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1500년 전 대륙 호령하던 태왕의 기상을 만나다

  • 윤완준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zeitung@donga.com

    입력2007-10-05 14:3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답사단은 닷새 동안 백두산·지안·단둥 지역의 고구려 유적지를 차례로 답사했다.

    중국에 도착한 지 사흘째인 8월16일. 마침내 장수왕릉 앞에 섰다. 현대 건축의 눈으로 보면 높이나 크기 다 보잘것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1500년 전이다.

    쌓은 돌을 다 합치면 무게가 6000t이 넘는다. 철골로 기둥을 세우고 콘크리트를 쏟아 부어 만든 현대 건축물도 200년을 버텨내기 힘들다. 이 석릉은 무려 1500년을 견뎠다. 장수왕릉은 지안에 남아 있는 왕릉급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 중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장수왕릉이 있는 곳은 룽산(龍山)의 기슭이다. 장수왕릉에 오르니 지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흐르는 압록강 건너 북한 자강도 만포시도 보였다. ‘왕릉에 올라 세계를 내려다보니’ 한순간 천하를 얻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필자는 제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등급별 성적우수자 학생, 학부모, 역사 교사 30여 명과 지난 8월14~18일 중국 지안, 랴오닝성 단둥시 일대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한다.

    이번 시상에 신설된 가족상 부문 1위를 차지한 최하림(48)씨 가족, 대입수학능력시험이 채 100일도 남지 않은 최우석(18·순심고 3년)군 등 답사단의 면면은 다양했다. 고혜령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등 위원회 직원도 답사에 동참했다. 역사 교사는 모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출제자들. ‘역사’ 하면 자다가도 일어날 이들이기에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고구려 왕릉의 위용은 감탄 그 자체였다.



    장수왕릉 축조의 비밀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중국 지린성 지안시 고구려 국내성 인근 환도산성(수도방어용 산성) 아래에 대규모로 자리잡은 고구려 무덤군.

    답사단의 관심은 이 엄청난 규모의 석릉이 오랜 세월 제 모습을 끄떡없이 지켜낸 비밀로 옮아갔다.

    첫 번째 비밀은 튼튼한 기초공사에 있었다. 왕릉 주위 바닥을 길이 1m 안팎의 큰 돌덩어리로 둘러쌓았다. 돌 사이 틈은 강돌로 다졌다. 이처럼 탄탄한 기초 덕분에 장수왕릉의 돌은 엄청난 무게에도 밀려나지 않았다.

    그랭이 기법도 빠질 수 없다. 그랭이 기법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의 돌 ‘덤벙주초’를 생김새 그대로 살려 쌓는 방법이다. 이 기법은 불국사 기단에도 쓰였다. 장수왕릉은 돌을 쌓을 때 돌과 돌을 원래 모양 그대로 완벽하게 접합해 무게를 견딜 수 있게 했다. 자연과 하나 되는 건축을 추구한 빼어난 멋을 보여준다.

    층마다 조금씩 들여 쌓는 퇴물려 쌓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고구려 특유의 축조 방식인 퇴물려 쌓기가 장수왕릉에도 사용됐다. 밑돌의 가장자리에 홈을 파고 그 홈에 맞춰 윗돌을 맞물리게 들여 쌓아 수직 압력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이다.

    장수왕릉에서 눈에 띈 것은 왕릉 사방에 기대어 세워놓은 커다란 자연석이다. 모두 11개로, 동서남쪽 면에 각 3개씩 있고 북쪽 면만 2개였다. 돌마다 어른 키의 두 배는 넘어 보였다. 가장 작은 돌 무게가 15t이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장수왕릉의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쌓은 받침돌이라는 얘기가 있다. 십이지(十二支)를 상징하는 수호신이라는 말도 있다. 학자들이 연구해보니 받침돌 기능은 하지 못하고 왕릉을 세운 4~5세기엔 십이지가 전해지지 않아 신빙성이 없다는 얘기도 있다. 수수께끼의 돌이다.

    답사단은 장수왕릉 주변을 한 바퀴 돌며 이 비밀들을 눈으로 확인했다. 널방으로 올라가면서 장수왕릉 곳곳에 숨은 축조의 비밀을 봤다. 널방은 4층 한가운데에 있었다. 한 변이 5m 정도이고 높이는 5.5m다. 널방 안엔 널받침 2장만 나란히 남아 있었다. 본래 장수왕릉과 왕비의 관이 놓여 있었으리라. 널방 안의 유물은 발견 당시 이미 도굴 당한 뒤라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장군총’이란 이름도 10여 년 전 장수왕릉을 발견한 중국인들이 ‘어느 중국 장군의 묘’라고 생각해 붙인 것이다. 유물이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널받침 위에는 중국 지폐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우리 지폐도 보였다.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소원을 빌며 던져놓은 것이다. 장수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이란 점을 생각하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더 한심한 건 널방 곳곳에 습기가 가득 찼다는 점이다. 널방 입구에는 관리원으로 보이는 중국인이 2명 있었지만 그런 데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수수께끼의 돌이 하나 부족한 북쪽 면엔 돌덩이들이 무너져내린 곳도 있었다.

    중국 정부는, 2004년 유네스코(유엔 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이 되기 전에는 널방은커녕 장수왕릉 근처에도 못 가게 했다고 한다. 비디오 촬영을 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감추며 아끼는 시늉을 하더니…” 참가자들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아름답고 정교한 고분벽화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다섯투구무덤의 5호 묘 고분벽화 ‘해신 달신’. 묘실 내부에 습기가 차 벽화의 색깔이 흐릿해지고 있다.

    장수왕릉 바로 앞 정원으로 빠져나왔다. 잘 정돈된 꽃밭, 풀밭이지만 왠지 장수왕릉의 위용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이제 정교하고 아름다운 고분벽화로 유명한 다섯투구무덤(오회분) 5호 묘에 갈 시간이다. 버스로 10~20분 거리다. 광개토태왕비와 광개토태왕릉도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이곳이 어딘가. 지안시다. 지안시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고구려는 서기 3년(유리왕 22년)에 수도를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427년(장수왕 15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무려 400여 년 동안 고구려의 중심지였다. 졸본은 현재 중국 랴오닝성 환런(桓仁)에 있다.

    지안시에 고구려 무덤이 몇 기 있을까. 100기? 1000기? 틀렸다. 무려 1만2000여 기가 있다. 고구려인은 땅의 절반을 주거지로, 나머지 절반을 무덤으로 사용했다더니 실감이 난다. 1500년 넘은 고분이 이곳저곳에 가득하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많은 고분이 떼로 모여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지나치는 거의 모든 곳이 ‘고분떼’다.

    이 중 통구무덤떼가 1만1300여 기다. 이곳에 장수왕릉, 광개토태왕릉, 다섯투구무덤을 비롯해 그 유명한 씨름무덤(각저총), 춤무덤(무용총)이 모여 있다. 안타깝지만 지안에 있는 벽화무덤 20여 기 중 공개된 곳은 다섯투구무덤 5호 묘뿐이다.

    널방 입구 앞에 서니 한국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많다. 널방이 그리 넓지 않아 한번에 많아야 15명 정도만 벽화를 볼 수 있다. 널방은 16.53m2(5평) 정도다. 20여 분을 기다려 마침내 널방으로 들어섰다. 어두컴컴하다. 청룡·백호·주작·현무의 사신도가 어디에 그려져 있는지 도통 보이지 않는다. 널방 안에 널받침이 3장 놓여 있다. 관은 없다. 가운데 널받침은 고분의 주인, 양옆의 널받침은 두 부인의 것이리라.

    조선족 안내자가 손전등을 켰다. 손전등 불빛을 따라 답사자들의 눈동자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와!” 청룡의 얼굴이 보였다. 널방 입구를 향해 역동적으로 뛰어오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손전등 불빛을 따라 청룡의 화려한 몸이 드러났다. 빛은 바랬지만 노랑, 초록, 갈색을 비롯 형형색색의 색감이 예사롭지 않다. 목과 배는 분홍색이다. 발톱이 날카롭다.

    맞은편 벽에 백호가 있다. 역시 널방 입구를 향해 금방이라도 뛰어들 태세다. 청룡 백호 뒷다리에 우모(羽毛)가 눈에 띈다. 신비한 영물에 나는 깃털이다.

    널방 입구 쪽 벽엔 주작이, 반대편 벽엔 현무가 그려져 있다. 위에는 해신, 달신이 보인다. 수레바퀴신도 보이고, 농사신인 소머리신도 보인다. 해신은 세 발 달린 검은 봉황이 있는 해를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 달신이 이고 있는 달엔 두꺼비가 있었으나 사라지고 없다. 면류관을 쓰고 용을 타고 나는 신선도 보인다. 창을 들고 뒤를 따르는 신장(神將)도 보인다.

    그리스 신화가 무색하다. 고구려인은 1500년 전 이미 문명을 상징하는 신을 예술작품의 소재로 형상화했다. 신의 이야기를 회화로 남긴 것은 둔황이나 중원 지역에선 볼 수 없다. 상상력이 놀랍다. 미술적 성취도 놀랍다. 고대의 신과 사신도는 화려하다. 정교하다. 직접 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다.

    손전등 불빛을 따라간 눈길이 마지막으로 널방 천장에 멈춘다. 숨이 멎는다. 용과 호랑이가 얽혀 싸우고 있다. 네 벽과 천장 가득 여백이 없다. 온통 벽화다. 예술이다. 역사다. 고구려인의 세계다.

    답사단은 30여 명이었다. 팀을 둘로 나눴다. 기자는 모두 두 번 들어갔다. 두 번째 감탄. 손전등 불빛이 현무에 닿았다. 형체는 남았지만 무엇이 거북이고 무엇이 뱀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벽화는 정교한 아름다움을 뽐내지만 군데군데 지워졌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탓일까.

    천장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굵은 물방울이 거슬렸다. 자세히 보니 사방에 물이 줄줄 흐른다. 무덤 안팎의 온도 차이 탓에 생긴 습기다. 습기 정도가 아니라 목욕탕처럼 물방울이 줄줄 흐른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문제가 알려진 지 족히 10년은 넘었다. 중국 관리인에게 물었다. “관광객이 많아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 관광객의 널방 출입을 막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답사에 함께한 김정옥 장학사(경기 이천시 교육청)는 “명(明) 황제 13명의 능묘군인 베이징 명십삼릉도 지하에 널방이 있지만 제습장치가 잘 돼 물방울을 찾아볼 수 없다”고 꼬집었다. 벽화를 손으로 문질렀더니 검은 안료가 묻어나왔다며 국사편찬위원회 직원이 혀를 끌끌 찬다. 안료인지 먼지인지 알 수 없지만, 중국 정부의 관리 소홀로 벽화가 훼손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보호각에 갇힌 광개토태왕비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비각(碑閣)에 갇힌 세계 최대의 비석 광개토태왕비. 태왕비의 금석문은 귀중한 고구려 역사 자료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광개토태왕릉과 광개토태왕비로 향했다. 광개토태왕릉은 한 변의 길이가 66m다. 돌을 쌓은 방법이 장수왕릉과 같다. 잘 다듬어진 네모꼴 돌덩어리를 차례로 들여 쌓았다. 장수왕릉보다 훨씬 큰 규모지만 석릉 대부분이 무너져내려 언덕처럼 보였다.

    광개토태왕릉은 장수왕릉과 달리 유물이 출토돼 광개토태왕릉임이 확실히 알려졌다. 석릉에서 ‘태왕릉’이라 새긴 벽돌이 발견됐다. 지안시 박물관에 소장된 태왕릉 출토 청동방울에 ‘호태왕’이라 새겨진 사실이 2003년 확인됐다. 관광객들이 무덤 이곳저곳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녀도 제지하지 않았다. 돌이 무너져 내려 무덤 같지 않은 모양이다. 포항제철서초교 6학년 이동호(12)군의 지적이 따갑다.

    “할아버지 무덤은 안 밟으면서 조상의 무덤을 함부로 밟게 놔두는 걸 이해할 수 없어요.”

    널방의 사정은 장수왕릉과 비슷했다. 널받침 2장 위엔 지폐가 어지러이 놓여 있다. 벽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중국인 관리인이 2명이나 입구에 있는데 하는 일이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광개토태왕이 잠들었던 곳은 그렇게 훼손되고 있었다.

    광개토태왕릉 아래쪽에 ‘태왕릉 태왕비 사진 전시관’이란 작은 현판이 붙은 단층 건물이 있다. 안은 휑하다. 방 하나에 태왕릉과 태왕비의 과거 사진, 태왕비 탁본 사진 몇 점이 전부다. 건물의 다른 방은 텅텅 비어 있었다. 청소부가 “어서 나가라”고 외친다. 세계문화유산을 안내하는 전시관으론 볼품없기 그지없다. “왜 만들었는지 모를 곳”이라며 고혜령 편사부장이 혀를 끌끌 찬다.

    광개토태왕릉에서 동북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광개토태왕비가 있다. 높이 6m 너비 139cm. 세계 최대의 비석이다. 고구려연구회 이사장인 서길수 서경대 교수가 저서 ‘고구려 역사유적 답사’에서 한 비유가 그럴듯하다.

    “아파트 3층에서 베란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을 때 갑자기 큰 돌덩이가 앞을 가로막는데, 그 돌덩이 하나가 1층 땅바닥에서 솟아오른 큰 돌이라면 어떤 느낌이 들까?”

    대륙을 경영한 광개토태왕의 업적이 담긴 세계문화유산은 그러나 비각(碑閣)에 갇혀 있다. 명목은 ‘보호’지만 숨 막힐 듯 답답해 보였다. 그 운명이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석탑과 같아 한숨이 나온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은 유리 보호각 안에 갇혀 있다. 탑이 화강암보다 무른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비바람에 많이 닳았다. 탑골공원은 비둘기 집단 서식지여서 배설물에 의한 훼손도 심각했다. 지난 2000년 문화재 당국이 탑 주변에 유리 보호각을 쳤다. 완벽한 보존처리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보호각 속에 갇힌 탑에서 조상의 얼이 숨쉬는 문화재의 참맛을 느끼기란 어렵다. 하물며 광개토태왕비야….

    2003년부터 개방된 유리 비각 속 비좁은 틈에서 광개토태왕비를 보는 관광객들도 답답해 보였다. 폐쇄된 공간에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들면 입김 때문에 비석의 부식이 빨라진다는 전문가들의 우려도 있다. 바로 앞에서 비석을 살펴보니 비석이 갈라지는 걸 막기 위해 틈새에 주입한 접착제가 흘러나온 듯 비석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광개토태왕비는 금석학 연구에 중요하다. 금석문은 세월이 흐르며 덧쓰고 지워지는 문헌과 달리 새길 당시 기록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보다 700여 년 앞선 기록이다. 광개토태왕비는 일제의 글자 변조설로 논란이 됐다. 일본 육군대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1883년경 중국 현지에서 입수했다는 묵본이,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다.

    이 묵본의 신묘년 관련 기록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 □□, 신라를 깨뜨렸다’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후대 탁본에는 ‘渡海破’란 글자가 뚜렷하지 않아 조작 의혹을 받았다(□□는 판독하지 못한 부분). 일본은 글자를 변조해 광개토태왕비를 욕보이고, 중국은 비를 보호각으로 옥죄 광개토태왕비를 괴롭히고 있다.

    사라지는 국내성 흔적

    지안시에서 답사단을 안내한 조선족은 중국 지린성 퉁화(通化)시의 조선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여교사였다. 중국 정부의 고구려 유적 훼손이 안타까워 조선족들은 고구려 역사를 어떻게 배우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이 답사단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학교에서 고구려 역사를 거의 배우지 않습니다. 세계사의 한 부분으로만 스쳐 지나갈 뿐이지요. 대학 입시에도 나오지 않으니 어린 조선족 학생들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아요.”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광개토태왕릉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다. 중국 정부의 무성의한 관리로 태왕릉은 심각하게 훼손됐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산속에 묻혀 잊혀가는 듯한 고구려의 환도산성이 가뜩이나 무거운 마음을 더 무겁게 한다. 지안시 환도산성의 음마지(飮馬池)는 고구려 병사들이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이지만 지금은 풀만 무성하다. 안내를 맡은 여교사가 고구려 궁궐의 터라며 가리킨 곳은 언뜻 보기에 밭이다. 다른 밭과 구별하기 힘들었다.

    남쪽 옹성 문을 지나 만나는 요망대(遼望臺)에선 국내성이 한눈에 보였다. 고구려 병사들이 이곳에서 국내성과 신호를 주고받았다는 설명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지안시 중심부엔 국내성이 있다. 국내성도 환도산성도 모두 돌을 퇴물려 쌓았다. 퇴물려 쌓기는 고구려만의 축조 방식. 국내성은 도시 한가운데 있어선지 많이 헐렸다. 심지어 아파트의 담벼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구려 두 번째 도읍지가 하릴없이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주택과 주택 사이에 낀 국내성을 보자 풍납토성이 떠올랐다. 풍납토성 역시 한성기 백제의 도읍지란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난개발로 훼손됐다. 한창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지만, 남은 토성은 풀 가득한 둔치처럼 보인다. 국내성이 풍납토성과 다른 점이 있다면 ‘치’다. ‘치’는 적을 삼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성벽 앞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이다. 고구려 성만의 특징이다.

    이곳이 국내성임을 알리는 표지판도 제대로 없었다. 초라하게 쓰러져가는 국내성의 운명이 슬펐을까. 흐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8월17일 단둥시의 고구려 유적인 호산산성(박작성)을 찾았을 때도 세찬 비가 내렸다. 이곳에선 중국의 역사 왜곡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 내린 비는 분노의 비였으리라.

    호산산성은 고구려 산성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대형 우물이 발견돼 학계가 고구려 박작성으로 보는 곳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국이 이 성을 대대적으로 복원한 뒤 등장한 것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호산장성’이다. 장성과 연관시키려 고립된 산성을 다른 성과 연결된 장성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압록강에서 바라본 북한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중국 단둥에서 바라본 북한 신의주. 압록강 유람선에서는 북한 주민들을 코앞에서 볼 수 있다.

    단둥시에는 압록강 철교가 있다. 이 철교는 북한땅 평북 신의주시와 단둥시를 연결하는 다리다. 일제가 건설했다. 6·25전쟁 때 미군 B-29폭격기의 폭격으로 다리 2개 중 하나가 완전히 끊겼다(‘압록강 단교’라 부른다). 관광객들은 끊어진 곳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

    8월17일, 비바람이 세찼지만 답사단은 철교를 걸었다. 철교 끝에서 답사단은 갈 수 없는 나라, 북한을 바라봤다. 새삼 분단된 현실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러나 압록강 철교의 안내판은 영 딴판이다. 중국인에게 압록강 철교는 한반도를 거쳐 중국을 침략하는 미군을 막아낸 구국항쟁의 상징이다. 이들에게 중국은 6·25전쟁에 개입한 ‘침략국’이 아니라 미국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방어국’이라는 설명이다. 나라마다 역사 인식이 다른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끔찍한 살상을 이런 식으로 침소봉대하는 태도에 씁쓸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답사단은 압록강 유람선을 탔다. 신의주시 가까이까지 배가 접근했다. 수십m 앞에 북한 주민들이 보인다. “안녕하세요!” 손을 흔들자 주민들도 답례한다. 기자는 평양, 개성, 금강산을 가봤다. 북한 주민과 악수하고 술도 함께 마셔봤다. 그런데 배에서 보는 북한은 느낌이 달랐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 손 한번 흔드는 것으로 헛된 유대감에 만족하는 것은 아닐까….

    답사 참가 학생들의 소란스러운 외침이 상념을 끊는다. “김정일 장군, 김일성 수령, 하하하!” ‘역사 천재’들이지만 어린 학생들이다. 북한, 분단, 전쟁…. 아직 그 아픔은 모를 나이일까. 고대사도 중요하지만 근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심어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이틀 전인 8월15일 답사단은 백두산 천지에 올랐다. 답사단 대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을 만큼 천지는 다시 볼 수 없는 장관을 선사했다. 안내자의 설명에 따르면 맑은 날씨에 천지를 선명히 보는 날은 백두산을 10번 올라 1번 있을까 말까 하단다. 답사단이 천지에 오르자 흩뿌리던 비는 곧 그쳤고 눈부신 태양 빛에 반사된 푸르디푸른 천지가 자태를 드러냈다. 백두산 정상은 볼품없는 표지석 하나로 중국 땅과 북한 땅이 나뉘었다. 참가자들은 “‘장백산’이 아니라 ‘백두산’으로 천지에 오를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고구려 유적은 인류의 자산

    지안(集安)에서 단둥(丹東)까지, 고구려 유적 답사기

    중국 지린성 지안시 환도산성을 찾은 답사단이 유적을 둘러보고 있다.

    8월14일 랴오닝성 선양(瀋陽) 국제공항에 도착해 퉁화시, 백두산, 지안시, 단둥시를 거쳐 중국 랴오둥 반도의 끝인 랴오닝성 다롄(大連)시 국제공항에 이르는 여정 대부분을 버스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숙소를 옮길 때마다 버스로 보통 5~6시간을 달렸다. 하루 왕복 10시간은 버스에서 보낸 셈이다. 버스 기사는 속도를 최대 60km 이상 내지 않았다. 답사단 일부는 ‘만만디(慢慢的)’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기사는 어린 참가자들의 안전이 최고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기사가 옳았다. 기사는 고구려 유적 훼손과 역사 왜곡으로 실망한 답사단을 거의 유일하게 감동시킨 중국인이었다.

    강민경(19·성균관대 1년)씨는 8월16일 환도산성의 병사 거주지 터에서 발견한 고구려 기와 조각을 18일 서울에 돌아올 때까지 고이 간직했다. 고구려 특유의 붉은 기와에 조밀하게 세로로 길게 난 흔적을 보고 포목흔(布目痕)임을 바로 알아맞혀 답사단을 놀랜 주인공이다. 포목흔은 기와를 만들 때 틀에서 잘 떨어지게 하려고 기와에 삼베를 씌우면서 생긴 흔적이다.

    8월17일 밤 단둥시를 떠나 다롄 국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서 참가 학생들은 하나같이 “교과서나 역사책에서 벽화 사진이 선명해 관리가 잘 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심각하게 훼손돼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말했다. 이들은 “중국의 허술한 관리도 문제지만 고구려가 우리 역사인 만큼 우리 정부의 소극적 대응도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김학춘(16·곤지중 3년) 군의 말이 특히 생각난다.

    “문화재에 너희 민족 것, 우리 민족 것이 어디 있습니까. 고구려 유적은 우리 민족만의 유산이 아닙니다. 중국 정부가 인류 전체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보존했으면 좋겠어요.”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