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청양 소년 살해사건 미스터리

살인자는 복역 중…살아 돌아온 피살자는 유령인가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7-10-04 17: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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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양 소년 살해사건 미스터리

    박창수 소년(사진) 살해사건의 초기 소식이 실린 ‘매일신보’ 1930년 11월29일자 기사(아래)와 사건의 미스터리를 추적한 ‘별건곤’ 1931년 1월호 기사.

    “아이고 창수야… 금쪽같은 내 자식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니… 창수야….”

    박창수의 어머니는 시신을 확인하고 울부짖다가 넋을 놓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반쯤은 부패한 시신이었지만 어머니는 한눈에 피붙이를 알아보았다. 가난에 쪼들려 따뜻한 밥 한 공기 제대로 못해 먹인 자식이었다. 이제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행동을 했을 리 없고, 자식을 죽인다고 위협해 빼앗아 갈 재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배운 것은 없지만 착하고 부지런한 창수가 왜 참혹하게 살해당했는지 어머니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고 내 아들 불쌍해서 어쩌누. 부모 잘못 만나 호강 한번 못해보고….”

    곡소리로 가득한 살풍경 속에서 수사책임자인 청양경찰서 최 사법주임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피살자의 신원이 확인된 이상 용의자의 범행을 입증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최 사법주임은 시체 안치실 바닥에 쓰러져 흐느껴 우는 여인을 일으켜 세우며 다시 물었다.

    “창수 어머니, 그만 울고 시신을 다시 한 번 똑바로 봐요. 박창수가 분명해요?”



    “아이고… 세상에 제 자식을 못 알아볼 어미가 어디 있단 말이오. 옷은 한 달 전 아들이 집 나갈 때 입고 나간 게 아니지만, 틀림없는 창수요.”

    피살자가 박창수라면 사건은 이미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낱 주막 머슴에 불과한 박창수를 살해할 동기를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뿐이고, 그는 이미 경찰에 체포돼 신문을 받고 있었다.

    청양 박석산에서 소년의 변사체가 발견된 것은 사흘 전이었다. 1930년 4월29일, 청양군 비봉면 용천리에 사는 주부 이씨는 마을 뒷산에 나물을 캐러 갔다가 산허리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놀란 이씨는 “산중에 시체가 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마을로 뛰어내려왔다.

    용천리는 살인사건은커녕 사소한 도난사건조차 흔치 않은 순박한 시골마을이었다. 순식간에 마을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신고를 접수한 비봉파출소 김 순사는 청양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지원을 요청하고, 최초 발견자 이씨를 앞세워 사건 현장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산상의 소년 변사체

    열대여섯 살 남짓 돼 보이는 소년의 시체였다. 온몸에 멍자국이 선명해 자살하거나 사고사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시체 주위에서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지게와 살인에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건이 발견됐다. 시체를 청양읍내 병원으로 옮겨 부검한 결과,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이었고 사망시간은 72시간 이내였다. 범인은 소년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후 수건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이었다.

    시체가 발견된 박석산 주변 비봉면의 인구는 7000여 명. 청양군 인구를 다 합쳐봐야 7만여 명에 불과했다.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사나흘 안에 사라진 10대 중반 소년을 찾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틀 동안의 탐문 결과 비봉면 일대에서 지난 일주일 동안 사라진 소년은 박창수 한 명뿐이었다.

    4월26일 오전, 박창수는 주막 여주인 고옥단과 머슴 조기준에게 두 차례에 걸쳐 심한 매질을 당하고 주막을 나간 후 소식이 끊겼다. 최 사법주임은 일단 고옥단과 조기준을 체포해 청양경찰서에 유치하고, 보령군 청소면 박창수의 집으로 수사대원을 보내 어머니를 데려오게 했다.

    피살자의 신원이 확인된 뒤에도 고옥단은 한사코 범행을 부인했지만, 조기준은 이틀 만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조기준은 고옥단의 지시로 박창수를 살해했으며 시체 주위에서 발견된 수건도 자기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조기준의 자백으로 범행이 백일하에 드러난 후에야 고옥단은 마지못해 범행을 시인했다. 경찰이 설명한 범행의 전모는 다음과 같다.

    청양 소년 살해사건 미스터리

    재심공판을 받으러 경성복심법원에 출두하는 고옥단. ‘매일신보’ 1931년 7월22일자에 실린 사진이다.

    1929년 9월,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매산리에 사는 한백원은 스무 살 난 미모의 여인 고옥단을 첩으로 들였다. 본처의 투기가 심해 한집에 살지 못하고 이웃 마을인 비봉면 용천리에 주막을 열어 딴살림을 차렸다. 한백원은 본가와 용천리 주막을 오가면서 지내고, 고옥단은 서른다섯 살 된 머슴 조기준과 주막을 운영했다. 미모의 고옥단을 보러 오는 단골손님이 늘어 주막은 날로 번창했다. 한백원은 평상시 몸가짐이 조신하지 않은 고옥단이 주막 손님과 무슨 일을 꾸밀지 늘 불안해했다.

    1930년 3월, 박창수는 집을 나와 거지무리에 들어갔다. 가난한 가족이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입 하나라도 줄여야 했다. 거지무리에 섞여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어느덧 용천리까지 흘러 들어왔다. 때마침 일손이 필요했던 고옥단은 주막에 구걸하러 온 박창수를 머슴으로 들였다. 박창수는 눈치가 없고 아둔한 게 흠이었지만, 힘이 세고 걸음이 빨라 심부름꾼으로는 그럭저럭 쓸 만했다.

    용서받지 못할 죄

    하루는 고옥단이 박창수를 데리고 외상 술값을 받으러 갔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기문의 집에 들렀을 때 이기문은 엉뚱한 말로 수작을 걸었다.

    “이봐 옥단이, 첩살이와 술장사로 청춘을 썩힐 게 아니라 나랑 같이 멀리 가서 호강하며 살지 않을 테야? 내가 별볼 일 없어 보여도 강경에 땅마지기도 제법 있다고. 오늘 밤이라도 함께 강경으로 도망가 살림을 차리세.”

    “아따, 숨겨놓은 땅마지기나 있는 양반이 외상 술값은 왜 안 갚아요? 도망을 가건 강경에서 살림을 차리건 술값을 갚고 나면 한번 생각해보리다.”

    “아니 이 사람 야멸차기는…. 지금은 먹고 죽으려 해도 돈이 없네. 내 조만간 주막에 들러 외상 술값도 갚고, 살림 차릴 계획도 의논할 테니 그만 돌아가요.”

    “글쎄 외상 술값 때문에 멀쩡한 주막 문 닫게 생겼어요. 하여간 어서 갚아요.”

    민망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박창수는 먼 산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이기문의 집에서 허탕을 친 고옥단은 박창수를 데리고 외상 술값이 밀린 다른 손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1930년 4월26일 아침, 한백원이 고옥단을 불러 다짜고짜 호통을 쳤다.

    “네 집에 심부름하는 박창수의 말을 들은즉 네가 이기문이라는 자와 일찍이 정교관계를 맺고 그와 한 가지로 머지않아 강경 방면으로 달아날 약속을 했다니 그런 불량한 년의 버릇이 있느냐?”

    꾸지람을 들은 고옥단은 자기의 비밀을 남편에게 밀고한 박창수의 소행이 괘씸해 즉시 박창수를 불러다 놓고 전후 두 차례나 매질을 했다. 그러고도 부족해 조기준과 공모해 박창수를 용천리 박석산 위로 끌고 가서 죽이기로 작정했다. (‘조선초유의 대의혹, 박석산상의 살인사건’, ‘별건곤’ 1931년 1월호)


    그날 오후 7시, 고옥단은 박창수에게 박석산으로 나물을 캐러 가자고 했다. 해는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박창수는 오밤중에 무슨 나물을 캐느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꾸물거리다간 또다시 매질을 당할 것 같아 지게를 지고 나섰다. 박창수가 나물 캐러 가면서 왜 지게를 지고 나섰는지는 재판 과정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바구니가 없어서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으로 지게라도 지고 나섰는지도 모를 일이다.

    산중턱에 이르자 날은 이미 저물었다. 고옥단과 박창수는 어둠을 헤치고 나물을 캤다. 주위가 너무 어두워 나물인지 풀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얼마쯤 지나자 조기준이 불쑥 나타났다. 묵묵히 나물을 캐던 고옥단은 낯빛을 바꾸고 박창수를 꾸짖었다.

    “동냥질 다니던 녀석을 불쌍해서 거둬줬더니 뒤통수를 쳐!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뭐 어째, 내가 이기문과 정교를 맺고 강경으로 도망친다고?”

    고옥단은 두 차례 매질한 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박창수를 눕혀놓고 사정없이 짓밟았다. 박창수는 비명을 지르고 “한번만 용서해달라” “제발 살려달라”며 울부짖었지만 짙은 어둠이 깔린 산중에서 그를 구해줄 사람이 나타날 리 없었다. 고옥단은 박창수를 원 없이 두들겨 팬 후 조기준에게 신호를 보냈다. 조기준은 준비해온 수건을 박창수의 목에 두른 후 힘껏 잡아당겼다. 박창수는 수건을 붙잡고 몸을 뒤척이며 맹렬히 저항했지만 끝내 숨이 끊어졌다.

    박창수를 죽이기까지는 계획대로 진행됐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죽일 계획은 세웠으나 죽인 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두 사람은 맥없이 널브러진 박창수의 시체를 흙과 낙엽으로 대충 가린 후 허둥지둥 살인현장을 떠났다. 당황한 나머지 지게와 수건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경찰은 고옥단과 조기준을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한 후 박창수의 시신을 어머니에게 인계했다. 어머니는 반쯤 부패된 아들 시신을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정성스럽게 매장했다. 이제 박창수는 의학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더 이상 산 사람이 아니었다.

    청양 소년 살해사건 미스터리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별건곤’ 1931년 8월호 기사. 사진 속 인물이 용의자 고옥단이다.

    고옥단과 조기준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판에 임했다. 조기준은 검찰 신문과 공판에서 경찰 신문 때와 마찬가지로 범죄사실을 순순히 시인했지만, 고옥단은 경찰 신문 때 범행을 자백했음에도 검찰 신문과 공판에서는 범죄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공주지방법원 하세베(長谷部) 재판장은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조기준에게 징역 10년, 부인으로 일관하면서 과오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고옥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조기준은 항소를 포기하고 복역했지만 고옥단은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다.

    1930년 9월1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수에히로(末廣) 재판장은 고옥단에게 원심과 같은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고옥단은 재판을 더 해봐야 무죄가 선고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상고를 포기했다. 이로써 1930년 4월26일, 청양 박석산에서 발생한 소년 살해사건은 다섯 달 만에 종결됐다.

    박창수의 환생

    “귀신이다! 유령이 나타났다!”

    1930년 10월18일, 낮잠을 자던 박창수의 어머니는 가위눌린 듯 비명을 질렀다. 보름 전 추석 전후로 꿈자리에 죽은 아들이 자주 나타나더니 그날따라 아들 모습이 유난히 또렷이 보였다. 사무치게 그리운 아들이건만, 꿈자리에서 매일같이 만나다 보니 이제는 자식이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저승 가서 편히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엄니, 저 창수구먼요.”

    “불쌍한 내 아들 창수야, 죽은 지 반 년이나 지났으니 그만 저승으로 떠나려무나. 어미 걱정일랑 말구, 응?”

    “엄니, 죽긴 누가 죽어유. 저 안 죽었어유.”

    어머니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이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소년은 귀신이 아니라 분명 자신의 아들 창수였다.

    놀라고 놀란 박창수의 어머니는 반신반의로 멀건이 자기 아들 얼굴을 바라보며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박창수도 놀라고 소문을 듣고 달려온 동네 사람들도 놀랐다. 박창수는 자신이 살해되었다는 기괴한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놀랐고, 동네 사람들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박창수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에 놀랐다. (‘조선초유의 대의혹, 박석산상의 살인사건’, ‘별건곤’ 1931년 1월호)


    4월26일 오전, 고옥단과 조기준에게 혹독한 매질을 당한 박창수는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박창수가 머슴으로 들어온 직후 한백원은 박창수를 은밀히 불러놓고 고옥단이 수상한 행동을 하면 즉시 알려달라고 당부하면서 제보자가 누구인지는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박창수는 한백원의 약속을 믿고 몇 차례 고옥단의 비행을 밀고했다.

    고옥단과 이기문의 대화를 엿들은 후에도 박창수는 늘 해오던 대로 한백원에게 일러주었다. 엿듣고 싶어 엿들은 것도 아니고 없는 사실을 꾸며낸 것도 아닌데 바깥주인이 시킨 일을 했다고 안주인은 애꿎은 머슴에게 매질을 해댔다. 박창수는 나이 지긋한 바깥주인이 ‘밀고해도 후환이 없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분했고, 자기보다 고작 다섯 살 많은 안주인이 남편에게 꾸지람 한번 들었다고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한 것도 억울했다. 박창수는 하루 세 끼 밥 먹자고 치사한 상전들 밑에서 더는 일하고 싶지 않았다.

    박창수는 주인에게 떠난다는 말도 없이 주막을 나와 정처 없이 유랑의 길을 떠났다. 그날 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는 격으로 박석산에서 소년이 살해당했다. 박창수는 공주 마곡리를 거쳐 갑사로 들어갔다. 한 달간 갑사에서 절밥을 얻어먹은 후 또다시 길을 떠나 거지무리와 어울렸다. 한동안 공주읍내를 떠돌다가 동냥하러 들른 노원태의 집에 하인으로 눌러앉았다. 박창수는 그해 여름을 노원태의 집에서 보냈다. 청양에서 자기가 살해당했다는 소동이 벌어지고 어머니가 자식을 잃었다고 울부짖다 실신까지 한 것을 머슴살이하는 박창수가 알 도리가 없었다.

    여름이 가고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었다. 10월6일, 그해 한가위는 여러 사람에게 색다른 명절이었다. 고옥단과 조기준에겐 각각 서대문형무소와 공주형무소에서 보낸 첫 번째 명절이었고, 박창수의 어머니에겐 아들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고 처음 맞는 명절이었으며, 박창수에겐 집을 나와서 처음 맞는 명절이었다. 죽은 박창수가 살아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고옥단은 13번, 조기준은 8번의 추석을 차가운 벽돌집에서 보내야 할 운명이었다. 타향에서 추석을 보낸 후 박창수는 집 생각이 간절해 노원태의 집을 나와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반 년 만에 귀가한 아들을 보고 어머니가 외친 첫마디가 “귀신이다!”였던 것이다.

    법조계의 대소동

    살인자는 형이 확정돼 복역 중인데 정작 살해당한 사람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 기괴한 상황. 수사당국과 재판당국은 대혼란에 휩싸였다. 수사와 재판에 관련된 여러 인물 중 누군가는 잘못을 저질렀는데, 누구 하나 잘못을 시인하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박창수가 살아 있는 게 확실한 이상 박창수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고옥단과 조기준은 무죄였다. 형사소송 절차상 두 사람이 석방되려면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아야 했는데, 공주지방법원 검사국 마쓰모토(松本) 검사는 사건 수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재심 청구를 차일피일 미뤘다. 왜 서둘러 재심을 청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마쓰모토 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창수 소년이 살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박창수 소년이 살해당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남은 문제는 고옥단과 조기준이 박석산에서 소년을 죽이기는 했으나 박창수가 아닌지, 혹은 전혀 딴 범인이 죽인 것을 고옥단과 조기준이 혐의를 뒤집어쓴 것인지 가려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조기준과 고옥단이 박석산에서 소년을 상해했다는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지금 같아서는 물론 재심을 요구할 형편입니다만 박석산에서 죽은 소년의 신원이 판명되지 않은 것은 이 사건의 해결을 더디게 합니다. 과연 누가 박석산에서 소년을 죽였는가, 나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규명하겠습니다.”

    (‘오살? 오인?’, ‘매일신보’ 1930년 11월28일자)


    공주지방법원 하세베 재판장은 오심(誤審)을 인정하지만, 검사국에서 재심을 요구하지 않는 한 자기로서는 손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박창수 살인사건을 심리하여 판결을 내린 것은 사실입니다. 피해자인 박창수가 지금 살아 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공판에 착오가 있다고 할지라도 검사국에서 재심을 요구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재심을 하는 경우에는 최종의 심리를 받은 법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조기준은 공주지방법원에서 할 것이나 고옥단은 경성복심법원에서 할 것입니다. 하여튼 당사자인 우리로도 의외의 결과를 낸 사건이라고 봅니다. 재심의 결과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 세간의 의혹을 일소할지 모르겠습니다.” (‘의외 사실이 발로될 듯’, ‘매일신보’ 1930년 11월28일자)


    고옥단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경성복심법원 수에히로 재판장은, 결과적으로 오심을 한 것이지만 재판 절차는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경무국에서 살인사건 피해자가 살아 있다고 발표했다고 하나 재판소에는 어떠한 통지도 없습니다. 공판시에는 피고인이 범행을 자백한 경찰조서와 살해한 것이 사실이라는 감정서까지 제시되었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도된 사건의 내용을 보면 가해자가 전혀 범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살해는 했으나 피해자가 오인되었다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하여간 우리는 재판을 한 것뿐이니까 지금 같아서는 어떠한 의견도 없습니다.” (‘재판을 하였을 뿐 의견이란 없다’, ‘매일신보’ 1930년 11월26일자)


    범죄 수사의 최고책임자 조선총독부 와타나베(渡邊) 법무과장은 오심의 책임을 은근슬쩍 부검의와 박창수의 부모에게 떠넘겼다.

    “재심의 내용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번 사건은 일찍이 조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괴사건입니다. 재심의 이유가 어디 있는지도 잘 알 수 없으나 의사의 감정이나 피해자 양친의 감정이 박창수가 틀림없다고 하는 때에는 사법관으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산중에서 권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인 사건과 같은 것은 더러 오살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까 이번 사건에 대해 한 마디로 사법관만 그르다고 할 수가 없는 줄 압니다. 또 산상의 변사체가 박창수는 아니더라도 피의자들의 소행임이 밝혀지면 역시 살인죄를 구성할 것임은 물론입니다.” (‘오살한 것인가 오인한것인가’, ‘매일신보’1930년 11월26일자)


    박창수는 살아있지만, 4월26일 박석산에서 누군가는 살해당했다. 수사당국은 밤잠을 잊고 피살자의 신원파악에 나섰고, 재판당국은 고옥단과 조기준의 재심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

    청양 소년 살해사건 미스터리

    조기준의 재심공판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1년 7월3일자 기사.

    단순한 살인사건이 전대미문의 괴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사건 발생 직후 피살자의 신원을 오인한 데서 비롯됐다. 경찰이나 부검의가 엉뚱한 소년을 박창수라고 오인할 수 있다 하더라도, 어머니가 자식을 몰라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고 아들이 죽어서 이득을 본 것이 없었다는 점에서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어머니가 자식 얼굴을 못 알아본 것은 몇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첫째, 죽은 지 이미 일주일이나 지난 시신을 확인했으므로 시신의 부패가 심해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박창수의 시신인지 확인해달라는 경찰의 질문이 선입관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아들이 죽은 것 같다는 경찰의 말에 충격을 받은 데다 눈물이 앞을 가려 시신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창수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틀림없다”고 확인하면서 “옷은 내 아들이 입고 나간 옷과 다르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아들이 틀림없다는 말은 철석같이 믿으면서도 정작 옷이 다르다는 말은 흘려들었다. 경찰이 피살자의 의복을 좀더 정밀히 감정했거나 최소한 증거물로 보관만 했더라도 사건이 미궁으로 빠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찰이 피살자의 의복을 시신과 함께 유족에게 넘겨버린 바람에, 피살자의 신원이 박창수가 아니라고 밝혀진 후에는 피살자 주변에서 발견된 지게와 수건 두 가지 단서만으로 피살자의 신원을 추적해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4월26일 청양 박석산에서 교살된 소년은 누구인가? 그를 어떠한 자가 어떠한 이유로 죽였을까? 죽은 사람은 누구며 죽인 사람은 누구일까? 억측은 더욱 구구해진다. 정체 모를 의문의 소년을 죽인 범죄에 대해서는 아직 해결이 묘연하다. 형의 집행을 받고 있는 두 사람 중에 조기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날 박석산에서 분명히 박창수를 죽였다고 자백했다. 또 1심인 공주지방법원에서 살인죄로 징역 10년의 판결이 언도되매 그는 항소도 하지 않고 순순히 복역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조기준이 박창수를 죽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무슨 죄가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면 혹시 두 사람이 그날 박창수를 죽일 목적으로 박석산에 올라갔을 때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박창수와 생김새가 비슷한 다른 소년을 박창수로 잘못 알고 죽인 것은 아닐까? 과연 그럴듯한 추측이다. (‘조선초유의 대의혹, 박석산상의 살인사건’, ‘별건곤’ 1931년 1월호)


    오후 7시가 지나서 살인사건이 발생한 만큼 시야가 어두워 엉뚱한 사람을 오살(誤殺)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조기준은 고옥단과 박창수가 함께 박석산에 올랐다고 진술했다. 아무리 시야가 어둡기로 함께 걸어가면서 사람이 바뀐 것을 몰랐을 리 없었다. 더욱이 멀찌감치 떨어져 권총으로 살해한 것도 아니고 코앞에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목을 졸라 살해했는데 엉뚱한 사람을 죽였을 리 없었다.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고옥단은 조기준과는 달리 경찰 신문을 제외하면 일관되게 범행을 부인했다. 그렇다면 고옥단은 사건과 관계없고 조기준이 단독으로 저지른 범행은 아닐까.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가설에도 문제는 많다. 박창수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은 고옥단이지 조기준이 아니었다. 고옥단이라면 몰라도 조기준이 혼자서 박창수를 죽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조기준이 정체 모를 소년을 혼자서 살해했고 애꿎은 고옥단을 물고 들어간 것은 아닐까?

    그럴듯한 일이다. 박석산에서 소년의 변사체가 발견됐을 때 현장에는 수건 한 개가 있었으니, 당시 조기준은 그것이 분명히 자기 물건이요 그것으로 박창수의 목을 졸라 죽였다고 자백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오직 하나뿐인 물적증거로 남아 있다. 정당한 법 이론으로 보면 설혹 그가 수건으로 죽인 피살자가 박창수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때 그곳에서 그의 수건에 목을 졸려 죽은 피해자가 실제로 있다면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최근 경찰과 검사의 수사 결과 유일한 물적증거인 그 수건이 조기준의 것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마지막 남은 단서인 수건의 소유자마저 잃었으니 수수께끼 같은 의문의 살인사건은 여기에서 풀 길이 막연해진다. 이래서 범죄 수사는 더한층 곤란해지고 의문은 가일층 커진다. 수건의 임자는 누구인가? 수건의 임자가 곧 범인이니 경찰의 주력도 수건의 임자를 찾는 데로 쏠린다. (‘조선초유의 대의혹, 박석산상의 살인사건’, ‘별건곤’ 1931년 1월호)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으로 사건의 실체는 점차 미궁으로 빠져들지만, 고옥단과 조기준이 박창수도 정체 모를 소년도 살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실해진다. 두 사람이 살인사건과 무관하다면 또 하나의 커다란 의문이 생긴다. 고옥단은 검사국과 법정에서 부인할 범죄사실을 경찰 신문에서는 왜 시인했을까. 조기준은 왜 초지일관 죽이지도 않은 박창수를 죽였다고 시인했을까? 조기준은 그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았지만, 고옥단은 법정에서 가혹한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자백을 했노라고 주장했다.

    보상받지 못한 수감생활

    공주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조기준은 공주지방법원 검사국 마쓰모토 검사의 재심 청구로 1931년 6월30일 무죄를 선고받아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7월14일 경성복심법원 검사국 사카미(酒見) 검사는 고옥단이 박창수를 살해한 사실이 없고 박석산에서 죽은 소년을 살해했다는 증거도 없으니 무죄를 선고해 달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7월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개정한 재심공판에서 수에히로 재판장의 심문에 고옥단은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기문과 정교 관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인가.”

    “없습니다.”

    “박창수를 데리고 용천리에 술값을 받으러 가다가 이기문과 만났을 때 이기문이 자신의 아내가 돼달라면서 도망하자고 말한 것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그때 그런 말을 박창수가 들었는가.”

    “한백원에게 말한 것을 보면 들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피고는 박창수를 때렸다지.”

    “예, 때렸습니다.”

    “때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죽이려고 결심했었지.”

    “죽일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고용살이하는 조기준과 공모하고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때린 일은 있으나 죽이려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4월16일, 박석산에 소년의 시체가 있었다는 것은 알았는가.”

    “몰랐습니다.”

    “그 시체가 박창수인 줄 알았는가.”

    “그때 박창수가 내 집에서 보이지 않아서 혹 박창수의 시체가 아닌가 하고 의심한 일은 있습니다.”

    “피고인은 박창수가 살아 있는 것을 아는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릅니다.”

    “박창수를 안 죽였다면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가.”

    “그런 일 없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피고인은 죽였다고 자백했는가. 경찰 조서에 보면 피고인은 분명히 박창수를 죽였다고 자백한 것으로 돼 있는데….”

    “경찰서에서 너무 가혹하게 문초해서 부득이 거짓자백을 한 것입니다. 전후 사실을 보면 내가 죽인 것같이 되었으니 부득이 죽였다고 한 것입니다.”

    (‘청천백일 하에 무죄 석방된 소년 살해범 고옥단’, ‘ 별건곤’ 1931년 8월호)


    1931년 7월27일, 고옥단은 무죄를 선고받고 조기준보다 한 달 늦게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1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고 혹독한 고문까지 당했지만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형의 집행을 받은 자가 무죄를 선고받을 경우 국가에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법률인 ‘형사보상법’은 1933년에야 시행됐다. 당시 형사보상법은 경찰이나 검찰 조사과정에서 범죄 사실을 자백하면 보상청구를 기각하도록 했기 때문에 설령 형사보상법이 시행됐더라도 고옥단과 조기준은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기 전 스스로 알아서 조심해야 했던 시대인 셈이다.

    청양 소년 살해사건 미스터리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박창수는 길거리에만 나가도 사람들이 따라다니며 구경할 만큼 충청도 일대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그 후로는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박석산에서 살해당한 소년의 신원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어서 사건은 영구미제로 남았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사건을 해결하겠다던 마쓰모토 검사는 그 후로도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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