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미첼 바첼레트 칠레 최초 여성 대통령

증오를 거꾸로 돌리는 데 바친 삶… “고마웠어요, 대통령”

  • 허문명│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angelhuh@donga.com│

    입력2010-06-04 10: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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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첼 바첼레트 칠레 최초 여성 대통령

    2006년 3월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군중에게 인사하고 있는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

    한국의 첫 번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네루다의 고향이며, 프랑스 못지않은 우수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 라틴아메리카 서남부의 칠레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다. 국토가 남북으로 긴 나라 칠레가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온 것은 아무래도 ‘와인’ 덕이 클 것이다.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면서 대거 쏟아져 들어온 칠레 와인은 가격 대비 만족도가 높은 편이어서 국내 소비자가 와인에 한결 친숙해지는 데 일조를 했다.

    그런 칠레가 최근 닥친 강진으로 전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2월27일 규모 8.8의 강진이 칠레 서해 연안에서 발생한 이래 여진만 100여 차례가 넘었다. 먼 곳에서 일어난 재난이지만 와인 값이 오르고 종이, 구리 등 원자재 값이 상승해 국내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자 ‘지구촌’에 살고 있음을 실감케 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들의 리더십이 빛을 발휘한다. 칠레에서도 지진이라는 대재난 속에 이 나라 최초이자 남미 지역 전체에서 직접선거로 선출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의 리더십이 새삼 주목을 받았다. 임기 마지막 날인 지난 3월10일까지 지진현장을 돌아다니며 이재민을 위로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국제뉴스의 주목을 받았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바첼레트 대통령이 지진이 발생하자마자 6개 피해 도시를 돌아보며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노력했다”고 전했다. 지진 발생 직후부터 매일 TV에 출연해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침착한 대응을 주문한 것도 인상적이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약탈이 발생하자 협상을 통해 대형 슈퍼마켓 체인에서 이재민들에게 물품을 공짜로 공급하면 추후 정부가 보상하기로 협의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2014년에 다시 만나요”



    3월11일 있었던 그녀의 퇴임식은 재난의 와중에도 국민축제를 방불케 했다.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 발코니에서 작별을 고하는 바첼레트 대통령에게 칠레 국민은 뜨거운 박수와 함께 “대통령 고마웠어요. 2014년에 다시 만나요” 하며 환호를 보냈다. 2014년 말 대통령선거에 다시 후보로 나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한 것이다. 행복하게 퇴임하는 대통령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정치가 연출된 것이다.

    2009년 ‘포브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22위에 바첼레트를 올렸고, 2008년 ‘타임’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그를 포함시켰다.

    칠레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바첼레트는 남녀를 통틀어 일찍이 칠레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정치 스타다. 라틴 아메리카 최초 여성 국방장관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이전부터 드라마틱한 인생으로 칠레인의 마음을 울린 사람이다. 그가 걸어온 길에는 칠레 현대사의 분열과 상흔, 희망과 비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0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 정권인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정권은 대규모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사회주의적 급진정책을 실시하다 집권 3년 만인 1973년 9월11일 육군사령관이던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로 무너진다.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에서 결사항전하다 사망했다.

    친미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의 통치는 1990년 정권 이양 때까지 무려 17년간 이어진다. 군부독재의 장기집권은 칠레 현대사의 그늘이다. 칠레는 한국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군부독재를 딛고 경제를 일으키고 민주주의를 건설했다는 점에서 한국과 닮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청문회가 열리던 1980년대 말, TV에서 방영된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칠레의 피노체트 독재는 가혹했다.

    피노체트 쿠데타와 그의 통치는 칠레 현대사에서 가장 큰 갈등의 진원지로 아직까지 칠레를 분열시키고 있다. ‘세계의 과거사 청산’(푸른역사)이란 책에서 칠레 편을 쓴 이성헌씨는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칠레는 양분됐다”고 소개했다. 한편에서는 가혹한 군부독재를 ‘마르크스주의의 암’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이해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선거를 통해 집권한 민주정부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전복하고 반대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야만적인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딸의 운명을 바꾼 아버지

    많은 칠레인이 피노체트 집권 시기를 상처로 기억하는 것은 가혹한 고문통치 때문이다. 피노체트는 우리의 옛 안기부에 해당하는 국가정보국을 통해 반대세력을 통제하고 불법체포, 구금, 고문, 처형, 추방 등을 서슴지 않았다. 정치범들을 대형 축구장에 가두고 휘발유를 뿌린 후 불태우기도 했으며 고문 살해 후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여성 수감자들에 대해서는 성 고문까지 자행했다. 피노체트 통치 기간에 일어난 인권침해는 정부의 공식적인 보고서에서 확인된 것만도 사망, 연행, 실종이 3000여 건, 구금·고문 피해가 3만5000여 건에 달한다. 1990년 민간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이 끈질기게 이어졌음은 당연한 일이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2006년 대통령 취임 첫 연설에서 1974년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헌사를 했다.

    “이 순간, 의심할 여지없이 (저의 이런 모습을 보고)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할 분, 그분이 살아계신다면 오늘밤 꼭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나의 아버지 알베르토 바첼레트(Alberto Bachelet)입니다.”

    알베르토 바첼레트는 고위 직업군인이었다. 인류학자를 아내로 맞아 둘째딸로 바첼레트를 얻는다. 바첼레트는 1951년 9월29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다. 산티아고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칠레 국토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1818년 4월5일 칠레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명인 야고보의 스페인 이름이자 스페인의 수호성인이기도 한 ‘산티아고’가 그대로 수도 이름으로 정해졌다. 산티아고는 19세기에 발견된 구리 광산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다.

    바첼레트는 호방하면서도 애국심이 깊었던 아버지의 유전자와 부드러우면서도 사물을 깊이 보는 지혜의 눈을 가진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부모는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을 믿는 상황에서 드물게 종교적 신념이나 가치를 자녀에게 강요하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의 양육을 했다.

    바첼레트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칠레의 여러 군 기지를 돌아다니며 보낸 덕분에 어릴 때부터 칠레와 칠레 국민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키웠다. 1962년엔 아버지가 미국 워싱턴 DC의 칠레대사관으로 파견되는 바람에 미국으로 건너간다. 당시 메릴랜드에서 2년 동안 중학교를 다녔는데, 미국 사람들이 칠레란 나라를 거의 모르고 있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는다. 바첼레트는 이때 처음 칠레를 세계무대에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이밖에도 선진국에서 얻은 다양한 경험은 그녀의 내면을 여러모로 살찌웠다.

    1963년 말 다시 칠레로 돌아온 바첼레트는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970년 칠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본래 사회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칠레의 보건의료 증진과 질병 완화를 돕는 구체적인 방법을 배우기 위해 전공을 바꾼 것이다.

    그런데 평범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일이 일어난다. 아옌데 정부에서 물가조절위원회라는 정부 요직을 총괄하고 있던 아버지가 피노체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감된 것이다. 반역죄라는 혐의가 씌워졌지만, 실상 피노체트 정권이 아옌데의 측근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부하들에게 집중적인 고문을 당한 아버지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받다 이듬해 심장마비로 죽는다. 당시 딸 바첼레트는 히피 같은 모습으로 의학과 사회학을 공부하던 22세의 대학교 4학년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바첼레트와 가족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피노체트 정권은 바첼레트 가족의 은행 거래를 모두 막아버리는 등 칠레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정부로부터 요주의 가족으로 찍히자 친지와 이웃들까지 바첼레트 가족을 멀리했다. 그러지 않아도 억울하게 아버지를 잃은 바첼레트의 마음에 반(反)정부 의식이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칠레 탈출

    아버지의 죽음 이전부터 민주화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바첼레트는 아버지가 죽은 후 정권의 감시가 날로 심해져감에도 지하 전위당으로 탈바꿈한 칠레 사회당을 돕는 위험(?)한 일을 감행한다. 학생 신분으로 사회주의 청년단 활동과 정치 수배자 원조 활동을 지속했다. 그러던 1975년 1월 어느 날, 집에서 밥을 먹다가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만다. 어머니와 함께였다. 바첼레트 모녀는 고문과 암매장으로 악명 높은 산티아고의 비밀 감금 장소에 갇혔다. 당시 피노체트 정권은 여성들에게도 모욕, 구타, 심지어 성폭행까지 했는데, 바첼레트 모녀는 성폭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모진 욕설과 구타를 당했다.

    하지만 바첼레트는 기를 꺾지 않았다. 감방 안에서도 동료들을 치료해주면서 격려했다. 1년여 지난 어느 날 아버지를 존경해온 일부 군인들의 도움으로 바첼레트는 어머니와 함께 천신만고 끝에 칠레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남동생이 정착해 있는 호주로 망명한다.

    바첼레트는 호주를 거쳐 사회주의 나라인 동독에 살기로 결정한다. 당시 동독에는 바첼레트처럼 군부독재의 탄압을 피해 망명한 칠레 민주인사가 여럿 살고 있었다. 바첼레트는 훔볼트대학에 입학해 의학공부를 계속한다. 영원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앞날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통의 나날이 이어지는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그곳에서 첫 인연을 만나 결혼에 이른다. 상대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망명자인 칠레 출신 건축가 호르헤 다발로스(Jorge Da‘valos)였다. 바첼레트는 그와 결혼해 맏아들 세바스티안(Sebastian)을 얻는다.

    비록 이국땅이지만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한 바첼레트의 삶이 또 한 번 바뀐다. 1979년 피노체트 정권이 정치범들에 대해 대거 사면을 실시하면서 바첼레트 모녀에 대해서도 추방령을 철회한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고향 칠레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학업을 계속해 198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외과 의사 자격을 취득한다.

    바첼레트는 일반 개업의를 하고자 했지만 정부가 불허하는 바람에 4년 동안 스웨덴 정부가 운영하는 로베르토 어린이병원에서 소아과 전문의 과정을 이수하기로 한다. 이 기간 그녀는 ‘국가 비상사태에 의한 피해 아동 보호단체’라는 비정부 기구에서 일했는데, 산티아고 및 칠레 전역에서 고문당하거나 실종된 사람들의 아이들을 돕는 단체였다.

    바첼레트는 1986년부터 1990년까지 의료 부서 책임자로 이 단체를 이끌었다. 그리고 1984년 둘째이자 맏딸인 프란시스카(Francisca)를 낳는다. 하지만 얼마 후 이혼하고 만다. 보수적인 칠레사회에서 이혼, 특히 여성의 이혼은 낙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바첼레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면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그는 이후에도 비교적 자유로운 연애를 하는데 이혼 이듬해에는 알렉스 보코비치(Alex Vojkovic)라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알렉스 보코비치는 1986년에 피노체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무장단체의 대변인이었다. 2년간 동거했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했다. 바첼레트는 당시 피노체트 정권에서 고문당한 희생자 가족에게 의료행위를 제공하는 데 몰두했다. 알렉스 보코비치가 그녀를 정치활동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바첼레트는 반체제 활동을 지원하는 것은 신념에 맞지 않는다고 맞섰다.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피노체트 정권의 종말

    1988년 피노체트 정권이 8년 집권 연장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찬성 43%, 반대 54%로 패함에 따라 집권연장에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중도와 좌파 성향 정당들이 모인 ‘노(No)를 위한 정당연합’이 결성된다. 이 조직은 국민투표에서 승리한 후 17개 정파를 아우르는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연합 ‘콘세르타시온(Concertacion)’으로 발전해 훗날 아윌윈, 라고스, 바첼레트 등 세 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는 칠레 최대 집권여당으로 부상한다.

    선거를 통해 1990년에 집권한 아윌윈 정권은 먼저 민주체제를 공고히 하고, 사회적 평등과 지속적 성장을 위해 경제구조를 개혁하고 인권침해를 규명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아윌윈 민주 정권이 들어서면서 바첼레트의 삶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를 띠게 된다. 일단 의료라는 전공을 살려 보건복지부에 입성해 공공의료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범(汎)아메리카 보건기구, 세계보건기구 및 독일기술협력단체의 자문역도 담당한다.

    아이들을 키우고 일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바첼레트가 관심을 기울인 분야가 있었으니, 뜻밖에도 국방 분야였다. 1996년 칠레의 국립정치전략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국방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칠레의 험난했던 역사 속에서 칠레의 제도, 정치, 문화와 국방의 관계를 고민하고 싶다는 오랜 희망을 구체화한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도움이 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한 것처럼, 평화를 유지하고 전쟁을 피하는 국방이라는 학문에 매력을 느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바첼레트는 7점 만점에 6.99점이라는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다. 그리고 대통령 장학금을 받아 1997년 미국 워싱턴 DC의 미주국방대학(Inter-American Defense College)으로 유학한다. 칠레 육군 전쟁아카데미에서 군사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2000년 바첼레트는 정당연합체인 콘세르타시온이 배출한 대통령후보 라고스를 도와 선거운동에 나섰다. 라고스 후보가 당선되자 바로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칠레 의료개혁을 위해 동분서주하게 된다. 라고스 대통령은 바첼레트에게 첫 임무로 취임 90일 내에 병원 진료실에 시민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는 문제를 해결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칠레 사람들은 부족한 의료시설과 형편없는 의료서비스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으려면 석달 이상 기다려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첼레트는 800개의 진료 예약전화를 개통시키고 어린이와 노약자의 경우 24시간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모든 병원이 주말에도 문을 열도록 했다. 또 공공보건의료 시스템 개편에도 착수해 국민들이 암, 심장질환을 포함한 56개 질환에 대해 값싼 의료비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으며, 모든 가구에 대해 한 달 월급 이상을 의료비로 지출하지 않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성공적인 임무수행으로 국민과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바첼레트는 2002년 1월 마침내 국방장관에 임명된다. 칠레는 물론 남미를 통틀어 첫 여성 국방장관이다. 아버지가 군사정권의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지 19년 만이었다. 칠레 군부는 경악했다. 여자 국방장관을 모시는(?)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었지만, 혹여 아버지를 군에서 잃은 바첼레트가 군 원로들에게 복수라도 하지 않을지 전전긍긍했다. 그러다보니 바첼레트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 무시하는 이중적인 태도로 매사에 협조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바첼레트는 장관으로서 무엇보다 군심(軍心)을 얻는 게 우선이었다.

    군심과 민심을 움직인 진심

    재임 5개월째로 접어들던 2002년 6월 칠레에 내린 맹렬한 폭우가 그를 구했다. 바첼레트 장관은 수륙양용차를 타고 수재현장을 누볐다. 일반 사병들과 마찬가지로 탱크에 올라 폭우와 바람을 뚫고 수재민을 구해내는 헌신적인 모습이 칠레 전역에 TV로 생중계되자 군심뿐 아니라 민심이 움직였다. 진정 국민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정치인이 탄생했다는 공감대가 번져나갔다. 바첼레트는 마침내 명실상부 칠레를 대표하는 정치 스타로 부상했다.

    ‘수재민 구제사업에서 보여준 그녀의 탁월한 능력과 용기는 군부(軍部)의 존경과 신임을 받기에 충분했다. 군대를 사열할 때 군인들이 그녀에게 씩씩하게 경례를 하면 바첼레트는 다정스레 볼 키스로 화답하는 파격을 연출했다. 그녀와 군부 간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졌다. 공군은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비행 재킷을 선사하기도 했고 한 중위는 1973년 군사쿠데타 이후 군인을 껴안은 최초의 사회당원이며 국가화합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세계 최초의 권력을 가진 여성들’, ‘바첼레트’ 편)

    탄력을 받은 그는 각종 국방개혁에 착수한다. 무기 구입에서부터 국내 안보 및 첩보에 이르기까지 국방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검토하고, 군대 연금 체제 개편과 군사력 현대화 방안에도 매달렸다. 무엇보다 나라가 강해지려면 국방이 강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보수적 성향의 군 원로들의 마음을 샀다.

    “나라에 국방력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길거리에 나앉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고 만다. 국방력은 그것을 필요로 할 때에만 대충 때울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엔 전쟁이 쉽게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군비지출이 아깝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국방은 오히려 평화로운 시기에 강화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바첼레트는 재임 중 록히드마틴사로부터 F-16전투기 10대와 해군 잠수정 6대를 구매하는 등 장비를 대폭 강화했다. 그를 복수의 화신으로 생각하며 두려워하는 한편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했던 군대는 나중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그를 가장 지지하는 그룹으로 탈바꿈했다. 결국 바첼레트의 국방장관직 수행은 대권을 잡는 데 필요한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국가의 격을 높이다

    보건복지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으로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바첼레트에게 또 다른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4년 후반 여론조사에서 인기가 급격히 상승하자 대통령후보 물망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2005년 12월11일 대통령선거에서 45.95%의 최다 득표를 하지만, 과반수 획득에 실패한다. 승리가 쉽지는 않았다. 이듬해인 2006년 1월15일 다시 결선 투표가 치러지고, 마침내 53.49%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된다.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맞는 칠레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해외의 성원도 잇따랐다. 바첼레트의 당선이 확정된 직후 미국 국무부는 “남미의 대표적 민주주의국가에서 첫 여성대통령이 선출된 것을 축하한다”며 특별성명을 발표했고, 미국 언론들도 남다른 기대감을 표명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설에서 “바첼레트는 21세기형 지도자”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바첼레트는 서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으로 좌파 반미 포퓰리즘을 지향하는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나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전혀 다르다”고 했다. 그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며, 국민의 삶을 편하게 해줄 사람임을 인정했다. 미주개발은행(IDB)도 성명에서 “칠레에서 여성대통령이 선출된 것은 민주주의가 공고화하고 남녀평등이 실천되고 있다는 증표”라고 환영했다. 유럽연합(EU)의 하비에르 솔라나 외교안보 집행위원은 “바첼레트의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하겠다”는 축전을 보내기도 했다.

    칠레는 안정된 민주주의, 투명한 시장경제 덕분에 일찌감치 ‘남미의 유럽’으로 불려왔다. 세계은행이 1996년부터 2006년까지 한 사회가 얼마나 법치주의를 실현하고 있는지를 계량화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칠레는 100점 만점에 73점으로 중남미에서 독보적이다. 한국은 1996년 64.2점, 2006년 64.4점으로 10년 동안 제자리 걸음이다. 어쨌든 민주화의 척도를 나타내주는 법치주의로도 이미 선진국 수준이었던 칠레는 최초의 여성대통령을 배출해냄으로써 국가의 격이 격상된 듯했다. 바첼레트 취임은 1980년대의 경제자유화, 1990년대의 정치민주화에 이어 2000년대의 문화적 개방으로까지 평가됐다.

    그는 독재정권 시절에는 민주투사로 정권의 핍박받는 사람을 위해 헌신했고 민주화시대에는 남성중심사회에 도전했다. 칠레 국민의 선택은 차별은 줄이고 다양성을 높이는 사회 문화적 변화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0달러를 넘어서면서 칠레에서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는 등 여성의 사회참여가 국가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또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도 대부분 여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칠레 사회가 요구하는 정치적 리더십에 가장 맞는 인물로 바첼레트가 선택된 것이다.

    성공한 유아 공교육

    미첼 바첼레트 칠레 최초 여성 대통령

    2009년 11월11일 한국을 국빈 방문한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 대정원에서 열린 공식환영식에 참석해 환영 나온 어린이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세 자녀를 둔 ‘싱글맘’이다. 두 번 이혼했고, 세 자녀 중 한 명은 미혼모 상태에서 낳았다. 칠레는 가톨릭이 지배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강하다. 게다가 남성 우월주의가 강해서 2004년에야 이혼이 합법화됐으며 2005년에야 ‘직장 내 성희롱 방지법’이 마련됐다. 지금도 여성과 남성이 투표소에서 따로 투표할 정도다. 낙태는 여전히 불법이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바첼레트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성 못지않은 카리스마와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선거운동과정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정공법이다.

    바첼레트는 선거유세 때 “나는 여성인데다 이혼경력이 있고 더구나 종교를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이기 때문에 아마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죄를 한꺼번에 안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며 자신의 단점을 감추는 대신 정면으로 당당하게 맞섰다. 유세장에서 재혼을 생각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만일 내가 남성이었다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겠죠? 사실 나는 당신이 궁금해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틈이 없어요. 지금 내 머릿속에는 대통령이 되든 안 되든 앞으로 4년 동안 어떻게 열심히 일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밖에는 없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칠레 여성들의 삶은 모든 면에서 힘들지만 내가 당선되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혜택으로 여기도록 만들겠다”며 여심(女心)을 사로잡았다. 자신이 당선되면 다수의 여성장관을 임명하고 탁아시설을 확충하는 등 여성의 권리강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말이다. 실제로 바첼레트는 당선직후 남성 10명, 여성 10명의 남녀평등 내각을 구성했다.

    ‘그의 임기 중에 하루 2.5개꼴로 무려 3500개의 유아학교가 빈민가에 지어졌다. 소득 하위 40% 이하 가정의 0∼4세 아동은 무상급식과 무상교육을 받게 됐다.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일자리를 갖기 시작해 실업률이 떨어졌다. 출산율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덕성여대 신은수 교수는 “칠레의 유아학교 모델은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낮은 국가에서도 유아 공교육에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라고 강조한다.’ (2009년 11월12일자 ‘동아일보’, 정성희 논설위원의 ‘횡설수설’ 중)

    바첼레트는 “여성은 권력획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맡은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권력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남성과 다르다. 따라서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도 적을 만들기보다 서로간의 호의와 결속을 중시하게 된다. 이게 여성 정치인들의 장점”이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모든 여자가 바첼레트의 말처럼 ‘호의와 결속을 중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본적으로 모성적 유전자가 강한 여자들이 남자들에 비해 덜 호전적이고 평화를 중시한다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바첼레트가 칠레인들뿐 아니라 세계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았음에도 그 ‘한(恨)’을 이해와 사랑, 관용의 정신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다. 바첼레트는 “증오를 거꾸로 돌리는 데 내 삶을 바쳐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통령 취임 후 한 인터뷰에서 “나 역시 인생의 어느 순간 분노로 가득 찬 적이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게 발생했던 모든 일은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성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깊은 신념에 도달하게 해주었다. 나 스스로 증오의 생생한 체험자이기 때문에 그런 증오를 어떻게 하면 이해와 관용, 사랑으로 바꿔내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면서 “칠레의 후손들이 나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도 과거 회귀를 원치 않는다”

    지금까지 세계 정치무대에 등장한 여성정치인들 중에는 정치 지도자를 남편으로 두었다가 남편의 유고를 대신하는 과정에서 부상했거나 가문의 후광을 입은 이도 많았다. 하지만 바첼레트는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계단을 밟아 올라가며 민심을 사로잡는 정치를 펴 대통령직에 도전했고 그것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바첼레트 대통령은 2009년 11월에 한국을 처음 방문하기도 했다. 방한 전 한국기자들을 만나 기자회견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한국을 중요한 경제파트너로 강조한 바 있다. 실제로 칠레는 한국의 핵심적인 파트너다. 2008년 기준 칠레의 대(對)한국 수출은 280% 늘어 36억달러를 기록했고, 한국으로부터의 수입도 31억달러나 됐다. 칠레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수입한 자동차 중 3분의 1이 한국산이다.

    그는 당시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이전에 한 사람의 어머니,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소회를 간단하게 밝혔다.

    ▼ 대통령이지만 세 자녀의 어머니로서 아이들의 아침식사를 직접 챙겨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국방부 장관 시절까지는 열심히 챙겨줬는데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24시간 내내 바빠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래도 휴일에는 가끔 직접 식사를 챙겨준다. 내년 3월(퇴임 시기)부터는 매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 여성적 리더십에 대한 의미와 장단점에 대해 말해달라.

    “남성과 여성을 일반적으로 어떻다고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전통적으로 남성 리더십은 결과에 포커스를 맞추고 여성은 과정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한다. 어느 것이 월등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 혼자서 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 피노체트 군사정권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고문을 당했지만 국방부 장관 시절 과거 군사정권의 인사들까지 포용한 적이 있다.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한 것인지, 과거사 청산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는 그 당시 일을 잊지 못한다.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를 잘 풀어나갈 수 있다고 확신한다. 모든 사회에는 충돌과 의견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런 것을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중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민주주의적 방식이 더욱 소중하다.”



    ● ‘그녀들은 무엇이 다른가’(세계여성지도자·명인문화사)

    ● ‘세계최고의 권력을 가진 여성들’(북공간)

    ● ‘세계의 과거사청산 칠레편’(푸른역사)

    ● ‘21세기 여성 정치지도자들의 이미지는 ‘잔 다르크’ 아닌 실리주의 정통 정치인’(‘주간조선’ 2006년 3월13일) 등 다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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