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버들잎에 부치는 봄의 노래

궁류·대현마을

  •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입력2012-04-20 16: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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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들잎에 부치는 봄의 노래

    대현마을 전경.

    1982년 4월 26일 밤 9시 반 경남 의령군 궁류면 경찰지서에 근무하던 우범곤 순경(당시 27세)은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2정과 실탄 144발, 수류탄 8발을 탈취해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했다.

    그의 범행은 우발적이었다는 추후 소문과는 달리 믿기지 않으리만치 치밀했다. 먼저 우체국으로 가서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한다. 지금과 같은 인터넷이 없던 시절,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수단이던 전화를 단절하기 위한 조치다. 그리고 불이 켜진 집을 골라 다니며 젖먹이, 노인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난사하고 특히 상가(喪家)에 들러서는 돗자리에 앉아 있던 수십 명의 주민에게 서너 발의 수류탄을 던진다. 살벌했던 남북 대치 시대, 마을 주민들은 대규모 무장공비가 나타난 줄 알고 공포에 떨었다.

    56명 사망한 참사의 현장

    한 주민이 캄캄한 어둠 속 산비탈 길을 달려 의령경찰서에 신고한다. 하지만 여덟 시간 동안 토곡리 등 4개 마을은 공포 그 자체. 우 순경은 다음 날 새벽 5시께 일가족 5명이 잠자고 있던 궁류면 평촌 외곽의 외딴 농가에 들어가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한다. 자그마치 무려 56명의 사망자와 34명의 부상자를 남긴 광란의 살육제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버들잎에 부치는 봄의 노래

    평촌마을회관 벽면 간첩신고를 독려하는 문구가 이채롭다.

    ‘恐怖(공포)·悲鳴(비명)·鮮血(선혈)의 8시간 죽음의 宮柳面(궁류면).’ 그해 4월 27일자 ‘동아일보’의 머리기사 제목이다. 기사는 “坪村(평촌) 마을은 집집마다 온통 피범벅이었으며 방과 마루 등에는 피가 뒤엉겨…”등으로 이날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나아가 지구촌을 놀라게 했다. 아무리 술 취했다손 치더라도 한 개인이 하룻밤 사이에 그 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 있었을까.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동네사람들과 격의 없이 술잔을 나누던 순한 청년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치안 체계가 도마에 올랐다. 담당 경찰서장은 물론이고 급기야 내무장관까지 사임하기에 이른다. TV 방송용 서프라이즈도 이만한 서프라이즈는 찾아보기 힘들다.

    경남이지만 대구 문화권

    버들잎에 부치는 봄의 노래

    설명회를 들으려고 모인 주민들.

    사설이 길었다. 경상남도 의령군 궁류면은 사건처럼 이렇게 외지고, 외롭고 또 궁벽한 마을이다. 용감한 주민이 죽을힘으로 내달려야 비상전화라도 걸 수 있을 만큼 떨어져 있는 산간오지, 경남 중심부에 숨어 있는 존재감 없는 산간마을이다. 그나마 의령군에 속해 있는 덕분에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의령은 행정구역으로는 경남이지만 대구 문화권이다. 지금은 메워져 흔적조차 없어진 대구시 서구 성당못 인근에 위치한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직행버스로 한 시간 남짓 걸린다. 그래서 대부분의 물산이나 인적 교류가 부산이나 마산보다는 대구 쪽으로 향하게 된다.

    우 순경 사건의 궁류면 정도로 대중에게 인식되지만 그러나 그날의 비극을 되살릴 만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몸서리쳐지는 기억을 떨쳐내려는 주민들과 행정관서가 참극의 현장을 죄다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숱한 사람이 죽어간 상가는 부숴버리고 그 위에 보건진료소를 지었다. 우 순경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농가는 텃밭으로 변해 지금은 집터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억까지야 없앨 수 있겠는가? 마을 입구에서 만난 정서분(74) 할머니는 손사래와 함께 진저리를 친다. 우 순경이 동거녀와 낮잠 자다가 벌인 말다툼이 발단이 되었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는 것이 정 할머니의 설명. 하지만 모든 사건 사고 뒤에는 여자가 버티고 있다는 것은 불멸의 진리가 아니던가. 스무 살에 시집와서 50년 넘게 이 마을에 살았다는 정 할머니가 들려주는 그날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참담한 역사를 간직한 궁류면 소재지를 뒤에 두고 산길을 거슬러 한참 가다보면 평촌리 대현마을이 나타난다. 구름도 울고 넘는다는 노랫말에 딱 어울리는 언덕 위의 남루한 마을이다. 마을 뒤편 고개를 왼쪽으로 두고 거슬러 올라 한티 고개를 완전히 넘어서면 합천군 쌍백면. 그래서 한때는 합천군에 속했다가 다시 의령군으로 되돌아온 ‘왔다갔다’ 마을이다. 대현마을은 능선과 밭이 유려한 곡선으로 조화를 이룬 자굴산 자락을 끼고 있다.

    산자수명한 마을, 그래서 수년 전 이곳에다 ‘의령예술인촌’을 조성한다고 떠들썩했지만 지금은 흐지부지된 상태다. 봄은 이제 올 만큼 왔지만 산꼭대기 마을에는 칼날 같은 바람이 귓전을 사납게 때린다. 팔십 노인 너덧 가구가 사는 마을, 대처에서 놀러온 손자가 심심한 듯 접근해 온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었네’

    버들잎에 부치는 봄의 노래

    마을회관에 걸려있는 30년 된 액자들.

    그러나 잠시, 봄 거름을 밭에다 져내는 노인의 모습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 노랫말과 이다지도 똑같을 수가 있을까. 쓰러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거름을 메고 나르는 노인의 모습에서 생의 버거움을 느끼게 된다. 삶의 고달픔을 두고 부피나 면적이 아니라 무게로 표현하는지 이해가 된다. 버겁고, 등이 휠 것 같은 무거운 삶, 너무나 힘들어하는 모습에 감히 말을 붙이지 못했지만 주름진 얼굴에서 생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그렇구나. 한평생 자굴산 기슭에서 늙어간, 봄볕에 그을린 노인의 얼굴에는 한 인간의 신화와 전설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평촌마을을 유명하게 한 것은 우 순경만이 아니다. 이 마을은 지금은 추억 속으로 사라진 망개떡의 고향이다. 그래서 망개떡집 간판이 눈에 띈다. 유년 시절 대처 공원에 나들이 가서 사 먹은 망개 잎에 곱게 싸인 떡, 망개는 청미래나 명감나무를 일컫는 경상도 방언이고 망개나무 덩굴에서 따낸 잎으로 감싸서 만든 멥쌀 떡이 망개떡이다. 망개 잎의 향기와 싱그러움으로 맛깔나는 명품 떡이지만 인스턴트 식품에 떠밀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기억 속의 떡일 뿐이다.

    지나가다가 불현듯 곤고했던 과거를 추억하고 싶은 사람은 평촌마을회관에 들를 일이다. 콘크리트 슬래브 건물로 한껏 멋을 부린 마을회관은 이제 완전히 폐허다. 부서진 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본 마을의 역사는 1985년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숨통이 끊어졌다. 회관 벽에 붙어 있는 여러 가지 액자를 한번 살펴보라. 역대 이장 명단도 새마을지도자 이름도 1985년을 마지막으로 공란으로 남아 있다. 20여 년간 아무도 찾지 않은 마을회관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하다. 모든 것은 27년 전 1980년대 중반에 멈춰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낡은 책꽂이에 버려진 책들, 삼중당 문고본이다. 사진을 보고 아, 삼중당 문고를 내뱉으며 탄식하는 독자들은 더 이상 젊음이 아니다. 곰팡이에 찌든 채 버려져 있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그리고 한마디 말도 없었네’가 눈에 띈다.

    이 데카당하고 멋들어진 제목은 전혜린이라는 작가가 자신의 에세이집을 같은 제목으로 발간해 한때 이 땅의 청춘을 울리지 않았던가. 그녀의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1970년대 초반 전혜린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에게 잠 못 이루는 밤을 안겨주었던가. 그래서 종로에도 이화여대 앞에도 책 속에 등장하는 독일 소도시 ‘슈바빙’이라는 이름의 카페가 서너 곳 등장하고 모두가 전혜린처럼 살고 사랑하고 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어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키다리 아저씨’도 보이고 톨스토이의 ‘죄와 벌’도 ‘크로이체르 소나타’도 눈에 띈다. 누가 기증했을까. 아니면 누가 구입해 꽂아놓았을까?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진 곰팡이 가득한 책에서 세월을 읽어내는 틈입자의 맘이 오히려 서서롭다.

    지덕체로(知德體勞)가 네잎 클로버에 새겨진 4H 액자가 저 홀로 걸려 있는 외로운 마을회관은 이제 거미줄만 어지럽다. 1914년 농촌을 살리자는 취지로 미국 워싱턴에서 설립된 세계적인 청소년 단체인 4H의 의미는 두뇌(Head·知)·마음(Heart·德)·손(Hand·勞)·건강(Health·體)이다. 그러나 그 시절의 청소년들은 이제 흔적조차 없고 건물 안쪽 유리창에 붙어 있는 빛바랜 사진 속에는 낡은 젊음이 흑백으로 웃고 있다.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봄

    늘 그랬듯이 봄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가왔다가 이내 그리움만 남긴 채 떠나간다. 한 시절 장려했던 버들잎이 아름답던 궁류마을의 봄도 이제 한 굽이를 넘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니만……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저만큼 가고 있다. 그렇다. ‘봄날은 간다’는 옛 노래가 가슴에 절절하게 스며들 때는 인생의 봄날은 이미 아득하게 멀어진 것이다.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이 춤추던 동네, 궁류의 버들은 이제 짙은 초록으로 물들었다. 아,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몇 번의 봄을 더 맞을 것인가.

    버들잎에 부치는 봄의 노래

    풀무와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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