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원정 월드컵 16강 ‘始祖’ 허정무

“세대교체 실패 … 히딩크가 한국 축구 말아먹었다”

  • 이형삼│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ans@donga.com│

    입력2010-07-19 11: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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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걱! 한국 15번 떴다, 다들 피해라”
    • 우루과이戰 만회골 후 아무 생각이 없었다
    • 축구 기술은 골반에서 나오는데…
    • 나를 안 좋아하는데 자리 연연해서야…
    • ‘그러니까 니 애비가…’ 악플에 전율
    • 바둑판에서 축구를 배운다
    원정 월드컵 16강 ‘始祖’ 허정무
    “새하얗고 동그란 것이 어쩌면 그리도 예쁘던지…와, 나도 놀랐다니까. 중국음식점에서 디저트로 나오는 열대과일 리쯔 있잖아요? 꼭 그거 같더라니까, 하하.”

    허정무(許丁戊·57) 감독은 웃으며 말했지만 기자는 도저히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갑자기 기자의 몸 어느 깊은 곳이 몹시 욱신거리고 얼얼해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 이래서 ‘진돗개’라고 하는구나.

    1978년 7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메르데카컵 축구대회. 이라크와 맞붙은 예선경기에서 혈기방장한 25세 허정무는 공격과 수비를 오가며 맹활약했다. ‘백넘버 15번 저 친구, 그냥 놔둬선 안 되겠다’ 싶었던 이라크 수비수가 마침내 하이킥성 육탄 태클을 날렸다. 높이 솟은 그의 축구화 바닥이 눈 깜짝할 사이에 허정무의 왼쪽 고환으로 날아들었다. 묵직한 충격을 느끼며 뒹굴었지만 ‘나도 갚아주마’ 하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서는 곧장 상대 선수에게 깊숙한 태클을 걸었다. 그러나 빗맞는 바람에 원을 풀지 못하고 교체된 뒤 구급차에 실렸다.

    병원에 가서 보니 고환 겉부분이 손가락 두 마디쯤 찢겨 있었다. 그 안으로 ‘리쯔’처럼 둥글고 하얀 부위가 들여다보일 만큼 깊은 상처였다. 꿰매고, 약 먹고, 훈도시 비슷한 천을 구해다 사타구니를 잔뜩 조여 맸다. 왼쪽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한의사 출신 주치의가 2~3일 동안 침을 놔주자 그제야 다리를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대회가 풀리그 방식이라 몇 게임 쉬었는데 우리가 결승까지 올라갔어요. 몸은 성치 않아도 결승엔 안 나갈 수 없잖아. 다친 지 닷새 만엔가 실밥도 안 떼고 결승전엘 나갔어요. 나도 참, 독종은 독종이야.”



    결승 상대는 또 그 껄끄러운 이라크. 그러나 2대 0으로 낙승했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허정무. 주요 부위를 크게 다쳤다던 한국 ‘15번’이 나 보란 듯 이를 서걱서걱 갈면서 선발 출전하자 이라크 선수들은 아연실색했고, 후반 20분께 교체돼 나갈 때까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라운드를 휘젓던 허정무 근처엔 누구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그곳’이 찢어지고도 곧장 맞태클로 응징에 나섰던 15번 아닌가, 저 몸으로 나왔는데 또 건드렸다간 무슨 험한 꼴을 당할까, 허걱. 더욱이 심판들도 모두 남자라 ‘15번의 아픔’을 절절이 공감하는 처지였기에 그날 밤 한국팀에 매우 우호적이었다는 후문이다.

    기회 안 놓치는 게 기술

    ▼ 그런 독종 감독의 눈에는 요즘 선수들의 근성이랄까 투혼 같은 것이 영 못마땅하겠네요. 평소 체력훈련도 혹독하게 시킬 것 같습니다.

    “아뇨, 시대가 변했습니다. 옛날에야 악이다, 깡이다 하면서 들입다 거칠게 치받아대면 ‘근성이 좋다’고들 칭찬했지요. 요즘은 달라요. 보복행위를 했다간 바로 레드카드를 받지 않습니까. 현대적 의미의 근성이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연마해나가는 자세 아닐까요. 그리고 그런 근성을 뒷받침하는 건 체력보다는 두뇌와 감각입니다.”

    예상과는 다른 답변이 돌아온다. 허정무 감독은 인터뷰 내내 ‘두뇌와 감각’을 강조했다. 7월13일 늦은 오후 서울 반포동 자택에서 만난 그의 얼굴은 딱 보기 좋을 만큼 그을어 있었다. 팔짱을 끼자 단단한 상체가 도드라졌다. “남아공에서 돌아와 2주 남짓 푹 쉬었다. 피로는 진작에 다 풀렸다”고 했다.

    오전엔 골프를 쳤다고 한다. 92타. 며칠 전엔 78타를 쳤다. 기복이 심해 20타 아래 위를 오르내린다고 한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골프는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지, 스트레스를 받으려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유별난 ‘진돗개 승부욕’도 골프에서만은 예외다. 마음먹고 드라이버를 휘두르면 300야드를 훌쩍 날려 보낸다니 가끔 OB가 나더라도 스트레스는 화끈하게 풀릴 성싶다.

    “미들홀에선 더러 원온도 합니다. 하지만 드라이버샷이 그린 30~40m 앞에 떨어지면 어프로치가 서툴러 보기, 더블보기를 예사로 하죠.”

    원정 월드컵 16강 ‘始祖’ 허정무

    남아공월드컵 대표팀 코칭스태프. 왼쪽부터 허정무 감독, 정해성 코치, 김현태 코치.

    ▼ 한국 축구의 고질병인 ‘문전처리 미숙’이 떠오르네요. 문 앞까지 잘 몰고 가다가 결정적인 득점기회를 놓쳐버리는. 이번 월드컵에서도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실력은 엇비슷해 보이는데, 우리는 기회를 연거푸 놓치고 상대는 단 한 번의 기회를 득점으로 연결하잖아요.

    “실력이 비슷한 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실력차이입니다. 기회를 안 놓치는 게 진짜 기술이죠. (박)지성이, (이)동국이, (박)주영이 같은 선수들도 결정적인 순간에 힘이 들어가 기회를 놓치곤 하거든요. 그래서 축구가 어려운 겁니다. 뇌에서 가장 먼 곳이 발 아닙니까. 그런 발을 손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니 축구가 쉽지 않은 거죠.”

    ▼ 우루과이 전에서 특히 그런 아쉬움이 컸습니다. 나중에 4강까지 오른 팀과 대등하게 잘 싸웠지만, 경기 직후 허 감독의 말씀대로 “골을 너무 쉽게 내주고 골 찬스에서 골을 넣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습니다.

    “우루과이는 조직력이 예선경기에서보다 더 탄탄했어요. 포를란·수아레스·카바니 등 공격수 3명의 공수전환이 빠른 데다, 수비형 미드필더 2명이 중원을 든든하게 지켰습니다. 우리로선 포를란을 어떻게 봉쇄하느냐가 고민이었죠. (김)동진이나 (이)영표를 붙이자니 우리 밸런스가 무너질 것 같아 결국 우리 식대로 갔습니다. (김)정우가 포를란을 좀 더 신경쓰기로 하고요. 이렇게 전반을 마무리하면 후반에 분명 기회가 올 것으로 봤습니다. 실제로 기회가 왔고요.

    그런데 미처 생각이 못 미친 게 있었어요. 후반에 나설 때 ‘경기를 뒤집자’고 마음먹었어야 하는데, 만회골을 넣는 데만 급급했던 겁니다. 역전을 하려면 만회골을 넣고 난 뒤의 마음가짐과 움직임에 대해 미리 생각했어야 해요. 이걸 생각해두지 않은 탓에 동점을 만든 후 선수들이 안도한 나머지 한순간 진공상태가 생겼고 다소 느슨한 플레이를 한 겁니다. 아차 싶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우루과이가 그 빈틈을 놓치지 않더군요.”

    허 감독과 기자는 초면이다. 우직한 허 감독은 약간 낯을 가리는 편이었고, 축구 취재 경험이 없는 기자는 ‘무지’의 소치로 그의 코멘트에 그때그때 적절한 추임새를 넣어주지 못했을 터. 그래서 처음 얼마간은 ‘아이스 브레이킹’에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월드컵 얘기가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가자 그는 눈빛을 달리하며 본격적으로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월드컵을 계기로 우리 국민 상당수가 축구전문가로 거듭난 만큼, 허 감독의 ‘리뷰 :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지루하지만은 않을 듯해 옮겨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원정 월드컵 16강 ‘始祖’ 허정무

    1986년 멕시코월드컵 아르헨티나 전에서 마라도나에게 태클을 거는 허정무 선수.

    ▼ 사실 16강 우루과이 전은 망외(望外)의 경기였고, 지난해 12월 조 편성 이후 우리 대표팀은 오로지 조별 리그 통과를 목표로 모든 준비를 해왔을 겁니다. 허 감독께선 우리가 속한 B조 편성 직후 그리스 전은 ‘공세를 이용한 역습’, 아르헨티나 전은 ‘수비수 괴롭혀 공격 템포 늦추기’, 나이지리아 전은 ‘볼을 오래 소유하는 상대가 춤추기 전에 끝내기’를 핵심 전략으로 설정했는데, 셋 다 잘 들어맞았습니까.

    “그리스는 원래 수비에 치중하다 역습을 노리는 팀이지만, B조에서 우리를 반드시 잡아야 할 상황이니 절대 수비 위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이게 아주 보기 좋게 들어맞았죠.

    아이고…그런데 아르헨티나 전은 우리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갔어요. 어차피 이기리라고 생각한 경기는 아니지만, 전반만 실점 없이 버티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봤죠. 스페인과의 평가전에서도 잘 버텼으니까. 아르헨티나의 찬스 대부분은 메시를 통해 이뤄지기에 메시를 영표에게 맡기고, 동진이를 영표 자리로 보내고, 주영이를 원톱으로 내세웠죠. 하지만 초반에 실점을 하고 나니까 이 구도가 무너졌어요.

    원정 월드컵 16강 ‘始祖’ 허정무

    16강전에서 우루과이에 석패한 뒤 허 감독이 주장 박지성을 위로하고 있다.

    더구나 후반에는 ‘더 실점하지 않겠다’는 전술을 폈어야 하는데, 전반 말미에 한 점을 만회하고 후반 들어 흐름이 좋아지니까 ‘한번 맞붙어보자’고 나간 게 패착이었어요. 수비가 흔들린 거죠. 가령 메시가 어시스트할 때를 보세요. 걔가 드리블하며 치고 나가자 우리 선수 5명이 달라붙었어요. 그러다 메시가 느닷없이 동료에게 볼을 툭 질러주고 빠졌는데, 다들 메시가 돌파하는 줄 알고 따라가다가 완벽한 공간을 내주고 말았잖아요. 어디 그뿐입니까. 첫 실점은 자책골, 두 번째 실점은 수비수들이 조금만 뒤로 빠졌어도 오프사이드, 세 번째 실점은 완전한 오프사이드였어요. 세 번째 골이 오프사이드로 선언됐다면 경기 양상은 또 달라졌을 겁니다. 경기가 안 풀리려니 되는 일이 없었어요. 골은 많이 먹었어도 경기 내용은 나쁘지 않았는데….

    나이지리아 전은 피차 좋은 기회를 많이 만들면서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됐어요. 아프리카에서 치른 경기에서 아프리카 팀에 선제골을 먹고도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건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봅니다.”

    세계의 ‘벽’ 못 넘은 까닭

    허 감독은 현대 축구의 대세라는 ‘토털 사커’를 이미 30년 전에 체험한 사람이다. 1980~83년 토털 사커의 원조 격인 네덜란드 프로리그 PSV 아인트호벤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축신(蹴神)으로 추앙받던 요한 크루이프가 토털 사커의 진면목을 보여주던 시절이다. 허 감독도 공격형 미드필더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오가는 멀티플레이어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3년 동안 77경기 15골을 기록했다. 이번 남아공월드컵에서 네덜란드는 비록 토털 사커의 전형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4강까지 파죽의 연승 행진을 했고, 크루이프로부터 토털 사커를 전수받아 제대로 체화한 스페인은 그런 네덜란드를 결승에서 꺾었다.

    ▼ 이번 월드컵에선 1~3위를 유럽 국가들이 휩쓰는 등 유럽 축구가 빛을 발한 반면 남미 국가들은 고전했습니다. 유럽 축구가 큰 흐름을 타고 있는 건가요.

    “남미 국가들도 16강까지는 강세였잖아요. 만약 브라질이 결승에 나가 스페인과 붙었다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축구란 게 워낙 상대적인 경기인 데다, 경기 당일의 미묘한 흐름이 승부를 뒤집어놓곤 하니까요. 8강전에서 브라질이 득점을 한 뒤에 네덜란드를 좀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오히려 대승할 수 있었다고 봐요. 전반에 한 골 넣었다고 설렁설렁 하다가 당한 거죠. 유럽과 남미는 여전히 세계 축구의 양대 산맥입니다.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고 단언할 수 없어요.

    다만 이번에 하나 눈에 띄는 변화는 유럽 축구가 화려함보다는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했다는 점입니다. 유로 2008 대회를 직접 봤는데, 그때 스페인이 지금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었어요. 이번 대회에선 실리와 안전 위주로 하다보니 볼 점유율은 높아도 경기력은 떨어집디다. 스트라이커를 비야 한 명이 전담하니까 파괴력이 떨어질 수밖에요. ‘사비-볼 배급, 이니에스타-침투, 비야-공격’ 딱 이것뿐이었어요. 네덜란드도 한때는 극단적인 공격축구를 구사했지만, 이게 리스크가 따르다보니 ‘안전운행하다 한 방 노리기’로 전환했고요.”

    ▼ 우리 선수들도 배운 게 많았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단지 ‘첫 원정 16강’만이 이번 대회의 성과는 아닐 겁니다. 대회를 준비하고 치르면서 귀중한 소득이 적지 않았을 텐데요.

    “과거 월드컵 같은 큰 대회에 나가면 괜시리 상대를 두려워하고, 그러다보니 몸이 경직돼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결국은 상대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곤 했습니다. 그게 너무 후회스러워 이번엔 ‘우리가 실력이 좀 모자라도 당당하게 즐기면서 우리 것을 충분히 보여주자’는 모토를 내걸었죠. 이 부분에선 정말 큰 소득이 있었어요. 우리 선수들은 이제 누구와 만나도 주눅 들지 않고 제 플레이를 합니다.

    하지만 세계 수준에 육박하긴 했어도 아직 ‘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 또한 절감했습니다. 체력과 정신력은 강해요. 그러나 기술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드리블, 패스 같은 볼 컨트롤 능력뿐 아니라 경기운영, 상황판단 같은 능력도 기술이거든요. 이런 건 단기간에 수준을 끌어올리기 어려워요. 다음 월드컵, 그리고 10년, 20년 후를 내다보려면 어려서부터 갈고 닦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메시, 사비, 포를란 같은 선수들이 나오려면 지금과 같은 학교 스포츠 시스템으론 한계가 있어요.”

    “깎아내리려는 사람도 많네요”

    원정 월드컵 16강 ‘始祖’ 허정무

    허 감독은 “16강도 16강이지만 세대교체도 뿌듯한 성과”라고 했다.

    ▼ 그래도 요즘은 여건이 많이 바뀌지 않았나요.

    “인식의 전환이 절실합니다. 아이들에게 승부보다는 축구 자체에 재미를 느끼게 만들어 두뇌와 감각을 키워줘야 해요. 어려서부터 이게 안 되면 창조적인 플레이가 나올 수 없죠. 클럽활동을 통해 축구를 자연스럽게 즐기고, 그중에서 재능 있는 아이들이 프로로 가는 수급 시스템이 돌아가야 합니다. 솔직히 일본과 비교해도 기술적인 면에서는 현재 일본이 우리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다고 봐요.

    아이들에겐 볼이 발에 붙게 하는 능력을 길러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즐기게 하는 것이 최고예요. 그런데 우리는 승부에 급급하다보니 어린애들한테도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시킵니다. 이렇게 하면 한창 성장할 때 몸의 밸런스와 유연성을 잃게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축구할 때 골반이 무척 중요하거든요. 골반이 유연하지 못하면 허리와 발목에 영향을 미쳐 감각적인 패스나 드리블을 할 수 없어요. 메시가 드리블할 때 보면 공이 발에 붙어 있다시피 해요. 그러면서도 수비수를 몇 명씩 따돌리며 자유자재로 방향전환을 합니다. 그 정도로 골반이 유연하다는 얘기예요. 이에 비해 우리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그저 뜀박질만 해온 터라 대개 골반이 굳어 있거든요. 뛰는 데 필요한 체력은 나중에 노력하면 얼마든지 보완할 수 있는 건데…. 이런 게 답답해서, 나중에 은퇴하면 아이들이 커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고 싶어요.”

    아무도 못 해낸 원정 월드컵 16강 위업을 세우자 그가 대표팀 감독을 연임하리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허 감독은 남아공에서 돌아온 지 사흘 만인 7월2일 축구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감독직을 사임했다. “축구협회의 차기 감독 인선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빨리 결단을 내렸다. 당분간 재충전의 시간을 갖겠다. 앞으로도 한국 축구에 기여하겠다”는 게 회견 요지였다.

    ▼ ‘박수 칠 때 떠나기’가 가장 현명한 선택 같았습니까.

    “처음부터 이번 대회 결과와 상관없이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코치들한테는 이미 언질을 주었고요.”

    ▼ 1986년 멕시코월드컵엔 선수로,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엔 트레이너로, 1994년 미국월드컵엔 코치로, 그리고 이번 남아공월드컵엔 감독으로 참가했습니다. 월드컵 경험이 가장 많은 축구인에게 연임을 기대할 만도 하지요.

    “훌륭한 선후배들에게도 기회를 줘야지요. 선수들도 여러 지도자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실력이 늘 거고요. 더구나 이번에 우리 선수들이 잘 뛰었고 목표도 달성했는데, 이걸 깎아내리려는 이도 많습디다. 다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자리에 연연해서야….”

    일부 네티즌의 악플 세례를 염두에 둔 발언 같았다. 매 경기가 끝날 때마다 인터넷엔 허 감독과 선수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글이 봇물을 이뤘다. 16강 진출에 성공했는데도 ‘그만두라’는 악플이 쏟아지자 이에 상처 입은 가족들이 “이제 쉬라”며 눈물로 호소했다는 얘기도 있다.

    10년 가는 ‘악플 상처’

    ▼ ‘특수성’을 지닌 일부 네티즌의 비난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아닌지요. 그냥 유명세이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텐데.

    “사임은 제가 내린 결정입니다. 제가 가족들 의견 따라 왔다갔다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그리고 어디에나 반대세력은 있다고 봅니다. 비판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고요. 하지만 비판을 떠나 인신공격에 가까운 건…. 악성 댓글 때문에 자살한 연예인도 있었잖아요. 이젠 좀 성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원정 월드컵 16강 ‘始祖’ 허정무

    허 감독의 자택 거실에 가득한 가족사진. 그의 가정적인 면모를 짐작케 한다.

    이날 처음 들은 얘기지만, 그에게는 악플과 관련한 너무도 쓰라린 기억이 있었다. 듣고 나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대표팀 감독으로 유럽 전지훈련을 갔습니다. 그런데 에스토니아에 가 있을 때 부친상을 당했어요. 급히 귀국해 장례를 치른 뒤 다시 돌아와 강팀인 체코와 평가전을 했습니다. 4대 1로 이겼죠. 올림픽을 겨냥해 만든 팀이라 그때 선수들이 동국이 하나 빼고 다 대학 선수들이었어요. 마침 귀국 직후 대학선수권대회가 있어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선수들을 다 풀어줬습니다. 그러고는 대회가 끝난 뒤 한·일전 사흘 전에 재소집했어요. 4차례 평가전이 포함된 유럽 전지훈련에다 대학선수권대회를 치르느라 다들 파김치가 된 상황이었죠. 경기 시작하고 20분이 지나니까 선수들이 그냥 걸어다녀요. 4대 1로 박살이 났죠.

    일본한테 지고 나니 욕을 바가지로 먹고 인터넷에서도 난리가 났는데, 거기에 어떤 댓글이 올라왔는지 아세요? ‘그러니까 니 애비가 뒈지지’…. 그때 너무 쇼크를 받아서 지금도 인터넷 들어가면 섬뜩섬뜩해요. 댓글은 아예 보지도 않고요. 하지만 가족들은 가끔 보는 모양입디다. 저한테 말은 안 하지만 무척 속상할 거예요.”

    ▼ 후임 감독으로 누가 적격이라고 봅니까.

    “제가 언급할 사안이 아니죠. (축구협회) 기술위원회에서 결정할 일입니다.”

    ▼ 이번 월드컵을 함께 치른 정해성 수석코치를 추천하셨다는 얘기가 있던데….

    “아유, 아니에요. 축구협회에 인사 가서 그만두겠다고 하니 어느 분이 ‘허 감독이 더 해야지’ 하시길래 ‘저는 벌써부터 결심했습니다’ 했어요. 그랬더니 ‘그럼 누가 맡아?’ 해요. 그래서 ‘아, 정 코치도 있고 좋은 사람 많잖습니까’ 했을 뿐이에요. 이 말이 엉뚱하게 전해진 거라니까요.”

    ▼ 말씀은 못 하지만 마음속에 점찍어둔 사람은 있죠? ‘저 친구가 딱 적임인데…’ 싶은.

    “아, 난 말 못해요.”

    ▼ 축구협회는 ‘허정무 감독이 잘했으니 후임은 무조건 국내 감독’이라고 확신하는 듯합니다. 한국인 감독과 외국인 감독, 각기 일장일단이 있겠죠? 한국인 감독은 선수들을 잘 알기에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든지, 외국인 감독은 축구협회나 인맥 신경 쓰지 않고 전술향상에만 전념할 수 있다든지….

    “한국인 감독이냐 외국인 감독이냐를 따질 일은 아닙니다. 한국의 어느 감독이냐, 외국의 어느 감독이냐를 따져야죠. 우리 축구에 필요한 사람이 누구냐, 다시 말해 인물을 평가기준으로 삼아야지 국적이 무슨 상관입니까. 아직도 외국인 감독이라면 일단 한 수 접어주며 숙이고 들어가는 사대주의 같은 게 남아 있어요. 한국인 감독은 대충 어영부영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고.”

    그때 허 감독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 놔두세요…그냥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주세요. 아뇨, 괜찮습니다…”라며 끊었다. 며칠 전 어느 방송국과 전화 인터뷰를 잠깐 했는데 출연료를 보내주겠다는 전화였다고 했다.

    히딩크는 세대교체에 무관심

    ▼ 원정 16강 진출로 눈높이가 올라간 축구 팬들이 다음 감독에 거는 기대 수준이 매우 높을 겁니다. 이 때문에 조급하게 성과를 재촉하면서 감독을 흔들어대진 않을까 걱정됩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후 히딩크 후임으로 온 본프레레, 베어백 감독도 그런 부담 때문에 긴 안목의 전략을 세우지 못한 건 아닐까요.

    “지금 우리 선수들과 유망주들의 수준, 발전 가능성 등을 고려하면 다음 대회에선 당연히 8강 정도는 목표로 삼아야죠. 일단 목표는 높이 설정해놓고 장·단기 전략을 마련해야 합니다. 감독들의 부담? 까놓고 말해서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의 미래를 걱정해서 장기적 관점에서 전략을 짠 게 있나요? 그는 철저하게 단기적인 것에만 집중했어요. 모든 전략과 전술을 오직 2002년 월드컵에만 맞췄으니까. 2002년 이후를 내다보는 세대교체, 특히 취약한 수비 부문의 세대교체엔 전혀 신경을 안 썼습니다. 히딩크의 뒤를 이은 쿠엘류, 본프레레, 베어백도 다 마찬가지였어요. 코앞의 성적 올리기에만 몰두했지 밑바닥에서부터 유망주들을 발굴하려는 노력은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 사람들이 한국 축구를 말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 이번 대회에서 우리 수비가 허술했던 것도 세대교체 실패 때문일까요. 실점한 8골 중 절반인 4골을 노마크 찬스에서 허용하지 않았습니까. 2002년 대회 때 최진철, 김태영, 홍명보 등이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던 생각이 났어요. 제가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건가요.

    “정말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데…. 아무튼 그때부터 수비수 세대교체 작업을 차근차근 해왔다면 상황이 좀 달라지긴 했을 겁니다. 자꾸 경쟁시키면서 키워야 하는데, 제가 팀 맡고 나서 이 잡듯 찾아봐도 잘 안 보이더라고요.”

    세대교체에 관한 한 허 감독에겐 웬만큼 발언권을 인정해줄 만하다. 박지성, 이영표, 이동국, 김남일, 송종국, 설기현, 이천수, 최태욱 등 쟁쟁한 면면들이 그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준비하던 10~12년 전에 발굴한 선수들이다. 황선홍과 홍명보는 코치 시절에 뽑았다.

    남아공월드컵 대표팀을 맡고 나서도 가장 역점을 둔 것이 세대교체다. 대회가 임박하도록 엔트리 발표를 미루고 주전 경쟁을 시킨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이번 월드컵을 치르면서 16강 진출 못지않게 뿌듯하게 여기는 것이 세대교체를 이뤄낸 점이다. 이번 대회도 급했지만 4년 후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세대교체는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박지성, 이영표를 발탁하는 등 선수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는 평가입니다. 신인들을 발굴할 때 주로 어떤 점을 눈여겨봅니까.

    “지능과 감각이죠. 볼이 왔을 때 패스와 컨트롤을 어떻게 하고 문전에선 어떻게 하는지, 볼을 갖지 않았을 때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체력은 그 다음입니다. 이건 훈련을 시켜봐야 알 수 있는 거고요.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성격입니다. 앞에서 말한 현대적 의미의 근성이 여기 포함되죠.

    지성이와 영표도 그렇게 뽑았습니다. 일주일쯤 훈련을 시켜보니 지능, 감각, 체력, 성격 다 오케이였어요. 그때 명지대 신입생이던 지성이는 다른 건 쓸 만해 보였는데 몸이 쬐끄만하고 체력도 별로였어요. 하지만 일주일을 지켜보니 회복능력이 좋더라고요. 기술위원회도 안 거치고 둘을 뽑겠다고 축구협회에 일방적으로 통보했어요.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1년 후에 보고 판단하라’며 딱 잘랐습니다. 1년 뒤에 아무도 시비 걸지 않았어요.”

    我生然後殺他

    ▼ 평생을 그라운드에서 살았는데, ‘재충전’도 좋지만 집에 있으면 몸이 근질근질하지 않나요.

    “제가 어디 축구를 완전히 그만두는 건가요. 대표팀 감독 아니어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겠죠. K리그도 하고 싶고요(그는 한때 나돌던 K리그 포항 감독 영입설에 대해서는 ‘접촉한 적도 없다’며 부인했다). 집에 있는 것도 좋아요. 나가는 게 별로 안 내켜서. 밥 먹고 술 마시는 것도 주로 이 동네에서 해결합니다. 술집 옮겨 다니고 하다가 공연히 말 나오는 것도 신경 쓰이고.”

    ▼ 축구감독이 축구만 잘 안다고 될 일은 아닌 듯합니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상대의 수를 읽어내려면 사람 공부도 게을리 해선 안 될 것 같네요. 그라운드 밖에서 ‘두뇌와 감각’을 계발하기 위해 즐기는 취미가 있나요.

    “바둑만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아마 4~5단쯤 두는데, 바둑과 축구엔 기본이 서로 통하는 게 많습니다. 예컨대 내 돌은 생각하지 않고 상대 돌만 먹으려 덤비다보면 내 돌이 다 죽잖아요. 아생연후살타(我生然後殺他)라, 아무리 공격축구를 강조해도 뒷문 다 열어놓으면 망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또 상대가 강한 곳으로 침투하지 말라(彼强自保)거나, 바둑판 전체를 보며 시야를 넓히라는 격언도 새삼 곱씹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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