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나는 뉴스가 아닌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다”

해적 소굴에 배낭 하나 메고 들어간 여자, 김영미

  • 송홍근│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11-05-20 13: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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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뉴스가 아닌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다”
    이 여자, 가냘프다. 천생 여자다. 분쟁지역 전문 tv저널리스트 김영미(41). 10년간 전쟁, 테러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무모하다 말려도, 위험하다 걱정해도, 뚜벅뚜벅 걸었다. 중학생 아들을 둔 ‘싱글맘’의 가냘픈 몸으로.

    그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스타벅스 1호점에 들러 커피콩을 샀다. 시카고로 취재를 다녀와 먹을 게 별로 없다면서 그녀가 냉장고를 뒤진다.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소말리아 해적 소굴에 들어간 여자가 만들어준 햄버거가 일품이다. 이곳은 미국 시애틀이다.

    그녀의 아들이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프린터로 출력해왔다. 아들을 잘 키운 것 같다. 씩씩하고, 밝다. 엄마와 아들이 ‘세계’를 주제로 대화한다. “보기 좋다”고 하자, “노력한다”며 웃는다.

    “10년 동안 아들과 함께 지낸 게 1년에 3개월밖에 되지 않아요. 아들에게 늘 미안했어요.”

    엄마가 아들에게 들려준 분쟁의 진실은, 아프다.



    “진실이야 어쨌든, 청년의 장례식 날, 너무나 슬프게 우는 그의 동생을 보고 나는 마음이 아팠다. ‘형, 어디 있어? 형 가지 마’ 하며 거의 자지러질 듯 울부짖으며 죽은 형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나중에 들으니 슬피 울던 열다섯 살 소년은 탈레반 병사가 되어 아프가니스탄 남부로 떠났다는구나. 형의 복수를 위해 미군을 죽이려 탈레반이 되었다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 때보다 더욱 마음이 아팠다. 전쟁에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지. 한번은 해적 마을에서 열 살 꼬마에게 물었다.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그러자 아이는 거리낌 없이 ‘저는 커서 아빠처럼 해적이 되어 많은 배를 납치할 거예요’라고 대답하더구나.”

    뉴스 속 현장

    국제뉴스가 일상을 파고든다. 소말리아 해적이 납치한 선원을 걱정하고, 해군의 선원 구출 작전 성공에 환호한다. 한국인이 테러에 희생되는가 하면, 국군이 세계 각국에서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한다.

    그녀는 바로 그 ‘뉴스 속 현장’을 누비고 있다. 그녀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작품 목록을 보면 ‘아! 그 프로그램’ 할 것이다. 그녀가 제작한 프로그램을 보면서 안쓰러워한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 방영한 그녀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SBS 특집 다큐멘터리 ‘동티모르 푸른 천사’(2000)

    ■ KBS 일요스페셜 ‘부르카를 벗은 여인들’(2002)

    ■ SBS 특집 다큐멘터리‘일촉즉발, 이라크를 가다’(2003)

    ■ MBC 긴급 르포 ‘파병, 100일간의 기록, 자이툰 부대’(2004)

    ■ MBC 다큐멘터리 ‘이라크 파병, 그 머나먼 길’(2004)

    ■ SBS 스페셜 ‘이슬람의 딸들’(2005)

    ■ MBC PD수첩 ‘조국은 왜 우리를 내버려 두는가?’(2006)

    ■ MBC 스페셜 ‘불타는 레바논’(2007)

    ■ SBS 스페셜 ‘탈레반, 그들이 꿈꾸는 나라’(2008)

    ■ KBS 수요기획 ‘미군들의 이라크’(2008)

    ■ EBS 다큐프라임 ‘히말라야 커피로드’(2010)

    “나는 뉴스가 아닌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는다.

    세계는 싸우고 있다. 지구는 분쟁과 위기의 아틀라스다. 평온한 세계를 갈망하는 것은 불행히도 희망사항에 가깝지만, 그녀는 전쟁 통에서도 평화와 미래를 찾는다. 분쟁의 땅에서도 아이들은 뛰어놀고, 굴뚝엔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카메라에 뉴스를 담지 않아요. 사람을 찍습니다. 진실은 뉴스가 아닌 사람에게 있어요.”

    그녀가 아들에게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만난 의사의 얘기를 들려준다.

    “위험하고 힘든 환경에서도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단다. 그가 이렇게 답했어. ‘사람은 살아야지요. 아이들에게 예방접종도 해야 하고요. 나는 이스라엘이고, 팔레스타인이고 따지고 싶지 않아요. 사람이 살아야 싸우기도 하는 것 아닌가요.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의사니까요.’ 그의 말에 엄마의 눈엔 눈물이 고였단다.”

    신문 귀퉁이 작은 기사

    11년 전 이 여자, 그냥 평범한 주부였다.

    그녀는 1999년 스물넷에 결혼한 남편과 헤어졌다. 일상은 팍팍했다. 탈출구를 원했고, 6㎜카메라가 친구가 됐다. 허드렛일을 알아보다 신문 귀퉁이에 실린 기사를 읽었다. 동티모르 내전 탓에 꽃다운 나이에 희생당한 여대생을 다룬 것이었다. 아들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비행기를 탔다.

    “아이와 함께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겠는데 할 줄 아는 일은 하나도 없고…. 식당 일을 할까 아니면 보험설계사로 나설까 생각하던 차에 우연히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선 동티모르 사진을 보았어요. 느닷없이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고요.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어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동티모르어를 익혔고요. 외신기자들도 만났는데, 그때는 영어를 잘 못했거든요. 그냥 부딪쳤지요.”

    그녀는 동티모르의 아줌마, 아저씨를 만나 그들의 벗, 말동무가 됐고, 밥상머리의 수다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탄생한 게 2000년 10월 SBS에서 방영한 ‘동티모르의 푸른 천사’다.

    “외신기자들이 필름을 편집해 한국 방송국에 보내보라고 조언했어요. 운이 좋았지요. 공중파가 그즈음 낮에도 방송하기 시작했어요. 시간 때우는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거였어요. 그 작품 덕분에 프리랜서 PD가 됐으니 기회를 잘 잡은 것이지요.”

    이윽고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날아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쌍둥이가 얼어 죽은 장면을 찍었어요. 그곳에선 그런 일이 예사로 일어났어요. 카메라에 펑펑 우는 엄마를 담으면서 다른 손으로는 그녀를 쓰다듬었어요. 아이를 낳아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가 느낀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사람은 다 똑같아요. 속 깊은 얘기를 나누다보면 그네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돼요.”

    이 장면이 담긴 ‘부르카를 벗은 여인들’이 그녀의 출세작이다.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는 여자들의 삶을 다뤘다. 일본 니혼TV에서도 방송 시간을 내주었다. ‘아프간 난민촌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황금시간대에 방영했는데,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바람직한 PD는 촬영부터 편집, 방송까지의 과정을 장악해야 해요. 그래서 일어를 익혀야 했어요. 지금은 자막도 직접 쓰고 내레이션도 합니다.”

    그녀는 한국·일본 방송국에 프로그램을 팔아 밥을 먹고 산다. 일본 잡지에 이따금씩 글도 기고한다.

    “처음에는 취재비 마련하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1시간분량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데, 보통 1억원이 들어요. 한국에서 반, 일본에서 반 이렇게 해서 제작비를 채워요. 돈을 많이 버냐고요? 아니요. 취재비용을 충당하고 먹고살 만큼만 벌어요. 할 줄 아는 거라곤 영상 만드는 게 전부예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요.”

    오빠가 동생을 죽이다

    “나는 뉴스가 아닌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녀에게 분쟁지역에서 만난 사람 중 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2003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샤이마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와 함께 일한 통역의 친구이던 샤이마는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생각이 서구화한 아가씨였다. 샤이마에게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미국에 가서 공부하겠다, 모델이 되고 싶다면서 웃었다고 한다.

    두 여자는 e메일을 주고받는 친구가 됐다.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에 갈 때마다 샤이마가 부탁한 옷, 화장품을 사갔다.

    샤이마는 아프가니스탄 방송의 앵커가 됐다. 서양식 옷을 입고, 히잡으로 머리만 가린 채 방송에 출연했다. 그녀의 옆에 남성 앵커가 앉았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이 그녀의 차림새와 남녀가 함께 출연하는 방식이 이슬람 율법에 반한다고 항의했다. 그녀는 결국 2005년 3월 방송국에서 해고됐다. 그러고는 친오빠가 쏜 총알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오빠에게 명예살인을 당했어요. 요르단 대법원 판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명예살인에 6개월 넘은 형량을 선고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이슬람 사회이기에 명예살인에 관대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명예살인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오히려 나쁘다는 게 그네들의 시각이에요.”

    그해 6월 그녀는 카메라맨과 함께 샤이마의 집을 찾았다. 그녀의 오빠는 체포된 후 열흘 만에 유치장에서 풀려났다. 인터뷰 중 그녀의 오빠가 카메라맨이 앉은 자리를 가리키면서 양탄자를 들어보라고 했다. 양탄자를 걷었더니 엄청나게 많은 피가 굳어 있었다.

    “핏자국을 치울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다면서 그는 울먹였어요. 동생을 무척 사랑했지만, 장남의 의무 탓에 어쩔 수 없었다면서요. 방송이 나간 뒤 어느 교수가 명예살인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면서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더군요. 나는 그런 주장에 동의할 수 없어요.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를 용납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프가니스탄은 가장 강력한 이슬람 법 체계인 샤리아를 따라요. 혹시 사우디아라비아 여자 얼굴 본 적 있어요? 앞으로도 오랫동안 보지 못할 거예요. 사우디아라비아도 샤리아를 따르거든요. 부르카는 전통 의상이라고 봐야 해요. 문화는 천천히 바뀌는 거예요. 외부의 힘으로 부르카를 벗길 수는 없어요. 탈레반이 부르카를 강요했고, 미군이 해방시켰다는 것은 사실과 동떨어진 얘기지요.”

    파병, 100일간의 기록

    2003년 3월19일 그는 이라크-요르단 국경에 서 있었다. 다음 날 새벽 미·영 연합군의 공습으로 이라크전쟁이 발발했다. TV는 바그다드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다. 한국인은 외국 통신사 및 방송사가 제공한 영상만을 보았다.

    그녀가 카메라에 담은 SBS 다큐멘터리 ‘일촉즉발, 이라크를 가다’는 한국인의 눈으로 들여다본 미국·이라크 전쟁의 모습이다.

    그녀는 신문·방송 기자들이 외신을 보면서 기사를 쓸 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는 현장에서 ‘살아 있는’ 영상을 보내왔다. ‘이라크 파병, 그 머나먼 길’ ‘파병, 100일간의 기록, 자이툰 부대’는 지금 다시 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수작이다. ‘파병, 100일간의 기록, 자이툰 부대’는 MBC가 창사특집으로 방영했다.

    국방부가 도와줬느냐고 묻자 그녀가 웃는다.

    “국군보다 먼저 아르빌에 들어가 살고 있었어요. 자이툰 부대가 나보다 늦게 도착했지요. 지방정부의 인사, 보통 사람들과 사귀어놓았어요. 군인들은 현지 사정을 파악하는 게 급했는데, 작지만 도움을 줄 수 있었어요. 자이툰 부대 사람들이 적응에 바쁘다 보니 취재를 막을 겨를도 없었고요. 독점취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먼저 아르빌에 들어가 그곳에서 살고 있었던 덕분이에요.”

    자이툰 부대가 아르빌에 주둔할 예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이번엔 소리 내어 웃는다.

    “원래는 자이툰 부대가 키르쿠크에 주둔하기로 했었지요. 키르쿠크에 들어가 ‘이라크 파병, 그 머나먼 길’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국군이 주둔하기엔 키르쿠크가 위험하다는 게 다큐멘터리의 주제였어요. 국군이 키르쿠크 주둔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하자마자 주둔지로 거론되는 아르빌로 이사를 갔어요.”

    해적 소굴

    “나는 뉴스가 아닌 사람을 카메라에 담는다”
    2006년 그녀는 소말리아 해적 소굴을 취재했다. 피랍된 ‘동원호’에 올라 선원을 인터뷰했고, 해적 소굴에 들어가 우두머리를 취재했다. 한국인 스태프는 그녀가 유일했다.

    “스태프를 제일로 많이 투입한 작품이 소말리아 해적을 취재한 ‘조국은 왜 우리를 내버려 두는가?’예요. 보디가드를 포함해 70명이 움직였어요. 육지의 해적 소굴을 카메라에 담은 것은 전세계에서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통역은 영어를 하는 소말리아인이 했어요. 모가디슈에서 촬영한 테이프를 보면서 통역이 인터뷰 내용을 영어로 번역했고요. 한국에 와서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해 한글 대본을 만들었어요. 방송 프로그램이라는 게 뚝딱하면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편집하는 데만 3개월 넘게 걸리기도 해요.”

    낯선 남자와 엄마가 오랫동안 얘기하는 게 못마땅했는지, 아들이 방을 이따금씩 기웃거리면서 엄마에게 말을 건다.

    그녀는 소말리아 해적과 관련해 아들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결과에는 수많은 이유와 배경이 있단다. 현장을 이해해야 해결책이 완벽에 가깝게 나와. 해적을 악당으로만 보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단다. 소말리아는 전세계가 외면한 나라야. 여기선 태어날 때부터 해적이 사회적 선망의 대상이란다. 그곳 아이들은 너희들과는 너무나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고 있어. 그들의 고통, 그곳 아이들의 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해 해적을 단순히 악당으로만 여기게 되는 거란다.”

    아들에게 분쟁 현장 얘기를 자주 해주느냐고 물었다.

    “엄마가 보고 느낀 것을 가르쳐주려고 애써요. 공부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글로벌한 마인드로 세상을 보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다큐멘터리가 각광받는 것은 전쟁을 겪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분쟁의 진실을 들여다봐서다.

    “아낙은 전쟁 때문에 남편이 집에서 놀아 하루 세 끼 밥을 해줘야 한다고 투덜대요. 그녀에게 전쟁은 남편을 하루 종일 집에 묶어둔 망할 놈의 것이지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의 와지리스탄은 탈레반에게 수도(capital)와 같은 곳이에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빠듯한 데도 손님이 찾아오면 쌀독을 털어 식사를 대접합니다. 곤궁한 사정이 안타까워 밥을 먹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 사람들 얼굴이 화난 듯 일그러집니다. 그게 사람 사는 모습 아닌가요. 뉴스가 아닌 일상에 진실이 있어요.”

    분쟁지역, 전쟁터를 쏘다닐 때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위험이 실제로 닥쳐야 ‘무섭다’라는 단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선 잘못될 수도 있겠다고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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