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인류를 사로잡은 ‘무인도’와 ‘외딴집’의 상상력

‘로빈슨 크루소’ vs ‘월든’

  • 정여울│문학평론가 suburbs@hanmail.net│

    입력2010-08-04 09:2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어떻게 신께서는 스스로 만드신
    • 존재를 이렇게 완전히 파멸시켜
    • 불행하게 만들고,
    •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 홀로 남게 함으로써
    • 철저히 버리실 수가 있는가? 이런 삶에 감사를 드리는 건
    • 말도 되지 않았다.
    •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중에서
    나는 혼자만의 해와 달과 별들을 가지고 있으며 혼자만의 작은 세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밤에는 길손이 내 집 옆을 지나거나 문을 두드리는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마치 내가 이 세상 최초의 인간이거나 마지막 인간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중에서

    1 내가 만약 ‘아담’이라면?

    인류를 사로잡은 ‘무인도’와 ‘외딴집’의 상상력
    만약 무인도에 버려진다면, 우리는 얼마나 생존해낼 수 있을까. 만약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딴집에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고독을 견딜 수 있을까. 문득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참을 수 없는 권태를 느끼거나, 삶이 너무도 팍팍하게 느껴질 때면 저마다 한 번씩 ‘무인도’와 ‘외딴집’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곤 한다. 무인도에 버려져서도 우리는 다른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외딴집에 홀로 살며 오직 자연만을 벗하고 산다면, 우리는 여전히 한 사람의 ‘개인’일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저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리 중 누가 최초의 인간이었다 하더라도 인류의 삶은 이러한 모습으로 진화해왔을까. ‘최초의 근대인’을 그려낸 다니엘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1719), 그리고 톨스토이와 간디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의 ‘월든’(1854)은 이러한 원초적 질문에 대해 경이로운 해답을 제시해주는 작품들이다.



    다니엘 디포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각종 사업을 벌이던 상인이자 작가이자 비밀 첩보원으로도 활약한 다채로운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좋아했고, 정치·지리·범죄·종교·경제·결혼·심리학은 물론 미신까지 글쓰기의 소재로 삼은 전방위적 문필가였다.

    그는 4년 반 동안 외딴 섬에 버려졌다 살아남은 선원 알렉산더 셀커크(1676~1721)의 실제 이야기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지만, 셀커크의 체험담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담을 창조해낸다. 셀커크는 무인도에서의 삶이 아름답고 낭만적이었다고 회상했고, 오히려 다시 ‘세상 속으로’ 돌아오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아무 걱정 없는 삶, 미래에 대한 어떤 불안도 없는 ‘자연인’의 삶에서 다시 노동과 화폐와 인맥에 휘둘리는 ‘사회인’으로 돌아오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극기훈련’ 28년의 성과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는 ‘낭만적’인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곤경을 불굴의 의지로 헤쳐나가며, 신의 섭리를 반쯤은 믿는 척하면서도 실은 인간세계의 우연을 더욱 신뢰하는, 전형적인 근대적 남성상을 보여준다. 모험을 꿈꾸던 철부지 청년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28년을 보내면서 경험한 엄청난 ‘극기훈련’을 통해 노련하고 용의주도한 근대적 CEO형 인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말하자면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의 극한체험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영리해졌고, 유능해졌으며, 성공신화의 주인공에 어울리는 ‘근대인’이 된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영국의 산업혁명 직후에 탄생한 ‘최초의 근대인’을 형상화하고 있다면, ‘월든’엔 초기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미국 사회의 시스템에 염증을 느낀 한 지식인의 희미한 저항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무인도의 불시착이 전적으로 로빈슨 크루소가 전혀 원치 않았던 ‘재난’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월든 호수 근처에서 혼자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던 소로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고립을 택한 것이었다. ‘로빈슨 크루소’가 평범한 뱃사람이던 한 남자의 입지전적 성공신화를 그려낸다면, ‘월든’은 세상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인생의 정수를 체험하는 한 인간의 내밀한 고백을 담아낸 것이다.

    내 집 마당에는 큰 소리로 우는 수탉도 꼬꼬댁거리는 암탉도 없었다. 아니 마당 자체가 없었다. 단지 어떤 것에도 막히지 않는 자연이 바로 문턱에까지 와 있을 뿐이었다. (…) 대문도 없고 마당도 없고 문명 세계로 통하는 길 자체가 없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강승영 옮김, ‘월든’, 이레, 184쪽

    2 최초의 근대인, 로빈슨 크루소

    인류를 사로잡은 ‘무인도’와 ‘외딴집’의 상상력

    영화 ‘로빈슨 크루소’의 한 장면

    로빈슨 크루소는 주어진 운명이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바꾸는 모험정신의 상징이 됐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예나 지금이나 흥미로운 장면은 인간이 자연 속에 완전히 고립됐을 때 홀로 살아남기 위해 고안해낸 ‘생존의 기술’을 묘사한 대목이다. 다니엘 디포는 인간의 보편적인 두려움, 즉 완벽한 고립에 대한 두려움에 호소함으로써 ‘고독’을 최고의 문화상품으로 만들어낸다. 로빈슨 크루소의 실제 모델이던 셀커크의 무인도 체류기간이 4년인 것에 비해 작품 속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체류기간이 무려 28년으로 늘어난 것은 이 작품의 성공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동력이었다.

    즉 인간 사회로부터 완벽히 고립된 한 개인의 고독을 극한까지 몰아붙임으로써 작가는 ‘고독’이야말로 진정한 ‘개인’을 만들어내는 최고의 연료임을 증명했던 것이다. 고독이야말로 로빈슨을 키우고, 로빈슨을 강하게 만들고, 로빈슨을 한 사람의 성숙한 ‘개인’으로 완성시켜준 결정적 동력이었다.

    ‘로빈슨 크루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장 자크 루소는 ‘에밀’을 통해 한 소년의 진정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최고의 환경이 바로 ‘고독’임을 입증하려 하기도 했다. 루소는 인간이 타락하는 원인을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대한 애착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완벽히 차단한 순수한 자연 속에서 에밀이 영혼의 스파르타 훈련을 치러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작품 속의 로빈슨 크루소도 실제 모델이던 셀커크와는 달리 ‘고독’을 낭만적으로 이상화하지 않고, 고독 그 자체를 통해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려 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기나긴 고독 끝에 식인종의 포로 프라이데이를 구출해 충실한 ‘하인’으로 만들고, 선상반란이 일어난 영국 함선의 선장을 구출해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의 우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원주민 남성을 ‘식민지의 노예’처럼 착취하는 데 성공했으며, ‘식인종’보다 훨씬 우월한 자신, 선상반란을 일으킨 ‘선원들’보다 더욱 뛰어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해낸다. 그는 더는 철부지 선원이 아니었으며, ‘28년 동안 무인도에서 살아남았다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성숙한 개인’이 된 것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마침내 이 섬 전체를 지배하는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로빈슨 크루소’는 단지 무인도에 고립된 고독한 개인의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라 한낱 평범한 뱃사람이 일약 한 부족의 왕이 되기까지 우여곡절 가득한 ‘성공신화’의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

    내 섬에 사람이 늘어났고 스스로 보기에도 날 따르는 신민이 너무 많았다. 가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꽤 왕처럼 보인다는 생각에 즐겁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섬 전체가 내 소유였으니 통치권은 당연히 내가 갖고 있었다. 두 번째, 온 국민은 내게 완전히 복종했다. 나는 절대적인 군주이자 법률을 세우는 이였다. 그들은 모두 내가 목숨을 구해준 사람들이었고 혹시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날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펭귄 클래식, 345쪽

    인류를 사로잡은 ‘무인도’와 ‘외딴집’의 상상력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삽화. 크루소를 뒤따르는 남자가 하인 프라이데이다.

    로빈슨 크루소가 세상 속으로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돈’을 챙기는 것이었다. 섬에서 혼자 살 때는 아무 쓸모도 없던, 그래서 가장 먼저 ‘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닫는 것이 섬생활 적응수칙 1호였는데 말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돈을 어떻게 관리하고 축적하고 투자할까를 걱정하는 진정한 ‘부르주아’가 된 것이다.

    섬에서 조용히 살 때보다 더 많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섬에서는 가진 것말고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고, 원하는 것말고는 가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큰 책임을 져야만 했고 많은 재산을 지켜야만 했다. 이제 내게는 돈을 숨겨둘 동굴도 없었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흙에 덮인 채 더러워질 때까지 잠금장치도 없이 재산을 놓아둘 곳도 없었다. 오히려 재산을 어디에 둬야 할지 누굴 믿고 맡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로빈슨 크루소’, 401~402쪽

    3 우리 안의 잃어버린 천재성을 찾아서

    사람이 철로 위를 달리는 것이 아니다. 실은 철로가 사람 위를 달리는 것이다. 철로 밑에 깔린 저 침목들이 무엇인지를 당신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침목 하나하나가 사람인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에서

    우리는 버릇이 없고 무식하며 천박한 삶을 살고 있다. (…) 우리는 고대의 위인들만큼 훌륭해져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이 얼마나 훌륭했던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소(小)인종이며, 지적인 비상에서 일간 신문의 칼럼 이상은 날지 못하고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강승영 옮김, ‘월든’, 이레, 155쪽

    로빈슨 크루소에게 무인도가 마치 ‘야생의 감옥’처럼 무시무시한 서바이벌 게임을 필요로 하는 전쟁터였던 반면, 소로의 월든 호수는 스스로 선택한 고립에 의해 마침내 자연 속에 귀의함으로써 존재를 ‘해방’시키는 축제의 공간이었다. 로빈슨 크루소는 마침내 무인도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섬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자유를 잃어버린 신세가 된다. 새롭게 일군 그의 사유재산을 지켜내느라, 그는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불안한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과연 이러한 ‘소유’가 인간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월든’은 인류가 이룩해낸 찬란한 물질문명의 풍요에 걸맞지 않은 정신문명의 심각한 결핍에 대한 날카로운 보고서이기도 하다.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유해졌는데, 왜 그만큼 현명하고 지혜로워지지는 못했을까.

    ‘월든’은 오해하기 쉬운 텍스트이기도 하다. 세상에 대한 혐오나 자기애적 퇴행, 모든 걸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일방적인 자연 예찬의 텍스트로 잘못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하지만 ‘월든’의 문장 하나하나를 마음 깊이 새기며 읽는다면 이런 오해는 쉽게 떨쳐낼 수 있다. 한 사람의 ‘국민’이나 ‘시민’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사는 법을 고민했던 소로. 그의 고민이 담겨 있는 ‘시민불복종’과 ‘월든’을 함께 읽는다면,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전도유망한 엘리트이던 소로가 어째서 ‘은둔’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는지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소로는 우리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태어나고 ‘주민등록증’과 같은 신분의 구속에 제한받는 순간, 일종의 원초적 불평등의 상황에 처한다는 것을 간파한다. 우리가 ‘사회인’이 되어갈수록, ‘자연스럽게 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살 수 있는 권리’는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안의 천재성’이 외치는 소리

    인류를 사로잡은 ‘무인도’와 ‘외딴집’의 상상력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생활한 월든 호숫가.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우리 존재를 해방시키는 기술을 연마할 수 있을까. 소로는 말한다. 하루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라고. 소로는 자연 속에 파묻히자 비로소 한 번도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자기 안의 천재성’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낚시와 사냥을 가라. 날마다 멀리, 더 멀리, 또 더 멀리. 그리고 시냇가이든 난롯가이든 두려워하지 말고 쉬어라. 새벽이 되기 전에 근심에서 깨어나서 모험을 찾아 떠나라. 밤이면 뭇 장소를 그대의 집으로 삼아라. 이곳보다 넓은 평야는 없으며, 여기서 하는 놀이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다. 그대의 천성에 따라 야성적으로 자라라. 각종 ‘리스크’를 따져보느라 허송세월하지 말고, 근심 걱정과 단호히 결별하고 모험을 찾아 떠나라. 사람들이 수레와 헛간으로 피할 때 그대는 구름 밑으로 피하라.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마라.”

    소로는 그렇게 우리 안에 잠자고 있던 억압된 자연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왜 우리는 각종 저축과 보험, 주식 투자에까지 열정을 쏟아부으며 ‘퓨처 인베스트먼트’엔 그토록 신경을 쓰면서, 현재를 위해서는 좀처럼 투자하지 못하고 여전히 ‘외부의 명령’이나 ‘주변의 시선’을 향한 노예로 살아가는가. 우리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던 우리 자신의 예술, 단지 음악이나 미술이 아니라 자연과 대화하고 나 자신과 대화하는 기적을 실험하는 시간. ‘월든’은 단지 자연 속에 온몸을 던지기만 하면 된다고(이제 그런 일이 얼마나 어려워졌는가!), ‘주변의 시선’이나 ‘사회의 제도’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오랫동안 겨울잠을 자고 있던 우리 안의 천재성을 깨워낼 수 있다고 속삭인다.

    자연의 품에 기꺼이 안기기를 원하는 소로와는 달리, 로빈슨 크루소는 자연을 소유하고 정복하고 지배하려 한다. 크루소는 무인도 체류 이후 과거보다 훨씬 커다란 ‘시민권’을 얻게 되지만, 소로는 은둔생활 이후 ‘시민권’이 필요한 시스템의 중력장 자체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크루소가 ‘잘 소유하는 법’을 연구한다면 소로는 ‘잘 잃어버리는 법’을, 그리하여 ‘잘 사라지는 법’을 연구한다.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28년 동안 익힌 생존의 기술을 통해 엄청난 부자가 되어 ‘사회’로 복귀했다. 그는 고독을 통해 사회의 ‘승자’가 되는 법을 배웠고, 소로는 고독을 통해 비로소 ‘자연’이라 불리는 타자들과 만나고 소통하는 법을 배웠다.

    무한 미디어 사회에서 저마다 시끌벅적한 1인 미디어를 경영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어떤 빛깔의 고독을 통해 어떤 생존의 기술을 습득해야 할까.

    내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이 아닌 것을 살지 않으려고 했으니, 삶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 불가피하게 되지 않는 한 체념의 철학을 따르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인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게 스파르타인처럼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수풀을 폭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 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압축시켜서 그 결과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를 세상에 알리며,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다음번의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129~130쪽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