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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올림픽

오늘은 누가 메달을? 가슴 뛰는 올림픽의 밤과 낮

한국 빛낸 ★ 런던 빛낼 ★

  •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younglo54@yahoo.co.kr

오늘은 누가 메달을? 가슴 뛰는 올림픽의 밤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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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누가 메달을? 가슴 뛰는 올림픽의 밤과 낮

‘코트의 미녀’라는 별명으로 불린 변경자.

1988년 서울올림픽 남자 유도 대표 선발전에서 김재엽은 후배 윤현에게 패해 올림픽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호소카와에게 복수할 기회를 잃은 것이었으나 대한유도협회가 윤현을 설득했다. 윤현이 올림픽 출전권을 양보하는 바람에 김재엽에게 기회가 왔다. 생애 한 번만 참가해도 영광인 올림픽에서 출전권을 양보한 사람은 윤현이 모든 종목을 통틀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김재엽이 서울 대회에서 결승전에 무사히 오른 반면 호소카와는 브라질계 미국 선수 케빈 아사노에게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났다. 김재엽은 결승전에서 아사노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아사노는 김재엽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김재엽은 현재 동서울대 경호스포츠학과 교수로 일한다. 윤현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해 은메달을 차지했다.

구기 종목에서 처음으로 메달을 따낸 것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여자 배구팀이다. 한국은 남자 고등학교 배구의 명문이던 대신고 김한수 교장을 감독, 태광산업 코치를 지낸 전호관 씨를 코치로 삼았다. 당대 최고의 세터인 유경화 유정혜를 더블세터로 가동했으며 ‘나는 작은 새’ 조혜정, ‘거포’ 이순복과 정순옥 윤영내가 주축이었다. ‘미녀 선수 1호’ 변경자를 비롯해 마금자 장해숙 이순옥 박미금 백명선이 엔트리에 포함됐다.

이낙선 당시 대한배구협회장은 물심양면으로 대표팀을 지원했다. 선수 개인 사정까지 돌봐준 것.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올림픽을 3개월여 앞둔 4월 초 박인실이 사적인 이유로 선수단에서 빠진 것이다. 박인실은 스파르타식으로 이뤄지던 국가대표 훈련을 받는 게 싫다면서 태릉선수촌을 무단으로 이탈했다. 대농 소속이던 박인실은 현재 한국 여자 배구 에이스인 김연경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역대 여자 배구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아왔다. 실업 최강이던 대농에서 ‘나는 작은 새’ 조혜정이 박인실에 밀려 보조공격수를 맡아야 했을 정도다.



한국은 예선 B조에서 소련에 1대 3으로 패했지만, 이후 동독에 2세트를 먼저 내주고 내리 3세트를 따내 3대 2로 역전승했다. 쿠바를 상대로도 역시 풀세트 접전 끝에 3대 2로 이겼다. 변경자의 날카로운 공격이 박인실의 공백을 메웠다. B조 2위를 차지한 한국은 A조 1위 일본과 준결승전을 치렀다. 0대 3 패배. 한국의 3·4위전 상대는 헝가리였다. 당시 국제배구연맹 회장이 헝가리 출신이었는데, 3·4위전 주심에 헝가리와 같은 동구권 출신의 불가리아인이 배정됐다. 3·4위전에서 한국은 불가리아 심판의 편파 판정에 시달려야 했다. 첫 세트를 12대 15로 내줬지만, 2세트를 15대 12로 따낸 뒤 두 세트를 더 획득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당시 헝가리 선수들의 평균 신장은 180㎝에 가까웠지만 한국은 173㎝의 정순옥이 최장신으로 평균 신장은 169cm였다.

올림픽 첫금 양정모

1976년 몬트리올에서 양정모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양정모의 어머니 박월선 씨는 태몽으로 ‘큰 고목나무 밑에 용이 한 마리 있고, 그 밑에 깊은 못이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양정모도 어릴 적부터 골목대장이었고, 학교에서도 힘에 관한 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승부욕도 대단해 딱지치기와 구슬치기를 할 때도 친구들의 딱지, 구슬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성미가 가시곤 했다.

양정모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태권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부산 덕진중에 입학해 유도를 잠깐 한 뒤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레슬링을 배웠다. 건국상고에 진학하면서 레슬링에 눈뜨기 시작했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부산 시내 한일체육관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 건국상고 2학년 때 전국체전에 출전해 고등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을 석권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는 한 선수가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에 모두 출전할 수 있었다. 양정모는 레슬링 특기자로 동아대에 입학했다. 국가대표를 지낸 오정룡 코치를 동아대에서 만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1971년 일본에서 열린 세계주니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 출전해 자유형 은메달, 그레코로만형 동메달을 획득했다.

오늘은 누가 메달을? 가슴 뛰는 올림픽의 밤과 낮

서울 올림픽 유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김재엽 선수가 한복 차림으로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양정모는 1972년 뮌헨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때 장경무를 물리치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으나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했다. 가난한 나라 탓이었다. 예산이 부족하던 대학체육회는 소수 정예만 뮌헨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양정모는 좌절했다. 1년 넘게 레슬링을 접다시피 했다. 정동구 당시 코치의 설득으로 매트 위로 돌아왔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 자유형 페더급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고,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양정모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도 유력한 우승후보였으나 한국이 올림픽 보이콧(부당한 행위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적 ·집단적으로 벌이는 거부 운동)에 참여하는 바람에 출전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또 한 번의 좌절이었다. 양정모는 현재 동아대 스포츠과학대학 초빙교수로 일한다. 런던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레슬링 국가대표팀 특별 코치로 선임돼 후배에게 조언을 해줬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황영조는 마라톤도 머리를 써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냈다. 30㎞ 지점까지 선두를 달리던 김완기가 뒤로 처진 후 콜럼버스 동상이 서 있는 35㎞ 지점부터 황영조와 모리시타 고이치의 숨 가쁜 한일 대결이 시작됐다. 황영조는 에스파냐 광장을 지날 때까지 모리시타를 바로 앞에 세우고 페이스를 조절했다. 급경사인 몬주익 언덕에서 승부를 내고자 숨을 고른 것이다. 황영조는 언덕을 내려갈 때 스피드를 내면 모리시타를 따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계산대로 몬주익 언덕의 정점에서부터 전 속력으로 치고 내려와 상대를 제압했다. 금메달을 딴 황영조(2시간13분23초)와 은메달을 차지한 모리시타의 기록 차이는 22초였다. 모리시타는 2시간13분45초에 들어왔는데, 내리막길에서 승부를 걸지 않았다면 메달 색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4년 후 벌어진 애틀랜타 올림픽 마라톤에서 이봉주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조시아 투과니는 더욱 치열한 승부를 벌였다. 이봉주 2시간12분39초, 투과니 2시간12분36초. 3초 차이로 금·은메달이 나뉘었다.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단 시간차로 승부가 갈린 경기였다. 이봉주는 넉 달 뒤 열린 후쿠오카 마라톤에서 투과니를 막판에 제치고 우승하면서 설욕했으나 올림픽에서의 ‘3초’는 이봉주에게 달랠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봉주는 올림픽 챔피언이 되고자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잇따라 출전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10년 은퇴했다.

국민 마라토너로 불리는 이봉주는 현재 채널A 예능 프로그램 ‘불멸의 국가대표’에 출연하고 있다. 황영조는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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