을 뜯어갔고, 1935년엔 마침내 롼링위와 새 애인을 간통죄로 법원에 고소했다. 상하이 최고의 여배우가 간통죄로 고소당하자 신문은 연일 그 뒷이야기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가공해 보도했다. 한동안 롼링위 집 앞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언론과 사람들의 입방아에 지친 롼링위는 결국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자살한다. 그가 죽은 날은 1935년 3월8일, 바로 세계 여성의 날이다. 롼링위는 이날 여고 교장으로 있는 친구의 부탁을 받고 여성의 날 기념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유서에서(영화에서는 자막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다민 때문에 죽는다. 그는 은혜를 원수로 갚고, 원한으로 덕에 보답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나쁘다고만 한다. 아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게는 오직 죽음뿐이다. 정말이지, 사람들의 말이 참 무섭다. 나는 죽는 게 두렵지 않다. 사람들의 말과 소문이 두려울 뿐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배우에게 언론과 대중은 물과 같은 존재다. 배우라는 배를 띄워주는 것도 그들이지만 전복시키는 것도 바로 그들이다. 롼링위 개인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이 사건은 언론과 대중문화가 어느 정도의 세력을 형성할 만큼 상하이의 근대 문화가 무르익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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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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