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호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모자람보다 넘치는 편을 택한 승부사

  •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09-03-06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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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나라를, 심지어 세계를 쥐락펴락한 그들에겐 어떤 특별함이 있을까. 역사에 기록된 메마른 사실에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음으로써, 세월에 묻힌 그 남자들의 매력을 끄집어내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 첫 번째로,영국의 수장이었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무엇보다 사후(死後)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영국인이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는 윈스턴 처칠의 매력을 탐구한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남자의 매력이란 어떤 것일까. 능력이나 인간성, 화술 등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외모’일 것이다. 정치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대중에게 늘 모습을 드러내고 평가받는 정치인에게 외모는 결정적인 강점이자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정치 신인 오바마 후보가 4선 상원의원 매케인을 물리친 데는 그의 매력적인 외모 - 188cm의 키에 농구로 다진 강인하고 늘씬한 몸매 - 가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Sir Winston Churchill·1874~1965)은 ‘매력적인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160cm를 겨우 넘는 단신에 뚱뚱했으며, 등이 굽은 데다 대머리였다. 목은 거의 안 보였고 입술은 너무 얇아 마치 없는 것 같았다. 20세기 영국 정치사에 유일하게 귀족 혈통을 이어받은 총리였지만, 외모만은 결코 ‘귀족적’이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

    ● 1874년블렌하임궁에서 출생

    ● 1893년샌드허스트 사관학교 입학



    ● 1900년하원의원 당선

    ● 1905년통상장관으로 입각

    ● 1908년클레멘타인 호치에와 결혼

    ● 1911~1915년해군장관

    ● 1917년군수장관

    ● 1925년재무장관

    ● 1939년제2차 세계대전 발발, 해군장관으로

    10년 만에 입각

    ● 1940년총리 임명

    ● 1945년제2차 세계대전 종전

    총선 패배로 총리직 사임

    ● 1951년총리로 재입각

    ● 1953년노벨문학상 수상

    ● 1955년총리직 사임

    ● 1965년91세로 타계

    남자의 매력이란 때로 외모의 열등함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모양이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그리고 다시 1951년부터 1955년까지 도합 9년간 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은 가장 성공한 총리이자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으니 말이다. 2002년, 영국 국영 방송국 BBC는 ‘지난 1000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을 설문조사했다. 수백만명의 시청자는 셰익스피어나 뉴턴, 엘리자베스 1세 등을 제치고 처칠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했다.

    풍전등화의 영국

    왜 영국인들은 이 땅딸막한 신사, 나비넥타이를 매고 시가를 피우며 승리의 V자를 그리는 단신의 남자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남자가 국가적 비상사태에 보여준 놀라운 용기와 결단력 때문이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스에 맞선 최후의 지도자였다. 전 유럽을 무릎 꿇게 만들었던 히틀러도 무모할 정도의 용기와 고집으로 똘똘 뭉친 이 남자를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시계를 반세기 전으로 돌려, 섬나라 영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던 1940년 5월의 런던으로 떠나보자.

    1940년 5월9일 오후, 흔히 ‘빅벤’으로 불리는 템스강변의 국회의사당에 집권당인 보수당의 핵심 인물들이 모였다. 회동의 참석자는 네빌 체임벌린 총리, 에드워드 할리팩스 외무장관,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 그리고 데이비드 마게손 보수당 원내총무였다. 네 남자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거웠다. 이들은 지금 아주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처지다. 이날의 결정으로 영국의, 아니 유럽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거듭된 실패와 좌절

    정확하게 말하자면 체임벌린 총리는 이미 총리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이틀 전인 5월7일, 체임벌린은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을 막지 못한 데 책임을 지고 보수당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내각책임제인 영국에서는 총리가 임기 중 물러나면 새로운 여당 당수가 자동으로 총리직을 승계한다. 선거 없이 총리가 교체되는 것이다.

    영국은 1939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독일과 협상을 벌여 전면전만은 피하자는 것이 체임벌린 내각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협상의 결과는 대책 없는 양보 또 양보뿐이었다. 히틀러는 협상의 대가로 유럽의 국가들을 하나씩 요구했고,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베네룩스 3국, 그리고 마침내 스칸디나비아 반도마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러시아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바다 건너 미국은 물자는 지원해도 참전은 어렵다며 한발 물러서 있었다. 유일한 동맹국 프랑스마저 굴욕적인 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영국은 독일의 속국이 되느냐 아니면 맞서 싸우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비상시국을 맞아 여당인 보수당과 야당인 노동당은 여야를 막론한 전시 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전시 내각을 이끌 총리, 즉 보수당수가 공석인 상황. 5월9일 회동은 새 총리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체임벌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리팩스 외무장관께서 맡아주시겠소?” 좌중의 시선이 할리팩스에게 쏠렸다. 할리팩스는 1938년부터 외무장관을 맡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을 직접 만나 협상을 벌여온,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명망 높은 귀족이자 상원의원으로 보수당 내의 신임도 두터웠다. 할리팩스는 머뭇거렸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할리팩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상원의원인 제가 총리를 맡는 것은 관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뜻을 알기 위해서는 영국의 독특한 양원제를 이해해야 한다. 영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실제적인 권력은 하원에 집중되어 있다. 상원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로 구성된다. 즉 영국 귀족의 장자는 아버지가 타계하면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고 자동으로 상원의원이 되는 것이다. 상원의원은 명예직일 뿐, 실제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다. 이 같은 역사적 관행을 들어 상원의원인 할리팩스가 총리직을 거절한 것이다.

    그때 말없이 앉아 있던 처칠 해군장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외무장관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 역시 상원의원이 총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 역시 경력은 할리팩스 못지않게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30대이던 1905년에 입각한 이래 내무장관, 해군장관, 재무장관 등 내각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문제는 그 경력의 대부분이 실패로 끝났다는 데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해군장관이던 처칠은 다르다넬스 작전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다 20여 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작전 수행에 실패했고, 전후(戰後) 재무장관으로 임명됐을 때는 무리하게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금본위제도를 환원시켜서 영국에 1929년 대공황이라는 악몽을 떠안겼다.

    처칠은 보수당원으로 하원에 입성했다가 1904년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1924년 다시 보수당에 복귀했다. 이 때문에 보수당원들은 처칠을 배신자로 낙인찍은 지 오래였다. 결정적으로 처칠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기중심적 스타일이라 토론과 합의를 중시하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에 영 적응하지 못했다. 총리인 체임벌린조차 “천국의 즐거움을 다 주어도 처칠과 같은 내각에 있고 싶지는 않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보수당 내에 적(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66세의 처칠이 10년 만에 다시 입각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처칠은 이미 1934년에 나치스의 공군기가 런던을 폭격할 가능성이 있다며 영국 공군 전력의 강화를 주장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 전쟁이 한 세대 전의 제1차 세계대전 못지않게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수당 내각은 부랴부랴 처칠을 불러들여 해군장관을 맡겼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승리”

    아무튼 1940년 5월9일 회동에서 처칠이 자신의 말에 담은 뜻은 분명했다. 그 자신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체임벌린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영국 의회의 관례에 따라 체임벌린은 국왕 조지 6세에게 처칠의 총리 임명을 청원했다. 조지 6세 역시 체임벌린 못지않게 처칠을 싫어했다. 조지 6세는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 윈저공 에드워드 8세의 동생으로, 에드워드 8세의 양위에 의해 1936년 왕이 된 인물이다. 당시 볼드윈 총리를 비롯한 전 내각이 조지 6세의 즉위를 찬성했지만, 오직 처칠만이 끝까지 반대했다. 양위가 결정된 후에도 처칠은 에드워드 8세의 양위 연설문 작성을 돕는 등, 물러나는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니 조지 6세와 왕비 엘리자베스가 처칠을 미워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조지 6세에게 신임 총리 임명 청원을 물리칠 권한은 없었다. 1940년 5월10일, 윈스턴 처칠은 전시(戰時) 영국 내각의 수장이 되었다. 총리가 된 후, 처칠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을 총리로 만들어준 체임벌린에게 감사 편지 쓰기였다. 그는 마음속 깊이 총리가 되기를 원했고, 영국이 처한 난관을 뚫고 나갈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총리가 된 후 처칠은 한 측근에게 “진심으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5월13일, 하원에 출석한 처칠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내가 국민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와 노고, 땀과 눈물뿐입니다… 여러분은 제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바다와 땅과 하늘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동원해 싸우는 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여러분은 또 물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이냐고. 나는 한마디로 대답하겠습니다. 승리라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도 승리하는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승리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피력한 처칠의 연설은 성과 없는 협상과 계속되는 패배에 지쳐 있던 의원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하원은 만장일치로 그의 총리 임명을 가결했다. 처칠은 곧 보수당과 노동당 인사를 막론한 거국 내각을 구성했다. 부총리에는 노동당수인 애틀리가 임명되었고 처칠 본인이 총리와 함께 국방장관, 해군장관을 겸했다. 처칠은 마침내 국정을 다스릴 전권, 영국의 운명을 자신의 손아귀에 거머쥔 것이다. 그러나 그 운명은 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나치스의 영국 본토 공습이 임박했던 것이다.

    영국 국회의사당이 있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區)에는 ‘윈스턴 처칠 박물관 겸 전시 내각의 방(Churchill Museum and Cabinet War Rooms)’이 있다. ‘전시 내각의 방’은 상무부 건물 지하에 비밀리에 지어진 벙커의 이름이다. 미로 같은 지하에 50여 개의 작은 방과 사무실, 회의실, 미국과 연결된 핫라인 전화 등이 설치돼 있다. 처칠을 비롯한 전시 내각은 1940년 10월부터 나치스의 공습을 피해 이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며 전쟁을 지휘했다. 처칠은 ‘이런 곳에 숨어서 전쟁을 지휘해야 하느냐’며 탐탁지 않아 했지만 1940년 10월15일 독일 전투기가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공관)를 정확하게 폭격하자 지하 벙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처칠은 작전회의를 숱하게 주재하고, 대서양 건너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밀담을 주고받았으며 새벽 5시까지 전황 보고를 받고 연설문을 썼다. 나치스는 이 비밀 벙커의 존재를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The Finest Hour”

    전시 내각의 방을 방문한 관광객은 처칠의 방송 연설 육성을 들을 수 있다. 1940년 9월11일, 독일 공군기가 최초로 런던을 공습한 지 나흘 만에 BBC 라디오를 통해 전 영국인에게 했던 연설이다. 처칠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했다. 감정이 실린 열띤 음성이 아닌, 건조하고 침착한 음성이다. 처칠은 공포에 질린 영국인들에게 현재의 전황이 아주 불리하고, 영국이 나치스에 홀로 맞선 대가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며, 국가 자체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우리는 다음 주를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로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드레이크 경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넬슨 제독이 나폴레옹의 군대와 대치하던 그 며칠과 같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상황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인류의 생명과 미래, 문명에 대해 더 큰 규모로, 더 치명적인 결과를 몰고 올 것입니다.… 우리의 의무를 상기하고 분발합시다. 앞으로 1000년간 대영제국과 영연방이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지금 이때야말로 가장 좋았던 시절(The Finest Hour)’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공습의 공포에 질린 채, 숨죽여 라디오를 듣고 있던 런던 시민들에게 처칠의 연설은 마법 같은 힘을 발휘했다. 런던 시민은 이후 4만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 시민의 4분의 1이 집을 잃은 9개월간의 대공습을 의연하게 버텼고, 영국 공군은 나치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처칠은 영국 공군의 응전을 치하하며 “이토록 소수의 손에 이토록 많은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말했다. 예상외로 끈질긴 영국 공군의 저항에 부딪혀 독일은 영국 본토를 침략한다는 계획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처칠은 여느 총리와 달리 모든 연설문을 직접 썼다. 그는 전시 내각의 방에서 혼자 새벽까지 연설문을 쓴 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비서관에게 연설문을 건네주고 잠에 빠져들곤 했다. 처칠은 학창 시절 수학과 라틴어에서 구제불능의 낙제생이었다. 그는 명문 해로우 스쿨을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과 라틴어 때문에 3수 끝에 간신히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처칠은 대신 영어와 역사에는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등을 무척 좋아했고, ‘영어 사용 국민들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 등 20여 권에 이르는 역사서를 집필했다.

    처칠은 본래 정치인이나 총리, 하원의원이 아닌 작가였다. 30대에 이미 인세와 강연 수입으로 연 6억원을 벌었을 정도다. 처칠은 평생 동안 하루에 8대의 시가를 피우고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영국 남부 차트웰에 고급 저택을 짓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는데, 그것은 그가 귀족 집안의 자제여서가 아니라 20여 권의 저서에서 나오는 인세 수입이 늘 두둑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처럼 처칠은 “평생 먹고살 돈을 혀와 펜으로 벌었다.”

    “영어를 동원해 전투에 내보낸”

    처칠이 20대에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30대에 입각할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글 솜씨 덕분이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처칠은 짧은 장교 생활을 접고 ‘모닝 포스트’지(紙)의 기자가 되었다. 1899년, 보어 전쟁에 종군 특파원으로 파견된 처칠은 탈선한 열차에서 부상병을 구하려다 포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한 달 만에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이듬해 7월 영국으로 귀환했는데, 당시의 경험을 드라마틱한 종군기로 연재해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사선을 넘나든 보어 전쟁의 경험은 처칠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비명횡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을 안겨주었고, 실제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숱하게 전장을 누비고 다녔지만 매번 무사히 귀환했다.

    이처럼 뛰어난 작가였던 처칠의 펜 끝에서는 “국민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노고, 그리고 땀과 눈물뿐입니다” “만약 이 나라의 장구한 역사가 끝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피에 질식해서 땅바닥에 쓰러진 후의 일일 것” “우리는 바다와 하늘에서, 강과 항구에서, 들판과 시가지와 언덕에서 끝까지 싸울 것이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명연설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연설들은 마법처럼 영국인들을 일으켜 세웠다. 존 F케네디 대통령의 말대로 처칠은 “영어를 동원해서 전투에 내보냈”던 것이다. 지금도 영국인들은 4만3000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낸 1940~41년의 런던 대공습 기간을 ‘가장 좋았던 날’이라고 부르니 그의 ‘마법’은 반세기를 넘어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처칠의 연설이 특별했던 점은 단순히 미사여구 나열에 그치지 않고 늘 역사적 시각을 담고 있었다는 데 있다. 처칠은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긴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고난을 ‘일찍이 우리 선조들도 겪었던 고통과 투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대영제국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존재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는 처칠이 구사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역사학자인 앤드루 로버츠의 지적대로, 처칠의 연설에는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결의는 가득하나 어떤 방식으로 히틀러와 싸워 이길 것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은 들어 있지 않다. 처칠은 영국의 힘만으로는 독일을 물리칠 수 없고, 미국과 소련이 참전해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총리가 된 1940년 5월부터 미국이 참전한 이듬해 12월까지 19개월 동안,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승리를 장담하며 전쟁을 이끌어갔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처칠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었다. 주영 미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존 F케네디의 아버지)는 처칠에 대해 ‘음흉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러나 케네디 대사의 보고는 사실과 달랐다. 처칠은 참전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루스벨트에게 100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 진주만 폭격 이후에는 “만약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받는다면 영국은 한 시간 이내에 참전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등, 모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칠에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양국 정상이기 이전에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1941년 12월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연이어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소련은 이미 그해 6월부터 상호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침공해온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연설로는 늘 승리를 장담했지만, 처칠은 미국의 참전이 확실해진 뒤에야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대신에 히틀러를 물리친 뒤에는 소련에 유럽의 패권을 넘겨줄 것을 각오해야 했다. “독일에 전부를 주느니 소련에 반만 주는 게 낫다.” 처칠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 사이에서 회담하는 자신의 처지를 ‘커다란 덩치의 미국 들소와 소련 곰 사이에 앉은 가련한 영국 당나귀’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위트를 잃지 않았던 그는 이 말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 셋 중에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이는 오직 영국 당나귀뿐이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처칠이 남성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서 깊은 말보로 공작가(家)의 후손이기는 했지만 물려받은 유산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1908년, 영국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히던 클레멘타인 호치에 양과 결혼했다.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인 클레멘타인은 이후 처칠에게 반려자 이상의 정치적 동지이자 안식처, 그리고 최고의 친구였으며, 1남4녀를 낳으며 해로했다. 이 점만 보아도 처칠에게 평균 이하의 외모를 극복할 만한 특별한 매력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못 말리는 엉뚱함

    처칠이 가진 매력의 본질은 늘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는 데 있다. 처칠은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는 차가운 이성을 가진 동시에,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못 말리는 엉뚱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이 ‘장난꾸러기 소년’의 기질은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부서진 집과 거리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우는가 하면, 공습 중에 런던 동물원의 동물들이 놀라지 않도록 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군대에 맥주를 지급할 때는 후방보다 전방 병사에게 먼저 지급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해군 장관으로 재직하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참호에서 달릴 수 있는 전차, 즉 탱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탱크를 개발했다. 심지어 그는 전쟁 중에도 진짜 아이처럼 오후가 되면 반드시 낮잠을 자야 했다.

    이처럼 좌충우돌한 성향이 과묵하고 진지한 영국 사회에서 쉽사리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처칠이 정신병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거나, 알코올 중독자라는 소문이 의회에 끈질기게 나돌았다. 평생 처칠과 정치를 같이했던 로이드-조지는 처칠을 ‘잘 운전하다 갑자기 낭떠러지로 차를 몰아가는 운전수’에 비유했다. 심지어 처칠의 든든한 지원세력이었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마저 “처칠은 매일 100가지의 아이디어를 낸다. 그중에 여섯 가지 정도는 쓸모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처칠은 엄청나게 정력적이고, 엄청나게 귀찮은 독불장군이었던 것이다.

    이런 모순 자체가 처칠의 인간적인 매력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처칠은 보좌관과 내각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모시기 어려운 상사였다. 그리고 그가 전권을 장악한 5년 동안 쌓인 주위의 불만은 1945년 7월 영국 총선에서 ‘대폭발’하고 말았다. 승전을 보고한 지 두 달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하원의석 197석 대(對) 393석으로 애틀리의 노동당에 참패했다. 총선 당일 미·영·중·소 4개국 회담을 위해 포츠담에 가 있었던 처칠은 뜻밖의 소식에 부랴부랴 귀국해야 했다. 히틀러에게 이기고도 노동당에 졌으니, 처칠의 입에서 “이 배은망덕한 국가 같으니! ”라는 말이 튀어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

    국왕이 참석한 장례식

    6년 후인 1951년 처칠은 총선 승리로 다시 한 번 총리직에 복귀했으나 77세의 노령으로 국정을 수행하기에 무리였다. 결국 4년 후인 1955년 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내각에서 물러나 하원의원으로 남았다. 두 번째 총리 재임 중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한 나라의 수장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경우는 처칠이 유일하다.

    처칠은 평생 하루 여덟 개의 시가를 피우고 매일 샴페인과 와인을 마셨지만 한 세기 가까운 긴 삶을 영위했다. 처칠이 1965년 1월21일 91세로 타계하자 영국의 노동계는 그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모든 파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군왕은 신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했다.

    처칠은 업적만큼이나 많은 과오도 남겼다. 생의 대부분을 20세기에 살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난 19세기적 인물이자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여성참정권과 인도 독립을 맹렬하게 반대했고 마하트마 간디를 ‘현자인 척 하는 사기꾼’으로 매도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도 일본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해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하는 오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영국인들에게 처칠은 하나의 신화다. 아니, 비단 영국인뿐 아니라 전쟁에 나서는 모든 지도자는 처칠이 보여준 비범한 용기와 리더십을 본받으려 한다. 2002년 1월 이라크전을 앞둔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우리는 실패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약해지거나 지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는 처칠의 1941년 2월 연설을 그대로 인용했다.

    해로우 스쿨에서 낙제를 거듭하던 키 작은 소년, 병정놀이와 역사서에 빠져 있던 이 열등생이 히틀러의 무서운 야망에 맞서 전 유럽을 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은 ‘참전이 불확실한 동맹국들을 믿고, 나치스에 맞서 싸울 용기가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당시 영국 정치인 대다수가 이 같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처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히 전쟁에 뛰어들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꾀 많고, 겁 없던 ‘진짜 남자’

    내각에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여타 정치인들과 달리, 처칠은 젊은 시절부터 성공과 실패를 숱하게 반복해왔다. 다르다넬스 작전의 실패, 재무장관 시절의 실책, 두 번에 걸친 당적 이탈, 1930년대에 겪었던 10여 년간의 야인 생활 등 그의 경력은 롤러코스터처럼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고, 이런 와중에서 처칠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은 없다’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처칠이 본래부터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는 판단이 더 합당할 것이다. 보어 전쟁에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부상병을 구하기 위해 열차로 뛰어들었다가 포로로 붙잡혔던 것처럼, 그에게는 도박사에 가까운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승부사답게 그는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주저 않고 목숨을 내걸었다. 1년 가까이 끈 다르다넬스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처칠은 해군장관 직을 내던지고 직접 동부 전선으로 가 종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스코틀랜드와 동유럽을 비롯해 영국군이 전투 중인 모든 전장을 직접 찾아가 군인들을 독려했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을 때는 ‘영국군과 함께 노르망디 땅을 밟겠다’는 처칠의 결의가 너무도 굳세어 결국 조지 6세가 ‘친애하는 윈스턴에게’로 시작되는 친서를 보내 그의 노르망디행(行)을 만류했을 정도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처칠은 참다운 남자이자 진짜 군인이었다.

    만약 처칠이 오늘날 신화로 부각된 자신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아마 자신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불도그처럼 입을 꾹 다문 채 턱을 내밀고 승리의 V자를 그리던 이 남자는 본질적으로 겸손하기보다는 오만하기를, 모자라기보다는 조금 넘치는 편을 택하는 승부사였으니 말이다. 처칠은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벌레일 거야.”

    1945년 5월 8일 승전을 기념하며 구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윈스턴 처칠(가운데).

    런던의 마담 티소 박물관에 전시된 아돌프 히틀러와 윈스턴 처칠의 밀랍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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