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호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자

  •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입력2011-03-22 09:3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자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은 실패한 아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아버지의 인자한 표정을 잘 포착하고 있다.

    “우리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어요. 그 때문에 남편이 우울하고, 아이와 말도 안 해요. 남편의 기분을 위로할 수 있는 음악 한 곡 신청합니다.”

    가끔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이런 사연을 전하는 MC의 말이 흘러나왔다. 7080세대가 주로 듣는 프로그램이니 자연스럽긴 한데, 그 자연스러움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낮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점심을 먹는데, 친구가 ‘엄친아’였던 자신의 아들 얘기를 한다.

    “나름 공부를 잘했잖아? 그런데 OO대학밖에 가지 못했어. 그랬더니 남편은 아들을 쳐다보려고도 안 해.”

    “너는?”



    친구가 긴 한숨을 쉬며,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한숨 나오지. 더구나 학부형 모임에 가면 모두 여전히 엄친아를 둔 엄마들인데….”

    “거기 안 가면 되잖아!”

    “응?”

    내 씨 박힌 말에 친구가 놀란다. 참 많다. 대입문제로 아들에게 실망하는 아버지가, 딸에게 실망하는 어머니가.

    자식에 대한 욕구불만은 자기에 대한 불만이다. “네가 내 아들인데 겨우 그 대학밖에 못 가다니” 하는 이상한 탄식으로 주문을 거는 아버지가 힘이 있는데 아들이 어떻게 그 대학에서 인생의 밑거름이 될 정신의 양식을 제대로 거둘 수 있겠는가. “네가 내 딸인데 겨우 그것밖에 안되다니” 하며 저주인 줄도 모르고 저주를 퍼붓는 어머니가 힘이 있는데 딸이 어떻게 기진맥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데 겨우 이곳, 여기라니’ 하며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눈을 뜨고 자기인생을 설계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과거 대단했던 실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대책 없는 폭력에 당하는 것이다. “우리 집안에 너 같은 사람은 없다”는 잔인한 말은 잘난 집안의 말이 아니라 콤플렉스의 말이다. 자식을 망치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들을 망치고 스스로를 망치는.

    나는 그런 학생을 많이 알고 있다. ‘무의식과 마음의 상처’라는 과목을 개설하고 보니 왜 그렇게 상처 입은 학생을 많이 만나게 되는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기가 죽어 있는 청년들! 참 많은 청년이 가장 가까운 부모에게서 참 많은 상처를 받고 산다.

    수업시간에 늘 앞자리에 앉는 성실한 학생이 있었다. 수업을 진지하게 듣지만, 질문을 던지면 당황하며 고개를 숙이는 소심한 학생이었다. 선생을 오래 하다 보면 할 말이 없어 대답을 못하는 건지, 당황해서 논리를 구성하지 못하는 건지, 소심해서 자기를 보여주지 못하는 건지 알게 된다. 선생이 어떤 논리를 구성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또 다른 논리구성력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표정, 눈빛, 몸짓이 모두 언어다.

    그 성실하고 소심한 학생이 학기 말에 내 연구실을 찾았다. 노크 소리를 듣고 들어오라고 했는데도, 뜸을 들이더니 겨우 연구실의 문을 빼꼼히 연 것이다. 아마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다가 어렵게 찾은 것이리라.

    그의 문제는 아버지였다. 대학에 입학한 지 2년 내내 아버지와 눈을 맞춰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산이었고 하늘이었던 아버지는, 자식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자 편하게 그를 보지 않았다. 말끝마다 이마에 내천(川)자를 그린 채 그를 대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 편입을 준비했고, 휴학을 했다. 편입도 제대로 되지 않자 아버지는 아예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 뭘 해보겠다고 계획을 말씀드리면 인상을 찡그리며 안 될 이유를 단호하게 들이댔다. 뭔가를 보여주기 전엔 아버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걱정과 짜증과 무시 속에서 기가 꺾인 아들이 또 어떻게 뭔가를 보여줄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어머니는 방관자였다. 어머니는 아들과 아버지를 중재하지 못했다. 아들에게 실망한 어머니도 말끝마다 걱정이고 말끝마다 한숨이었다. 함께 과외를 한 친구들이 모두 명문대학에 간 것만 되새기는, 과거 지향적 어머니가 무슨 힘이 되겠는가. 그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의 관계도 모두 끊겼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니 가정은 얼음판이었다. 아버지가 그저 무서웠고, 어머니는 싫었다. 그러자 재기발랄하던 어릴 적 모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자식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부모가 많다. 왜 그것도 못하느냐고? 자식의 미래가 걱정되는 부모는 성급하고 공격적이다. 자식이 맘에 걸리는 부모는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면서 자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야단치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한다. 부모는 자신들의 인생에서 두려워했던 것을 자식들에게 금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부모는 자식에게서 자신이 금지했던 것을 볼 것이다. 그런 부모는 의도와 상관없이 폭력적인 부모다. 그런 부모 밑에서 자식들은 기를 펴지 못한다. 기를 펴지 못하고 주눅 든 아들이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기 위해 노력할수록 스스로에게는 오히려 파괴적이다.

    아버지가 있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있어 두려운 아들이 너무 많다. 어머니가 있어 편안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에 대인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아이가 너무 많다. 그런 자식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두려워한다.

    아버지는 목표치를 정해놓고 따라오지 못하면 추방하는 구조조정의 수장이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엄친아의 이야기만 들고 오는 재미없는 이야기꾼이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자식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자여야 하고,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여야 한다. 자기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을 보려 하지 않는 건 자신의 그림자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이고, 자기보다 못한 자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건 자기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버지가 갖춰야 할 가장 큰 능력은 기다려주는 것이다.

    나는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환’에서 기다려주는 아버지의 원형을 보았다. 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 아들의 영혼을 만져주는 아버지가 피로에 지친 아들의 생 전체를 따뜻하게 데워내고 있는 그림이다. 아들에 대한 기다림으로 아예 눈이 먼 것 같은 무표정한 아버지의 따뜻한 손, 그 손에 몸을 맡긴 채 이제 평온을 찾은 듯 무릎을 꿇고 앉은 탕자, 탕자의 해진 옷과 감출 수 없는 더러운 발바닥이 고된 방황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그림이다.

    알려졌듯 탕자는 실패한 아들이다. 아버지에게서 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나가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 거지로 돌아온 초라한 자다. 그러고 보면 실패하지 않은 게 생의 목적은 아닌가 보다.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자
    李柱香

    1963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법학과 졸업, 동 대학 철학과 석·박사

    수원대 인문대 교수(철학)

    한국철학회 부회장, 한국니체학회 부회장

    저서 : ‘사랑이, 내게로 왔다’ ‘이주향의 치유하는 책읽기’ ‘현대 언어·심리철학의 쟁점들’ ‘내 가슴에 달이 들어’ ‘그래도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등


    샤갈도 ‘탕자의 귀환’을 잘 그렸지만 렘브란트의 그림이 훨씬 인상적인 것은 탕자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표정 때문이다. 아버지의 눈은 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자의 눈이었다. 과거를 규명하려 드는 냉정하고 싸늘한 눈이 아니라 기진맥진한 아들의 아픔 속으로 그저 스며들고자 하는 자의 포근한 눈! 그런 아버지가 있어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야 자기 안의 눈물을 모두 토해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온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되기까지 생에는 지름길이 없다.



    에세이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