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김영순 Style, 도시의 표준을 바꾸다

  • 송홍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9-11-09 10: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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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순 Style, 도시의 표준을 바꾸다
    백화점 가죠?”김영순 송파구청장이 뜬금없이 묻는다.

    “당연히 가죠. 왜 물으세요.”

    “백화점 입구에 회전문 있죠? 우측보행이에요, 좌측보행이에요?”

    “우측으로 걷죠.”

    초등학교 때 ‘교양인은 좌측통행’이란 구호를 익힌 게 떠오른다.



    “에스컬레이터는요?”

    “우측으로 오르내리는 것 같은데요.”

    그가 웃으면서 또 묻는다.

    “그런데 왜 좌측통행을 해왔을까요?”

    “….”

    2007년 7월, 송파엔 색다른 현수막이 걸렸다.

    ‘우측보행, 송파가 시작합니다.’

    한국서 가장 먼저 우측통행을 시작한 곳은 송파다. 말마따나 에스컬레이터, 회전문, 지하철 개찰구는 오른쪽 걷기를 기준으로 삼는다. 육상 트랙도 시계반대 방향으로 돌게끔 설계한다. 그런데 학교에선 왜 왼쪽으로 걸으라고 가르친 걸까?

    한국도 처음엔 우측통행이 원칙이었다. 첫 근대적 도로교통법인 1905년 ‘대한제국 규정’이 그렇다. 좌측통행으로 바뀐 건 1921년 조선총독부가 규정을 바꾸면서다. 그 후 한국인은 일제의 규정에 따라 왼쪽으로 걸었다.

    “우측보행이 사람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도로, 교통표지판도 우측보행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고요. 그동안 좌측보행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겁니다.”(한양대 인체공학연구센터 김정용 교수)

    인간의 인지·신경계는 좌측통행보다 우측통행을 선호한다. 좌·우뇌가 비대칭인데 주의력에서 우뇌가 좌뇌보다 우수하다. 우측통행하면 좌측통행할 때보다 정신부하, 심장박동수가 각각 13%, 18% 줄어든다.

    10월1일 보행자 통행 방식이 88년 만에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 지하철 역사 계단마다 화살표 모양의 우측통행 안내 표지가 붙었다. 인체가 설계된 방식 덕분인지 걷는 방향을 바꿨는데도 큰 혼란은 없었다.

    김영순 Style, 도시의 표준을 바꾸다

    사랑의 집짓기 행사에 참석한 김영순 송파구청장

    “잘못된 규정을 바로잡지 않고 88년 동안 엉뚱하게 걸은 겁니다. 건널목에 서서 사람이 오른쪽으로 걷나, 왼쪽으로 걷나 관찰해보세요. 전세계에 좌측통행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었어요. 일본도 1946년 우측통행으로 바꿨습니다. 옛날 같으면 우리만 안에서 고생하면 됐지만, 지금은 글로벌 시대예요.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얼마나 헛갈리겠습니까? 반대로 외국 나가서 왼쪽으로 걸으면 민폐겠죠. 송파가 2년 전 우측보행을 시작한 후 청와대에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2년여의 캠페인, 건의, 홍보 끝에 ‘김영순 법’이 국가의 표준이 됐어요.”

    김영순 Style

    2007년 봄, 송파구청 여권과는 오전 7시부터 붐볐다. 대기표를 받으려는 시민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다른 구청도 사정은 비슷했다. 대기표를 못 받으면 다음날 또 줄을 서야 했으며, 신청 서류를 제출한 뒤 여권을 손에 쥐기까지 1주일 넘게 기다려야 했다.

    “출근길 수백 명의 시민이 줄 선 걸 보고 시급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간 밀린 물량만 털어내도 여권 발급에 소요되는 시간이 준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권과 직원들은 대기 물량을 털어내고자 밤샘을 밥 먹듯 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여권 신청부터 발급까지의 소요 시간이 48시간으로 줄었다. 사정이 급박한 시민에겐 30분 만에 여권을 발급해줬다.

    입소문은 바람처럼 퍼지게 마련. 서울, 경기에서 시민들이 송파구청으로 몰려왔다. 하루 400건이던 여권 발급 신청 건수는 800건으로 늘었다. 다른 구청은 송파구의 혁신을 떨떠름해 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관가의 묵계(默契)는 송파를 중뿔나게 여겼다.

    “빠르면 이틀, 급하면 4시간 만에 여권을 만들어주겠다고 발표했어요. 다른 구청에선 뭐 잘났다고 설치느냐고 비난했습니다. 욕먹을 각오를 했어요. 직원들한테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은 세상이 바뀌었죠. 비법 같은 건 없습니다. 여권과 인원수는 다른 구청과 비슷했죠. 평소보다 일을 많이 한 게 해법입니다. 아침 일찍 나와서 밤늦게 퇴근한 거죠. 잡담, 사적 용무로 낭비하는 시간을 줄였습니다. 1시간으로 보장된 밥 먹는 시간도 줄였고요.”

    송파구의 혁신이 알려진 뒤 서울시는 여권 발급 대행 업무를 맡은 구청의 여권과장을 소집해 4일 이내 발급을 권고했다. 지난해 8월부터 자치구들의 여권 발급 처리 소요 기간은 4일로 줄었다. 송파구의 여권 발급 혁신은 2007년 서울시 창의행정 대상을 수상했다.

    “송파구 혁신의 핵심은 일종의 ‘양심선언’이다. 잘못된 관행을 인정하기 어려웠을 뿐 이들이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운영이다.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다.”(2007년 5월23일자 경향신문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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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파구의 여권 발급 혁명은 서울 전체로 파급됐다.

    UNEP, 송파를 주목하다

    10월13일 송파구는 유엔환경계획(UNEP)이 공인하는 리브컴 어워드(livecom Awards)에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됐다. 인구 20만~75만의 도시를 대상으로 한 카테고리D에서 동상을 수상한 것.

    송파구는 △도시 경관 증진 △효과적 문화유산 관리 △지속가능한 커뮤니티 구축 △친환경 정책 수립 및 실천 △건강한 생활양식 △미래 계획 등 6개 심사부문에서 고루 높은 점수를 받았다.

    송파구는 10월11일 체코 필센에서 도시별로 진행한 프리젠테이션에서 ‘2000년 서울 역사 발원지’ ‘가장 살고 싶은 모던 시티’ ‘21세기 녹색성장 신모델’을 강조해 참가자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리브컴 어워드엔 뉴플리머스(뉴질랜드, 2008년), 말모(스웨덴, 2007년), 둥관(東莞·중국, 2006년), 코벤트리(영국, 2005년), 민스터(독일, 2004년) 등이 수상 도시로 이름을 올렸다. 이들 도시는 세계인이 방문하고 싶어하는 도시로 주목받는 곳이다.

    리브컴 어워드는 UNEP의 공인을 받아 비영리기구인 ILC(International Liveable Communities)가 1997년부터 선정해온 세계적 권위를 갖춘 상이다. UNEP가 정부·개인·기관을 상대로 수여하는 상을 공인한 것은 모두 11개인데, 이 중 도시를 대상으로 한 것은 리브컴 어워드가 유일하다. 한국 지방자치단체가 이 상을 받은 것은 송파구가 처음으로 매년 250개 넘는 도시가 응모한다.

    김 구청장은 “한국의 도시들이 거주 환경과 삶의 질에서 세계도시와 경쟁할 만한 수준을 갖췄으면서도 저평가돼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번 수상은 녹색성장을 추구하는 한국의 국가 브랜드 강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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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파구는 친환경 ‘자전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그는 “앞으로 송파구는 기후변화를 비롯한 국제적 환경 문제에 지금보다 더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속가능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차관 출신 구청장

    1949년생인 김 구청장은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었다. 통일민주당 여성국장, 민자당 여성국장, 신한국당 부대변인, 한나라당 부대변인을 지냈고, 1994~95년엔 정무 제2차관으로 일했다. 45세 때 중앙부처 차관직에 오른 것이다.

    “구청장으로 일하는 보람이 대단합니다. 취임한 지 3년이 넘으니 도시가 바뀌는 게 눈에 들어와요. 내가 직접 한 일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참 좋아요.”

    그는 ‘차관’에서 ‘구청장’으로 내려왔다. 25명의 서울시 구청장 중 홍일점. 섬세하면서도 과감하다는 평을 듣는다. “구청장직이 몸에 잘 맞느냐”고 물었다.

    “차관에서 거꾸로 내려왔다는 얘기죠?”

    “네.”

    “결심하기 전 고민을 조금 했습니다. 삶의 방향을 틀어서 가는 건데…, 잘해야 여자 후배들이 전례를 밟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공천받은 걸 두고 전략 공천이라고 했습니다. 여성 구청장이 1명은 나와야 한다는 점에서 그 말을 나쁘게 듣지 않았어요. 서울 최초의 여성 구청장으로서 본을 보이겠다고 생각했죠. 구청장 일이라는 게 국방, 외교만 빼놓고 정부에서 다루는 일을 다 하는 거예요. 돌아서면 내 일이고, 바라만 봐도 내 일이죠. 그래서 아주 재밌어요. 보람되고요. 다만 구청은 굉장히 작아요. 권한이 작아서 아쉬움이 큽니다.”

    홍일점 구청장이라서 불편한 건 없느냐고 덧붙여 물었다.

    “여성1호는 ‘토큰적 지위’(여성 리더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여성 전체의 단점으로 인식되는 걸 가리키는 말)를 갖습니다. 먼저 길 닦는 사람의 책무가 무겁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어요. 그동안은 시대의 요구에 따라 여성 1호가 등장했습니다. 초기엔 여성이 어떤 지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었지만 그게 익숙해지면 경쟁을 통해 강력한 여성이 대두됩니다. 송파상공회의소 회장이 처음엔 내가 여자라서 일을 잘할지 걱정했대요. 글로벌화한 분인데도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내가 일하는 걸 보고 여자도 리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기쁘던지. 지금은 능력을 갖추면 성별을 가리지 않는 시대입니다. 강력한 대선후보로 여성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오르내립니다. 2006년 서울시장선거 때도 후보로 나온 강력한 여성이 있었고요. 내년 선거 때 서울시장후보로 거론되는 여성도 많습니다. 홍일점 구청장이라서 불편한 점은 없습니다. 9월29일에도 구청장 모임이 있었는데, 남자들이 나를 피해 도망간다면 모를까 어색하거나 어려운 거 없습니다. 여자라서 특별히 배려받는 것도 없고요. 그냥 구청장이에요. 저스트 구청장.”

    조직 장악에도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지금 송파구 공무원 중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아요. 여자들은 엄마 같은 데가 좀 있어요. 반면 공무원은 반듯한 점이 있고요. 한 둘 속 썩이는 사람은 어느 조직에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사람들이 참 반듯해요. 조직 장악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물 흐르듯 잘 해왔어요. 송파구가 만들어진 뒤 올해로 21년째입니다. 공교롭게도 직원들이 공무원 출신 구청장만 겪어봤어요. 정치인 출신의 여자가 구청장으로 오니 조금 놀랐겠죠. 직원들이 놀란 거고 난 어려울 일이 없었습니다. 관료 출신은 관료의 벽을 못 넘는 예가 적지 않습니다. 너무 조심하는 거죠. 저는 정부와 정당, 학교에서 일했습니다. NGO(비정부기구) 일도 해봤고요. 잡다한 일을 다뤄본 게 구청장직을 수행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김영순 Style, 도시의 표준을 바꾸다

    김영순 구청장은 지속가능한 도시를 강조한다.

    송파개벽

    김 구청장은 운(運)도 좋았다. 송파구는 강남구처럼 번잡하지 않고 한강 이북처럼 낡지 않았다. 맘껏 구상을 펼칠 장(場)을 가진 것이다.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다른 자치구를 맡았다면 지금처럼 주목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송파구는 아주 유니크한 도시, 특별한 도시예요. 그게 어떤 뜻이냐면…. 내가 거꾸로 질문해볼게요. 서울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자치구가 어느 곳일까요?”

    “글쎄요…. 서초구, 도봉구가 떠오르는데요.”

    “아니죠. 송파예요. 그러면 주거환경이 가장 잘 갖춰진 도시는요?”

    그는, 송파 자랑을 길게 했다.

    송파구는 서울 남동부 한강 남안에 있는 자치구다. 오랫동안 서울의 변두리였다. 경기 광주군 중대면, 구천면에 속하다가 1963년 일부 지역이 서울 성동구에 편입했다. 강동구, 강남구를 오가며 속하다가 1988년 송파구로 독립했다.

    송파구는 잠실동 석촌동 삼전동 송파동 문정동 오금동 오륜동 방이동 풍납동 가락동 등 26개 행정동으로 이뤄졌다. 북부와 서부는 한강과 탄천이 실어 나른 흙이 형성한 해발고도 20m 내외의 충적지, 동부와 남부는 해발 20~40m의 완만한 사면이다.

    송파구에서 29년을 산 김승주(34)씨는 초등학교 때와 지금을 이렇게 비교했다.

    “어릴 적 송파에 산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송파가 서울 맞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지금은 소개팅 나가면 상대가 ‘진짜 좋은 데 산다’면서 웃습니다.”

    송파 토박이 김만제(51)씨의 회고.

    “밭과 벽돌공장이 많았습니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에 둘러싸인 호수가 볼거리의 전부였죠. 정말 별 볼 것도 없었고, 서울이라는 인식도 없었습니다. 네 골목 건너에 가게가 하나 있으면 다행이었죠. 부모들은 아이들이 놀다가 벽돌공장에 있는 돌에 부딪히지는 않을까, 수풀로 가려진 웅덩이에 빠지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해야 했습니다.”

    1981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되면서 송파구는 급성장의 발판을 마련한다. 올림픽주경기장을 비롯한 스포츠시설과 롯데월드, 종합유통시설이 들어서면서 인프라가 확충된다.

    현재 송파구의 지가 총액은 강남구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재건축을 통해 2만여 가구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잠실은 올해 집값 상승의 핵이었다. 송파구는 지난해 말 대비 9월30일 현재 평균매매가, 평균 전세가가 각각 13.74%, 25.15% 올랐다.

    잠실 일대는 ‘제2의 대치동’으로도 불린다. 2007년 초부터 삼전동을 중심으로 대성NG학원, 장학학원을 비롯한 대형 프랜차이즈 학원과 보습학원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잠실동, 신천동이 학원가 덕을 봤다.

    또한 송파구는 로맨틱하다. 10월11일 잠실야구장에선 두산과 SK의 플레이오프 4차전이 열렸다. 선남선녀가 어깨를 겯고 가을의 향연을 즐겼다. 주말의 롯데월드는 사랑하는 이들로 붐볐고, 신천동의 클럽은 밤늦게까지 빛났다.

    롯데호텔에서 내려다본 잠실역 사거리의 야경이 눈부시다. 송파(松坡)란 이름만큼이나 푸르던 이 강변마을은 포스트모던의 옷을 입으면서 으뜸 도시의 하나로 발돋움했다. 내년 상반기엔 123층, 555m 높이의 ‘롯데 수퍼타워 123’이 착공된다.

    역사·환경·문화 삼중주

    송파란 이름은 한강 지류 주변에 소나무가 군집한 언덕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조선의 문인들은 경관이 뛰어난 이곳에서 세속의 근심을 잠시 잊고 ‘자연친화’ ‘물심일체’의 감상에 젖곤 했다.

    추사 김정희의 절친한 벗이던 황산 김유근의 송파주중(松坡舟中)의 한 대목을 들어보자.

    옛 나루터에서 배 타니 몸과 마음이 편하고, 시원스러움에 낮 더위 씻겨지네/ 산빛 모두 빛기운 머금었고, 물기 더불어 바람도 불어와 비치는 햇살에 온몸이 맑아지네/ 옷깃 풀어헤치니 온갖 근심 부질없구나.

    송파나루는 조선왕조 때 삼남(三南)에서 올라오는 물산의 집산지였다. 송파장시(場市)는 5대 향시(鄕市) 중 하나. 지금도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엔 무와 배추를 싣고 온 화물차가 즐비하다.

    송파는 백제의 옛 도읍(都邑)이다. 몽촌토성, 적석총, 백제고분군을 비롯한 한성백제의 유적이 남았다. 매년 석촌동 백제고분에서는 백제고분제가, 올림픽공원 일대에선 백제한성문화제가 거행된다. 삼전도비는 병조호란 때 청(淸) 태종에게 인조가 무릎 꿇은 곳에 세워진 청의 승전비다.

    송파는 역사, 문화, 환경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소나무의 진한 향이 진동하던 송파는 지금도 ‘푸름’을 지향한다. 공원수가 140개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데다, 서울 자치구 중 최대의 녹지율을 자랑한다.

    ‘싸이월드’에 둥지 튼 테니스 동호회 ‘오픈’의 회원들은 매주 토요일 올림픽공원 코트에 모인다. 우수연(35)씨가 백핸드 스트로크로 상대를 공격한다. 라켓의 스위트 스폿에 맞은 테니스공이 뻥~소리를 내면서 날아간다.

    “로스앤젤레스, 시드니에 산 적이 있는데, 올림픽공원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어요. 운동을 마치고 산책한 뒤 맥주 한잔 들이켜면 스트레스가 확 날아갑니다.”

    올림픽공원은 1984년 착공해 1986년 완공했다. 올림픽공원 숲은 20년 넘는 연륜을 가진 터라 성동구의 서울숲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울창하다. 가을숲은 ‘숲빛깔’이 아름답다. 도토리와 산밤의 떫은맛은 덤이다.

    가을, 넓은잎나무는 올림픽공원 숲을 별천지로 만든다. 습기를 털어낸 선들바람과 쪽빛 하늘을 담은 물빛이 상쾌하다. 단풍나무는 누르스름한 이파리가 순식간 노란색으로 바뀌다 마침내 붉은색으로 변한다. 은행나무의 샛노랑잎은 가을 숲의 진객.

    김영순 Style, 도시의 표준을 바꾸다

    올림픽공원 숲의 가을은 눈부시다.

    송파구는 도심의 은행잎을 남이섬에 보낸다. 쌀쌀한 날씨 탓에 나뭇잎이 일찍 떨어지는 남이섬에 샛노랑잎을 보내 소각 비용을 절감한 것. 배용준과 사랑에 빠진 일본인 관광객이 늦가을에 걷는 남이섬 은행잎길은 ‘made in songpa’다

    올림픽공원의 겨울숲은 ‘숲소리’가 일품. 서릿발 내린 낙엽을 밟으면 숲에서 소리가 난다. 낙엽에 따라 숲소리가 다르다. 사각, 서걱, 스르륵, 소시락…. 바람을 만난 숲은 쌩, 쏴쏴, 쐐, 씽씽거린다. 솔숲은 쏴아~소리를 내면서 영혼을 깨운다. 참나무는 약한 바람에도 바삭거리고 버석댄다.

    올림픽공원을 빠져나와 성내천을 걷는다. 말라죽은 하천 바닥의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물길을 되살렸다. 성내천의 비오톱과 여울은 생태학습장. 까르르 웃는 어린이들의 얼굴이 예쁘다. 성내천은 ‘2009년 대한민국 아름다운 하천 100선’에 선정됐다.

    성내천, 장지천을 복원하다

    9월25일 송파구에선 걷기 행사인 ‘송파 올레길 순례’가 열렸다. 송파는 사방이 물길인 도시다. 북으로 한강, 남으로 장지천, 동쪽엔 성내천, 서쪽엔 탄천이 흐른다. 송파는 숲, 물이 빚어내는 자연·생태와 마천루가 조화를 이룬 ‘미래 도시’를 꿈꾼다.

    송파 올레길은 송파구가 ‘제주도 올레길’을 본떠 만든 31.63㎞의 도심형 걷기 코스. 올레길이라는 이름은 가칭으로 새 이름을 준비 중이다. 성내천·장지천·탄천·한강으로 이어지는 ‘송파 워터웨이’는 한바퀴 도는 데 8시간 넘게 걸린다.

    성내천→장지천→탄천→한강→올림픽공원→송파구청으로 이어진 가을 밤길은 고즈넉하면서 아름다웠다. 성내천과 장지천은 송파구가 복원한 하천이다. 한성백제와 송파에 얽힌 옛이야기를 들은 건 덤.

    송파의 상징 격인 석촌호수의 역사는 흥미롭다. 잠실은 원래 강북내기다. 광진구 자양동에서 뻗어나간 반도. 첫 삽은 물이 떴다. 조선왕조 때 대홍수로 허리가 잘려나가면서 잠실은 하중도(河中島)로 변했다. 그런데 하중도 북쪽으로 난 새 물길이 본류의 물을 빼앗았다. 지질학에서 가르치는 ‘하천 도둑질’이 벌어진 것이다. 물을 도둑맞은 옛 본류는 지류가 됐고, 이 지류의 서쪽은 수서(水西, 강남구 수서동)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김훈(61)씨의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송파강이 홍수가 나기 전 한강의 본류다. 서울시가 1970년대 택지개발을 위해 송파강에 둑을 쌓으면서 물길은 사라지고 잠실은 한강 남안에 달라붙는다. 둑에 막힌 물이 남은 게 석촌호수.

    ‘송파 올레길 순례카드’에 기념도장을 모으는 일도 재미가 쏠쏠했다. 석촌호수 수변무대, 성내천 물빛광장, 장지천·탄천 합수부, 한강 잠실둔치, 몽촌토성에 도착하면 도장을 1개씩 찍어준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의 스탬프를 본떴다고 한다.

    동시다발 프로젝트

    김 구청장은 오렌지색 점퍼를 입고 ‘송파 올레길 순례’ 행사에 참석했다.

    ▼ 완주하기엔 버겨운 거리던데요..

    “꼭 완주할 필요는 없어요. 매달 밤길 걷기 행사를 열 겁니다.”

    ▼ 성내천을 환경친화적으로 복원했더군요.

    “송파구는 자연 환경, 주거 환경이 으뜸입니다. UNEP가 인정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아닙니까. 하지만 아직도 다듬을 게 많아요. 삶의 질을 높이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송파를 사방이 물길인 도시로 만든 건 정책의 산물이에요. 한강, 탄천은 전부터 있었지만, 성내천, 장지천은 우리가 꾸민 겁니다. 쓰레기더미가 쌓인 건천으로 미관이 좋지 않던 곳입니다. 성내천은 전임 구청장 때 복원을 시작했는데 인공하천 느낌이 강해서 자연·생태 하천으로 바꿨습니다. 장지천은 제가 취임한 뒤 새로 조성한 거고요. 송파의 동서남북을 물길로 연결한 뒤 문화·역사자원을 엮어서 걷기 코스를 만들어낸 겁니다. 송파구를 문화·관광도시로 키우겠다는 비전을 품고 있는데, 워터웨이 구축은 그 일환으로 이뤄졌습니다.”

    ▼ 롯데가 짓는 초고층 빌딩도 호재이겠군요.

    “송파는 알려진 것과 달리 자족기능이 부족합니다. 주거 도시로서의 성격이 오히려 강하죠. 역사는 배우라고 있는 건데, 타워팰리스의 사례를 보면 주민들이 결국 손해를 봤어요. 원래는 상업시설을 지을 계획이었는데 주민들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주상복합건물이 올라갔는데, 회사는 상업시설 지은 것보다 더 이득을 봤지만 강남구민에게 돌아간 혜택은 별로 없습니다. 교통문제만 심각해졌죠. 송파구에 112층 마천루는 매력적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층수가 바뀔 거라던데, 123층, 105층이란 말이 나돌아요.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 세수(稅收)가 늘어납니다. 시민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죠. 초고층 빌딩은 경제 유발 효과가 상당합니다.”

    롯데는 초고층 빌딩의 층수를 123층으로 확정했다.

    ▼ 문화·관광도시 구상을 실현하는데도 초고층 빌딩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송파구는 올림픽을 치른 도시입니다. 한성백제의 도읍이었고요. 스포츠 콤플렉스, 올림픽공원, 풍납토성, 몽촌토성, 백제고분군, 적석총, 야외조각공원, 한성백제박물관, 뮤지컬 전용홀을 아우르면 관광 유발 효과가 상당할 거예요. 동서남북 물길의 중앙에 석촌호수가 있습니다. 송파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석촌호수는 한강의 원류예요. 호숫가에 예술센터, 공연센터를 세우려고 합니다. 석촌호수 근처에 호텔 딸린 초고층 빌딩이 추가되는 겁니다.”

    김영순 Style, 도시의 표준을 바꾸다

    리브컴 어워드 시상식에 참석한 김영순 구청장. 한국의 역사, 문화를 알리고자 한복을 입었다.

    그는 “미래 가치 차원에선 강남구보다 송파구가 주목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원어민 강사를 학교에 파견하고 잉글리시 리더 과정을 개설했습니다. 아이들이 접근하기 쉬운 위치에 도서관을 지었고요. 잠실 재건축 단지가 들어선 뒤 송파동, 삼전동 일대에 학원가가 조성됐습니다. 송파 워터웨이를 비롯한 문화·환경 인프라는 벌써부터 갖춰놓았고요. 송파구의 가장 큰 장점인 자연환경은 끝까지 놓치지 않을 생각입니다. 지속가능한 도시는 자연과 사람이 조화를 이룬 곳입니다. 송파구는 주민들의 역량도 대단해요. 오랫동안 거주한 원주민이 많은데다 등록된 자원봉사자가 8만5000명으로 자치구 중 1위예요. 자원봉사 참여도는 시민 수준의 바로미터입니다. 가든파이브가 들어선 문정동, 장지동 일대에선 문정법조타운, 장지지구, 거여·마천 뉴타운, 위례신도시 등 초대형 프로젝트가 동시다발로 이뤄집니다. 이 일대는 주거, 오피스, 쇼핑이 시너지 효과를 내는 곳으로 거듭날 겁니다.”

    섬세함 꼼꼼함

    4월30일 개관한 송파어린이도서관은 인테리어가 앙증맞다. 엄마와 딸이 ‘책상’ ‘다락방’ ‘이글루’에 앉거나 누워서 책을 읽는다.

    “도서관이 아주 예쁘죠.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꾸몄거든요. 만 12세 이하의 어린이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어요. 주말엔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갖춘 중·고등학생 자원봉사자가 아이들에게 영어 책도 읽어준답니다. 초등학생들이 영어 신문도 만들고 있어요. 게다가 알찬 교육 프로그램이 모두 무료예요. 아이들이 다락방을 제일로 좋아해요. 앙증맞게 꾸민 화장실도 한번 가보실래요.”

    조금주(42) 송파어린이도서관 사서의 자랑이 끝이 없다.

    송파어린이도서관은 옛 잠실1동 주민자치센터를 리모델링해 만든 것이다. 4만권의 장서를 보유한 이 도서관은 동네의 명물이 됐다. 김민지(39)씨는 “아이랑 매일 도서관에 놀러옵니다. 굴러다니면서 책을 읽어요”라면서 웃었다.

    3월 첫 수업을 시작한 부리도어린이집(잠실1동)은 송파구가 세 번째로 만든 친환경어린이집이다. 4월엔 버들어린이집(장지동)이 문을 열었다. 친환경어린이집은 아토피 피부염에 초점을 맞춰 꾸려진 곳이다.

    “환경오염과 식생활 변화로 아토피 피부염을 앓는 아이가 늘었습니다. 친환경 마감재로 지은 우리 어린이집은 유기농으로 만든 음식만 제공합니다. 온도, 습도는 물론이고 공기 질도 관리합니다.”(부리도어린이집 장영화 원장)

    세 살 아이들로 이뤄진 튼튼이반은 낮잠에 들었고, 밝은햇살반의 다섯 살 녀석들은 ‘아 유 해피’ ‘아이 엠 해피’를 외치면서 놀았다. 구립 어린이집인 터라 4~5세반 기준 월 17만2000원으로 비용도 저렴한 편이다.

    장 원장은 “현재 112명의 어린이가 등록돼 있는데 입소문이 퍼지면서 아이를 입원시키기를 바라는 대기자가 900명이 넘는다”고 말했다.

    기저귀 갈이대

    김 구청장의 정책은 아토피 없는 어린이집, 어린이 전용 도서관이 상징하듯 섬세하다. 어린이보호차량 인증제, 여자화장실의 핸드백 보관대, 부녀 가정을 위한 생리용품 지원, 남자 화장실 기저귀 갈이대 설치, 가임 여성을 위한 수영장 할인 등은 아이를 길러본 여성이 아니면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다.

    가임 여성을 위한 수영장 할인은 송파에서 시작한 뒤 전국으로 번져나간 정책이다. 수영 강습을 등록한 뒤 의지와 무관하게 1주일가량 빠질 수밖에 없는 여성의 처지를 고려한 것이다. 지금은 서울시와 각 자치구가 조례를 개정해 여성은 구립 수영장에 회원으로 등록할 때 10% 할인을 받는다.

    “여성들이 수영장 이용료를 남성들과 똑같이 내면 억울하죠. 한 달에 열흘 동안 생리를 하는 여성도 있어요. 여성의 권익 차원에서 접근했어요. 지금은 생리 할인이 일반화했지만 처음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남성들이 거부감을 보일 수 있었거든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물을 더 많이 쓰지 않느냐는 말도 있었고요.”

    ▼ 남자 화장실 기저귀 갈이대 설치는 기발합니다.

    “자녀가 몇 살이에요? 요새는 남자가 아기를 안고 여자가 쫄망쫄망 쫓아가거든요. 요즘 남자들은 기저귀 가방까지 다 들어줍니다. 아기를 안고 가는 남자가 기저귀를 가는 게 편하겠죠. 남자 화장실 기저귀 갈이대는 변화한 세상에 앞서서 행정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취지예요.”

    ▼ 친환경 어린이집도 인기가 대단하던데요.

    “아토피는 환경의 문제면서 보육의 문제예요. 어린이 처지에서 보면 아동 문제고요. 당선자 시절에 지시를 했어요. 2006년 여름 취임한 뒤 곧바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11개월 만에 대한민국 1호 아토피 어린이집이 탄생했어요. 안전한 보육환경은 저출산 문제의 해결책이기도 합니다. 2007년 서울시가 아토피 없는 서울을 선포했습니다. 송파구의 아이디어가 도시의 표준을 바꾼 겁니다. 자랑 같지만 송파구가 하면 각 지자체가 따르고,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됩니다. 송파의 시책이 세상을 바꾼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그는 앞으로 모텔촌을 정비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모텔을 없애야겠다고 간부들에게 말했더니 처음엔 웃으면서 ‘어렵습니다’ ‘안 됩니다’라고 답해요. 우여곡절 끝에 모텔을 정비할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도시의 표준을 바꾸다.

    ‘리브컴 어워드’ 도시상(Whole City Award) 부문 프레젠테이션에 등장한 송파구의 모습은 매력적이었다.

    2000년 서울 역사의 발원지 : 송파구는 백제의 도읍지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1986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조성된 공원, 문화·체육시설을 뽐냈다.

    가장 살고 싶은 모던 시티 : 송파구는 동서남북이 물길로 둘러싸인 녹색도시라는 점을 강조했다. 송파는 WHO(세계보건기구)가 공인한 안전도시, 건강도시다.

    21세기 녹색성장의 신(新)모델 : 태양광 나눔 발전소를 통한 에너지 나눔 프로젝트, 자가 발전형 운동시설, 친환경 학습장인 기후놀이터, 자전거 무인대여 시스템 등은 1000여 명의 참석자에게 호평을 받았다.

    송파구뿐이겠는가, 다듬어 내놓으면 세계를 몸달게 할 도시가. 송파구는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해 세계로부터 주목받은 게 아니다. 김영순 스타일(Style)은 디테일을 강조하면서 지속가능한 도시를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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