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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액션 영화배우 열전 ⑨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영화 무림을 평정한 전설의 태권 스타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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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역시나

제2의 이소룡을 꿈꿨던 사나이 왕호

홍콩 영화계에서 조역으로 활동한 왕호가 멋진, 그러나 조금은 지쳐 보이는 발차기를 선보인 영화 ‘생사결’.

낚시를 하다보면 방금 전 미끼를 물었다가 구사일생으로 달아난 붕어가 다시 미끼를 물어 잡히는 경우를 본다. 한국 액션 영화에 관한 한 나는 붕어였다. 사기성 광고에 속으면서도 늘 ‘이번에는 혹시나 멋진 영화를 볼까’ 하는 심정으로 극장에 가서 또 속는 신세였다. 1977년, 홍콩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이른바 소림사 영화. 1975년 한홍 합작 진성 주연 ‘소림사의 결투’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홍콩 영화계는 소림사 영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는데, ‘소림사 18동인’ ‘소림사 십대제자’ ‘소림천하’ ‘소림 목인방’ ‘소림 통천문’ ‘소림 백호문’ ‘소림36방’ 등 소림 무술의 비기를 멋지게 영화화한 홍콩 영화와, 그와 비슷한 ‘짝퉁’ 소림사 영화까지 합해 ‘소림’ 딱지를 붙인 영화가 줄줄이 극장에서 개봉됐다.

그 다음은 이소룡 영화의 속편 행진. 저마다 ‘이소룡의 후계자’임을 내세운 이소룡과 비슷하게 생긴 얼굴의 배우들이 이소룡의 괴조음과 연기를 흉내 내는 작품들이었다. ‘속 정무문’ ‘신 용쟁호투’ ‘신 당산대형’ ‘신 정무문’에 이어 급기야 ‘불타는 정무문’과 ‘최후의 정무문’까지 나왔는데 대부분 이소룡 영화의 속편이라기보다는 전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내용에 이소룡 닮은 배우가 출연해 이소룡 흉내를 내는 영화였다. 나는 ‘누가 더 이소룡을 닮았나’ 심사하는 심사관이 돼 극장에 드나들었는데, 이여룡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했다가 나중에는 아주 대놓고 여소룡으로 이름을 바꾼 대만 출신의 배우가 기억난다. 그는 울상을 지을 때만 이소룡과 닮은 깡마른 몸매에 좀 빈티 나는 얼굴의 소유자여서 영화 보는 내내 애쓴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하종도란 배우도 있었다. ‘쌍룡비객’이란 영화에서 이소룡 흉내를 냈는데, 라면만 먹고 몸을 만든 사람처럼 없어 보이는 여소룡에 비해 영화 주인공 같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짝퉁’이었다. 이 시기 이소룡 속편 행진 해프닝의 완성은 ‘사망유희’였다. ‘사망유희’는 이소룡이 라스트 몇 장면을 홍콩의 세트장에서 먼저 촬영한 뒤 한국에서 모든 장면을 촬영하려 했지만, 한국의 겨울 추위가 너무 두려워 촬영을 봄으로 연기했다가, ‘용쟁호투’를 계약하는 바람에 이를 먼저 촬영하고 편집하던 중 급사해 미완성으로 남은 영화다. 홍콩 골든하베스트와 미국 워너브러더스는 이소룡의 미완성 영화를 완성하기로 결정하고 이소룡 역을 대신할 배우를 뽑기로 했다.

‘사망유희’의 비극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이소룡의 후계자를 뽑는 것이라 생각했다. 전체의 5분의 1 정도만 촬영된 영화의 이소룡 등장 장면 외에 다른 부분은 이소룡 역으로 뽑힌 자가 이소룡 연기를 하는 것이다. 온 동네가 들썩거렸다. 이소룡이 입던 깃 넓은 셔츠에 굽 높은 구두, 나팔바지를 입고 이소룡처럼 머리를 자른 젊은이들이 당구장에 넘쳐났다. 나 역시 쌍절곤을 휘두르고, 괴조음을 흉내 냈지만, 나는 이소룡보다는 홍금보를 더 닮아 결국 포기하고 누가 이소룡의 후계자가 될 것인지에만 신경 쓰기로 했다.

드디어 이소룡 역이 결정됐다. 그 행운아는 다름 아닌 한국 사람이었고, 영화에 출연한 적 한 번 없는 신인 김태정이었다. 은근히 시기와 질투가 났다. 차라리 홍콩이나 대만 사람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인데 한국 사람이라니. ‘어디 두고 보겠어. 이소룡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가는 험한 꼴을 볼 것이다!’

‘사망유희’가 완성되고 개봉됐다. 아, 한두 번 속나 했지만 또 속았다. 배우 김태정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나름 열심히 연기했다. 사기극의 주인공은 재능 없고 무능하며 나태하기 짝이 없고 색만 밝히는 감독 로버트 클로즈와 영화사 사장 놈들이었다. 영화의 중간 중간에 이소룡의 클로즈업은 모두 이전에 개봉한 영화에서 짜깁기한 것이었고, 가장 화가 나는 것은 김태정이란 배우의 얼굴을 영화 속에서 한 번도 확인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영화 내내 그는 얼굴의 반을 덮는 잠자리 선글라스를 쓰고 있거나 뒤돌아 있거나,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최악이었던 것은 이소룡의 사진을 가면으로 쓰고 나온 장면이었는데, 이런 사기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길고 지루한 로버트 클로즈의 촬영분이 지나가고 진짜 이소룡이 등장하는 장면이 시작되자마자 관객석에서 울려 퍼지던 탄성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이소룡이 찍은 그 라스트의 10분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길고 긴 줄을 서서 영화관에 들어가 1시간20여 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왕호는 이 영화에 핀치히터로 급파된다. 이소룡 등장 장면 이전까지 영화의 액션 장면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간파한 제작진이 액션 장면 하나를 급히 재촬영한 것이다. 식물원에서 이소룡 역의 김태정과 왕호가 대결한다. 매우 훌륭한 액션 장면이었지만 제작자들의 그 어떤 재능도 발견할 수 없다. 그냥 배우들의 피와 땀만 착취한 것이다.

특별출연 배우

‘사망유희’의 사기극을 잊으려 나는 다시 극장을 찾았다. 홍콩에서 활약하는 왕호의 출연작 ‘중원호객’. 이 영화 포스터에는 홍금보와 왕호 두 사람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왕호의 주연작이구나 했지만, 역시 왕호는 멋진 발차기를 선보인, 좋게 말하자면 특별출연이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나의 왕호는 분명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자질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악역으로 출연했던 성형수술 전의 성룡보다는 왕호가 더 카리스마 있고 무술 재능이 넘치는 배우였다. 성룡표 코미디 쿵푸 영화의 첫 시도였던 ‘오룡대협’으로 그의 재능이 발견되기 전까지, 성룡은 그렇고 그런 배우였다. 그런데 왜 왕호는 멋진 발차기를 선보이고는 사라지는, 좋게 말하면 특별출연 배우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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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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