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20대가 취재한 20대 동거문화

“결혼은 연습해보면 왜 안되지요?”

  • 피주영 신동아 인턴기자 (서강대 독어독문학과 4년) dasbeida2000@hanmail.net 조병주 신동아 인턴기자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4년) talented_bj@naver.com

    입력2008-09-03 17: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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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무한도전’과 ‘1박2일’이 주춤한 사이, ‘동거’를 소재로 한 가상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 공중파 가운데에는 MBC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와 SBS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가 ‘동거’를 소재로 하고 있고, 케이블 방송국에서는 ‘동거’를 더욱 과감하게 다룬 프로그램을 쏟아내고 있다. ‘색다른 동거’ ‘계약동거’ ‘발칙한 동거’ ‘아임 팻’ 등은 이미 시즌1을 마치고 후속편을 방영하고 있다.
    • ‘동거’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안방을 점령하면서 기성세대들이 낯부끄러워하며 쉬쉬하던 ‘동거’가 젊은 세대에게는 더 이상 불경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게 됐다. 오히려 연애의 한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을 정도다.
    20대가 취재한 20대 동거문화

    ‘동거’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안방을 점령하면서 젊은 세대에게 ‘동거’는 더 이상 불경한 것으로 다가오지 않게 됐다. 사진은 SBS 드라마‘달콤한 나의 도시’의 한 장면.

    1970년대와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동거’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잡지의 단골 소재였다. 다루는 내용도 대부분 혼전동거가 갖는 성적 판타지에 국한됐다. 당시 범람했던 에로영화 역시 동거남녀의 성행위를 묘사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2008년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동거’는 더 이상 ‘은밀’한 소재가 아니다. 쉬쉬하고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 달라진 세태를 반영한다. 동거가 단지 거주형태를 규정하는 단어에 그치지 않고, 현재 젊은이들의 사고와 행동, 생활 문화 등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동거에 대한 젊은이들의 인식이 과거에 비해 얼마만큼 달라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남정보대학이 2008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0%가 혼전동거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이들이 주로 회원으로 가입한 포털사이트의 동거 관련 카페만 해도 1200여 개에 달하고, 회원 20만명이 넘는 카페도 있다. 젊은 네티즌들의 이야기 광장으로 통하는 DC인사이드와 Nate Talk Talk, DAUM 아고라 등에서도 동거와 관련된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은밀한 성적 뉘앙스’를 풍기며 터부시되던 ‘동거’가 우리 사회의 성의식 변화와 맞물리면서 이제 공개된 공간에서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토론되는 주제로 바뀐 것이다.

    대학 신입생 80% 혼전동거 찬성



    남녀 동거 커플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성관계를 동거의 주된 목적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 출신 여자친구와 동거를 한 경험이 있는 최동석(가명·24)씨. 그는 ‘우결’과 ‘아임 팻’ 등 요즘 인기 있는 가상 버라이어티 얘기를 꺼내자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는 “TV 프로그램은 가상 프로그램일 뿐, (현실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자유롭게 얘기되지 않고 있다”며 “성관계를 목적으로 동거를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성(性)은 동거에 있어 결정적인 요소다”라고 했다. 상대방을 좋아하면 더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그렇게 함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

    대학생 김지훈(가명·남·25)씨는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이 (동거의) 가장 큰 이유”라고 솔직하게 얘기한다. 좋아하는 감정을 성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은 오늘날 젊은 세대에겐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20대가 취재한 20대 동거문화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대학가에서는 생활비는 물론 연애비용까지 절약하기 위해 동거에 들어가는 ‘알뜰형’커플이 늘고 있다.

    성적 욕구 해소뿐 아니라 어려워진 경제 상황과 맞물려 생활비 절약도 혼전동거의 이유가 되고 있다. 서울 신촌에서 대학을 다니는 나강문(남·25)씨는 얼마전부터 직장에 다니는 여자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다. 나씨는 “전셋집에 여자친구가 들어와 함께 사는데, 여자친구는 집세를아끼는 대신 생활비를 더 내기 때문에 서로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겨 좋다”고 했다. 나씨는 “식사는 집에서 해먹거나 학교에서 해결하고, 함께 있을 공간이 있어서 따로 커피숍이나 극장에서 만나는 데이트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고 했다. 동거를 함으로써 외식비가 줄고, 유흥비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동거 커플들은 외부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물론, 비용도 들이지 않고 성관계를 가질 장소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나씨는 “혼자 살 때 친구들을 불러들여 밤늦도록 술 마시고 방에서 흡연하던 생활습관도 동거를 시작하면서 사라졌다”고 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과정에서 술을 끊어 건강도 지키고 술값으로 나가던 적지 않은 돈도 절약할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위한 동거라면 편견을 갖고 바라볼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 학기 400만원이 훌쩍 넘는 등록금에 매달 들어가는 방값, 여기에 용돈까지 감안하면 ‘경제적인 이유’로 동거를 택한다는 얘기가 변명만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다.

    더욱이 동거 커플들은 경제문제 해결뿐 아니라 남성은 여성을 통해 생활관리가 가능하고, 여성은 남성을 통해 안전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다는 점에서 동거가 어느 일방에게만 이익이 되는 게 아닌 상호 윈-윈(Win-Win)하는 관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치솟는 물가와 떨어질 줄 모르는 대학가 부동산 가격, 평균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상회하는 대학 등록금 인상률 등이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대학생들로 하여금 점점 더 동거를 대안으로 선택하게 만드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상돈 고려대 법대 교수는 “기성세대의 동거는 피치 못할 이유로 맺는 사실혼의 형태로만 가능했다. 혼전(婚前), 혼외(婚外) 동거는 성윤리의 경직된 권력 작용에 의해 철저하게 비정상적인 삶의 형태로 낙인찍혔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이 동거를 하나의 ‘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 윤리적 권력이 해체되고 있음을 뜻한다”고 오늘날 동거 문화를 평했다.

    혼전동거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동거를 결혼의 사전연습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적지 않다. 일단 살아보고 결정하겠다는 생각으로 동거를 시작하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결혼을 미뤄야 할 경우 동거하기도 한다.

    높은 이혼율 보고 ‘살아보고 결혼하자’

    20대가 취재한 20대 동거문화

    법적 구속력이 없는 동거 커플은 마음이 맞지 않으면 쉽게 헤어진다고 한다. 사진은 이혼 위기에 처한 실제 가정의 사례를 통해 가족 간의 역할과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한 장면.

    학원 강사와 과외 아르바이트 등으로 매월 300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김경훈(가명·남·28)씨는 동갑내기 여자친구와 동거하며 그녀의 행정고시 뒷바라지를 하고있다. 2년 가까이 같이 지냈는데 그녀가 합격하면 그 다음은 자신이 고시 준비를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들처럼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서 동거를 하며 서로 뒷바라지하는 커플이 적지 않다. 신림동 근처 부동산 중개소에는 고시원이나 원룸을 알아보려는 남녀 커플이 심심치 않게 들른다고 한다. 이들은 장래에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 준비과정으로 동거를 택한 경우다.

    하지만 종종 결혼 예행연습으로 동거를 시작했다가 결별한 커플도 적지 않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사는 이선영(가명·여·26)씨는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면서 직장에 다니는 남자친구와 동거를 했다. 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결혼할 생각이었지만, 동거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동거를 하기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보게 되면서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다. 이씨는 “함께 살다가도 싫어지면 법원까지 갈 필요 없이 헤어질 수 있어선지 동거 커플은 관계가 오래가지 않는다”고 했다. 김지훈씨(25)도 “동거 사실을 부모님이 모르는 데다 친한 친구 몇 명만 입단속하면 헤어지는 데 부담이 없기 때문에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이혼한 부부는 12만5000쌍 정도다. 예년에 비해 소폭 감소했지만, 여전히 유럽이나 일본 수준의 높은 이혼율을 기록하고 있다. 주변에서 결혼 이후 결별하는 부부들을 지켜본 젊은이들은 ‘살아보고 결혼하자’ ‘겁나서 결혼 못 하겠다’는 신중론과 회의론에 근거해 동거를 시작하는 셈이다.

    하지만 동거는 결혼과 달리 법적 ‘구속력’이 없기에 언제든 쉽게 헤어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 광장에서 동거를 주제로 한 내용을 살펴보면 동거의 역효과에 대한 것이 많다. 성관계에서부터 경제, 성격, 집안 문제 등 동거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문제점이 동거 후에 드러난다는 얘기가 주를 이룬다.

    동거 부작용 우려 목소리도

    동거와 성(性)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만큼 성관계에 따르는 책임도 무겁다. 실제 인터뷰 과정에 한 여성은 원치 않은 임신을 하는 바람에 아이를 고아원에 맡긴 일을 어렵게 털어놨다. 이 여성은 “성관계는 양쪽이 모두 만족할 수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책임을 잊어선 안 된다. 성관계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임신과 같은 상황을 사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성에 대해 개방적인 풍토가 조성됐다 하더라도 성을 단지 ‘즐기는’ 수준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동거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인지, 반대로 기존의 공동체 문화를 파괴하는 기능을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쟁이 분분하다. 다만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동거를 택하는 것에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특히 동거를 경험했거나 동거생활을 유지하는 커플들은 한결같이 ‘핑크빛 환상과 낭만에 사로잡혀 시작하는 동거’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동거란 상대방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애인과 헤어지는 것과 가족과 헤어지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냥 좋다고 섣불리 동거를 결심하면 나중에 더 큰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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