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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특별함 <마지막회>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위대한 선지자인가, 약삭빠른 장사꾼인가

  • 전원경│주간동아 객원기자 winniejeon@hotmail.com│

‘클래식 황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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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당원이 된 덕분에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등 각종 저명 페스티벌에 지휘자로 참가할 수 있었다. 1938년에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베를린 필을 지휘할 기회를 얻었다. 카라얀은 이 오케스트라의 탁월한 능력을 첫눈에 알아보았고, 언젠가는 베를린 필의 수석지휘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이 야심이 실현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름 음악에 일가견이 있던 히틀러가 카라얀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카라얀의 책임도 있었다. 1939년, 카라얀은 히틀러가 참석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바그너(Richard Wagner·1813~83)의 악극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rnberg)’를 지휘했다. 그런데 카라얀과 성악가들의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아 극은 뒤로 갈수록 뒤죽박죽이 되었고, 마침내 관객들의 야유 속에서 막을 내렸다. 바그너의 며느리인 비니프레드 바그너(Winfred Wagner·1897~1980)의 회고에 따르면 이 연주가 끝난 후, 히틀러는 “카라얀을 다시는 바이로이트 무대에 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독일 내 유대인 지휘자가 대부분 추방된 상태에서 카라얀은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ring·1893~ 1946)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이 경력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카라얀은 1945년 독일 패망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송환되어 1947년까지 지휘 활동을 일절 금지당했다. 종전과 함께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복권된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약삭빠르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로 보나 카라얀의 앞날은 암울해 보였다.

남다른 자기 과시욕

그러나 카라얀은 주저앉지 않았다. 때마침 바다 건너 영국에서 명 프로듀서 월터 레그(Walter Legge·1906~79)가 ‘필하모니아(The Philharmonia)’라는 레코딩 전문 오케스트라를 창단해놓고 지휘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카라얀은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데 적임자였다. 월터 레그는 카라얀이 오케스트라 조련에 솜씨가 있는 데다 ‘레코드 산업’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적합한 세련된 이미지까지 갖추고 있음을 간파했다. 카라얀은 ‘무대에서 지휘하는 행위’를 금지당한 상황이었지만, 레코딩은 무대가 아닌 스튜디오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라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는 이 우연찮은 기회를 통해 LP가 새로운 청중을 개발할 수 있는 방법임을 알아차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레코드 산업은 SP에서 LP로 넘어가며 날개를 달기 시작했던 것이다. 녹음 분량이 적은 SP에 비해 LP는 한 장에 60분가량, 즉 대부분의 교향곡이나 협주곡을 담을 수 있었다. 카라얀은 앞으로 레코드가 콘서트홀을 대체할 것임을 직감했다. 카라얀은 필하모니아의 첫 번째 수석 지휘자가 되었고, 월터 레그-카라얀-EMI가 손을 맞잡은 클래식 음반 시리즈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음악 황제 카라얀’이 바야흐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954년, 베를린 필의 지휘자였던 푸르트벵글러가 68세로 타계했다. 수장을 잃은 베를린 필은 후임을 물색했고, 루마니아인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1912~96)와 카라얀이 물망에 올랐다. 마침 베를린 필은 1955년으로 예정된 전미 순회공연을 앞두고 있어서 참신하고 역량 있는 지휘자 발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을 기념해 열릴 이 전미 순회공연은 정치적으로도 큰 사건이었다. 첼리비다케는 능력이나 경력에서는 카라얀을 앞섰지만, 지나친 완벽주의자인데다 매스컴을 기피하는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더구나 첼리비다케는 레코딩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이는 음반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오케스트라로서는 묵과할 수 없는 단점이었다.

반면 카라얀은 잘생긴 외모에 신선하고 독일적인 이미지를 갖추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사무국은 카라얀을 점찍었고 카라얀은 대담하게도 “전미 순회공연을 성공시키면 베를린 필의 종신지휘자 계약을 성사시켜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로서는 일대 도박이었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의 편이었다. 전미 순회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성공의 대가로 카라얀은 1956년 4월 베를린 필의 종신지휘자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쉰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의 종신지휘자라는, 말 그대로 ‘황제’ 반열에 올라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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