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제대로 살아야 사는 것”… 열사의 울림, 100년을 뛰어넘다

  • 손택균 동아일보 오피니언팀 기자 sohn@donga.com

    입력2007-09-10 2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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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년, 3인의 조선 청년이 네덜란드 헤이그를 향한 대장정에 올랐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라”는 고종의 밀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두 달 넘게 걸려 목적지에 닿은 이들은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한 발짝도 내디디지 못했다. 한 청년은 울분을 토하다 이국땅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고, 남은 이들은 그의 유해를 수습하며 비탄에 잠겼으리라. 꼭 100년 전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가 의연히 걸어간 길을 따라가봤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

    시베리아에선 공간도 시간도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숲일까. 바로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자작나무 물결이 지평선 끝까지 촘촘히 메워진다. 차창 밖으로 드문드문 스쳐 지나는 통나무집 마을은 목초의 바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솟아오른 섬이다.

    어디서부터 뿌린 밀알일까. 밭의 경계를 어떤 방법으로 구분하고 있을지, 파종과 수확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밤 11시가 가깝도록 희뿌연 빛을 거두지 않다가 겨우 저문 태양은 이른 새벽부터 다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어스름 하늘을 밝힌다.

    거리와 시간을 짐작하는 일이 부질없는 길을 달리기 때문일까. 열차는 마냥 여유롭다. 지구 전체 둘레(4만77km)의 4분의 1에 가까운 먼 길을 고작 시속 70~80km로 느릿느릿 달린다. 샛길 없는 철로에 한번 올라탄 이상, 끝 닿을 때까지는 끝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

    2007년 7월14일은 이준(李儁)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한 지 100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동아일보’는 기독교대한감리회와 공동 주최로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발자취를 좇는 청년 답사단을 파견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b>시베리아 횡단철도(TSR) 지도</b><br>가는 실선 : TSR <br>점선 : 나머지 아시아횡단철도(TAR) 구간 <br>굵은 실선 : 답사단이 탑승한 구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기점으로 대륙을 횡단해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에 이르는 21일간의 일정. 각 교회의 추천을 받은 감리회 청년 50명(남자 30명, 여자 20명)과 인솔 목사들, 동아일보 취재진 3명과 TV 다큐멘터리 제작진 2명, 협찬사 직원 10명 해서 모두 65명이 참가했다.



    6월27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답사단은 이틀 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Trans-Siberian Railroad)에 올랐다. 이상설(李相卨)과 이준의 100년 전 기차여정을 되짚는 길의 시작이다. 두 헤이그 특사는 고종 황제의 밀지(密旨)를 가슴에 품고 1907년 5월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보름간의 장도(長途)에 올랐다.

    ‘헤이그 특사’ 하면 대개는 분사(憤死)한 이준 열사만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설은 이준 못지않게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당시 37세의 이상설이 정사(正使), 48세의 이준이 부사(副使)였다. 답사단 인솔자인 협성대 역사신학과 서영석 교수는 “드라마틱하게 두드러지는 특정 사건에만 초점을 맞춘 역사 교육이 여러 중요한 인물의 업적을 간과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상설은 24세 때 갑오문과에 급제해 불과 2년 뒤 성균관장에 임명된 수재였다. 항일운동에 뛰어든 것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대한 철회운동을 주도하면서부터.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에는 고종 황제에게 “이래도 나라가 망하고 저래도 나라가 망할 바에야 죽음으로써 조약 인준을 거부해 선대가 남긴 책임을 완수하는 게 낫다”고 뼈아픈 상소를 올렸다.

    특사 활동 중 순국한 이준을 헤이그 땅에 묻은 뒤 이상설은 유럽을 순회하며 외교활동을 벌이다가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다.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 의병을 규합한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 그것이었다. 1914년에는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 통령을 맡았다.

    1916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을 얻은 그는 이듬해 3월 니콜리스크에서 사망한다. 향년 47세. 헤이그 특사에 대한 일제의 궐석(闕席)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 10년 만이었다. 유언은 이러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魂)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100년 전 시베리아 철길을 되밟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헤이그 시내의 이준열사기념관. 바겐 슈트라트124번지에 있는 드 용(De Jong)호텔을 한국인이 인수해 기념관으로 조성했다.

    2007년 6월29일 오후 9시35분. 서울에는 ‘서울역’이 있지만,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역’이 없다. 러시아 각 도시의 철도역에는 구간별 종착도시 이름이 붙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행 기차를 타려면 ‘모스크바 역’으로 가면 된다.

    온통 짙은 잿빛뿐인 역사(驛舍) 초입에는 거무튀튀한 ‘TSR 시발점 표지비’가 서 있다. 러시아를 상징하는 쌍두(雙頭) 독수리 조형물 아래 모스크바까지의 철도 길이 ‘9288(km)’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경부선(444.5km)의 20배가 넘는 거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에 올라 중간 기착 없이 모스크바에 닿으려면 꼬박 6박7일이 걸린다.

    시베리아는 전세계 목재 생산량의 25%가 나오는 땅이다. 러시아 에너지 자원의 80%가 이 땅 밑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잠자는 땅’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시부르’의 영어식 발음이 ‘시베리아’. 동서 최장 7000km, 남북 최장 3500km에 달한다.

    1891년 착공된 TSR은 1916년 아무르 강 철교를 끝으로 완공됐다. 일찌감치 전철화와 복선화를 마쳐 목재 석재 등을 운반하는 러시아 물류의 ‘핏줄’이다. 답사단의 첫 TSR 체험은 일단 하바로프스크까지의 12시간 25분 하룻밤 여정이었다. ‘혼자 탑승한 동양인 승객은 러시아 열차강도가 노리는 표적이라더라, 돈만 뺏는 게 아니라 운 나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칼을 맞을 수도 있다더라…’. 워낙 흉한 얘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열차를 기다리는 일행의 얼굴에 적잖은 긴장이 비쳤다.

    허름한 회녹색 열차는 수십년 전 한국의 완행열차를 연상시켰다. 폭 85cm 정도의 비좁은 복도 한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객실이 지저분하기 그지없다. 객실 출입구를 중심으로 양쪽 벽에 침대 두 개 씩을 아래위로 나란히 붙여놓은 4인실 침대칸. 비치된 담요와 매트리스를 펴자 희뿌연 먼지가 훅 날아올라 객실을 가득 채웠다. 객실 폭은 180cm, 침대 길이는 190cm, 천장 높이는 2.2m. 거구의 러시아인이 잔뜩 웅크려 누운 자세로 몇 날 몇 밤을 견뎌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화장실 사용도 고역이었다. 세면대 수도는 물 나오는 구멍을 위로 밀어 올려야 물이 나오는 괴상한 얼개다. 한 손으로 꼭지 끝을 잡고 위로 힘주어 누른 채 손가락 사이로 졸졸 새어나오는 물을 다른 한 손으로 힘겹게 받아 세수나 양치를 해야 한다. 하룻밤 세면과 용변을 포기하는 이가 대부분. 배설물은 기차 바닥 밑으로 그냥 흘려버리기 때문에 중간역사에 정차하기 직전과 직후에는 화장실 문이 잠긴다.

    하지만 ‘12시간 전초전’을 거치고 나서 7월1일 오후 5시에 재개된 하바로프스크-이르쿠츠크 2박3일 강행군에서는 답사단 전원이 만만찮은 생활력을 과시했다. 한 차례 낭패를 겪으며 터득한 노하우로 머리 감고 면도까지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몇 시간에 한 번씩 나타나는 간이역에서 정차 시간은 짧게는 2분, 길게는 15분 정도. 허름한 매점에서 기름 좔좔 흐르는 빵과 소시지, 탄산음료, 보드카, 떠먹는 요구르트 등을 살 수 있다. 매점 밖에서는 주르르 늘어선 좌판 상인이 승객을 기다린다. 식당차 음식값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이들이 파는 식은 닭튀김, 삶은 감자, 멜메니(러시아식 만두), 블린(크로켓), 생오이 등이 요긴한 끼닛거리가 됐다.

    목표지인 이르쿠츠크에 거의 와 닿을 즈음 답사단은 ‘목초의 바다’ 한가운데서 ‘민물의 바다’ 바이칼 호수를 만났다. 열차는 마치 고단한 승객들을 배려한 듯 정확히 해질 무렵에 호숫가 레일 위를 고즈넉이 달려줬다.

    오후 10시15분. ‘아름답다’ 또는 ‘장엄하다’는 식의 뻔한 형용사를 붙이기 미안한, 20여 분 동안의 고요한 일몰. 부족한 언어를 짜내 억지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광경이 답사단 전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한 면적의 3분의 1(3만1500㎢)에 이르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 수심 1741k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라는 여행안내 책자의 정보는 수면에 비친 진홍빛 구름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졌다.

    100년 전 이상설과 이준도 이와 똑같은 민물바다 노을빛을 하염없이 바라봤을 것이다. 살아생전 언제 다시 볼지 모를 풍경을 디지털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 없는 100년 뒤의 답사단과 달리, 살아생전 다시는 나라 잃은 처지로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처연한 마음으로.

    이범진과 이위종 父子

    열차는 7월4일 오전 2시에 이르쿠츠크 역에 닿았다. 하바로프스크와의 시차 2시간을 더해 꼬박 59시간을 열차 안에서 보낸 셈이다. 하지만 답사단이 도합 나흘간 힘겹게 지나온 철길은 헤이그 특사들이 100년 전에 열차로 달린 거리의 고작 3분의 1에 불과했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는 비행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는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했다. 세 번째라 익숙해진 답사단원들은 조금의 어려움도 없이 열차 안에서 다시 하룻밤을 보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3인의 밀사가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내린 헤이그역.

    새벽녘에 닿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하늘은 아름답지만 변덕스러웠다. 햇살이 쨍쨍하다 싶더니 금세 두꺼운 구름이 모여들고, 비가 쏟아진다 싶더니 다시 청명한 푸른빛이 구름을 젖히고 나섰다.

    망국(亡國) 공사관을 지킨 부자(父子)의 신뢰를 외면한, 100년 전 러시아를 연상시키는 날씨. 답사단은 이곳에서 구한말 충신 이범진(李範晉)과 그의 아들 해외파 특사 이위종(李瑋鍾)의 자취에 닿았다. 이상설과 이준은 1907년 6월4일 보름간의 철도길 끝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세 번째 특사 이위종과 합류했다.

    이범진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주도한 친러파의 좌장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거쳐 1900년 러시아 공사로 부임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뒤에도 일제의 소환 명령을 거부한 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항일외교활동을 계속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성장한 둘째아들 이위종은 자연히 영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당시 20세로 다른 두 특사보다 한참 젊은 이위종의 역할은 통역 겸 대변인. 그는 헤이그 만국기자협회에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성토하는 불어 연설로 청중을 감동시키는 등 특사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1908년에는 부친의 지시에 따라 군자금을 갖고 연해주로 가서 안중근 등과 함께 항일의병단체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한 분노와 절망감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이듬해 1월13일 호텔방에서 목을 매단 채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쏴 자결한다. 부친 사후 이위종의 말년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1912년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소비에트 붉은 군대에서 기관총부대장으로 복무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7월7일 오후. 답사단은 이범진·이위종 부자의 한(恨)이 서린 구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을 찾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텔랴 거리 5번지의 임대 아파트. 부스스한 머리로 현관 앞에서 담배를 피워 물고 있던 러시아 여인이 황급히 문을 잠그고 건물 안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칠이 다 벗겨져 흉물스럽게 드러난 벽돌 내벽의 부스러진 잔해가 건물 뒤 주차장 한쪽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부자의 고된 삶을 증명하는 것이라고는 현관 옆에 붙여놓은 가로 80cm 세로 1m의 대리석 안내판뿐.

    ‘이 건물에서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이범진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 공사가 집무했습니다.’

    태극기가 걸려 있었을 법한 현판 옆 깃대에는 시커먼 세월의 녹과 때만 켜켜이 쌓여 있었다.

    헤이그에 퍼진 특사의 울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6월27일 서울을 출발, 밀사들의 여정을 따라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18일간의 여정을 마친 순례단이 7월14일 새벽 최종 목적지인 네덜란드 헤이그역에 도착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난 답사단은 독일을 거쳐 7월13일 비행기 편으로 네덜란드에 입국했다. 예고 없는 소나기. 매섭고 싸늘한 서풍. 신문 일기예보를 보면 이 나라의 괴팍한 날씨를 실감할 수 있다. 외국인을 위한 영자신문 ‘NIS’가 예보한 7월초 어느 날 헤이그의 날씨는 ‘계속 바뀜(changeable)’이었다.

    100년 전 6월25일 헤이그 HS역에 도착한 세 특사가 올려다본 하늘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 특사는 외교적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 황제를 알현하려 했지만 냉랭한 거절의 답변만 들었다. HS역은 내부만 현대식으로 개조됐을 뿐, 외형은 100년 전 그대로였다. 세 특사의 심정처럼 우울한 하늘빛을 띤 무채색 외장 벽돌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곳은 HS역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상원 의사당 비넨호프(Binnenhof). 특사단은 일본 등 참가국들의 반대로 끝내 이곳에 입장할 수 없었다. 격분해 쓰러진 이준 열사는 7월14일 4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사인(死因)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북한 조선출판물수출입사가 2004년 발간한 ‘헤이그에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서의 이준 열사 할복자살을 묘사하고 있다. 일본에 의한 독살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울분 속에 식음을 전폐하다가 분사(憤死)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정도언 교수는 “극도의 좌절감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 기간 지속되면 심장 등 신체기관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길고 힘든 여정으로 몸 상태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므로 그것이 사망 원인이 됐을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특사들의 숙소였던 헤이그 ‘드 용(De Jong)’ 호텔은 1995년 교민에 의해 기념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7월12일 오후, 세 특사의 후손인 이준 열사의 외손녀 유성천(80)씨, 이상설의 조카 이동휘씨, 이범진의 증손자 이원갑(67)씨가 국가보훈처의 초청으로 특사 파견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헤이그를 찾았다.

    100년 전 조상들이 말 못할 시련을 겪었을 숙소를 돌아보는 후손들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특사 이위종의 형 이기종의 손자 이원갑씨는 준비해간 붉은 나팔꽃 화분을 창가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비넨호프 궁전. 현재는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0년 한국이 러시아와 수교하기 전에는 작은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얘기를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살았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막상 머물러 계시던 흔적을 마주하니 그저 눈물만 나네요.”

    7월14일에는 이준 열사를 기리는 봉헌교회가 문을 열었다. 오후 3시 헤이그 북동쪽 인근 레이셴담 시 프린센호프 가(街) 8번지. 기독교대한감리회는 2006년 7월부터 한국 각지에서 10억원을 모금해 이 교회를 사들였다.

    회백색 벽돌 내력벽 위에 흑갈색 목조 지붕을 단정히 얽어 올린 4m 높이의 단층 건물. 정갈한 구조가 독일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제대로 살아야 사는 것”이라 했던 이준 열사의 간명한 인생관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인 건물이다. 뒤뜰에는 푸른색 프리지어가 만발했다.

    동아일보 김학준 사장은 기념사에서 “이준 열사는 헤이그로 떠나기 전 서울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기도를 받았다”며 “황제가 부여한 조국 수호의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굳건한 종교적 신념이 특사 임무 수행에 커다란 힘이 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B. J. 브룬스 레이셴담 시장은 “헤이그 특사의 행적은 한국에만 의미 있는 역사가 아니다”라며 “네덜란드뿐 아니라 평화를 지켜야 할 세계의 모든 젊은이가 마음 깊이 새겨야 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기념연주에 나선 첼리스트 정명화씨가 묵직한 활로 현을 타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선율이 교회를 가득 채웠다. 고된 생을 마친 열사의 영혼이 뒤뜰 프리지어 위에서 비로소 고이 쉴 곳을 찾은 듯했다.

    열사를 기리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헤이그까지, 만국평화회의 특사들의 자취를 좇다

    이상설의 조카 이동휘, 이범진의 증손자 이원갑, 이준의 외손녀 유성천씨(왼쪽부터 시계 방향)가 7월12일 이준열사기념관을 찾았다.

    봉헌식을 마친 답사단은 오후 7시 이준 열사 기념묘역을 찾았다. 헤이그 서부 외곽의 뉘 아이큰다우는(Nieuw Eykenduynen) 시립 공동묘지. 1만8000여 시민이 묻힌 묘비들 사이 한 곳에 이준 열사의 유해가 56년간 머물렀음을 알리는 청동 흉상과 추념비가 있다.

    50명의 학생은 한 명도 빠짐없이 준비한 국화를 한 송이씩 들고 차례로 흉상 앞에 헌화했다. 긴 여정의 끝. 열사 흉상 앞에 선 학생들은 저녁 햇살 아래 조용히 눈을 감고 엄숙하게 각자의 기도를 올렸다. 말없는 그들의 표정에서 간단치 않은 감흥이 읽혔다.

    다음날 오후 7시, 네덜란드 헤이그 시내 로열극장에서는 이준 열사를 기리는 창작무용 ‘열사를 기리며’가 초연됐다. 현대적인 요소의 한국 창작무용은 관객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선사했다. 시련을 극복하고 희망을 찾은 질곡의 역사가 무용수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스며 있었다.

    한국에서 2세 때 네덜란드로 입양돼 의대에 다니고 있는 곽아름(22)씨는 “이곳에서 한국 문화공연을 볼 기회는 5년에 한 번 정도”라며 “한국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모국의 무용 공연을 보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청년 답사단도 700여 객석을 가득 메운 네덜란드 사람들과 함께 기립박수를 보내며 여정의 감동과 교훈을 정리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고된 경험을 거쳐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의 자취를 좇아오면서 청년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훌쩍 성장해 있었다.

    아주 작은 마음속 변화. 막연하던 조상의 역사가 남의 것이 아님을 확인한 시간. 그것이 답사단의 21일 여정이 이뤄낸 가장 큰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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