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떠도는 영혼을 지닌 작가 윤후명

“문학은 패자(敗者)에게 피어나는 연꽃, 난 죽어도 써요”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입력2007-09-10 19: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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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 자체가 현대사의 질곡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는 소설가 윤후명. 그는 떠도는 영혼을 가진 나그네이고, 존재의 진실을 보게 해주는 술이며, 우주를 온몸에 품은 ‘늙은 꽃’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은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피어난 꽃처럼 향기롭고 고독하다.
    떠도는 영혼을 지닌 작가 윤후명
    7월28일 토요일 오후에 만나기로 한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윤후명(尹厚明·61) 선생과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선생의 마음이 고여 있는 소설집을 기쁘게 받아들고 마치 목마른 이가 샘물을 마시듯 읽어 나가던 중이었다. 소설 속에서 선생은 여러 나라를 오가며 분주했지만, 그것은 무척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오랜 세월 고인 자신의 마음을 퍼내는 자의 무서움일 것이다.

    조금만 인기가 있으면 온갖 현란한 과대선전에 시달리는 이 천박하고 경박한 시대에 선생의 소설은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피어난 꽃처럼 향기롭고, 고독하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통화가 되었다. 선생은 전날에 술을 많이 드셨다. 몇 달 만의 과음이라고 하셔서, 그럼 어떻게 하나 우물쭈물하는데 선생이 말씀하셨다.

    “옛날에 고(故) 박정만 시인과 보름 동안 내리 술을 마신 적이 있지요. 박 시인은 통뼈였고 나는 왜소하지만 한번 마시면 둘이 끝까지 가다가 무너졌지. 그렇게 무너지는 거야. 오랜만에 무너진 것 같아. 인터뷰고 뭐고 술이나 한잔합시다.”

    인사동에 있는 주점 ‘시인’에서 오후 2시에 만나기로 했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친구에게 윤후명 선생을 만나기로 했는데 취하신 것 같다고 했더니 선생의 건강을 걱정했다. 우리 문단을 위해서라도 선생은 건강하셔야 하는데, 또 술에 발동이 걸렸으니 며칠은 가지 않을까 염려했다. 필자 역시 문단 생활 20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문인들의 취중 모습이다. 그건 모두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아픔이고 상처이기도 하다.

    소설 쓰는 시인



    오랜만에 인사동을 찾았다. 최근에는 일산에서 거의 모든 만남이 이루어져 시내 외출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인사동 사거리에 들어서니 마침 토요일이어선지 인파가 쏟아졌다.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듯 길을 헤맸지만 ‘시인’을 찾지 못했다.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오지 못한 나를 원망하면서 부끄럽지만 다시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시간이 조금 지나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선생 역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한다. 길이 막혀 조금 늦는다며 자세한 위치를 알려주어 골목길 깊숙이 들어가 있는 주점에 먼저 가서 앉았다. 어딜 가나 낯선 곳에서 길을 찾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헤매는 것도 오랜만이다.

    문득 청년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부딪히고, 깨지고, 넘어지고, 자빠졌다. 그렇게 비틀거리면서 40대 중반에 다다랐다. 나는 요즘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두 바퀴를 안전하게 굴려 목적지에 도착하듯이, 내 삶도 어느 정도는 단정하다. 인사동 거리에서 길 찾기를 하느라 나는 잠시 헤맸고, 그 헤맴 속에서 문득 내가 잃어버린 시간의 어디쯤에 와 있는 것 같았다. 한 때 인사동에서 얼마나 술을 마셔댔던가. 같은 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병들었고, 어떤 이는 출세해서 잘산다. 그렇게 어울려 산다.

    그간 이런저런 문단 모임에서 선생에게 몇 번 술을 친 적은 있지만, 따로 만나는 사이가 아니어서 약간 어색하기도 하다. 인터뷰라는 형식이지만, 사실 이 연재는 나의 산문일 따름이다. 선생의 말에 빗대어 선생의 삶을 살짝 엿보는 것이다. 부담감을 털어버리기로 마음먹자 선생이 들어왔다. 그리 취하신 것 같지는 않아 일단 안심했다.

    이제부터 새의 말을 듣는 것인가? 선생이 최근에 낸 소설집 제목이 ‘새의 말을 듣다’이다. 제목에서부터 울려오는 어떤 소리가 있다. 선생은 항상 시인이었던 이력이 떠오르는 소설가다. 시를 쓰다가 소설가로 변신한 작가는 의외로 많다. 성석제, 장정일을 비롯해서 원재길과 김형경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들에겐 소설가라는 이름이 참으로 어울린다.

    윤후명 선생을 대하면 왠지 ‘소설을 쓰는 시인’ 같다는 선입관이 든다. 궁금한 것을 책갈피에 넣어두고 근황을 여쭸다. 국민대에서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으며 선생이 직접 운영하는 ‘소설학당’을 여전히 꾸리고 계셨다. 소설가의 근황은 최근에 낸 소설집을 빼면 별로 변한 게 없다. 작년이 육순이셨는데, 그때 나올 소설이 육순과 연결되어 번거로운 일이 있을까봐 올해 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

    떠도는 영혼을 지닌 작가 윤후명
    윤후명 선생은 요즘 틈틈이 그림을 그린다. 헤르만 헤세는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황지우 시인의 조각 솜씨는 대단히 뛰어나다. 문인이 문학의 주변 예술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직접 붓을 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다. 육순을 넘긴 선생의 마음자리에 원고지말고도 큰 캔버스가 펼쳐졌다. 그것은 이제 서서히 예술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다는 전조로 보였다.

    선생의 그림 중에 한 점이 최근 출간한 소설집 ‘새의 말을 듣다’ 표지화로 장식되어 있다. 두 산 봉우리 사이로 새가 날고 있는 모습인데, 새는 섬새이고, 산 봉우리처럼 보이는 것은 동도와 서도, 2개의 섬으로 된 독도를 의미한다. ‘새의 말을 듣다’라는 제목과 잘 어울리는 그림이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표지에 씌인 ‘그림 윤후명’을 보고, 동명이인의 화가가 있나 싶어 여쭸더니, 그림도 그린다면서 “나 요즘 이렇게 살고 있소” 한다. 선생의 그림은 그간 쓴 소설에 그 뿌리가 있다. 글로 써내기만 해서 마음속에 잔영으로 찍힌 이미지를 화폭으로 옮기는 것이다.

    어떻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훈련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은 수년 전부터 관심이 있어 어떤 화가에게 사사했는데, 그분이 남을 전혀 가르쳐본 적이 없어 ‘그냥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라’는 참으로 어려운 말을 해서,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꼼꼼하게 선 하나 긋는 것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기초를 다지고 다시 그 화가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림을 시작한 지 이미 수년이 지났다.

    “그림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고 아마추어 때는 쉽고 재미있지만, 점점 그것을 알아가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 고뇌도 생기게 마련이라 만만치가 않아요. 하지만 그림에는 특별한 욕심이 없어서 그냥 나 좋은 대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겠다 싶지요. 특히 문학과 미술은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문학은 글로 쓰고, 그림은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음악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해, 즉 음(音)을 통해 뭔가를 보여준다면 그림과 문학은 보이는 것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를 내리는 것이지 싶었다. 선생은 요즘 그림을 많이 그린다.

    진짜 술꾼

    이런저런 한담을 나누다가, 42세에 요절한 박정만 시인 얘기가 나왔다. 선생은 자신과 박정만을 술꾼이라고 한다. 진짜 술꾼이 사라진 요즘 선생의 술 이야기에 일단 구미가 당겼다.

    “지금은 몸 때문에 맥주를 먹지만, 한때는 맥주를 술로 보지도 않았지요. 그런 내가 대적한 진짜 술꾼은 박정만이에요. 그 사람, 아마 술 때문에 저 세상으로 간 걸 거야. 정만이는 25일 연속으로 마신 적이 있고, 나는 보름이 최고 기록입니다. 그러고는 소설가 이문열 정도가 술꾼이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그때 술만 그렇게 드셨나요.”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답했다.

    “곡기는 다 넘어와. 다른 음식은 다 토하고, 술을 그 자리에다 넣는 거지. 매일 소주 7병을 먹었지. 소주(알코올 도수)가 30도 혹은 25도 하던 시절이야. 요즘 소주는 20도 안 되지. 그거 술 아니야.”

    이야기가 술로 시작된다. 보통 처음에는 차를 마시고 다음에 술로 넘어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지 하고 생각하며 맥주잔을 들었다.

    이 글이 더 취하기 전에 일단 선생의 이력부터 더듬어본다. 선생은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969년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는데, 대학 다니던 1967년 ‘경향신문’에 시가 당선됐고, 1979년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다. 시집으로 1977년에 낸 ‘명궁’과 1992년에 낸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 등이 있고, 소설집 ‘둔황의 사랑’ 이외에 다수, 장편소설 ‘별까지 우리가’, 산문집 ‘꽃’, 장편동화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 등이 있다. 녹원문학상, 이수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선생은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까지 살았다. 강릉 임당동에서 어머니는 담배장사를 하셨다고 했다. 담배장사라,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쟁 중이었고, 선생의 고향은 바다가 가까운 마을이 아니어서 농업이나 어업 같은 생활수단도 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바닷가까지 걸어가려면 어린 걸음으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몇 번 가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저 고즈넉한 시골마을이었다.

    떠도는 영혼을 지닌 작가 윤후명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어 언젠가 다시 고향 집터를 찾아 나선 적이 있었는데, 임당동 성당만 그대로이고, 새로 난 신작로가 집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다행히 그때까지 남아 있던 살구나무 한 그루를 보고 옛 집터 자리에서 서성댈 수 있었다고 했다. 꽃을 사랑하는 선생의 마음이 살구나무를 거기에 머물게 한 것일까 싶었다.

    당시 선생이 살던 마을 가까운 곳에 공군부대가 주둔했는데, 항공정비 위주의 시설이어서 진짜 조종사는 몇 안 되고 나머지는 다 공군 정비병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전투기 조종사의 ‘빨간 마후라’를 하고 그 좁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동네 처녀들의 흠모를 받은 모양이었다. 마을 처녀들에겐 그들이 자신을 비행기에 태우고 멋진 곳으로 데리고 갈 존재로 보였다고 한다. 마을의 분위기와 냄새가 맡아진다.

    이미 선생이 어떤 글에서 밝힌 적 있듯이 선생에겐 아버지가 두 분이다. 지금도 제사 때 두 분의 영혼을 모신다. 선생의 이력은 6·25전쟁을 비롯한 우리 역사의 흐름과 같이한다. 선생에게도 전쟁의 상흔이 잔혹하게 남아 있다. 선생의 친부는 경찰이었는데 전쟁 발발 즈음 38선 근처에서 벌어진 국지전에서 돌아가셨다. 전쟁 전부터 자잘한 분쟁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두 아버지

    분단의 희생양이기도 한 친부는 그렇게 선생이 걸음마를 떼던 시절에 세상을 떠나 선생은 친부의 얼굴도 기억할 수 없고, 체취도 느낄 수 없었다. 19세에 선생을 낳고, 얼마 있지 않아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어버린 어머니는 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으로 내려가려 했지만 아이가 홍역을 앓는 바람에 그냥 마을에 남아 담배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때 선생을 길러주신 아버지와의 만남이 이뤄졌다.

    마을에 군 부대가 있었고, 군인이던 아버지가 전투가 없는 한적한 마을에 가끔 담배를 사러 들르다가 어머니를 만났다. 선생이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면,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 같은 이야기가 바로 윤후명 선생의 아버지 이야기다. 나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 소설 쓰는 친구가 선생이 글로 쓴 가계(家系)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선생의 소설도 그러하지만, 결국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게 마련이다.

    “아버지는 군 법무관이셨는데, 사실 전쟁 중엔 전투가 있을 뿐 법은 필요 없지요. 그러나 그것이 군 질서의 상징이기 때문에 꼭 필요하기도 하고. 전쟁 통의 괴괴한 마을에서 두 분은 그렇게 만났지요.”

    그렇게 만난 부친은 서울대 법대 4회 졸업생이다. 그때는 사법시험을 고등고시라고 했는데, 전국에서 6명만 뽑았다. 그 후 군인 아버지를 따라 대전, 대구, 춘천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는 부산에서 복무했다.

    작가의 유년시절엔 대부분 고독한 공간이 있다. 빈 쌀독처럼 공허한 시절. 그것이 작가로서의 운명을 결정하는 어떤 요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허기질 때 먹는 밥이 맛있듯이, 작가의 외로운 유년시절은 삶의 허기를 느끼게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윤후명 선생은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 다니면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당시 부산에 있던 군수기지사령부에 근무했고, 계급은 중령이었다. 그 부대의 사령관이 바로 박정희 장군이었다. 어린 시절 박정희 장군이 집에 찾아온 기억도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한 순간이 다가온다.

    훗날 혁명을 준비하던 박 장군은 이동 중인 헬기 안에서 선생의 부친인 윤 대령에게 거사를 같이하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저는 그냥 군인으로 남아 있겠습니다”라고 했고, 이것이 나중에 큰 화를 자초했다. 선생이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그때 아버지가 권총을 차고 귀가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서울 6관구 사령부 법무참모를 지냈는데, 어느 날 육군 제3 범죄수사대에서 아버지를 잡아갔다. ‘반혁명세력’으로 분류됐다고 했다. 헬기 안에서 박 장군의 제의를 거절한 대가가 비수가 되어 날아든 것이다.

    “인생이란 것이 말이죠…”

    혁명위원회는 군인으로 남고 싶어 한 아버지를 수도육군병원에 감금시켰다. 군사정변이 성공한 후 공과(功過)를 정리하던 과정에서 아버지가 희생을 당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군법회의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됐고, 10년 자격정지라는 가혹한 처벌을 받고 거리로 내몰렸다. 새의 날개를 부러뜨리고 허공으로 내던진 격이었다. 부친은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 이때부터 지독한 가난이 찾아왔다.

    용산고 3학년 시절에는 버스표 한 장만 들고 학교를 다녔다. 점심과 용돈은 물론이고, 심지어 연필이 없어 필기를 하지 못한 적도 있다고 했다. 이번 작품에도 선생이 대학시절에 겪었을 이야기가 들어 있다. ‘소행성의 분노의 강’에 나오는 이 구절은 아마도 당시의 체험이 녹아든 것이리라.

    ‘내 눈에 길음시장의 망령이 와락 달려들었다. 길음시장 밥집의 망령, 한 그릇 밥이 고마워 흘렸던 눈물의 망령, 누울 곳이 없어 밤늦게 헤매던 발길의 망령, 어설프게 보낸 청춘의 망령이었다.’

    떠도는 영혼을 지닌 작가 윤후명
    추억하면 망령이지만, 그때는 처절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가난과 배고픔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잔인한 짐승이다. 그 짐승은 인간의 영혼을 뜯어먹는다. 배고픔은 사람의 육체를 뜯어먹는다. 가난은 부끄러움이라는 의복을 모두 벗겨버려 인간을 발가숭이로 만들어버린다. 인생은 체험하지 않는다면 뜯지 않은 통조림 깡통일 뿐이다. 깡통을 보고 인생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이 살아온 삶이 그대로 시와 소설이 됐다.

    그렇게 가난한 생활을 견디게 한 것이 문학이었다. ‘연세춘추’ 기자를 하면서 받은 2500원의 월급으로 생활했고, 연세문학상 상금과 대학교 2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받은 2만5000원의 상금으로 당시 1만3000원 하던 등록금을 내면서 겨우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의 시간이 온다. 옛 영광이 지금 삶의 올가미가 되어 울분의 세월을 보내던 아버지는 환갑을 이태 남겨둔 58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인생이라는 것이 말이죠….”

    선생은 가끔 눈시울을 붉혔다. ‘인생이라는 것이 말이죠’ 다음에 말을 잇지 못하는 심경은 단지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그 인생이라는 것, 소설가 윤후명은 문학을 통해 그것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갑을 넘긴 지금껏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것이 문학에 대한 열정이었다.

    이미 고등학교 1학년 때 문학에 목숨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5·16 이후 서울에 올라온 윤후명은 중학교 3학년 2학기 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고 그냥 보내게 된다. 다음해에 용산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청소년 문예지 ‘학원’에 일기를 행갈이해서 응모했다. 시가 일기인가 싶던 시절이었다.

    “법은 승자의 것, 문학은 패자의 것”

    고교시절에는 청록파 시인들의 시를 좋아했고, 원예반 활동도 같이 했다. 선생은 꽃을 무척 사랑한다. 아마 지금도 식물학자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선생 자체가 점점 꽃이 되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선생을 꽃을 찾아다니는 벌과 나비같이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날 본 선생의 모습은 향기 은은한 늙은 꽃이었다.

    ‘법’에 의해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받은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법만 생각한 분이었다고 했다. 공부를 제법 잘하던 아들이 법대가 아닌 국문과에 가겠다고 하자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의 친구가 전부 사법고시 출제위원인데, 법대에만 들어가면 그 영리한 머리로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잘살 수 있는데 갑자기 문학이라니,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연세대 철학과에 입학한 것도, 아들의 고집을 꺾기 위해 ‘그럼 잠시 철학과에 들어가서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뒤 법대로 옮기라’는 아버지의 암묵적인 명령 때문이었다.

    “법은 승자의 것이고, 문학은 패자의 것이다. 왜 너는 패자의 길을 걸으려고 하느냐? 너의 생부가 살아계셨어도 법을 원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과연 바른 말씀이었다. 선생은 문학은 패자의 것으로 여긴다고 했다. 문학은 인생의 패자, 삶의 쓸쓸함, 시궁창, 그러나 거기에서, 그 마음과 장소에서 피어나는 연꽃 같은 것이 아니던가. 윤후명은 이런 말을 함으로써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

    “법은 인간을 구속하지만, 문학은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황석영 선생이 독일에서 겪은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한 독일 기자가 황석영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는 작가다. 그리고 북한을 다녀와 옥고를 치른 매우 독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작가로서 어느 편인가? 남한인가, 북한인가?”

    황 선생은 좀 불편해 직답을 피하다가, 계속 답변을 요구받자 천천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작가로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패배한 자, 쓰러진 자의 편이다.”

    문학이 뭐길래, 시가 뭐길래 아들이 이렇게 변했을까? 아버지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살기 어려운데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느냐면서 혼을 냈지만, 이미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장성한 아들을 어찌 하지 못하셨다.

    시인으로 등단해 문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문학과 지성사의 초기 시집 멤버로 참여한 선생은 34세 때 소설가로 다시 문단에 등단한다. 당시 셋방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신춘문예 시상식 다음날 운명했다. 그때 상금으로 묏자리를 봐드릴 수 있었다고 한다.

    떠도는 영혼을 지닌 작가 윤후명
    아버지의 장례식은 쓸쓸했다. 화려한 과거 인맥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황량한 겨울바람만 묘지를 감돌았다. 선생은 그때 인생의 또 다른 면을 보았다. 인생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것이다. 그래, 삶 앞에서 잘난 척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서 그렇게 살았다. 문학과 더불어 가난과 더불어 술과 더불어. 그러다가 알코올릭의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선생의 이러한 삶은 시인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왜 소설가로 방향을 틀었을까.

    “첫 시집 ‘명궁’을 내고 나서 든 생각인데, 시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요. 늘 뭔가 찌끄러기 같은 것이 남았던 거죠. 시라는 것이 언어를 극도로 절제하고 정화해서 표현하기에 그런 것이죠. 하지만 소설은 정화된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정화된 존재가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게 진짜 아닐까요?”

    평론가 오생근은 이런 글로 선생의 변신을 말했다.

    “아마도 그는 철학과 출신의 작가로서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소설을 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본래 ‘이야기꾼’으로서의 소설가를 경원하고, ‘시인이 되지 못하면 나는 살지 않을 것이다’고 외칠 만큼 시인으로서 한평생을 살아가기를 꿈꾸었던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극도로 ‘삶이 철저하게 고립되고 망가져’ 있는 절망감과 참담한 정신적 방황 끝에 새롭게 다시 태어나려는 의지에서 소설을 쓰게 되었다면, 이것은 시인에서 소설가로의 변신을 설명하는 한 이유가 되긴 하겠지만….”

    선생이 그토록 술에 의지하며 시절을 보낸 것은 술에 취해 마치 무의식 상태에서 저절로 흘러넘치는 그런 상태로 써내려가는 것들이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인사불성 상태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상태에서 정말 진짜가 나오는 것이라 믿었다. 선생은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명료한 것이 싫어요. 판에 박힌 금언과 아름다운 문장도 싫습니다. 소설은 일상이기에 일상적인 언어로 이야기하면서 언어예술의 경지로 스스로 올라가는 것이지요. 문장도 너무 아름다운 것들만 배열되어 있으면 왠지 징그럽지 않아요?”

    “살고 싶다면 저 여자와 결혼하라”

    선생의 인생을 술과 장미의 나날이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싶다. 술과 꽃은 선생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음양의 원리처럼 작용한다. 보름쯤 내리 술 마시는 나날이 이어지면 어떤 현상이 올까. 죽거나 죽어가거나가 아닐까.

    “마흔여섯 때였나 싶은데, 사경을 헤매는 것 같았어요. 환청이 들려오고 환상이 보이는 거야. 10층 건물에 올라 내려다봐도 마치 1층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지. 그냥 뛰어내려도 고양이처럼 사뿐히 내려앉을 것 같았어. 그런데 죽을 팔자는 아니었는지 누가 나타나더군요.”

    부인을 만난 것이 그 시절이다. 선생의 소설세계를 사랑한 독자이기도 했던 그녀가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다. ‘글 쓰다가 술 먹고 죽겠다’는 선생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운 것이다. 문단에서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선생의 육성으로 들으니 입체감이 살아난다. 이 일은 윤후명의 문학세계에서 큰 전환점일 것이다. 불경스러운 생각일지 모르지만 아마 그때 부인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 문단에 크게 슬픈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선생도 아마 그랬을 거라고 말한다. 술 마시다 죽었을 거라고.

    두 분의 결혼식 풍경은 차라리 취중에 쓴 한 편의 시와 같다. 어느 날,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선으로 충무 통영에 있는 섬에서 열린 문학모임 자리에서였다. 그 자리에 부인이 선생을 쫓아왔다. 독자로서 참석한 자리였지만, 이미 선생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2박3일 일정이었는데 첫날부터 소설가 이문열 선생과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다 취중에 이문열 선생에게서 “살고 싶다면 저 여자와 결혼하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살고 싶은 마음이야 죽는 순간까지 인간을 끌어올리는 밧줄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데 누가 깨우면서 결혼식을 하러 가자고 해서 치러진 결혼식이다. 연장자인 이호철 선생이 주례를, 이근배 시인이 사회를, 송영 선생이 축가를 불러주었다. 민족문학 창간기념 자리에서 즉석으로 진행된 결혼식. 이 결혼식은 마침 취재거리를 찾던 KBS 지국에서 취재해 ‘전국은 지금’ 프로그램에 전국으로 생중계됐다.

    그런데 정작 결혼을 주선한 이문열 선생은 결혼식장 한구석에서 이불을 돌돌 말아 얼굴을 가린 채 자고 있었다고 했다. 그때 김주영 선생은 윤후명의 결혼식 광경을 보고 건물 기둥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윤후명의 파란만장한 삶이 여기에서 제발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기도의 눈물이었을까. 아무런 준비가 없었지만, 마침 동행한 기자가 아침에 통영으로 나가 금반지를 사와서 부인의 손가락을 울지 않게 했다. 1991년 여름이었다.

    정신병원에 갇히다

    사람의 만남이란 우연이 아니다. 유행가 가사이지만, 일상의 진리다. 오늘 만난 그 어떤 이라도 우연히 만나지 않는다. 거기에는 지독한 필연의 고리가 엮여 있다. 살아 있음은 그러한 지독한 인연의 연속이다. 그 시절 선생은 가정이 해체된 자리에서 홀로 남아 술만 먹고 죽어가고 있었다. 일을 안 하니 당연히 돈이 없었지만, 그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산의 작은 방에서 라면만 먹고 살았다. 정확하게는, 라면만 먹은 것이 아니라 그 라면에 들에서 뜯어온 풀을 넣어 먹고 살았다. 그리고 백조 담배, 일주일에 서너 번 라면에 넣어 먹던 달걀로 그 시절을 표현할 수 있다.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들에 나가면 먹을 게 많아. 그걸 먹으면 되는 거지요. 라면에 들풀을 뜯어 넣고 끓여 먹던 시절이야. 그때 시 쓰는 최승자씨가 양파를 같이 먹으면 오래 살 거라고 하더군. 오래 살고 싶지 않아 양파는 안 넣었지만 풀은 넣어 먹었어. 들이 가르쳐준 거지. 그리고 술병이 늘 곁에 있었지요.”

    이미 중독 상태인 선생을 부인은 서울대 정신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소주병을 든 채 그녀를 따라가서 의사를 만났는데, 담당 의사가 학계의 권위자인 이부영 선생이었다. 그런 상태로는 진료를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 있다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검진을 한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등 뒤로 철커덕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데 정신병동에 입원한 것이었다. 이 시절 이야기는 ‘별까지 우리가’에 그렸다. 이 작품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우리나라 정신병동 시스템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고 봐요. 잘못하면 악용할 수 있는 거지. 한번 입원한 사람은 입원을 시킨 사람의 동의가 있어야 퇴원할 수 있는 거야. 고의적으로 누군가를 입원시킨다면 큰일날 일이지요.”

    그 시절에 받은 정신과 치료는 한마디로 ‘순응’을 배우는 것이었다. 일 더하기 일이 뭐냐고 물어보면 ‘그냥’이라고 대답을 해야지, 만일 뭔가 좀 불편한 행동을 하면 의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 나간다. 정신이 멀쩡한 선생은 금방 병원치료 시스템을 알게 되었다. 무조건 순응해야 하는구나, 여기는 그런 곳이구나 하는 깨달음.

    이걸 견뎌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내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퇴원하게 된다. 정신병원은 감옥보다 더 고독한 곳이다. 쇠창살이 가로막은 창문은 인간의 마음에 그렇게 창살을 치고, 뛰어내릴 수도 목을 매달 수도 없는 공간은 점점 생에 대한 절망감을 가져다준다. 다행히 효과가 있어 1년 동안은 기적적으로 술을 끊었다. 그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 후 다시 술을 입에 댔으나 소주 대신에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알코올릭에 대한 기억을 하면서 선생은 여러 번 강조했다.

    “알코올 속에는 무서운 세상이 있어요. 그 환상의 세계는 절대 보아서는 안 되는 세상입니다.”

    알코올 속에는 아마도 무서운 짐승이 사는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경험이 없는 필자는 어떤 사람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몸에 귀신이 든 것 같아 아주 큰 굿으로 그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다. ‘알코올은 무섭다’는 생각을 하면서 맥주 2병을 더 시켰다.

    술에 취해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필자도 ‘문학이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의 문학인생에 일점 후회는 없는 것일까. 선생이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에, 내 문학에 후회는 없어요. 오히려 보람이 있죠. 살면서 좀 굶으면 어떻고 부자면 어때요. 그저 살아가는 것이죠. 윤동주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은 맹자의 한 구절을 따온 것이죠. 즉 맹자를 베낀 것인데, 지금 생각하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해요. 문학을 하려면 말이죠.”

    存久自明

    윤후명 선생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을 하는 집안의 사위다. 즉 궁핍하지 않게 산다. 어떤 친구들은 윤후명이 부잣집으로 장가를 갔으니 이제 글을 못 쓸 것이라고 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번 작품집을 읽으면서 필자는 오히려 더 젊고 치열한 작가정신을 보았다. 그것은 오래될수록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도자기와 같다. 거기에는 더 깊어진 선생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심경을 선생은 자신의 산문에서 이렇게 인용했다.

    진짜와 가짜 도자기를 어떻게 구별하느냐는 선생의 질문에 시조시인 초정 김상옥 선생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골동을 사다놓고 오래도록 지켜보면 된다고. 그러면 결국 싫증이 나는 것과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싫증이 나는 것이 가짜일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아무리 지켜봐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이 진짜라고 하면서 이렇게 글을 이었다.

    “곰곰 곱씹고, 또 살아오면서 여러 몹쓸 일 겪기를 오래하다 보니, 그처럼 진리의 금언이 따로 없었다. ‘맹자’라고 기억되는데, 읽다가 채록해놓은 ‘존구자명(存久自明)’, 오래되면 스스로 밝아진다는 말! 선생의 말과 상관없이 나중에 내가 의지해온 이 한 마디와 일치하기도 해서, 나는 지금도 놀란다. 새벽잠이 없어진 지 오래인 요사이, 나는 선생의 말을 되살리며 어둠 속에 앉아 있곤 했다. 이제까지 나를 오래도록 지켜봐온 사람 혹 있다면 어떻게 여길 것인가. 내 작품은 또 어떨 것인가. 진짜로 올려질 것인가. 가짜로 내려질 것인가. 나 자신 나를 지켜보며 아무쪼록 싫증이 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 하며, 오래전 도자기를 가만히 지켜본다.”

    한 송이 꽃에서 우주를 본다

    그래서 선생은 문학을 삶의 도구로 보지 않는다. 문학을 도구로만 본다면 생활이 안락해지거나 나이가 들면 그 도구를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에게 문학은 도구가 아니라 생명이었다.

    “난 쓸 거요. 자기 생명을 밝히는 일인데 왜 그걸 안 쓰겠소. 안 쓴다면 죽은 거지. 써야지. 난 죽어도 써요.”

    죽어도 쓴다는 것은 생명엔 끝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 환경이 바뀌면 펜을 내려놓는 친구들도 있는데 그런 사람을 보면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젊은 날의 가난은 그 세월처럼 멀리 떠나고, 선생은 이제 돈 걱정은 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고급 승용차 정도는 타고 다닐 수 있는 처지지만, 삶의 모양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모를 일이고, 문학을 생명으로 여기기에 생활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생은 지금이라도 들에서 풀을 뜯어 라면에 넣어 먹으면서 살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 자신감은 문학이라는 강인한 생명력에서 비롯된다.

    그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모진 삶의 풍파를 겪었지만, “괜찮다”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열심히 살고, 남에게 신세 안 지고, 한눈 팔지 않고 문학에 매진하는 모습에 생명력이 넘쳤다. 글을 쓰는 것 자체에 행복감을 느끼면서 사는 인생. 그리나 서서히 세월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세월이 지나면 누구나 혼자 있게 되지요. 이제는 혼자 있는 게 좋아요.”

    그러나 선생은 혼자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혼자서 ‘아무도 모르게 숨겨둔 나의 다른 모습을 찾아’ 가거나 독도를 찾아가거나, 청계천 주변을 산책할 것이다. 그 기록이 이번 작품집이다. 선생은 어쩌면 독도와 같은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독도는 쉽게 닿을 수 없는 곳이다.

    소설 ‘새의 말을 듣다’에 나오듯이 거친 동해 한가운데 있는 이 작은 섬은 자신의 몸에 사람이 쉽게 오르지 못하게 한다. 결국 선생도 두 번이나 근처에서 머물다 돌아와야 했고, 그 경험이 녹아 만들어진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선생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체구에 다부진 몸도 독도를 닮았고, 온갖 소문이 선생의 곁에서 떠돌지만, 그것은 ‘그’라는 섬에 오르지 못하게 하려는 동해의 파도가 아닐까 싶었다.

    살아갈수록 어렵고 힘든 일이 사람을 안다는 것이다. 범인(凡人)들의 세계도 파헤치면 개미굴처럼 복잡하고 슬프다. 소설 속에서 독도를 떠나며 배에서 만난 알타이어를 연구하는 사람과의 대화. 그것은 새의 울음소리를 통해 전하고 싶은 선생의 언어인지 모른다. 흔히 뱃전을 따라오는 괭이갈매기는 그 울음소리가 괭이, 고양이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작중 알타이어 연구자의 말처럼,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고양이나 다른 동물의 소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주제넘습니다만, 제 귀에는 그 소리가 알타이어로 들린다는 겁니다.”

    소설가는 고양이나 개의 울음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울림이 있는, 뿌리가 있는 자신만의 언어로 울음소리를 낸다. 읽는 이에 따라 그 소리는 새의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호랑이의 포효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다. 선생은 이 소설에서 선생의 언어가 꿈꾸는 세계를 선명하게 밝혔다.

    “나는 일찍이 식물학자가 되었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내 삶의 짐이었고, 숙제였다. 때로는 그렇게 다시 살았으면도 싶었다. ‘한 송이 꽃에서 우주를 본다’는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은 잊지 못할 명구였다. 식물에 집착한 만큼 나는 샤먼들의 신목을 믿었다. 아니 모든 나무와 풀을 신목이자 신초로 여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한 송이 꽃에서 우주를 보고자 대화한다면 그 말이 무슨 말일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대화에는 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응당 한국어가 되어야 마땅하다. 꽃은 물론 우주도 한국어로 응답할 것이다. 당연한 사실을 나는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작품집 ‘새의 말을 듣다’는 혼자 있는 사람의 여행기다. 선생의 인생 자체에 비유할 가장 적절한 단어가 여행일 것이다. 선생은 떠도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혼자 남게 되는데, 그것이 이번 작품집에서는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처럼 가깝다. 작품집의 해설에서 평론가 오생근 선생은 선생의 글쓰기에 이런 설명을 한다.

    “윤후명다운 글쓰기란 시대적 변화 속에 황폐해진 내면적 공허를 증언하는 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소설의 형식을 통해, ‘고도성장’의 산업화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돌아보는 기억과 반성의 행위로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있고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인지를 끈질기게 질문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자기 방식대로 응답할 것이다.

    멋진 생일선물

    떠도는 영혼을 지닌 작가 윤후명
    원재훈

    1961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졸업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시 ‘공룡시대’로 등단

    시집 ‘딸기’, 소설 ‘바다와 커피’, 산문집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등


    인사동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맥주를 두어 병 더 마시고, 선생은 또 후배가 한다는 근처의 포장마차로, 나는 일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늙은 부모님과 처자식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늦은 저녁식사를 식구들과 하면서 내 생일에, 선생이 나에게 아주 큰 생일선물을 해주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생에 대한 예술가의 아름다운 육성이고, 소설로는 다 말할 수 없는, 이런 서툰 산문으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선생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선생은 근본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분 같다. 그래서 꽃이 좋은 게다. 다행히 인사동 거리에는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많이 지나다녀 선생에게 즐거움을 준 것 같아 그것도 기분이 좋았다.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싶다. 다음날, 나는 작업실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었다. 꽃이 피어날 것이다. 아름다운 여체의 상징인 꽃, 시들지 않는 예술가의 꿈인 꽃, 이처럼 식물적인 상상력이 세상의 물이 되고, 희망이 되고 생명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선생의 말대로 삶은 곳곳에서 모세혈관처럼 인연이 이어져 있어 선생을 만나게 되니 즐거울 뿐이다. 그리고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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