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오현경…아픔, 그리고 10년

“죽음보다 깊은 고통도 스승이 됐죠”

  • 최호열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헤어·메이크업/JEAN PIERRE(02-3444-1704, 02-511-1306)

    입력2007-10-08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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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스코리아 출신 탤런트 오현경.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굴곡의 삶을 살아온 그가 돌아왔다. 외모는 10년 세월을 훌쩍 건너뛴 것처럼 여전히 아름답지만, ‘죽음보다 깊은 절망’을 딛고 일어선 그는 훨씬 성숙해 있었다.
    오현경…아픔, 그리고 10년
    오현경(37)이 돌아왔다. 1998년, 치명적인 파문에 휩싸여 등 떠밀리듯 연예계를 떠난 지 10년 만이다. 9월29일부터 방송되는 SBS 주말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에서 그는 바람 피우는 남편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주인공 ‘화신’역을 맡았다. 현대물로는 드물게 100부작으로 기획된 ‘조강지처 클럽’은 남편의 외도에 대항하는 조강지처들의 반란을 재미있게 그릴 예정.

    복귀 소문은 지난해부터 들려왔다. 그녀가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연예계 대모’ 이경순 모닝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복귀를 적극 설득했다. 이 대표를 통해 1년 넘도록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오현경은 “기다려달라”고만 했다. 지난 8월초 방송 복귀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한 뒤에도 “조금 더 시간을 달라”고 했다. 가슴속 깊이 남은 응어리들을 토해내기엔 시간이 더 필요한 듯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9월10일, 그와 단 둘이 만날 수 있었다. 10년 세월이 흘렀어도 오현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8월 기자회견 때의 상기된 표정과는 달리 한결 여유 있어 보였다. 그의 향긋한 미소가 청명한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와 뺨을 간질였다.

    달라진 건 내가 아니라 세상

    “드라마 촬영 시작한 지 3주쯤 됐어요. 제작 시스템이 많이 달라졌더군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왔다고 할까요. 달라진 점이 또 있어요. 10년 전엔 제가 모든 스태프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스태프 대부분이 저보다 어리다는 것. 다들 저를 ‘누님’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흐른 것 같아요.”



    ▼ 다른 연기자들과 호흡은 잘 맞나요.

    “원래부터 잘 알던 이들이라 다행이에요. 김혜선씨는 가장 친한 친구예요. 선배 연기자들도 제가 마지막으로 했던 드라마 ‘사랑하니까’나 ‘세 여자’에서 호흡을 맞춘 분들이고, 다른 배우들도 저와 한 번씩은 작품을 같이 한 적이 있어 편해요.”

    오현경…아픔, 그리고 10년
    ▼ 연기의 감을 되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너무 오래 쉬어서 주눅 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적응하고 있어요. 문영남 작가가 대본을 워낙 잘 쓰니까 저는 대본에 나온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돼요. 제가 이젠 나이도 먹었고, 어려움도 겪을 만큼 겪었잖아요. 드라마에서 요구하는 감정을 충분히 끄집어낼 자신이 있어요.”

    10년 만에 하는 연기지만 낯설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연예계를 떠난 후에도 TV에 또래 연기자가 나오면 그의 연기를 따라 해보며 ‘감’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고 한다.

    “한번 연기자는 죽을 때까지 연기를 버릴 수 없나 봐요. 그리고 지난 10년, 제가 살아온 것 자체가 연기였잖아요. 길을 걸으면 사람들이 다 알아 보니 늘 긴장하면서 연기를 해야 했어요. 옛날엔 우는 연기를 잘 못했는데 이제는 누구보다도 잘 울 수 있어요.”

    바람 피우는 남편에게 당당하게 이혼을 선언하고 홀로 서는 씩씩한 역할을 맡았다. 실제로도 그렇게 씩씩한 편이냐고 묻자 “안 그래요. 우유부단하고 소심하죠. 귀가 얇아 남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고…. 겉으로는 활달해 보이지만 실은 사교성도 없어요” 하며 웃는다. 신이 나서 드라마며 연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자랑할 것 많은 다섯 살짜리 같다. 하긴 그에겐 올해 다섯 살배기 딸이 있다. 엄마는 아이랑 정신연령이 똑같다고 하지 않던가.

    ▼ 밝은 모습을 보니까 천생 연기자구나 싶네요.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진 않나요?

    “제가 변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저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달라진 게 아닌가 싶어요. 저는 늘 똑같은 저였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저를 전혀 모른 채 ‘걔는 그럴 거야’ 하는 선입관을 갖고 있다가 그렇지 않은 제 모습을 보고 ‘쟤가 달라졌구나’ 생각하는 거죠. 사람들이 제게 ‘일을 하니까 밝아졌다’고 하는데, 만일 제가 복귀한 상황이 아니라면 똑같은 지금의 저를 보고 ‘표정은 좋아 보이지만 속으론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을 거예요. 아무튼 사람들이 저를 긍정적으로 받아주는 자체가 저로선 고마울 뿐이에요.”

    ▼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진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는 오현경씨의 생각이 달라진 건 아닐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전에도 나를 모르면서 선입관을 가지고 거기로 나를 몰아간 거니까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느껴졌다. 그만큼 상처는 깊었으리라.

    집단관음증의 희생자

    오현경은 우리 사회가 보듬어야 할 아픈 상처다. 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이 불법적으로 유포, 공개되면서 여자로서 견뎌내기 힘든 수치와 고통을 겪었다. 집단관음증과 선정주의가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당시 우리 국민의 3분의 1이 그의 사생활을 엿본 ‘관음증 환자’였다는 분석도 있다.

    그런데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그에게 “정숙하지 못하다”며 집단 이지메를 가했다. 피해자인 그가 되레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공개사과를 해야 했다.

    오현경…아픔, 그리고 10년
    “사람들이 똘똘 뭉쳐 제게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 같았어요. 20대의 어린 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죠. 더구나 그 무렵 저는 많이 아팠어요. 그런 상태에서 도무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었고, 그런 상황이 납득도 되지 않고…. 여자로서의 삶은 끝났다는 생각도 들고….”

    ▼ 많이 힘들었겠어요.

    “한없이 서운하고 서럽고…. 그런데 시간이란 게 묘해요. 처음엔 고통과 끝 모를 절망감뿐이었죠. 그러다 멍한 상태가 되어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냥 흘러가게 돼요. 마치 태평양 한가운데에 혼자 떨어져 있는 느낌이에요. 작은 파도만 일어도 엄청난 공포가 밀려왔다가 나중엔 그냥 그런가 보다 싶어져요. 그렇게 적응해 나가는 거죠. 자기도 모르게 살아가는 방법, 어려움을 헤쳐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돼요. 인간이란 게 그렇더군요. 약할 때는 벌레보다도 약하고, 강할 때는 정말 초인적이 돼요.”

    ▼ 가장 힘든 건 뭐였나요.

    “언론이었죠. 저라는 한 인간의 최소한의 인격마저 무시했으니까요. 마치 짐승 대하는 것 같았어요. 그땐 정말 죽음의 시간이었어요. 남들은 상상도 못하는 고통이에요.”

    ▼ 왜 사건이 터졌을 때 곧장 불법행위를 하는 이들에게 법적대응을 하지 않고, 미국으로 피한 겁니까.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이 맞아요. 당시 턱관절 때문에 고생을 했어요. 언론에선 성형수술 부작용이라고 했지만. 턱관절이 안 좋아 수술을 했는데 그게 잘못되는 바람에 재수술을 받으러 미국에 가야만 했어요. 그때 한국에 있었더라면 잡을 사람 다 잡아내서 법의 심판대에 세웠을 겁니다.”

    ▼ 지금은 그들을 용서할 수 있나요.

    “솔직히 응어리는 남아 있어요. 세상 앞에 발가벗겨지는 그런 치욕이었잖아요. 마음의 병은 고쳐지지 않아요.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단단한 돌멩이처럼 박혀 있는 게 있어요. 제가 지고 가야 할 멍에인 것 같아요.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걸 또 들춰내고 싶어할 거예요. 그것으로 제가, 한 인간이 겪어야 할 고통은 생각하지 않고요.”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고통과 시련으로 배운 것

    오현경…아픔, 그리고 10년

    오현경은 자신을 내친 세상을 용서했지만 그래도 응어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선천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분들이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밑바닥에서 올라오지 못하는 분들 있잖아요. 그분들을 보면 제가 부끄러워져요. 그분들은 자신의 선택,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고통을 겪고 무시당하잖아요. 그에 비하면 전 어쨌든 작은 불씨만한 실수라도 있었던 거니까요. 그분들의 억울함에 비하면 저는 할 말이 없는 셈이죠. 그분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슬렀어요.

    죽음, 자살…, 저라고 왜 그런 생각 안 해봤겠어요. 그런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고, 시도도 했죠. 그런데 ‘그렇게 죽으면 남는 게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허무하게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거예요. 주위사람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주는 일이고요. 행복하게 잘살 권리가 있는 엄마와 동생들이 평생 내 죽음이라는 멍에를 짊어져야 하잖아요. 그걸 깨닫고 나니까 자살을 생각했다는 자체가 부끄러워졌어요.”

    그는 “인생은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죽지 않고 하루를 견뎌내고 다음날을 맞이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는 말에서 고통의 깊이가 느껴졌다.

    “처음엔 살아 있는 게 고통이고 못 견딜 시련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통이 도리어 삶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더군요. 그렇게 되기까지는 가족의 사랑과 종교가 큰 힘이 됐어요. 지금 살아 있고,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 힘들 때 주로 뭘 하며 지냈습니까.

    “성경의 잠언과 시편을 많이 읽었어요. 특히 시편은 마치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 같았어요. 시편을 읽고 있으면 ‘아, 오늘은 이래서 그랬구나’ 하고 가슴에 와 닿더군요. 요즘은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원리’라는 책을 읽고 있어요.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거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는 내용이라 마음에 와 닿아요. 며칠 전엔 ‘삼국지 경영학’을 샀는데, 경영의 지혜뿐 아니라 인간관계, 시련이 닥쳤을 때 풀어가는 방법을 담은 책이어서 꼭 읽어보려고요.”

    오현경…아픔, 그리고 10년

    후배와 함께 골프의류회사 JY골프를 운영하는 오현경은 직접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 어려운 사람들을 보며 힘을 얻었다니 봉사활동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 같은데요.

    “봉사활동은 어려서부터 틈틈이 해왔어요. 그런데 그 일을 겪은 후에는 여력이 없었죠. 후배와 함께 2004년에 골프의류회사를 만들면서 제일 먼저 다짐한 게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반드시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거였어요. 또한 재고 의류가 생기면 고아원 등에 보내곤 했어요. 중학교 때 고아원에 봉사활동을 갔는데 원장님이 ‘꾸준히 올 것 아니면 그냥 돌아가라. 너희는 일회성 봉사로 마음이 뿌듯할지 모르지만, 이곳 아이들에겐 얼마나 큰 후유증을 남기는지 아느냐. 하려면 작은 일이라도 지속적으로 해라’고 하시던 게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딸에게 자랑스러운 엄마 되겠다

    ▼ 골프의류사업(JY골프)이 잘되는 것으로 아는데, 연기 복귀를 결심한 이유라면.

    “아이 잘 키우고 사업에 성공하면 그것으로 뭔가 보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발로 뛰며 일을 했어요. 복귀 제의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눈도 돌리지 않았어요. 복귀하면 그 사건이 다시 불거질 게 뻔하잖아요.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걸 숨기려 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엄마가 오현경이라는 이유로 딸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있어요. 내 딸에게 그 짐을 지워주지 않으려면 내가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 씻어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 딸이 엄마가 오현경이란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용기를 낸 거죠. 물론 복귀하면서 안 좋은 댓글도 많이 달리겠지만 그런 두려움은 없어졌어요. 세상에서 나올 만한 나쁜 소리는 이미 다 들어봤는걸요.”

    ▼ 과거 기사를 검색해보니 이전에도 몇 번 복귀 이야기가 나오다 사라지곤 했더군요.

    “지난 10년 동안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제 기사가 나왔어요. 한 적도 없는데 인터뷰했다고 하고, 만난 적이 없는데 만났다고 하고….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쟤는 뭐야, 이런댔다 저런댔다 하냐’ 하고 욕했을 거예요. 저는 정말 열심히 생활인으로 살았는데 늘 문제를 야기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마치 살인을 저지르고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어요. 내 이름이 어디에 났다고만 하면 ‘무슨 일이지?’ ‘내가 모르게 또 뭐가 찍혔나?’ ‘내가 또 뭘 잘못했지?’ 하는 생각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 복귀 결정 소식을 듣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되더군요. 특히 지금은 사라진 듯한 불법 동영상이 분별없는 네티즌들에 의해 또다시 돌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없나요.

    “그게 가장 큰 문제예요.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더 이상 바보처럼 숨지 않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생각이에요. 더 이상 한순간의 재미를 위해 한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가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인생

    오현경…아픔, 그리고 10년
    1989년 미스코리아 진에 뽑히며 화려하게 연예계에 데뷔한 그는 한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자로서의 행복, 연기자로서의 꿈을 빼앗겼다. 미국에 머물다 2000년 말 한국에 돌아온 그는 2002년 재미 사업가와 결혼, 평범한 여자의 삶을 꿈꿨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사건은 주홍글씨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게다가 남편의 사업실패 등으로 지난해 이혼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 두 사람의 이혼에 대해 갖가지 소문이 떠돌았는데, 정확한 이혼 사유는 뭡니까.

    “어떤 이유로든 부부가 끝까지 함께 가지 못한다는 건 서로에게 아픔이에요. 비록 갈라섰지만 남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에게도 그렇고, 제게도 그렇고, 아이에게도 그렇고요. 제가 지금 어떤 말을 해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어요. 결국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일 뿐이죠.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사람이 앞으로 잘돼서 내 딸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에요.”

    오현경…아픔, 그리고 10년
    ▼ 아이의 친권은 누가 가지고 있나요.

    “제가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어요.”

    ▼ 호주제가 폐지된 데다 친권을 가지고 있으니 아이의 성(姓)을 엄마 성으로 바꿀 수 있을 텐데요.

    “그건 아이가 더 큰 다음에 아이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내 아이니까 내 마음대로 내 성을 주겠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제 독단으로 결정하고 싶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상처를 받지 않는 거예요. 그 부분에서 엄마가 이기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아이가 엄마의 성을 따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호주제 폐지는 정말 바람직하다고 봐요. 제 처지와는 다르게 아이의 성을 절실히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는 여성들도 있으니까요.”

    ▼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선택이 있다면.

    “많죠.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니까요. 그런데 막상 꼽으려니 딱 이거다 하는 게 없네요. 후회되는 순간이 너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회스러운 기억들이 저로부터 그만큼 객관화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돌이켜보면 성숙하지 못한 판단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천성은 잘 안 바뀌잖아요. 앞으로도 살면서 실수를 많이 하겠죠. 그러나 비슷한 실수는 또 하게 될지 몰라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일 뿐이다. 더 이상 지나간 과거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지울 수 있는 과거는 지우고, 끌어안고 가야 할 과거는 끌어안은 채 열심히 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아직 인생의 절반이 남았잖아요.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이제부터 잘 살아보려 합니다. 인간에게 시련이 닥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거라 믿어요. 그동안 많이 배우고 느꼈어요. 과거의 오현경을 잊고 열심히 사는 오현경을 애정을 갖고 지켜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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