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적장도 머리 숙인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의 주역 남이흥

“조선은 충의의 나라라더니 내 오늘 그 참모습을 보았다”

  • 남균우 교육학 박사

    입력2007-02-07 16: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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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신, 김시민, 권율. 흔히 임진왜란의 3대 장수로 일컫는 이들이다. 전 국민적 항전이 이어진 선조대의 왜란과 달리, 후금(後金)과 맞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의 전세는 파죽지세 일파만파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장수가 있었고, 눈물겨운 항전이 있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성(城)을 폭파해 옥쇄(玉碎)한 정묘호란 최초의 전투 안주성 싸움이 그것이다.
    적장도 머리 숙인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의 주역  남이흥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에 있는 성벽. 서북지방의 방어요충지였던 이 성은 고구려 때 처음 쌓은 것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대대적인 수리를 거쳤다.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쟁으로 국력이 약해져 임진왜란 같은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고 판단하고, 당쟁을 폐지해 황폐해진 나라를 복구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우선 병력을 확보해 국방을 강화하고 신흥강국인 후금과 명(明)제국의 공방전에서 중립을 지켜 조선의 입지를 마련하는 등 대내외적인 치적도 쌓았다.

    그러나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의 농간에 휘말려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형인 임해군과 14세의 아우 영창대군을 역모죄로 몰아 죽이는 등 패륜행위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때 대북파의 탄압을 받아 몰락하게 된 서인 이규, 김류, 이괄 등은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왕위에 옹립했다. 이름하여 ‘인조반정’이다.

    반정에 참여한 이괄은 무신으로 용맹과 지략이 당대에 빛나는 존재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그는 장수감으로 촉망 받는 인재였기에, 거사의 주모자들에게는 반드시 포섭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함길도 병사로 떠나려던 이괄에게 거사 계획을 털어놓고 가담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괄 또한 간신들의 폭정에 의분을 품었던 터라 가담을 결심한다.

    중견 장교들에게 신망과 존경을 받아오던 이괄은 군관 20여 명을 포섭해 반정군 부대 편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근 고을의 병력을 끌어들인 것도 그의 공로였다. 그러나 막상 반정이 성공하고 나서 진행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뜻밖이었다. 1등 공신으로 책정되어야 마땅할 이괄에게 2등 공신이 주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후금국의 힘이 강대해지면서 관서지방을 염려한 조정에서는 이괄을 평안병사로 임명해 영변에 부임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불만이 누적된 이괄은 결국 특단의 결정을 내린다.

    반란의 구름



    영변에 주둔한 이괄 휘하에는 평안도 최정예 병사 1만2000명과 임진왜란 당시 귀순한 조총수 및 검객 130여 명이 배속돼 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손에 쥔 이괄은 심복부하 이수백 기익헌 등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 구성도호부사 한명련을 끌어들였다. 거사의 막이 오른 것이다.

    관군과 맞닥뜨린 이괄은 관군의 장수들 중에서 남이흥, 유호걸, 박진영이 핵심을 이루는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남이흥의 부하 남두방이 마침 개인 자격으로 영변에 갔다가 이괄군에게 붙잡힌다. 이괄은 남이흥에게 전하라고 편지를 써주면서 그를 돌려보낸다. 편지를 받은 남이흥은 자신과 도원수 장만을 이간하려는 술책임을 간파하고 뜯어보지도 않고 평양에 주병하고 있던 장만에게 보고했다. 장만이 뜯어본 편지에는 ‘현명한 임금이 위에 계시는데 조정에는 흉악한 무리가 가득 찼으니 어찌 숙청하지 않으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후 남이흥에 대한 장만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장만은 병을 앓고 있어 남이흥을 중군으로 삼아 군사의 지휘권 등 모든 일을 그에게 맡겼다. 그 사이 반란군은 영변을 출발해 평양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관군의 군사력이 반란군보다 적음을 우려하는 장만에게 남이흥은 반란군 장수들에게 밀서를 보내 투항을 권유하라고 청한다.

    장만은 마침 평양에 있던 이윤서의 종을 불러 편지를 주인에게 전하라고 이른다. 밀서를 받아본 이윤서는 귀순하기로 결심하고 유순무, 이신, 이각 등을 설득한다. 야음을 틈타 한꺼번에 진을 무너뜨리고 거느리던 군사 3000명을 데리고 귀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반군의 기세가 꺾이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적장도 머리 숙인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의 주역  남이흥

    충남 당진 충장사에 소장된 남이흥의 공신도상(功臣圖像).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괄은 평양을 피해 황주 방면으로 전진했다. 이 사실을 안 장만은 남이흥에게 휘하에서 가장 날쌔고 용맹스러운 군사 1800명을 선발해 추격부대를 편성하라고 지시했다. 벌써 해가 저물었지만 한시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라 반란군의 뒤를 치려 한 것이다. 남이흥이 이끄는 추격군이 황주 신교에 다다르자 반군은 이들을 발견하고 대항했다. 남이흥은 전선을 마주한 반군에게 항복하라고 호령했다.

    추상 같은 호령에 반란군 무리 중 허전 송립 등이 마병 1200명을 이끌고 투항했다. 이들은 일찍부터 이괄이 심복으로 삼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선봉장들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남이흥이 만주에 있을 때 의식주의 은혜를 입은 바 있는 이들은 남이흥의 넓은 아량과 고매한 인품에 감복한 터다.

    무악재의 최후 결전

    남이흥이 이끄는 관군은 반란군을 추격해 평산 경계에 이르렀다. 밤이 깊어지자 남이흥은 결사대를 조직해 적진 깊숙이 쳐들어갔다. 이들은 삽시간에 적진을 격파하고 퇴로를 끊었다. 당황한 반란군의 형세는 약화되었으나 이내 평산 동남쪽 25리 지점인 저탄으로 진출했다. 저탄은 군사적 요충지로 예성강 도하(渡河)지점이었으므로 관군은 이미 이 여울목 건너편 기슭에 제2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방어사 이중돈과 이덕부가 이끄는 관군부대는, 그러나 태백산성으로부터 별다른 정보가 없었던 까닭에 방심하여 전투태세를 풀고 있었다. 이를 틈탄 반란군이 기습에 성공함으로써 관군은 처참한 살육전 끝에 전멸당하고 말았다.

    강을 건너 진을 친 반란군은 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자 장수 여덟 명의 머리를 베었다며 남이흥이 이끄는 추격부대에 보냈다. 관군의 투지와 사기는 금세 꺾였다. 이렇게 되자 남이흥은 크게 웃으면서 “그 여덟 장수는 평소에 내가 알던 사람들이다. 보내온 수급(首級)은 그들과 다르다. 죽은 졸병의 머리를 걸어놓고 나를 속이려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남이흥은 반란군이 임진강을 건너면 서울이 혼란스러워질 것이니 결사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인조는 이미 공주로 파천(播遷)한 상황이었다. 도원수 장만은 “서울이 격파되었으니 싸울 곳이 없다. 임금의 수레를 따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남이흥은 그 명령을 좇지 못하겠다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 무렵 반군은 개성을 넘어 남진했다. 죽음을 결의한 장만과 남이흥은 추격군을 이끌고 혜음령(지금의 광탄 용미리)에 도착했다. 벽제역을 굽어보는 고개 마루턱에서 병사들을 정지시킨 이들은 작전회의를 열었다. 도원수 장만이 입을 열었다.

    “지금쯤 이괄군은 서울에 입성했을 것이오. 도성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소. 첫째, 반군이 도성을 장악한 지가 얼마 안 되므로 주민들이 아직 적도(賊徒)들을 따르지 않을 거요. 그러나 하루 이틀 지체하면 관망하던 무리가 역모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협조할 것이 분명하오. 따라서 우리 병력만으로 조속히 공격할 필요가 있소. 그러나 이 방법은 세가 불리한 아군으로서는 소수 병력으로 결전해야 하는 일인 만큼 위험할 뿐만 아니라 희생이 적지 않을 것이오.

    둘째는 지구전인데, 경기관찰사 이서의 부대를 독촉해 도성 동쪽의 도포를 봉쇄하고 서울 이남의 관군부대를 불러올려 도성 남쪽 통로를 차단한 다음 우리 부대는 북방퇴로를 차단하여 적의 군량로를 끊어놓고, 각 도의 지방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협동작전으로 공격하는 것이오. 두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하겠소?”

    성미가 급한 정충신이 첫 번째 안을 찬성하고 나섰다. 남이흥 이하 여러 장수도 이에 동조했다. 정충신은 유효걸 이희건 김경운 최응일 신경원이 이끄는 부대와 함께 무악재 마루턱을 먼저 점령하고, 남이흥과 변흡의 부대도 어둠을 무릅쓰고 달려가 안산에 진출했다. 이확은 100명 포수로 편성한 별동대를 거느리고 치마바위 계곡에 잠복해 창의문 통로를 차단했다. 경기관찰사 이서와 황해관찰사 임서는 낙산에 진출해 협공태세를 갖추었다.

    추격군이 무악재를 점령한 사실을 안 반란군도 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 결과 일부를 무악재로 보내 정충신의 부대를 상대케 하고, 대신 조총으로 무장한 항왜(降倭·왜란 당시 항복한 일본 병사들)와 정예병을 창의문으로 우회출동시켜 배후의 도원수 본영을 기습하기로 했다. 주장(主將)을 사로잡기 위한 계책이었다. 반란군 장수들은 모두 이번 기회에 ‘오합지졸 관군’을 붕괴시킬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흔들리는 깃발

    항왜가 포함된 반란군 정예병들은 장만과 남이흥이 진주한 산고개 안쪽을 포기하고 기세등등하게 기어올랐다. 남이흥은 의자에 발을 묶고 불퇴전의 기백을 보였으나 군졸들은 겁에 질렸다. 총탄과 화살이 비오듯 날아오는 가운데 동풍마저 휘몰아치니 반군은 바람을 타고 쏜살같이 공격했다. 고개 안쪽의 관군은 필사적으로 진지를 고수했지만 밀리기 시작했다.

    변수가 생긴 것은 싸움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바람이 갑자기 서북풍으로 바뀌어 모래먼지가 반란군을 향해 세차게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남이흥은 이때를 위해 준비해둔 고춧가루를 뿌렸다. 강풍을 타고 날아간 고춧가루는 반란군 정예를 향해 휘몰아쳤고, 전세는 조금씩 달라졌다. 용기백배한 관군이 반격에 나선 것이다. 전투를 독려하던 반란군의 한명련도 화살을 맞고 허둥지둥 물러났다. 이때 남이흥은 다시 한번 기지를 발휘한다. 한명련이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고 외친 것이다. 관군의 사기는 다시금 솟구쳤다.

    반란군 진영의 한복판에서 지휘하던 이괄이 공격방향을 바꾸려고 주장의 지휘깃발을 돌리려 하였다. 커다란 깃발은 강풍을 맞아 쓰러질 듯 좌우로 흔들렸다. 이를 본 남이흥은 크게 소리쳤다.

    “이괄이 도망친다!”

    정신없이 싸우던 반란군 병사들은 아래쪽을 돌아보았다. 쓰러질 듯 마구 요동치는 이괄의 주장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경악한 반란군은 산사태가 나 무너져내리듯 앞을 다투어 무악재 고개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관군의 파죽지세에 밀리기 시작한 이괄은 도성쪽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성벽에 나와 관전하던 주민들이 성문을 닫아버렸다. 당황한 이괄은 숭례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도망쳤다. 정충신이 추격하려 했으나 남이흥이 제지했다.

    “궁지에 몰린 적은 쫓지 말라는 것은 병법에도 명시된 훈계 아니겠소. 도성 안에는 좁은 골목이 많아 적도의 기습대가 잠복해 있다면 낭패 당하기 십상이오. 공연히 서두를 것 없이 하루 이틀 그대로 놔두어도, 두목을 앉아서 잡아오게 될 것이니 기다려봅시다.”

    그 말은 곧 실현됐다. 이괄과 한명련은 한강을 건너서 광주를 거쳐 이천 묵방리까지 도망쳤다. 이괄의 심복부하 이수백 기익헌 이선철 등은 의논 끝에 이괄과 그 아우 이수, 한명련 원종경 등 아홉 명의 머리를 베어 투항서와 함께 장만 도원수 진영으로 보내왔다. 남이흥이 “앉아서 잡게 될 것”이라고 말한 지 이틀 만에 이괄의 머리가 변심한 심복에 의해 원수부에 바쳐진 것이다. 조선 땅을 온통 뒤흔들었던 이괄의 난의 허망한 종결이었다.

    무장(武將)의 임무는 끝이 없다. 반란군을 토벌하자 이번에는 관서의 국경이 꿈틀댔다. 후금국의 기미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국제정세가 불안해짐에 따라 이 지역 백성과 관원의 걱정이 태산 같아 조정에서도 대책을 세워야 했다. 관서지방에서 시작된 반란이 진정되지 않은 터라 섣불리 이곳에 부임하려는 이가 없었다. 인조는 토벌 공신 장만의 의견을 들어 정충신을 평안병사에 제수했으나, 이내 정충신의 건강이 악화되자 남이흥을 다시 임명했다. 영변부사와 양서순변사를 겸임하게 된 남이흥은 황해도와 평안도를 모두 지휘했다.

    후금군의 대공세

    이 무렵 조정에서는 병조판서와 공신으로 떠오른 장만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이들의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난 사안이 공교롭게도 남이흥이 부임한 평안병사의 위치 이동에 관한 것이었다. 병조판서는 병사가 최전방인 구성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장만은 성곽이 있는 안주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의 논란은 결국 천추의 한을 남겼으니, 평안병사가 확고한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하는 사이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고야 만다. 심양을 떠난 후금군 3만여 명이 8일 만에 안주성 앞까지 이른 것이었다. 1627년 1월20일의 일이다.

    남이흥이 안주성에 입성한 것은 그 하루 전의 일이었다. 안주는 원래 서북의 요충지로 수만명의 상비병력을 보유하는 병영이었지만 이괄의 난으로 모두 없어지고 텅 빈 상태였다. 다급해진 남이흥은 평안감사에게 장계(狀啓)를 보내 증원군을 요청하고 인근의 모든 병사와 민간인까지 끌어모아 겨우 3000명 병사를 채웠다. 10대 1의 중과부적이었으니 승패는 뻔한 노릇이었다. 성을 사수하기로 맹세한 남이흥이 믿을 것은 충의지심(忠義之心) 뿐이었다. 그는 고을 주민을 모두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민가는 화공을 피하기 위해 불을 지르는 등 전투태세를 명했다.

    후금군은 이내 1만4000명 병력을 산개시켜 안주 성벽을 기어오르게 하였다. 6000여 기병 등 나머지 병력은 성 주위를 맴돌며 사격을 가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병력을 엄호했다. 조선군의 화포가 불을 뿜자 공격이 잠시 주춤하는 듯했으나, 이내 압도적인 공세가 이어졌다. 성안은 방어전을 펼치느라 흡사 펄펄 끓는 물처럼 혼란스러웠다. 북문과 동벽, 남벽을 돌아가며 공세는 계속됐다.

    결국 1월21일 오후 4시, 후금군은 안주성 동남쪽 성첩(城堞)에 사다리를 거는 데 성공했다. 성안으로 후금군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단 전열이 흔들리자 북방 성벽에도 높은 사닥다리(雲梯)가 걸렸고 이어 사대문이 모두 부서져 나갔다. 그야말로 백병전이었다. 절대 열세였던 조선군은 이내 화살과 무기가 떨어져 후퇴를 거듭해 관아에까지 밀려났다. 후금군이 관아를 두겹 세겹으로 에워싸니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좌충우돌하며 밀려오는 적의 기세는 극성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구름 같은 병력이었다. 성안은 온통 적뿐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왔다고 판단한 남이흥은 준비해놓은 화약고에 불을 붙이려고 마음먹었다. 평소 아끼던 부하들에게 몸을 피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들 역시 “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외치며 끝까지 항전했다. 마침내 남이흥이 심지에 불을 붙였다. 순간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고 관아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아군은 물론이고 적군 수천명도 한꺼번에 폭사했다. 이렇게 해서 정묘호란의 첫 방어선이던 안주성이 무너져내렸다. 이때 남이흥의 나이 52세였다.

    최후의 폭발

    안주성에서 벌인 조선군의 최후항전은 후금군에도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피해도 엄청났다. 후금군 총대장 패륵 아민조차 머리를 조아려 곡을 하며 “조선은 충의의 나라라더니 내 이제 그 참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말했다 한다. 감동한 패륵 아민은 성안에서 패잔병을 죽이는 부하들을 말렸고, 수백명의 포로를 석방했다. 후금군의 전투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남이흥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한번 무너진 전선은 어쩔 도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평양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남이흥의 지원요청을 거절했던 평안감사는 후금군의 남진 소식에 40명의 군관을 대동하고 성을 빠져나갔다. 대다수 병사가 도망친 평양성에는 2000여 군민만이 남아 전판관 김준덕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항전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후금군은 이들을 무시하고 계속 남진했다. 황주에서 제2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던 황해병사도 평안감사가 성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1월25일 봉산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이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지거나 귀양에 보내졌다.

    남이흥의 장례는 인조의 명에 따라 국장(國葬)으로 치러졌고, 임금이 친히 참석해 입고 있던 곤룡포를 벗어서 관을 덮었다고 한다. 남이흥에게 내려진 사패지지(賜牌之地·공신에게 내려진 토지)는 당진군 대호지면 전부와 정미면 일부가 포함되는 엄청난 넓이였다. 현종 때인 1663년에는 충장공이란 시호도 내려졌다. 숙종 6년에는 안주에 사당을 지어 충민사(忠愍祠)라는 사액을 내리기도 했다.

    중국대륙을 분할하던 명나라 또한 그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황궁으로 가는 길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붉은 기를 내걸었다.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했던 남이흥의 친척이 극진한 대접을 받을 정도였다. 이 무렵 중국야사에 남은 남이흥에 관한 기록을 인용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열렬한 충성과 빛나는 절개는 적도 능히 구부러뜨리지 못했고 불도 또한 태우지 못했네.

    기운은 산하보다도 장하였고 이름은 중국 천지에까지 가득찼으니,

    예부터 사불사(死不死·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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