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딸과 근친상간하고 며느리와 섹스하고…

‘아버지’들의 불온한 욕망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08-01 16: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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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남루한 욕망의 언어에 귀 기울인 남자들. 미성년자인 로리타를 갖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와 결혼하는 교수 험버트 험버트(‘로리타’). 아들의 애인과 격정적인 섹스를 나누는 정치인 스테판 플레밍(‘데미지’). 결과는 늘 그렇듯 파멸이다. 모든 것을 얻었다고 여긴 그 순간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것은 위험한 연애가 아니라 불온한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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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데미지’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국경 지역에 있는 콘스탄스 호수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아주 오래전 훌륭한 왕이 있었다. 일평생 통치에만 힘쓰던 왕은 노년에 접어들어 한 소녀를 알게 된 후 오직 소녀에게만 열정을 쏟는다. 종일 그녀 곁에 붙어 서서 그녀만을 바라보는 왕을 사람들은 걱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 다음이 더 심각하다. 왕은 이제 그녀의 사체 곁을 떠나지 않는다. 목숨도 사라진 그녀 곁에서 왕은 시간을 잊은 채 머문다. 이런 상황을 의아해하던 사제는 소녀의 사체, 미라 주변을 샅샅이 훑어본다. 그리고 소녀의 혀 밑에 놓여 있던 반지를 발견한다. 이를 수상히 여긴 사제는 반지를 꺼내 가져가버린다. 그런데 이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왕은 돌연 마음을 바꿔 소녀의 사체를 허겁지겁 매장한다.

    반지를 사랑한 왕

    그날 이후부터 왕은 소녀가 아닌 반지를 지닌 사제를 쫓아다니기 시작한다. 당황한 사제는 이 모든 마력이 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여기고 주머니 속 반지를 꺼내 콘스탄스 호수에 던져버린다. 자, 그럼 이제 왕은 어떻게 되었을까? 왕은 그날 이후부터 호수를 바라보며 매일매일을 흘려보낸다. 늙어 죽을 때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왕은 호수만을 바라본다. 이제 그는 호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반지를 사랑한 왕’으로 알려진 이 전설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불분명하고 야릇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누군가를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그 이유는 분명치 않다. 절세미인을 사랑의 조건으로 내세우던 사람이 추녀에 가까운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조건만을 따지던 남자가 순전히 외양에만 이끌려 사랑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랑의 덫은 알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어 아무리 낮은 포복으로 기어도 언젠가는 한 번 엉뚱하게 사로잡히곤 한다. 아니, 지나간 사랑은 다 이렇게 엉뚱해 보인다. 그런데 ‘반지를 사랑한 왕’에는 조금 더 불온하고 내밀한 사랑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것은 왕이 매료된 사랑이 세상이 허락하는 온당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선 왕은 어린 소녀에게 빠져든다. 그리고 이후에는 동성인 사제와, 마지막에는 사물인 호수와 사랑에 빠진다.

    어떤 점에서 이 이야기는 평범한 또래의 여인이 아닌 ‘별난 사랑’에 빠진 사람을 위한 전설일지도 모른다. 만일 당신 곁에 완벽한 이성을 지닌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허덕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마법의 반지일 때문일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세상이 허락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훌륭한 알리바이가 되어준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랑에는 신화가 따라 붙는다. 여기, 이 남자들도 그녀들의 ‘혓바닥’ 밑에 감춰진 반지 때문에 불온하고 도착적인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세상이 불허하는 사랑, 아니, 비난하고 질타하는 사랑. 훌륭한 왕이었던 남자를 광인으로 그리고 추방자로 만드는, 남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사랑. 그 사랑의 속내에는 이해할 수 없는 ‘반지’의 매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죄이자 축복인 그녀

    “로리타 내 삶의 빛, 내 남성의 불꽃이여, 나의 죄악, 나의 영혼이여. 로.리.타. 혀끝이 세 번 올라가 입천장에 붙으면서 이를 세 번 건드린다. 로.리.타.”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허벅지를 드러내고 소파에 걸터앉는다. 아이라기에는 조금 여성스러운, 하지만 여자라고 보기엔 한참 어린 그녀, 그녀는 자신의 처녀성을 무기처럼 전시하고 아직 어린 자신의 몸을 무방비로 드러낸다.

    유럽에서 온 교수 험버트 험버트는 소녀들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연약하고 몽상적인 천진난만함과 말괄량이 같은 천박함의 혼합.” 덜 자란 소녀들의 몸짓에는 분명히 이런 이율배반적인 힘이 있다. 아이와 여성의 경계에 선 그녀들에게서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필연성에 따른 안타까움이 배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힘을 성적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늙은 남자의 시선이다. 아니, 그러한 소녀가 여성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죄의식과 황홀함을 함께 고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인간다움이고 도덕이며 윤리다. 윤리이자 도덕이라 부르는 사회적 질서는 소녀의 육체에 눈감고 그녀의 나이를 바라보라고 명령한다. 그녀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순간 남자는 변태가 되고 패륜아로 축출당한다. 여기 이 남자, 험버트 험버트처럼 말이다.

    출간 당시 포르노그래피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던 소설 ‘로리타’는 소녀들을 향한 남자들의 끊임없는 애정을 입체화하고 있다. 형법상 아동 학대이자 심각한 범죄로 분류되는 이러한 현상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문학비평가들은 로리타를 향한 늙은 교수의 사랑을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북미권에 대한 늙은 유럽 지성의 짝사랑으로 분석했다. 어쩌면 이러한 분석은 옳은 것이기도 하지만 윤리적으로 파멸적인 사랑을 이성적이면서 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다.

    로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시선은 분명 도착적이고 변태적이다. 그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인정해야 할 것은 험버트가 가진 그 욕망이 단순히 한 소녀의 처녀성을 빼앗기 위한 마초적 정복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로리타’에서 이목을 끄는 충동과 욕망은 일회적일 수밖에 없는 ‘소녀’라는 지표가 가진 그 순수함에 대한 열망이다. 이는 되돌아갈 수 없는 젊음에 대한 미칠 듯한 동경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로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고백, 신음과 절규에 가까운 환호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나의 불꽃이자 죄이며 기쁨인 소녀”, 기쁨이자 아픔이고 죄이자 축복인 그녀, 그녀가 바로 ‘로리타’이니 말이다.

    ‘로리타’는 우리가 도덕이나 규칙, 윤리라고 말하는 그 모든 질서를 위배하는, 도발적인 영화다. 그 도발성은 우선 험버트가 ‘로리타’라고 부르는 소녀가 바로 법적인 딸이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인 험버트는 뉴잉글랜드에 숙소를 구하러 갔다가 돌로리스라는 딸을 데리고 사는 과부의 집에 들르게 된다. 그는 소녀를 보는 순간 반하게 되고, 그 집에 머물 것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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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리타’

    간교함의 매력

    심각한 것은 그가 후에 ‘로리타’라고 부르게 될 이 소녀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그녀의 엄마와 결혼한다는 사실이다. 루카치의 말처럼 사랑하는 여자를 평생 얻기 위해 그녀의 가족과 결혼해버린 것이다. 자신의 딸에게 ‘다른 감정’을 지니고 있을 줄은 짐작도 하지 못한 헤이즈 부인은 이 어두운 내면의 남자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다. 험버트의 일기 속에서 자신의 딸에 대한 마음을 알고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헤이즈 부인은 놀라움에 뛰쳐나갔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될 결정적 순간. 그렇다면 험버트의 욕망은 실현되는 것일까?

    블라디미르 나브코프의 소설 ‘로리타’는 스탠리 큐브릭과 애드리언 라인 감독에 의해 두 번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로리타’는 중년 남성이 소녀의 발칙한 유혹에 이끌리는 감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한다. 로리타는 순결하지도, 그렇다고 무구하지도 않다.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있다.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을 순진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이 간교함이 필연적 매력이라는 사실이다. 소녀는 자신을 전적으로 숭배하는 늙은 남자의 애정을 이용할 줄 안다. 이것은 어떤 관계에서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전폭적 신뢰를 받을 경우에 생겨나는 아이러니다. 소녀는 자신의 어린 육체와 순진함을 무기로 활용한다. 이미 그녀는 순진한 소녀라기보다 순결성을 유혹의 도구로 삼을 만큼 교활하다. 아무렇지 않은 행위 하나하나에 양아버지가 숨죽이는 것을 안 소녀는 의도적으로 방심을 연출한다. 삐뚤삐뚤 입술을 칠한 채 여읜 종아리를 흔들기도 하고 아무곳에나 속옷을 드러내며 풀썩 주저앉기도 한다.

    심지어 그녀는 험버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꿰뚫고 자신을 그에게 허락한다. 이미 처녀가 아닌 자신을 말이다. 험버트는 그녀의 이런 행동에 마음이 베이듯 아프게 바라볼 뿐이다. 험버트는 여러 가지 규칙과 질서를 어긴 범죄자다. 그는 법적으로 딸인 아이를 근친상간하였고, 미성년자에게서 육체를 얻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점점 파멸해가는 것은 로리타가 아니라 험버트 자신이다. 날개를 얻은 새처럼, 로리타는 어느새 그의 품에서 벗어나 날아가지만 험버트는 지나간 욕망의 그림자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험버트에게 로리타는 자기 존재 모두를 건 ‘대상’이었지만 로리타에게 험버트는 살기 위해 필요한 잠시의 공간에 불과하다. 이 쓸모없는 무용의 공간에서, 험버트는 쓰러져간다. 로리타에게 그는 상처도 주지 못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밝혀진다. 로리타를 품에 안는 순간 험버트의 욕망은 달성되는 듯하지만,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하강하고 만다.

    험버트의 욕망은 되돌아갈 수 없는 순간에 대한 그리움과 닮아 있다. 어린아이들이 잔인한 까닭은 바로 그 시절을 돌이킬 수 없음을 어른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잃어버린 젊음을 목도하듯 그렇게 험버트는 로리타를 바라본다. 그것은 가질 수 없다기보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기에 더 안타까운 감정으로 자리 잡는다. 어쩌면 험버트가 사랑한 것은 돌로레스가 아니라 ‘로리타’라고 불리는 혓바닥 밑 반지였을지도 모른다. 이 위험하고도, 나쁜 사랑은 ‘반지’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패륜이니 말이다.

    영화 ‘데미지’의 스테판 플레밍(제레미 아이언스 분)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다. 기자로 성장한 훌륭한 아들을 두고 있고, 막강한 배경의 처가 덕분에 의사라는 직업말고도 정치가로서도 명망을 얻는다. 아버지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를 흠집 낼 만한 상황은 없어 보인다. 그만을 바라보는 우아한 아내도 남자의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액세서리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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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데미지’

    아들의 체취가 가시기도 전에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삶에 한 여자가 사고처럼 끼어든다. 칵테일 파티에서 만난 묘하게 음울한 눈빛의 여인, 안나 바튼(줄리엣 비노슈 분).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잠들어 있던 어떤 움직임을 감지한다. 운명의 지침을 돌린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처럼 그녀는 그렇게 그에게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들어온다. 이제 그의 삶에는 안나라는 여자의 발자국이 남게 된다. 문제는, 그 안나가 바로 아들 마틴의 애인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속에서 아들 마틴은 안나를 집에 데려와 부모님께 소개한다. 스테판은 별것 아닌 연애이겠지 치부하면서도 두 사람이 마주 잡은 손과 눈길을 보면서 질투를 감추지 못한다. 게다가 이 감정은 스테판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안나도 스테판에게 어떤 유혹을 감지하고 자신 역시 감관을 한껏 곧추세우고 있다. 망설이던 안나는 스테판에게 전화를 건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스테판의 태도는 가히 놀랍다. 그는 안나의 전화를 받자마자 그녀에게 집 주소를 묻는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두 사람은 안나의 집에서 첫 번째 섹스를 나눈다.

    스테판에게 유례없던 일, 낯선 여자에게 전화가 걸려오자 비서는 수상한 눈빛을 한껏 담아 스테판을 쳐다본다. 만일 스테판이 법과 질서 위에 구축된 그 모든 것으로부터 구원받고 자기 스스로에게 용서받으려면 바로 거기서 멈췄어야 한다. 경고를 보내듯, 비서는 의심쩍은 눈빛을 보내지만 스테판은 애써 그 눈빛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감각의 제국으로 향한다.

    이미 스테판은 그녀와 일탈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충분히 준비되었던 스테판에게 사실상 안나는 도화선이었을 따름이다. 문제는 아들 마틴과 안나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 있다. 안나는 마틴과 스테판을 모두 사랑한다고 말하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간다. 물론 아들 마틴이 모르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이제 마틴과 스테판은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연적이 된다. 마틴은 모르지만 이미 스테판에게 그는 연적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사랑의 비극은 안나와 마틴이 프랑스로 휴가를 떠날 때 극대화된다. 마침 국제회의에 참석하러 브뤼셀에 가 있던 스테판은 12시간 동안 주어진 휴식시간에 기차를 타고 마틴과 안나가 머무는 숙소를 찾아간다.

    그리고 곤하게 잠든 그녀를 불러내 길거리에서 급하게 그녀를 얻는다. 아직 몸에서 아들의 체취도 가시지 않은 그녀를 안은 스테판은 그녀를 독점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우연히 안나와 마틴이 머무는 방 맞은편에 머물게 된 스테판이 그들을 바라보며 오열하는 장면은 이 비극적 선택을 한 남자의 비애를 잘 보여준다.

    자살한 오빠를 그리는 섹스

    이제 남자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한다. 가족, 정치가로서의 삶, 의사로서의 직업, 그 모든 것을 말이다. 그래서 런던으로 돌아온 스테판은 안나에게 아내와 헤어지겠다고 말하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거부한다. 나와 결혼한다면 그 순간 이후로 나는 당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가족, 아내가 되고 만다고. 단지 나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절박함이 결혼을 필요로 할 뿐, 그게 당신과 나 사이에 진정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쯤 되면 알 수 있다시피 안나는 남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또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는 여자다. 그 조절의 배경에는 자신이 거절했던 친오빠의 자살이 깔려 있다. 둘도 없는 친구이자 남매지간이었던 오빠의 죽음은 안나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그리고 그늘 속에서 자라난 안나는 마치 자신이 사랑했던 애인-오빠에게 복수를 하듯 마틴을 배신하고, 한편으로는 애인이자 오빠였던 그에게 사죄하기 위해 스테판과 섹스를 나눈다.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스테판과 안나의 섹스신이 회를 거듭하면서 점점 알몸의 섹스로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처음엔 옷을 다 입은 채 했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의 몸을 완전히 드러낸 채 한다. 마치 정치가, 남편, 아버지, 의사라는 모든 사회적 이름을 지움으로써 ‘아들의 여자’가 아닌 여자와 만난다는 듯 그는 열정적으로 섹스를 나눈다.

    하지만 막상 그가 이 모든 것을 벗어던졌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파국과 만나게 된다. 알몸이 된 스테판과 안나를 본 마틴이 충격을 받고 추락사하고 만 것이다. 스테판은 알몸으로 뛰쳐나와 피투성이가 된 아들을 껴안고 오열한다. 자신의 몸에서 비롯된 아들이 자신의 몸이 저지른 비행 때문에 사그라지는 것을 본 순간, 그는 모든 사실을 부인하고자 몸부림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옷자락’은 하나도 없다. 그는 이제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남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스테판의 파멸이 충격적인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남자다운 남자이며, 아버지다운 아버지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그를 수식하는 ‘아버지’라는 용어는 그의 정체성이자 권력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며느리’와 사랑에 빠진다. 아니, 여기엔 사랑이라는 말이 부적합하다. 그는 그녀의 육체성에 매료되어 자신이 공들여 쌓아온 체계를 무너뜨리고 만다. 자신이 만들어두었던 공간에 스스로 흠집을 내는 순간 우리가 질서라고 불렀던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욕망을 가둠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던 모든 체계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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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올드 보이’

    “끔찍한 기억을 지워주세요”

    영혼을 훔친 반지처럼, 어쩌면 그녀는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유혹의 덫이었는지 모른다. 로리타를 사랑했던 험버트도, 안나의 치명적 매력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던 스테판도 이제 그녀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 채 홀로 남겨져 있다. 남아 있는 것은 더러운 사랑에 빠졌다는 세상의 낙인과 비난, 자멸감뿐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남루한 욕망의 언어에 귀 기울인 그 남자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로리타와 안나를 ‘정말’ 사랑했기에 파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위험한 연애가 아니라 불온한 사랑을 한 셈이다. 어쩌면 그 남자들은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멀쩡하게 숨기고 있는 깊은 도착과 왜곡의 돌출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윤리 감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불쾌한 남자들을 애써 빨리 지워내려 한다. 그들의 비행이 치명적인 것은 우리의 내면 깊숙이 가둬둔 금기를 건드리고 시각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버지들은 현실에 존재해서도 인정해서도 안 되는 불쾌한 오점들인 셈이다.

    딸과  근친상간하고 며느리와  섹스하고…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고려대·극동대 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종합예술대 강사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는 최면술사에게 자신의 기억을 지워달라고 요구하는 오대수의 모습으로 끝난다. 오대수는 말한다. 그 끔찍한 기억을 지워달라고. 최면술사는 대답한다. “자, 일곱 걸음 걸어가세요. 일곱 걸음을 걷고 나면 기억을 하는 오대수라는 몬스터는 한 걸음에 십 년씩 나이를 먹어 죽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지우고자 했던 기억은 무엇일까.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딸이라는 것? 아니면, 그녀와 섹스를 나누었던 기억? 질문을 바꿔보자. 과연 기억을 지운다고 할지언정 뭐가 달라질까. 기억을 지운다고, 딸과 저지른 불륜과 비행이 사라질까. 그럼에도 왜 오대수는, 그리고 우리는 망각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일까. 법과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와 욕망, 어쩌면 그 조화는 무시무시한 욕망을 망각의 늪에 빠뜨린 덕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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