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호

북한 문건에 나타난 대기업 ‘대북 비밀 접촉’ 실태

北, 평양 낙랑공단 참여할 CJ를 비롯한 한국기업 물색 중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0-04-02 15: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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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는 CJ를 비롯한 대기업의 대북 접촉과 관련해 북측 기관이 작성한 문건, 북한 인사 서명이 담긴 문건 등 다수(多數)의 자료를 확보했다. 문건엔 알려지지 않은 비화(秘話)가 가득했다.
    지난해 11월 초순 평양 낙랑구역 전진동 허허벌판에 한국인이 나타났다. 유병철 CJ제일제당 인천2공장 공장장. 유 공장장은 한 대북지원단체가 수년 전 지은 빈 공장을 둘러봤다. 식품소재 기획을 담당하는 CJ 간부도 동행했다.

    평양 낙랑구역엔 평양과기대 캠퍼스가 서 있다. 캠퍼스 서쪽으로 평양과 개성을 잇는 고속도로가 지난다. 고속도로와 캠퍼스 사이는 나대지다. 북한은 이 땅에 식품가공공단을 세우려고 한다. CJ 사람들은 왜 나타난 걸까?

    소문과 진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남북경협도 지난 정권과 달라야 한다고 여긴다 한다. 개성공단 같은 임가공 형태가 아니라 삼성 SK 같은 대기업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거다.”

    지난해 11월 중순 남북경협에 발을 걸친 한 대기업 임원은 “확실한 정보”라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소문은 꼬리를 물었다.



    “정상회담과 관련해 CJ가 북한에 식품공장을 짓는다. 중국 기업과 합작 형태다.”

    “삼성이 북한에 식품공장을 세운다. 순안공항 리모델링에도 관심이 있다.”

    한 언론은 A그룹, B회장이라는 이니셜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북한 경제개발 프로젝트가 물밑에서 추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경제 개발에 국내 굴지 A사가 참여한다. B회장도 제3국에서 북한 관계자와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에서 A그룹은 삼성, B회장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을 가리킨다. 이 기사는 순안공항 리모델링 사업도 언급한다.

    이 같은 소문과 기사는 사실일까?

    북한은 외자(外資)에 목말라 있다. 외자 유치 목적으로 국가개발은행을 설립하고, 조선대풍국제그룹을 외자 유치 창구로 지정했다.

    국가개발은행은 3월10일 이사회를 열고 전일춘 노동당 39호실장을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39호실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통치자금을 관리하는 곳. 부이사장은 중국동포인 박철수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 총재가 맡았다.

    박 총재는 3월2일 ‘조선신보’와 인터뷰를 하고 “외자 유치를 통해 먹는 문제와 철도 도로 항만 전력 에너지 등 6가지 사업을 동시에 추진한다”고 밝혔다. “북한이 최대 4000억달러 외자 유치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법과 제도를 손질하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북한은 한국 자본에도 군침을 흘린다. 북한과 한국기업의 남북경협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①북한 ‘경제 일꾼’이 중국에서 남측 중개인을 만난다. ②중개인이 한국기업에 제안서를 넣는다. ③중개인의 거간으로 중국 혹은 북한에서 남측 기업인과 북측 인사가 만난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①, ②단계에서 나돌곤 한다.

    북한은 자력갱생을 선서한 이들이 버글대는 곳이다. 부서가 돈을 주고 일을 시키지 않고 독립적으로 돈을 벌어서 살고 정해진 돈을 국가에 입금해야 하는 곳. 그래야 영웅이 되고 이런저런 훈장을 받는 곳이 평양이다.

    외자 유치에 혈안이 된, 중국에 나와 있는 경제 일꾼들도 마찬가지다. 남측 인사를 부지런히 만날 수밖에 없다.

    秘密 접촉

    북한 문건에 나타난 대기업 ‘대북 비밀 접촉’ 실태

    남과 북 인사의 서명이 담긴 조력발전소 관련 문건.

    한국기업과 북한의 접촉은 비밀리에 이뤄진다. 확인되지 않은 설(說)이 나도는 까닭이다. ‘신동아’는 대기업의 대북 접촉과 관련해 북측 기관이 작성한 문건, 북한 인사 서명이 담긴 문건 등 다수의 자료를 확보했다. “CJ가 평양에 짓는다”는 식품공장의 진실도 확인했다.

    우선, 문건을 통해 확인한 비화(秘話)를 일부 공개한다.

    대우건설은 평안남도 해주에 조력발전소를 세우는 걸 검토했다. 북한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와 대우건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의향서에 각각 서명했다.

    “남측 대우건설과 북측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우리 민족끼리의 기본정신에 따라 서해평화특별지대 해주지역에 공동으로 조력발전소를 건설하는 문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그 리행을 위한 실무적인 대책을 세우기로 하였다.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는 조력발전소 건설과 관련한 사업제안을 빠른 시일 안에 세부적인 검토를 진행하며 대우건설은 북측에서 요구하는 조력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기술 자료를 제공한다. 쌍방은 본 사업의 추진을 위해 가능한 범위에서 단계별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계속 협의해나가기로 한다. 본 의향서는 2007년 11월5일 작성하였으며 제3자에게 절대로 공개할 수 없다.”

    프라임그룹도 해주 조력발전소에 관심을 가졌다. 프라임그룹 계열사인 삼안은 조력발전소 발전시스템과 제어방법 관련 특허를 갖고 있다. 시화호 조력발전소를 설계하기도 했다.

    2007년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가동할 때 “아시아나항공이 북한에 민영 항공사를 설립한다”는 소문이 나돈 적이 있다. 아시아나항공은 실제로 북측과 접촉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북한 민영항공총국 앞으로 보낸 의향서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현 명예회장) 서명이 적혀 있다.

    “우리 그룹은 조선 측의 항공산업 분야의 합작과 관련하여 조선 측 해당 부문과 협의를 진행하기를 희망합니다. 본 의향서를 통해 우리 그룹이 본 사업에 대한 관심과 추진 의사가 있음을 표명 드리며, 조선 측에서 해당되는 부문과 진일보한 상세 협력 방안을 협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북한은 GS칼텍스에 석유를 분해할 때 나오는 나프타를 보내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 북한이 대금을 지급하고 GS칼텍스가 물품을 제공하는 형식. 나프타는 화학비료 및 석유제품 원료로 쓰인다. GS칼텍스는 북한에서 주유소 사업을 벌이려고도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이들 사업은 중단됐다.

    “마지막 남은 시장”

    북한 투자 역사의 첫 장은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열었다. 김 전 회장은 1992년 2월 “마지막 남은 시장을 개척하러 들어간다”면서 압록강을 건넜다.

    대우는 1996년 평안남도 남포시 신흥리에 봉제공장을 세웠다. 대우와 삼천리총회사가 반반씩 출자한 최초의 남북합영 기업.

    1998년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 이후 남북 민간 교류가 급물살을 탄다. 현대는 개성공단과 금강산·개성관광의 열매를 맺었다.

    한국 자본과 기술, 북한 노동력과 토지를 결합한 남북경협은 원론적으로 남북에 모두 도움을 준다. 내로라하는 기업이 북한의 문을 두드린 건 북한 투자가 그만큼 매력을 가졌다는 방증이다.

    북한 문건에 나타난 대기업 ‘대북 비밀 접촉’ 실태

    한 한국기업이 북한 민영항공총국 앞으로 보낸 의향서.

    그러나 열매를 맺은 남북경협 중 대기업이 참여한 것은 현대, 대우 사례 외엔 없다. 삼성은 1999년 윤종용 삼성전자 총괄사장(현 삼성전자 고문)이 방북하는 등 남북경협에 관심을 드러냈으나 투자에 나서지 않았다.

    북한 투자는 리스크가 상당하다. 남북 관계 경색 탓에 개성공단이 존폐의 갈림길에 섰을 때 입주업체는 발을 굴렀다. 금강산·개성관광이 중단되면서 현대가 입은 손실은 막대하다. 기업이 미래가 불확실한 곳에 투자하기는 어렵다.

    대북사업을 검토한 한 대기업 임원은 “북한 투자는 분명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지만, 핵 문제가 해결 수순을 밟거나 정치적 리스크가 제거돼야만 투자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북한 길들이기

    이명박 정부가 천명한 남북경협 원칙은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하고 있다. 북한이 핵 포기 절차를 밟아가는 단계별로 남북경협을 확대하겠다는 게 골자. 북한이 비핵화를 이행하면 세계은행(IBRD)을 비롯한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는 것을 돕고, 북미관계와 북일관계 개선에 도움을 주겠다는 거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출범 직후부터 ‘북한 길들이기’에 나섰다. 대북지원 민간단체의 방북 승인을 거부하면서 지원 물자 반출을 막았다. 지난해 8월부터 일부 빗장을 풀었으나 민간단체의 볼멘소리는 여전하다.

    북한은 금강산·개성관광이 다시 이뤄지기를 원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전제 조건을 내걸면서 재개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대로라면 현대아산은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신동아’는 지난해 12월호와 올 1월호에서 금강산·개성관광 문제를 다룬 적이 있는데, 현정은 현대 회장은 면담록 유출 책임을 물어 면담 자리에 동석했던 S상무를 해임했다(12월호 ‘현정은-리종혁·원동연 면담록으로 본 남북관계 막전막후’, 1월호 ‘남북경협 관련 김정일 비공개 연설문 : 현정은 회장 꽉 쥐면 한나라당 것들 고립시킬 수 있다’ 제하 기사 참조).

    그러나 S상무는 면담록 유출과 무관하다. 정부기관들도 이 면담록을 갖고 있다. 한 대북소식통은 “평양은 금강산·개성관광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걸 분명히 하고자 정부가 ‘신동아’에 면담록, 연설문을 건네줘 보도하게끔 했다고 여긴다”고 전했다. 이 같은 평양의 분석 또한 사실과 다르다.

    어쨌거나 정부가 북한 버릇 고치기 기조를 유지하면서 기왕의 남북경협도 게걸음하거나 후퇴했다. 이 같은 분위기인데 CJ 인사들은 어떻게 평양에 들어갔을까?

    식용유 공장 실사

    CJ 사람들은 지난해 11월3~7일 평양에 체류했다. 북한 민족경제협력연합회가 ‘방문동의서’를 발급했다. CJ 인사들이 평양을 떠난 날 개성공단에선 남북 당국 간 비공개 회담이 열렸다. 통일부와 통일전선부가 남북정상회담 관련 협의를 진행한 것. 남북 협상은 결렬로 마침표를 찍었다.

    북한의 한 대외협력기관이 작성한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낙랑구역 전진동 6만평 부지에 강냉이국수공장 물엿공장 과자공장 사탕공장 음료공장 감자라면공장 감자국수공장 감자튀기공장 빵공장(초코파이 밤빵 호두빵) 만두공장 통조림공장(수산물 과일 육류)을 세우려고 한다.

    이 문건은 토지·물·전기가격도 구체적으로 밝혔으며 공단부지에 거주하는 주민의 주택 철거비를 가구당 1만달러로 책정해놓기도 했다. 문건엔 ‘식료종합가공공장 투자제안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CJ 인사들은 지난해 9월24~25일 개성공단 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서 북측 인사들과 첫 면담을 가졌다. CJ의 관심사는 식용유. 수년 전 지은 빈 공장에서 식용유를 생산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게 11월3~7일 방북한 CJ 실사단이 맡은 일이다.

    북한 문건에 나타난 대기업 ‘대북 비밀 접촉’ 실태

    북한의 한 대외협력기관이 작성한 ‘식료종합가공공장 투자제안서’.

    “컨설턴트로 참여한 것이다. 중국기업이 자본과 설비를 다 대는 조건이었다. 생산과 설비 관련 노하우를 제공하고 컨설팅피 같은 걸 받으려고 했을 뿐인데 일이 이상하게 커졌다. 정상회담과는 무관한 일이다. 유 공장장 일행이 베이징에서 평양에 들어갈 때 국정원, 통일부 주재원에게 경고를 받기도 했다. 공장도 식용유를 생산하기엔 적합하지 않았다.”(CJ 인사)

    복수의 루트로 확인한 결과 이 인사의 말은 사실이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인 셈이다. CJ 실사단 방북과 통일부-통일전선부의 정상회담 협의 시점이 맞물린 데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이례적으로 대기업 인사들이 평양을 찾으면서 ‘CJ 식품공장’과 ‘정상회담’을 엮은 소문이 퍼진 것이다.

    통일부가 확보한 문건에 따르면 평양 낙랑구역 식품가공공단과 관련해선 북한 개성총회사와 한국 Y사가 합의서를 맺었다. 지난해 11월 작성한 이 문건엔 “강냉이종합가공공장 감자가공공장 빵·만두가공공장 과일·음료수공장 조미료공장을 꾸리기로 한다”고 적혀 있다. Y사는 중국 사이터그룹 협력사다.

    전방위 외자 유치

    1979년 설립된 사이터그룹은 백화점 호텔 쇼핑몰 오피스텔 아파트를 건설·운영·관리하는 서비스·물류 기업. 관계사로는 사이터호텔 사이터백화점 사이터파이낸스 사이터물류관리 사이터디지털소프트 사이터상업발전유한공사 등이 있다. 자본금은 60억위안(약 1조원)가량이다. CJ 인사가 언급한 중국기업이 바로 사이터그룹이다.

    사이터그룹 관계자도 CJ 실사단과 함께 평양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사는 북한 투자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외자 유치는 평양 식품공단 조성의 전제 조건이다. 북한은 기술도 자본도 없다. 북한은 식품공단에 입주할 한국기업과 중국기업을 찾고 있다. 한국기업, 중국기업이 함께 출자해 법인을 만들거나 합영공장을 세우면 이른바 ‘북한 리스크’가 줄어든다. 북한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북한 인사들은 CJ 방북단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한다.

    삼성 식품공장설, 순안공항 리모델링설은 낭설 중 낭설이다. CJ 인사들의 방북이 삼성으로 둔갑해 와전된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소속 북한 전문가 A씨가 중국에서 북한 인사를 만난 것은 맞지만 그게 전부다.

    독이 든 사과

    북한은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정했다. 북한 각 부서 경제 일꾼이 전방위로 외자 유치에 나서는 모습이다.

    문화일보는 “북한 평건투자개발그룹이 평양시 10만가구 살림집(민가) 건설 등과 관련해 한국·중국기업에 3억2000만달러 규모의 투자를 요청했다”고 3월10일 보도했다. 박철수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 총재 겸 국가개발은행 부이사장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중국의 함경북도 나진항 개발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한반도 동해안의 항구 확보는 중국 동북3성 지역의 숙원이다.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남부지역은 물론이고 외국으로 물류를 옮길 때 수월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 포기 수순을 밟지 않고도 외자 유치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지는 의문이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가 임박했다는 보도가 중국발(發)로 이어진다. 북한이 핵 포기에 나서고 북미관계,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면 대기업의 대북 접촉도 다시금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 대기업 임원은 “남북 정상회담이 열려 어떤 합의문이 나온다면 모를까 현 단계에서 대북 투자는 독이 든 사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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