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남로당과 북로당, 미군 간의 숨 막히는 첩보전

전운 감도는 1950년 초

  • 오세영│역사작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저자│

    입력2010-06-04 09: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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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년 초 고요한 한반도는 폭풍의 핵이나 다름없었다. 남과 북은 첩보전에 혈안이 되었고 변절자와 이중첩자가 속출했다. 그런 혼란의 시기에 대조적인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몰락한 남로당을 살리기 위해 평양에서 안간힘을 쓴 이승엽이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북로당 직속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남한 총선에 적극 개입하려 한 성시백이다. 두 사람이 각기 평양과 서울에서 서로의 숨통을 끊으려고 칼을 겨누는 사이, 미군은 본국의 군사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때때로 적의 적인 남로당과 손잡고 북의 동향을 파악했다.
    남로당과 북로당, 미군 간의 숨 막히는 첩보전

    1949년 6월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의 경위를 전하는 당시의 신문기사

    1950년3월14일, 서울 종로5가. 시각은 이미 오후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서울시경 사찰과 소속 수사관들은 허름한 골목길 끝에 위치한 한 주택으로 소리를 죽이고 접근했다. 정보가 틀리지 않다면 저 집에 김삼룡이 숨어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골수 좌익이었던 김삼룡은 박헌영이 월북한 이후로 남로당을 이끌고 있는 거물이다.

    김임전 주임이 신호를 하자 앞선 수사관이 몸을 날리며 담을 뛰어넘었다. 그가 문을 열자 나머지 수사관들이 일제히 들이닥쳐 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삼룡이 이미 도주한 것이다. 정황으로 봐서 급히 달아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김임전 주임은 즉시 일대를 봉쇄하고 주변을 샅샅이 뒤질 것을 지시했다.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 집을 뒤지고 길을 막고 행인을 검문하자 조용하던 동네가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워졌다. 주민 대부분은 순순히 수사에 응했지만 더러는 집을 뒤지는 경찰에게 따져 묻는 사람도 있었다. 가가호호 철저히 수색했지만 별 소득이 없자 김임전 주임은 초조해졌다. 현장에서 체포하지 못하면 김삼룡은 검거하기 힘들다.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기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쩌면 특기인 변장술로 벌써 포위망을 빠져나갔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설 수는 없다. 경찰은 주민들 중에 김삼룡과 연령이나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을 모조리 시경으로 연행했다. 주민들이 무더기로 끌려오면서 시경 취조실은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한강에서 뺨 맞고 남대문에서 눈을 흘긴다고, 취조실을 메운 무리 중에는 경찰관에게 항의하다 괘씸죄로 끌려온 사람도 적지 않았다. 김삼룡을 놓친 데 따른 분풀이를 주민들에게 해댄 셈이다. 그런데 그런 분풀이성 마구잡이 연행 덕분에 김삼룡을 놓친 것을 보상하고도 남을 뜻밖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은 꼴이다.

    “저자는 이주하입니다”



    잘못한 게 없는 데도 괜히 겁을 먹고 있는 사람, 생사람을 왜 잡아왔느냐며 대드는 사람,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눈을 감고 꼼짝도 않고 있는 사람들로 시경 사찰과가 난장판을 이루고 있는데, 그들 중에 유독 수사관의 신경을 거슬리는 영감이 있었다.

    “아니, 이 영감이!”

    수사관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예지동에서 연행해온 영감이 아까부터 계속 취조실 바닥에 가래를 뱉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수사관이 호통을 치면 웬만한 사람 같으면 주눅이 들게 마련인데 이 영감은 달랐다. 침도 마음대로 뱉지 못하느냐며 오히려 핏대를 올리고 나섰다. “대체 저런 골치 아픈 영감을 왜 잡아온 거야?” 수사관은 짜증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이보시오, 김 주임.”

    김임전 주임이 어찌 처리할까 고심하는데 누가 뒤에서 불렀다.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김창룡 소령이 서 있었다.

    김창룡. 나중에 특무대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암살을 당하는 김창룡은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일제강점기부터 공산당 색출에 남다른 솜씨를 발휘했던 인물이다. 김창룡은 광복이 되자 군에 입대해 특무대의 전신인 육군 정보국 방첩대에서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 색출에 맹활약을 하고 있었다.

    남로당은 1949년이 되면서 뿌리가 거의 뽑혔지만 그래도 여전히 일부는 살아남아 암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군과 검찰, 그리고 경찰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좌익 색출에 공조하고 있었는데, 일선 수사는 시경 사찰과에서 관장하고 군은 시경 사찰과에서 이첩된 자들을 처리하는 일을 맡았다. 육군 방첩대장으로 군검경합동수사본부 국장을 겸하고 있던 김창룡 소령은 뒤치다꺼리보다 일선에서 뛰는 게 생리에 맞는 사람이다. 그래서 수시로 시경 사찰과를 기웃거리며 이래라저래라 수사에 참견을 했다.

    그런 김창룡의 눈에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는 영감이 걸려든 것이다. 왠지 억지를 부리는 듯한 자세가 그의 동물적 감각을 자극했다.

    “저 영감을 내가 데리고 가겠소.”

    김창룡 소령이 소란을 피우는 영감을 지목했다. 그렇지 않아도 처리 곤란하던 차에 김임전 주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떨결에 대답을 해놓고 나서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룡이 누군가. 성깔 고약한 영감 훈계나 하고 있을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김창룡이 잠깐 자리를 뜨자 김임전 주임은 얼른 영감을 옆방으로 데리고 간 다음 급히 홍민표를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김임전 주임은 황급히 달려온 홍민표를 이끌고 옆방으로 갔다. 얼마 전까지 남로당 서울지부 책임자로 있다가 전향한 홍민표는 김삼룡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김임전 주임은 영감이 김삼룡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남로당 간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급히 홍민표를 찾았던 것이다.

    “김창룡이 웬 영감을 찍었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홍 선생이 한번 확인해주시오.”

    “그러지요.”

    김창룡이 찍었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며 문을 열고 들어서던 홍민표가 영감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흠칫 놀라며 뒷걸음쳤다. 뒤따르던 김임전 주임도 덩달아 긴장이 됐다.

    “주임님, 저자는 이주하입니다.”

    의문스러운 김삼룡 검거

    김임전 주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이주하라니? 상스럽게 가래침을 뱉으며 욕설이나 퍼붓던 저 노인이 거물 이주하란 말인가. 당시 이주하의 나이는 56세. 그 시절에는 그런대로 영감 소리를 들을 만한 나이였다. 토종 공산주의자로 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이주하는 김일성과 불화를 겪다 남쪽으로 쫓겨 내려와 김삼룡과 함께 남로당을 이끌고 있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얼떨결에 거물을 체포한 김임전 주임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이주하는 신분을 숨기고 예지동에서 젊은 여인과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김삼룡으로 인해 일제단속이 실시되면서 얼떨결에 시경에 끌려왔지만 이주하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수사관들이 자기가 이주하라는 사실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렴 경찰서에 오래 있어서 좋을 게 없다, 이럴 때는 적당히 소란을 피워 수사관들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빨리 빠져나오는 방법 중 하나다 하는 생각으로 일부러 침을 뱉으며 소동을 부린 것인데, 하필 그 자리에 육본 정보국 방첩대의 김창룡이 나타났던 것이다. 공산당 잡는데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김창룡에게 그런 식의 어설픈 행동이 통할 리 없었다. 이주하는 꼼수를 쓰다 제손으로 무덤을 판 꼴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불운이 또 겹쳤다. 이주하의 얼굴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홍민표가 직전에 전향을 해서 시경 사찰과를 돕고 있었으니 말이다.

    김창룡은 펄쩍 뛰었지만 시경 사찰과가 이주하를 순순히 내줄 리 만무했다. 시경 사찰과는 뜻밖의 개가에 환호성을 질렀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김삼룡은 어디로 갔을까? 시경 사찰과 수사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김삼룡의 뒤를 쫓았지만 김상룡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수사도 진척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느닷없이 치안국 중앙분실에서 김삼룡을 검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치안국 중앙분실은 시경 사찰과의 상급기관이면서 라이벌이기도 하다. 김삼룡과 관련된 정보는 일선에서 수사를 하는 시경 사찰과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데 시경 사찰과에서 놓친 김삼룡을 치안국 중앙분실에서 무슨 재주로 검거했단 말인가? 사찰과 과장 최운하와 주임 김임전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석 달 전인 1950년 3월은 남로당이 최후의 거친 숨을 몰아쉬던 시기였다. 폭동과 반란, 파업과 선동이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고 조직은 전부 노출돼 괴멸 직전에 놓여 있었다. 이제 유엔으로부터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 받은 대한민국은 혼란을 종식시키고 안정의 길로 접어드는 것일까? 그러나 정국은 여전히 안개 속이었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폭풍 전야의 고요가 한반도를 뒤덮고 있었다.

    위기의 조짐은 연초부터 감지됐다. 1950년 1월12일에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 연설에서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제외된다”고 발언한 것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온 것이다. 나중에 애치슨 장관 발언의 진의는 ‘향후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민족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발언 당시에는 미국이 여차하면 대한민국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었고, 무력남침을 준비하고 있던 북한에 고무적으로 작용했다.

    백형복의 최후

    남로당과 북로당, 미군 간의 숨 막히는 첩보전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좌익 지도자들. 왼쪽부터 백남운 근로인민당위원장대리, 허헌 남로당위원장, 박헌영 남로당부위원장, 홍명희 민주독립당위원장.

    “어서 오시오.”

    이승엽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백형복을 끌어안았다. 남한 치안국 중앙분실장이 의거월북을 했다. 남로당은 껍데기만 남았다고 괄세하던 북로당에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되었다. 대공사찰을 총괄하는 사람의 월북을 경계의 눈초리로 대하는 북로당과 김삼룡을 체포한 당사자를 환영하는 남로당. 묘한 상황만큼이나 평양은 묘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백형복은 이승엽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내무성 사회안전부 예심국에서 일하게 되었고 함께 월북한 조용복은 인민검열위원회에 자리를 잡았다. 예심국에 배치된 백형복은 월북자들의 위장월북 여부를 판정하는 업무를 맡았는데, 백형복이 위장월북이라고 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끌려가서 처형을 당하는 자들이 속출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그들 중에는 진짜 북이 좋아 38선을 넘은 사람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이 계속되자 북한 당국은 백형복을 대남연락부 산하 중앙연락소로 보냈다. 그곳은 북로당이 주관하는 대남사업을 파악할 수 있는 자리다.

    공개된 기록에 의하면 위장월북을 권고 받고 겁을 먹은 백형복 총경에게 니콜스 특무상사는 이승엽이 뒤를 봐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백형복 총경은 전쟁이 끝나고 다른 남로당 간부들과 함께 처형을 당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대신에 ‘목숨이 두 개가 있어도 다 바쳤어야 할 만큼 죄가 크다’ ‘새로운 삶을 알려준 당과 공화국에 감사한다’ ‘백번을 죽어도 당과 인민에게 범한 과오를 씻을 길이 없다’ 등 시구를 연상시키는 말을 남긴 남로당 간부들처럼 북한을 찬양하는 최후의 증언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공업무의 총수에서 의거월북, 이어 간첩죄로 체포되고 북한을 찬양하는 말로 최후를 마친 백형복 총경. 대단히 복잡한 상황인데 아무튼 백형복 총경이 니콜스 특무상사의 권유로 월북했고 이승엽의 비호를 받았으며 북로당의 대남공작을 주도하는 자리에서 일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로당원이 시경 사찰과에 전향했고 그로 인해 ‘권위 있는 선’ 성시백의 정체가 비로소 밝혀진다.

    1950년 5월6일. 조선중앙일보. 굳게 닫힌 사장실에서 성시백이 김명룡과 머리를 맞대고 벌써 몇 시간째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5월30일에 실시될 예정인 제2대 총선이 24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성시백은 동조세력을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대한국민당은 대거 낙선할 겁니다. 민주국민당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김명룡이 예상 선거 결과를 보고했다. 제헌의회 의석수는 총 198석.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대한국민당이 71석으로 제1당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다음이 민주국민당이다. 민주국민당은 내각제를 주장하며 이승만 대통령과 대립하고 있기에 야당으로 통하지만 둘 다 보수우익정당이란 점에서 친이승만 세력이다. 성시백은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고 북한에 우호적인 좌파진보정당을 만들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는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제를 채택하고 있었기에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는 의원이 다수를 이루면 합법적으로 이승만을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이자들이 무소속 출마자 가운데 우리와 뜻을 함께할 가능성이 있는 후보들이란 말이지?”

    성시백은 명단을 훑어보며 말했다. 다수 정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심정적으로 좌익에 동조하는 인사는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독선에 불만을 품고 있는 우익과 박헌영의 독주에 반기를 들고 떨어져 나간 중도파를 모두 포섭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필요한 자금은 이미 확보했다.

    성시백 검거와 급박한 상황 전개

    남로당은 무리한 공작을 펼치다 자멸했다. 하지만 남반부정치위원회는 다르다. 그런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신생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그런 나라에 자본주의는 맞지 않는다. 과격 색채를 빼면 사회주의는 충분히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성시백은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중용도 물고 늘어져야 한다. 반일과 민족 자결은 언제든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이슈다. 한 해 전에도 그것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지 않았던가. 국회에서 기반을 마련하고 남북평화 통일안을 상정시키는 게 1차 목표지만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오면 이승만을 몰아내고 새로 대통령을 뽑을 수도 있다.

    “회동일이 언제라고 했나?”

    “5월10일 서소문 동아호텔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내가 직접 참석하겠다.”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김명룡이 안전을 염려해 만류했다.

    “걱정할 것 없다. 남조선에서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선거가 목전에 당도했는데 뒷전에서 보고만 받고 있을 수 없다.”

    성시백의 말대로 그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신문사 사주가 대낮에 호텔 출입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얼마든지 정치 지망생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위치다. 그리고 그동안 특별히 눈에 띌 만한 발언을 하지도 않았다. 남로당과는 전혀 다른 공작에 수사기관은 그의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신분을 감추고 있던 성시백에게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1950년 5월10일 동아호텔 2층에서 잠복하고 있던 시경 사찰과 수사관들에게 마침내 검거된 것이다. 꼬리가 길면 잡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천적이라는 게 있다. 성시백의 체포에는 남로당 쪽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성시백의 얼굴을 아는 남로당원이 자수를 해서 그의 정체를 확인해주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일성은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시종일관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성시백은 체포된 지 25일 만인 6월9일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이 초스피드로 진행된 셈인데 집행은 그보다 더 빨랐다. 1950년 6월27일 새벽 5시. 포성이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일단의 무장군인들이 육군형무소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사형수 성시백을 형장에 세웠다. 서울에서 철수하면서 사형을 앞당겨 집행한 것이다. 그때 김삼룡과 이주하, 그리고 김수임도 처형됐다. 성시백은 종교에 귀의할 의향이 있느냐는 목사의 물음에 “종교는 아편”이라는 말을 남긴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남로당과 북로당, 미군 간의 숨 막히는 첩보전
    오 세 영

    1954년 충남 홍성 출생

    경희대 사학과 졸업

    1993년 역사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으로 글쓰기 시작

    저서 : ‘만파식적’ ‘화랑서유기’ ‘창공의 투사’ ‘소설 자산어보’ ‘구텐베르크의 조선’ 외


    역사에서 가정은 별 의미가 없지만 성시백이 그때 체포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확연히 다르게 전개되었을 지도 모른다. 6·25전쟁 당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진격을 멈추고 서울에서 사흘을 더 머문 이유는 남로당의 호언대로 남한 민중의 봉기를 기다린 것에도 있지만, 북로당 나름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선출된 2대 국회의원들 중에서 서울에 남은 사람들을 찾아 새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합법적으로 친북정권을 수립한 다음에 북과 통합할 계획이었다. 전쟁 직전에 실시된 2대 총선에서 보수우익인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은 각각 22석과 23석의 초라한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반면에 무소속은 무려 120석을 차지하며 원내 과반수를 이루었다. 무소속 모두가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야당으로 분류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서울에 인공기가 휘날리기 직전에 성시백이 검거되면서 포섭 공작은 수포로 돌아갔고 많은 의원이 한강을 건너면서 합법적으로 대한민국을 병합하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그리고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남한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전력이 많이 약화된 반면에 북한은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의용군들이 속속 귀환하면서 군사력이 크게 증강해 남과 북의 전력 차가 크게 벌어져 있었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남과 북이 각각 북진통일과 국토완정을 내세우며 으르렁거리고 있는데, 1950년으로 접어들면서 힘의 균형이 점점 북으로 기울고 있었다. 정말로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할 용의가 있는 것일까? 시커먼 먹구름이 1950년 봄의 한반도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월북 남로당의 위기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 비서 이승엽은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모란봉 능수버들에서 새 가지가 돋아나는 걸로 봐서는 봄이 오긴 온 모양인데 마음은 여전히 한겨울이었다. 월북해서 사법상을 거쳐 대남사업을 책임지는 당 제2비서를 맡고 있는 남로당 2인자 이승엽은 요즘 심사가 편치 못하다. 그를 대신해 서울에서 남로당을 이끌고 있던 김삼룡과 이주하 두 동지가 남한 당국에 차례로 검거됐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승엽은 화가 치밀었다. 남로당 지도부는 대부분 검거되었고 조직은 전부 와해되었다. 30만명에 달했던 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상당수는 전향해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돕고 해방구를 설치하기 위해 10여 차례에 걸쳐 남파시킨 인민유격대는 전부 토벌되었고 이현상이 이끌고 있는 빨치산은 지리산에서 쫓겨나 소식조차 두절된 상태다.

    지금 평양에서는 조선노동당의 헤게모니를 놓고 남로당과 북로당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데, 남로당이 붕괴되면서 월북한 남로당 지도자들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고 있었다. 근자에 들어서 북로당은 대놓고 남로당을 무시하고 있었다. 비록 셋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조선공산당의 법통은 어디까지나 박헌영 선생이 이끄는 남로당에 있다. 이승엽은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삼룡과 이주하 두 사람이 한꺼번에 잡히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조직이 많이 노출되긴 했어도 두 동지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이승엽은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 해 전 6월에 한국군 2개 대대가 월북한 일이 있었다. 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대대병력을 이끌고 38선을 넘은 것이다. 엄청난 쾌거였지만 그와 관련해 서울의 남로당 지도부에게 아무런 지시를 내린 적도, 보고를 받은 적도 없었던 이승엽은 크게 당황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누가 공작을 편 것이 분명한데 내가 모른다면 혹시 북로당이 따로 조직을 가동하고 있는 걸까?’ 은밀히 알아보려던 참에 김삼룡과 이주하가 동시에 검거된 것이다.

    “찾으셨습니까?”

    문이 열리면서 이강국이 들어왔다. 여간첩 김수임의 애인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유학 중에 공산주의자가 됐다. 광복이 되자 여운형을 도와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일하다 월북해 외무성 부상을 거쳐 지금은 무역성 산하 조선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김삼룡 동지와 이주하 동지가 체포되었소.”

    “알고 있습니다.”

    “뭔가 이상해.”

    이승엽이 의혹이 가득한 눈길로 이강국을 쳐다봤다.

    “어디서 정보가 샌 게 분명해.”

    이승엽의 눈매에 의혹이 가득했다.

    “하면…?”

    이강국의 안색이 변했다. 남반부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이승엽이 모르고 있는 정보라면 뻔할 것이다.

    “북로당과 직접 선이 닿는 자가 서울에서 공작을 펴고 있는 것 같아.”

    이승엽은 북로당에서 김삼룡과 이주하를 남한 당국에 밀고했을 거란 심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사실이라면 서울에서 알아보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이강국이 의견을 전했다.

    “그래서 안영달 동지에게 그 일을 맡길 생각이오.”

    이승엽은 북로당과의 일전을 마다하지 않을 각오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북로당에서 남로당의 뒤통수를 친 게 확인되면 곱으로 돌려줘야 한다. 만만하게 보였다가는 한도 끝도 없이 밀린다. 당과 조직의 생리를 잘 아는 이승엽은 이럴 때는 피의 보복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안영달 동지라면 정확한 진상을 알아낼 겁니다.”

    이강국이 동의를 표했다. 안영달은 일제강점기부터 공산당 활동을 했던 이승엽의 오랜 동지다. 그라면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보고할 것이다.

    미국인 위장망명과 남로당

    남로당과 북로당, 미군 간의 숨 막히는 첩보전

    1950년 초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던 김삼룡과 이주하. 북한이 남측에 민족진영 지도자 조만식과의 맞교환을 제의했을 정도로 거물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안영달이 김삼룡을 치안국 중앙분실에 밀고한 장본인이었다. 배신은 피를 부르게 마련이어서 안영달은 나중에 이승엽에게 죽임을 당한다.

    “현 앨리스와 이사민 말입니다.”

    이승엽이 한숨을 돌리려는데 이강국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화제를 돌렸다.

    “두 사람을 빨리 해외로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내무성의 수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현 앨리스는 하와이 태생의 한국계 미국인으로 광복 후에 미군정에서 잠시 일한 여인이다. 현 앨리스는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49년 초에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북한으로 망명했다. 현 앨리스는 상해임시정부에서 박헌영과 일했던 적도 있다. 이사민은 현 앨리스와 함께 북한으로 망명한 재미 공산당원이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중용되었다. 현 앨리스는 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 배치되었고 이사민은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으로 일했다. 그런 두 사람을 얼마 전부터 내무성에서 감시하기 시작했다. 미 첩보기관의 사주로 위장망명한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공산국가 출신 미국 시민권자들을 모국으로 망명시켜 첩보를 수집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 북한 내무성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망명 동기가 의심스럽다며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이승엽과 당시 외무성에서 일했던 이강국이 적극적으로 신원보증을 서는 바람에 평양에 들어왔던 것이다.

    CIA의 위장망명 프로그램은 그런대로 성과를 거두었지만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나기도 했다. 위장망명자가 마음을 바꿔 진짜로 망명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북한도 예외가 아니어서 CIA의 공작에 따라 1949년 11월에 입북했던 재미교포 조창영 부부가 마음을 바꿔 자수를 했고 그로 인해 현 앨리스와 이사민이 위험에 처한 것이다. 현 앨리스와 이사민이 간첩죄로 체포되면 북로당은 그들을 비호했던 이승엽은 물론 박헌영까지 끌고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두 사람을 빨리 빼돌려야 한다.

    “박헌영 동지께 부탁해서 두 사람의 비자가 빨리 나오도록 조치하겠소.”

    이승엽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북로당의 포위망은 여기 평양에서도 서서히 좁혀오고 있었던 것이다.

    현 앨리스와 이사민은 박헌영과 이승엽의 도움으로 북한을 탈출하지만 모스크바 공항에서 북한 관헌에게 체포돼 평양으로 송환된다. 그러면서 그들을 보증 섰던 박헌영과 이승엽은 처지가 곤란해진다. 6·25전쟁이 끝나고 박헌영과 이승엽을 비롯한 남로당 간부들은 미국 스파이 혐의로 체포돼 처형을 당한다. 남한에서는 김일성이 남로당을 패전의 희생양으로 삼은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최근에 공개된 미국 비밀문서에 의해 북한 측 주장이 상당 부분 사실로 확인됐다. 자료는 당시 남로당 수뇌부가 미국 정보당국과 선이 닿아 있었음을 밝히고 있는데, 그와 관련해서는 차차 밝히기로 하겠다.

    이승엽은 필요하면 변신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서 변신이란, 필요하면 멀리 있는 적과 손을 잡고 가까운 곳의 적을 치는 일종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전술을 말한다. 이승엽은 일제강점기에 전향해서 보도연맹의 일종인 대화숙(大和塾)에 가입했던 적이 있고, 남로당 내분 때는 장안파를 버리고 재건파와 손을 잡으며 박헌영의 측근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이 재판 과정에서 밝혔듯이 월북하기 전에는 레오나르도 버치 중위나 해럴드 노블 고문 등 미군정의 정보담당자들과 수시로 만나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이승엽에게 다시 한 번 변신을 해야 할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란성 쌍둥이의 운명

    한반도는 동서냉전이 열전을 향해 치닫던 시기에 폭풍의 중심이었다. 남과 북은 첩보전에 혈안이 되었고 배신과 음모가 횡행하면서 변절자와 이중첩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의 시기에 대조적인 삶을 사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 사람은 몰락한 남로당을 살리기 위해 평양에서 안간힘을 쓰던 이승엽이고 또 한 사람은 서울에 북로당 직속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남한을 직접 관장하려 한 성시백이다. 변절과 초지일관의 신념으로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두 사람은 각각 평양과 서울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성시백은 남로당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서, 이승엽은 그런 성시백을 제거하기 위해서.

    남로당과 북로당. 티격태격하며 서로 형임을 내세우던 이란성 쌍둥이는 남과 북이 따로 정부를 수립하면서 그만 애증의 세월을 마감했다. 명암이 확연하게 갈린 것이다. 지하에 숨어 지내던 조선공산당은 광복을 맞아 밝은 빛을 보게 되었다.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 박헌영이었다. 김일성이 소련군의 후원으로 쉽게 북한을 장악했지만 경력과 지명도에서 박헌영의 상대가 못되었다. 코민테른은 일국일당주의를 택하고 있다. 그래서 김일성은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 중앙위 산하 북조선분국 책임자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지만 이후의 세월은 김일성 편이었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이 미군정에 쫓겨 다니는 동안에 평양의 북조선분국은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아갔다.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에 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하면서 남조선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우익과 대결하기 위해 세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공산당이 남조선노동당으로 간판을 바꿔달자 북조선분국은 일국일당주의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우기며 슬그머니 북조선공산당으로 격을 높였다. 연후에 연안파의 조선신민당과 합당하며 북조선노동당을 칭하고 나섰다. 그렇게 되면서 김일성이 박헌영과 동격이 되었다. 남로당 간부들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월북해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처지에 더는 큰 소리를 칠 수가 없었다.

    비록 셋방살이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공산당의 정통성은 여전히 남로당에 있었고 남로당은 남한에서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48년 8월에 해주에서 개최된 인민대표자회의에서 남로당은 건재함을 과시했다. 남로당은 최고인민회의 전체 대의원 572석 가운데 과반수인 360석을 차지했고 35인에 달하는 주석단에서도 다수를 점하며 북로당을 압도했다. 당시 박헌영은 남한 인구 1800만명 가운데 남로당원이 77%에 달한다고 호언했고, 김일성과 김두봉, 김책 등 북로당 지도부는 박헌영의 위세를 인정하며 뒤에서 박수를 치는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남로당은 급격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남로당이 주도한 폭동과 반란이 차례로 진압되면서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친정이 망해서 좋을 것 하나 없다. 북로당은 남로당에 합당을 요구했다. 말이 합당이지 사실상 흡수합병이었다. 남로당으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지만 싫다고 버틸 형편이 못됐다. 결국 1949년 6월24일에 조선노동당이 새롭게 결성됐고, 김일성이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마침내 김일성이 공산당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조선노동당의 출범으로 공식적으로는 북로당과 남로당이 사라졌지만 헤게모니 장악을 둘러싼 양 계파 간의 투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박헌영은 국토완정-통일전쟁에서 반격 국면을 찾기로 하고 남로당원들의 무장봉기를 호언하며 통일전쟁을 재촉하고 나섰다. 하지만 북로당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미 식물인간에 불과한 남로당에 기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북로당은 대남사업을 직접 챙기기로 하고 적합한 인물을 물색했다. 그리고 적임자로 성시백을 발견했다. 김일성은 성시백에게 북로당 직속의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도록 은밀히 지시했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와 직접 연결된 이른바 ‘권위 있는 선’이 서울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한의 정보당국은 물론 남로당에도 극비 사항이었다.

    미군의 미온적인 군사원조

    1950년 4월 중순. 미 군사고문단장실.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개하면서 겨우내 찌들었던 서울 거리가 환하게 탈바꿈했다. 서울시민들은 산으로 들로 나들이를 나서고 고궁을 찾으며 화창한 봄날을 즐겼다. 그러나 전쟁의 먹구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한 미국과 대한민국 정보 책임자들의 표정은 화창한 봄날과 대조적으로 몹시 어두웠다.

    “조선의용군들이 입국을 완료하면서 현재 북한은 10개 보병사단과 1개 기갑연대의 편성이 완료되었소.”

    육군 정보국 장도영 대령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북한군의 총병력은 13만5000명에 달하는 데 반해 국군의 총병력은 8개 사단 9만8000명에 불과해 엄청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북한은 병력을 계속해서 늘리고 있었다.

    합동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다섯 명. 한국군은 육군 정보국장 장도영 대령과 방첩대장 김창룡 소령이 자리했고 미군은 군사고문단장 라이트 대령과 CIA 책임자 싱글로브 소령, 그리고 미 공군 첩보대(OSI) 소속의 니콜스 특무상사가 합석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장갑차를 겨우 27대 보유하고 있을 뿐인데 북한은 탱크를 무려 150대나 보유하고 있소.”

    장도영 국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당시 육군 정보국에는 나중에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인물들이 전부 집결해 있었다. 국장 장도영은 5·16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과장 이후락 소령은 대통령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을, 그리고 북한반장 김종필 중위는 국무총리를 지낸다. 여기에 군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예편됐던 박정희가 촉탁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6·25전쟁의 전개과정과 결과가 소상히 알려졌지만 당시만 해도 미군이 정말로 손을 뗄 것인지, 저들의 호언대로 남로당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인지, 전투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육군 정보국은 다만 비교적 소상하게 북한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전쟁이 임박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남과 북의 군사력 차이가 점점 벌어지고 있소. 당장 전쟁이 터진다면 초반에 전선이 붕괴될 것이오.”

    장도영 국장의 목소리가 저절로 커졌다. 소련이 적극적으로 북한에 군사원조를 하고 있는 데 반해 미국은 미온적이었다. 군사원조를 요구할 때마다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제7함대가 있네, 제5공군이 있네 하며 군원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는 사이 남과 북의 전투력 차이는 점점 벌어져 전투의 승패를 가름하는 1분당 발사탄수에서 남한은 북한의 10분의 1의 불과한 절대 열세에 놓이고 말았다.

    “군사원조가 시급한 것은 본관도 잘 알고 있소. 그렇지만 맥아더 사령부가 반대를 하고 있소. 윌로비 장군은 대한민국이 대만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군원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이오.”

    라이트 대령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국부군이 대륙을 공산군에게 빼앗긴 이유는 장제스(蔣介石) 군대의 무능과 부패 때문이다. 그에 실망한 맥아더 사령관의 정보참모 윌로비 장군은 한국을 대만과 같은 부류로 간주하며 군사원조에 반대하고 있었다. 미국으로선 걸핏하면 북진통일을 부르짖는 이승만 대통령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윌로비 장군은 작년의 일을 잊지 않고 있소.”

    라이트 대령의 지적에 장도영 대령과 김창룡 소령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할 말이 없었다. 사실 한 해 전 발생한 2개 대대의 월북은 맥아더 사령부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군에 침투한 남로당이 모조리 색출되었으니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겁니다.”

    김창룡 소령이 나섰다. 김삼룡과 이주하마저 체포되었으니 남로당은 이제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성급하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군에 암약하고 있는 자들이 있소”

    CIA 요원인 존 K. 싱글로브 소령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싱글로브 소령은 1970년대 주한미군 참모장으로 근무할 때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방침에 반기를 들다 면직됐던 강경파 인물로 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시절부터 만주에 주둔하면서 한국 청년들을 북한에 침투시키는 공작을 지휘하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북한 정세에 밝았다.

    “우리가 파악한 정보에 의하면 작년 8연대 2개 대대의 월북은 남로당과는 다른 선에서 공작을 한 것 같습니다.”

    싱글로브 소령의 말에 김창룡 소령은 뜨끔했다. 미군이 벌써 거기까지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방첩대에서도 그러한 정황을 포착하고 은밀히 내사를 하던 중이었다.

    “한국군은 좌익분자들을 모두 색출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군 내부에서 암약하고 있는 자들이 있소. 군비증강에 앞서 정군(整軍)이 철저하게 단행되어야 할 것이오.”

    라이트 대령이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하면서 누굴 탓하려 드느냐는 듯 두 한국군 장교를 몰아붙였다. 장도영 대령과 김창룡 소령은 혹을 떼려다 혹을 붙인 격이 되고 말았다.

    합동회의는 그렇게 각각의 주장만 펼친 채 특별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이 났다. 전쟁이 임박한 마당에 정체불명의 첩자가 군 내부에 침투해 있다는 사실에 두 정보 책임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군사고문단장실을 나섰다. 라이트 대령이 두 한국군 장교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서면서 단장실에는 싱글로브 소령과 니콜스 특무상사 두 사람만 남았다.

    “한국군 정보국은 아직 별 단서를 포착하지 못한 것 같은데?”

    싱글로브 소령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물이 암약하고 있는 건 분명한데 정체가 전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니콜스 공군 특무상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도널드 니콜스 특무상사. 훗날 싱글로브 소령은 그를 ‘최고의 첩보원’이라 칭했는데 첩보전을 얘기할 때 그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만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계급은 특무상사에 불과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단독면담을 할 만큼 깊은 신임을 얻고 있었으며, 북한은 니콜스 특무상사를 ‘천의 얼굴’이라 부르며 그의 목에 현상금까지 걸어놓고 있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또 닦달하겠군요.”

    “그러니 빨리 손을 써야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네.”

    “무슨 문제가?”

    니콜스 특무상사는 싱글로브 소령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덩달아 긴장했다.

    “모스크바 지국에서 통보가 왔는데, 현 앨리스와 이사민이 모스크바에서 체포되었다고 하네.”

    싱글로브 소령이 풀어 죽어 말했다. 이제 위장망명자를 통한 공작에 더는 기대를 걸 수 없게 된 것이다.

    적의 적과 손을 잡다

    “그렇다면 사람을 새로 보내야겠군요.”

    니콜스 특무상사가 대책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국 기록은 니콜스 특무상사가 직접 평양에 침투해 이승엽을 지칭하는 듯한 ‘남로당 고위간부’를 만나고 돌아온 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정황과 기록, 그리고 결과로 봐서 니콜스 특무상사와 이승엽이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밝혀지면서 이승엽은 미제 간첩으로 처형당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승엽이 미국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북로당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적의 적과 손을 잡고 이해가 일치하는 한도에서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는 공작을 펼쳤을 것이다. CIA가 공작을 주도한 한국계 미국인들의 위장망명을 이승엽이 적극 지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음모와 배신이 판을 치던 시절에 대척점에 서 있던 두 사람. 변신의 달인과 공작의 귀재에게 공통의 적이 생겼다. 아직은 실체가 안개에 가려 있지만 남로당의 기반을 허물며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가 두 사람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손을 잡을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당시 정보획득의 주요 수단은 사람이 직접 정보원(情報源)에 접근해 정보를 수집하는 ‘휴민트(humint)’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군의 경우 북한 후방의 정보는 월남민을 통해서, 그리고 전방 배치 상황은 정보요원이 38선 이북으로 침투해서 취득해온 것에 의존하고 있었다. 미군은 따로 침투시킨 고정간첩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고급정보를 얻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면 위장귀순을?”

    싱글로브 소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것은 발각될 염려가 크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전향해버릴 수도 있어 웬만하면 쓰지 않는 공작이다.

    “상황이 급합니다.”

    니콜스 특무상사는 강행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개전이 임박한 것은 분명하다. 빨리 맥아더 사령부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군이 장제스 군대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군 정보당국도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자가 서울에서 암약하고 있는 사실은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굴까? 어쩌면 평양의 남로당 간부들도 모르는 북로당의 비선(秘線)일지 모른다.

    니콜스 특무상사가 위장전향자로 정한 사람은 치안국 중앙분실장 백형복 총경. 바로 얼마 전에 김삼룡을 검거한 인물이다. 그렇게 되어 6·25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 대한민국의 대공사찰 총수가 월북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북은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요직에 앉혔다.

    인민공화국 영웅 1호

    1950년 4월 말, 서울운동장 부근 이발소. 영업이 끝난 이발소 문은 굳게 닫혔는데 그 앞에 어울리지 않게 미제 뷰익 승용차가 서 있었다. 굳게 닫힌 이발소 안에서 승용차 주인 성시백과 이발소 주인 김명룡이 책상 위에 놓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대로 찍었군. 좋아. 촬영을 계속하도록 해.”

    영월발전소를 촬영한 사진을 자세히 살피던 성시백이 만족을 표했다.

    성시백. 인민공화국 영웅 1호로 부드러움과 강함을 겸비한 데 더해서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지닌 인물로 나중에 김일성대학 총장을 지내는 성자립의 부친이기도 하다. 1905년생이니 박헌영보다는 다섯 살 아래고 김일성보다는 일곱 살 많은 데, 동갑인 이주하가 김일성을 막냇동생처럼 다룬 것과 대조적으로 성시백은 최후의 순간까지 김일성에 대한 충성스러운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김일성은 성시백이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수시간 전에 총살당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상해임시정부 출신으로 서울에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고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있던 성시백은 당대 최고의 스파이며 투사라고 할 수 있다. 박헌영과 이승엽, 김삼룡, 이주하 등 남로당 간부들이 일제강점기에 모진 옥고를 치렀음을 들어 조선공산당의 적자임을 주장했지만, 투쟁에 관한 한 성시백이 그들보다 한 수 위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밀명을 받고 장제스 군대에 침투했던 성시백은 혼전 중에 홍군의 포로가 되었다. 우군에게 잡힌 꼴이니 정체를 밝히고 빠져나올 수도 있었건만 성시백은 정체를 숨긴 채 모진 고문을 겪으며 5년의 감옥생활을 참아냈다. 그런 성시백을 국부군이 신뢰하는 것은 당연했다. 성시백은 기밀에 쉽게 접근했고 중요한 군사비밀을 빼돌렸다.

    남로당은 과격 일변도의 투쟁으로 자멸을 초래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박헌영의 오만한 성품도 한몫을 했다. 타협과 용서를 모르는 박헌영은 중도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장안파 출신 남로당원들도 적으로 돌려버렸지만 성시백은 달랐다. 포용력을 십분 발휘해서 중도 성향의 인사들을 하나둘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행동하는 남로당과 달리 사업가 행세를 하며 대낮에 떳떳하게 돌아다녔다. 남로당과는 너무 다른 행보에 대한민국 수사기관은 그를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성시백은 사업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공작에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남한은 북한에서 송전을 중단하면서 양초와 카바이트 수요가 급증했다. 성시백은 카바이트 무역에 뛰어들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그가 소유한 금비나호가 북한 진남포와 중국 칭다오(靑島)에서 카바이트와 양초를 싣고 인천과 부산항에 들어오면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았다. 성시백은 그 돈을 밑천으로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을 인수하고 신문사를 경영했다.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언론사주를 간첩으로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한 성시백은 서울 시내 13곳에 아지트를 두고 은밀히 공작을 추진해나갔다.

    친북인사 당선시켜야

    “선거가 얼마 안 남았다.”

    성시백은 사진을 한쪽으로 밀쳐놓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제2대 총선이 5월30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총 의석수는 210석. 성시백은 그중에서 상당수를 친북인사로 채울 계획을 진행 중이었다.

    “미군 철수에 동조했던 의원들을 중심으로 포섭 대상을 선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년 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통에 일이 어려운 점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김명룡이 보고했다. 그는 성시백의 심복으로 이곳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면서 신분을 위장하고 있었다. 작년의 일이란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해서 노일환, 이문원 등 국회의원 13인이 남로당에 포섭된 혐의로 체포된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을 말한다.

    국회 프락치 사건이 화제에 오르자 성시백은 화가 치밀었다. 따로 국회에 동조 세력을 포섭하고 있던 성시백은 프락치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그간의 공작이 수포로 돌아가는 쓴맛을 봤던 터였다. 남로당이 하는 짓이 그렇지. 성시백은 혀를 찼다. 제주도도 그렇고 대구와 여수도 마찬가지다. 괜히 소란만 떨었지 얻은 게 뭐가 있느냐 말이다. 결국 조직만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에 비해서 남반부정치위원회는 착실하게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한 해 전, 2개 대대 월북 공작과 이승만·장제스의 진해 회담 정보를 빼돌린 것도 성시백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김구 선생을 설득해 남북연석회담에 참석케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틈틈이 남한의 군사시설을 촬영해 보내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정보다.

    성시백의 목표는 뿔뿔이 흩어진 남로당원들과 그동안 남로당에서 소외됐던 사회주의자들을 규합해 새롭게 남반부정치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당면한 과제는 목전에 당도한 총선에서 친북인사를 최대한 많이 당선시켜 남북평화통일안을 국회에 상정시키는 것. 공작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고, 목표를 향해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성시백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오제도 검사와 방첩대장 겸 합동수사본부 국장인 김창룡 소령, 그리고 시경 사찰과 최운하 과장과 김임전 주임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하고 마주 앉아 있었다. 대공수사기관의 책임자들이 전부 모인 자리인데 꼭 있어야 할 사람이 한 명 빠져 있었다. 치안국 중앙분실장 백형복 총경이 돌연 38선을 넘어 월북한 것이다.

    발칵 뒤집힌 남한 정보기관

    대공수사기관의 책임자가 월북한 초유의 상황이 몰고 온 충격은 엄청났다. 2개 대대 월북에 비견될 만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백형복 총경이 대공비밀서류를 들고 월북한 바람에 일선 수사기관이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치안국은 물론 시경과 방첩대, 육본 정보국이 발칵 뒤집혔고 경무대는 엄중문책을 공언하고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 한국군을 제2의 장제스 군대로 의심하고 있는 마당에 이게 또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빨리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그래서 군검경합동수사본부가 긴급회동을 한 것이다.

    “이상합니다.”

    김창룡 소령이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용복이 월북을 주도했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왠지 수상합니다.”

    조용복은 안영달과 함께 김삼룡 체포에 협조한 남로당 간부다. 그 두 사람이 전향하면서 김삼룡 체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다시 치안국 간부를 포섭해서 북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배신과 음모가 횡행하는 현실이라고 해도 쉽게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이다. 혹시 미군 당국에서 시도한 공작이 아닐까. 김창룡 소령은 니콜스 특무상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 미군 첩보대에서?”

    최운하 과장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분간 지켜보는 게 좋겠군.”

    오제도 검사도 위장망명 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미군 첩보대에서 공작을 펼치는 중이라면 일단 지켜보는 게 좋다. 다른 기관에서 추진하는 공작에는 간여하지 않는 게 이쪽 세계의 불문율이다. 남로당과 북로당도 그렇지만 대한민국 수사기관과 미군 정보당국은 사안에 따라 협조하기도 하고 따돌리기도 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라이벌 의식이 더해져 군과 경찰이 경쟁을 하고, 같은 경찰이라도 치안국과 서울시경은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미군과 치안국에서 펼친 공작이라면 육군 정보국과 시경 사찰과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꼴이다.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럴수록 냉정해야 한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체포의 기회가 남아 있다.

    “그동안 뭐 좀 알아낸 게 있나?”

    최운하 과장이 김임전 주임을 지목했다. 지금 수사기관의 촉각은 정체불명의 거물에 쏠려 있었다. 미군 첩보대의 공작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별로 없습니다만 남로당과 별개로 움직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김임전 주임이 풀이 죽어 보고했다. 전향한 남로당원들을 아무리 닦달해도 더 알아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전에 체포해야 해.”

    오제도 검사가 엄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전쟁의 징후는 날로 짙어가고 있는데 총선이 목전에 당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될 것인가? 여론이 예전만 못하면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럴 때 꺼진 불씨가 다시 살아나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뭔가 단서가 있어야 수사를 할 텐데 도무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미군 첩보대의 공작이 사실이라면 혹시 북쪽에서 무슨 정보가 내려오지 않을까? 한 가닥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문제는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것이다. 김임전 주임은 무거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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