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애플보다 무서운 ‘특허괴물’에 대비할 때

  • 박성필| KAIST 지식재산대학원 교수 sppark@kaist.ac.kr

    입력2012-09-20 1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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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배심원단의 일방적인 평결로 삼성전자 대(對) 애플의 특허전이 한미 양국 간 감정싸움으로 비화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애플 같은 거대기업보다 오히려 더 고약한 상대는 특허법정에서 큰돈을 벌려고 하는 특허괴물이다.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해놓고도 결국 미국 특허괴물에게 넘겨주고만 비운의 MP3 플레이어 사례를 통해 애플보다 무서운 특허괴물의 속성을 해부하고 최근 동향을 파악해본다.<편집자 주>
    애플보다 무서운 ‘특허괴물’에 대비할 때

    2004년 출시된 레인콤의 아이리버 iFP-1000 프리즘 아이. 레인콤은 국내에서 세계 최초 개발된 MP3 플레이어 특허를 인수해 관련 사업을 벌였지만 결국 특허를 미국에 매각했다.

    삼성-애플 간 소송에서 보듯 최근 국제적으로 대규모 특허 소송이 빈발하고 있다. 수천 억에서 수조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고 판매금지까지 당하면 웬만한 기업은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그러잖아도 녹록하지 않은 글로벌 경쟁 속에서 특허전쟁까지 대비해야 하는 기업들의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다.

    우리 기업들은 전방(前方)인 해외시장과 후방(後方)인 국내시장에서 특허전쟁을 치른다. 대표적인 전방 전투지는 미국이다. 미국은 특허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나라로 주로 미국 법원에서 천문학적 수준의 손해배상 결정이 나오고 있다. 이런 미국에서 요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특허관리회사(Patent Management Company)가 태어났다. 특허관리회사는 아직 용어가 통일되지 않아 특허괴물(Patent Troll), 라이선싱회사, 비실시기업(Non-practicing Entity), 발명자본(Invention Capital) 등으로도 불린다.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한 우리 기업들이 이들 특허관리회사의 대표적인 공격 대상이 되고 있어 우려가 크다.

    후방에서의 전투는 전방에서의 그것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특허권자에 대한 보호 수준이 너무 낮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피땀 흘려 확보한 특허를 침해당해도 침해 사실을 입증할 증거확보가 너무 어렵거나 특허 무효로 판결 날 가능성이 높아 재판을 망설이게 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끝내 승소하더라도 변호사비를 지출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푸념하는 기업인도 많다.

    이런 전후방 특허 전선의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199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세계 최초 상용 MP3 플레이어다. 우선 MP3 플레이어 사례 분석을 통해 어떻게 특허제도가 기업에 오히려 독(毒)으로 작용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MP3 플레이어의 흥망성쇠



    상용 MP3 플레이어의 세계 최초 개발자는 다우기술 출신으로 1996년 디지털캐스트를 설립한 황정하 사장이었다. 연구개발과 사업화를 위한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던 디지털캐스트는 1997년 새한정보시스템과 전략적 제휴를 체결한 후 세계 최초의 상용 MP3 플레이어 ‘MPMan F10’을 개발했다. 이 제품은 1998년 독일 CEBIT 전자박람회에서 최우수 멀티미디어로 선정되면서 국제적으로 주목받았다. 당시 언론은 우리나라가 MP3 플레이어의 종주국으로서 세계시장을 석권할 것을 기대하면서 장밋빛 전망을 쏟아냈다.

    디지털캐스트와 새한정보시스템은 각각 50%씩 특허 지분을 보유했다. 해외 언론은 초기 발명자로 등록된 황정하, 문광수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관련 특허를 ‘문-황 특허(Moon-Hwang Patent)’라고 했다.

    그러나 이 전략적 제휴는 얼마 가지 못해 깨졌고, 디지털캐스트는 재미교포 이종문 사장의 미국 회사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Diamond Multimedia)에 인수됐다. 새한정보시스템의 오디오기기사업부는 문광수 사장의 주도로 엠피맨닷컴으로 분사했다.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가 출시한 MP3 플레이어인 ‘Rio’는 미국 시장을 90% 점유할 정도로 성공적이었지만, 후발주자인 애플의 아이팟(iPod)이 급부상하면서 시장지배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결국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의 MP3 플레이어 사업부는 칩셋 제조사인 소닉블루(SONICblue)에 매각되고, 이후 소닉블루도 경영 상태가 악화되자 MP3 플레이어 사업을 일본계 D·M Holdings에 매각했다. 이러한 일련의 이전 및 매각 과정에서 처음 디지털캐스트가 보유했던 50%의 특허 지분도 동일한 경로를 따라 이전되었다.

    한편 엠피맨닷컴은 한동안 국내 사업을 계속했다. 2001년 초 국내에서 원천기술인 ‘엠피이지(MPEG) 방식을 이용한 휴대용 음향 재생장치 및 방법’ 특허가 등록된 이후 국내외에서 관련 특허들이 하나둘씩 등록되기 시작하자 경쟁사들을 상대로 침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한편 로열티 협상을 요구하는 등 특허 공세를 강화했다.

    그러나 경쟁사들은 한국포터블오디오협회(KPAC·Korea Portable Audio Consortium)를 중심으로 뭉쳐 엠피맨닷컴 특허의 권리범위가 너무 넓다고 공격했다. 특허심판원이 해당 특허를 무효라고 판결하는 비율이 70%에 육박하는 국내 현실 역시 엠피맨닷컴엔 또 다른 압박이었다.

    무효 주장에 시달리던 엠피맨닷컴은 결국 스스로 정정심판을 통해 특허 권리범위를 축소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경영상태가 악화되어 레인콤에 인수되었다. 레인콤은 미려한 디자인의 ‘아이리버’ 브랜드로 한동안 선전했지만 애플이 아이팟 셔플과 아이팟 나노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시장을 확대해나가고 중국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자 결국 MP3 플레이어 특허를 미국 텍사스의 칩셋 제조업체인 시그마텔(SigmaTel)에 매각하고 말았다.

    사무실도 없는 특허괴물의 공격

    시그마텔은 레인콤의 특허지분 외에도 D·M Holdings가 보유한 나머지 지분마저 인수해 MP3 플레이어 관련 특허 전체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특허 포트폴리오는 텍사스MP3테크놀로지스(TMT·Texas MP3 Technologies)라는, 공장은커녕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는 전형적인 특허관리회사에 인수됐다. TMT는 변호사 5명이 소유한 회사로, MP3 플레이어 소송을 대리한 로펌 매쿨 스미스(McKool Smith)와 사무실 주소가 동일해 ‘특허 변호사 괴물(Patent Lawyer Troll)’이라 불렸다. TMT는 2007년 2월 삼성전자와 애플, 샌디스크를 상대로 텍사스 동부 연방지방법원에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만일 이 소송이 우리나라에서 진행됐다면 거대 글로벌 기업인 피고 회사들은 훨씬 수월하게 대처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특허제도하에서는 패소하더라도 소소한 규모의 손해배상으로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특허권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 고의 침해(willful infringement)의 경우 3배 배상(treble damages)까지 인정된다. 더구나 이 소송은 친(親)특허적 판결이 가장 많이 내려지는 텍사스 동부 연방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따라서 피고들은 무명(無名) TMT의 특허 공세에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TMT 같은 특허관리회사는 제조, 판매 등 다른 사업 활동을 하지 않으므로 그에 대한 반소(反訴) 제기나 크로스 라이선싱 전략으로 방어하기 어렵다.

    결국 소송은 소외(訴外) 합의로 종결되었다. TMT와 삼성전자, 애플, 샌디스크의 합의 조건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분쟁 결과가 그렇듯 이 세 회사가 일정 수준의 로열티를 TMT에 지불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 국가지식재산위원회와 공동으로 진행한 연구에서 MP3 플레이어 관련 특허의 로열티 수입을 최대한 보수적인 관점에서 추정해보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 중심으로 시장 규모가 큰 25개국을 대상으로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판매된 관련 기기 데이터를 수집했다. MP3 플레이어 기술은 매우 다양한 기기에 적용될 수 있지만 MP3 플레이어와 PMP(Portable Multimedia Player), 스마트폰 세 종류의 기기만 대상으로 삼았다.

    자료 조사 결과, 우리가 설정한 시장과 기간에 MP3 플레이어 관련 기기는 총 13억7000만여 대가 팔렸다. 여기에 기술 요율을 곱하면 바로 로열티 규모가 나온다. 엠피맨닷컴은 과거 경쟁업체들과의 로열티 협상에서 2개 특허에 대해 각각 1.5%, 총 3% 로열티를 판매금액에 부과한 바가 있다. IT업계 라이선싱 전문가들에게도 물으니 특허당 기기 가격의 1.5%를 적절한 기술료 요율이라고 말했다.

    2006년 이후 가장 많이 팔린 MP3 플레이어인 애플 아이팟의 경우 대당 가격이 200달러에서 700달러까지 다양한데, 최소 200달러라고 해도 (2개 특허에 대한 기술 요율3%를 적용할 경우) 대당 로열티가 6달러다.

    하지만 협상 과정에서 변수도 많고 특허기술이 적용된 기기의 유형도 다양하므로 장기적으로 안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수준의 기술 요율을 적용하기 위해 MP3 압축기술의 원천특허를 보유한 독일 프라운호퍼(Fraunhofer) 연구소의 로열티 책정 방식을 참조했다. 이 연구소는 업체들이 큰 반발 없이 수용할 만한 수준인 기기당 정액 2달러를 적용한다.

    MP3 플레이어 특허의 로열티도 기기당 2달러를 적용하면 6년간 추정 로열티는 27억4000만 달러, 우리 돈으로는 3조 원을 웃돈다. 고스란히 우리 기업들의 몫이 될 수 있었던 막대한 가치가 우여곡절 끝에 외국 특허관리회사 손에 들어간 것이다. 태권도처럼 ‘종주국’ 타이틀을 붙이며 대외적으로 내세울 수 있었던 기술개발국의 자부심도 함께 사라졌다.

    방어 목적 ‘특허 사재기’도

    TMT와 같은 특허관리회사들은 주로 미국에서 출현해 전 세계적으로 활동한다. 특허관리회사는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 당시 공급 중시 경제학 기조에 따라 반독점(anti-trust) 정책을 후퇴시키고 강력하게 펼쳐온 친특허정책(pro-patent policy)의 부산물이다. 특허권자에게 우호적인 텍사스 동부 연방지방법원이 위치한 텍사스주 댈러스의 소박한 마셜(Marshall) 시가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특허 소송 당사자들로 인해 어느덧 관광명소가 됐을 정도다. 웬만한 기업조차 소송 하나로 휘청거릴 정도로 소송 규모도 커졌다.

    지난해 가을 미국 보스턴대 로스쿨 교수진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특허관리회사들이 제기한 소송으로 피고 기업들이 약 5000억 달러의 피해를 보았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피해를 본 기업 대부분은 연구개발 투자에 집중하는 기술기업이었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이러한 소송비용으로 연구개발에 대한 재투자가 줄어든다는 점, 특허관리회사에 흘러들어간 돈이 최종적으로 발명가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했다.

    시장은 실제로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대기업들은 유능한 변호사들을 고용하는 데 아낌없이 투자하며 특허 전담부서를 양적, 질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방어 목적의 특허펀드 혹은 특허풀에 가입하거나 공격 성향이 강한 특허관리회사들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라이선싱 계약을 체결한다. 나아가 최근 여러 기업은 알짜배기 특허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기업 자체를 인수하는 데도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한 예로 2009년 파산한 캐나다의 통신장비회사 노텔(Nortel Networks)의 특허 6000건이 매물로 나왔을 때 LTE, 와이파이, 데이터 네트워킹, 인터넷, 반도체 등 IT 분야 핵심 기술이 망라된 핵심 특허들로 인해 시장이 들썩였다. 지난해 7월 이에 대한 인수전에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에릭슨, EMC, RIM, 소니 컨소시엄이 무려 45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제시해 구글과 인텔을 누르고 낙찰을 받았다. 이 컨소시엄은 이때 인수한 특허를 관리하기 위해 애플을 최대주주로 하여 록스타 비드코(Rockstar Bidco LP)를 설립했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이 회사가 삼성전자, LG전자, 팬택에 대해 특허침해 주장과 거액의 로열티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제 특허권을 연구개발(R·D)의 열매로 보기보다는 소송을 매개로 한, 수익성 높은 투자자산으로 인식하는 시대가 됐다. 글로벌 시장에서 특허관리회사와 관련한 이슈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TMT 같은 소규모의 ‘순수’ 특허관리회사들이 주를 이루지만, 록스타 비드코 같은 거대 제조회사들이 투자한 회사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계 최대의 특허관리회사인 인텔렉추얼 벤처스(Intellectual Ventures)는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소니, 노키아, 애플, 구글, 이베이, SAP, 엔비디아(Nvidia) 등 대표적인 기업들이 투자해 설립한 회사다. 그야말로 ‘별들의 연합’이다.

    삼성 LG 등 대기업 노려

    애플보다 무서운 ‘특허괴물’에 대비할 때

    미국 뉴욕의 애플 매장(왼쪽)과 삼성과 LG 등 우리 대기업들은 글로벌 특허괴물의 주요 표적이 되고 있다.

    글로벌 특허관리회사들은 우리 대기업들을 겨냥한다.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한 대가로 지불하는 ‘인기관리’ 비용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 소송비용으로 들어간다. 특허관리회사를 추적하면서 정보를 제공하는 페이턴트프리덤(PatentFreedom)에 따르면, 이들로부터 가장 많이 소송을 당하는 기업 10위 안에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들어있다. 하지만 이들 대기업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 역량이 충분하다.

    문제는 특허관리회사들이 우리 벤처·중소기업을 겨냥하는 경우다. 특허관리회사들에 노출되지 않고 조용히 사업을 할 수 있다면 모를까, 글로벌 시장에서 조금만 잘나가도 이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TMT와 같이 해외 특허관리회사들이 우리 벤처·중소기업의 소중한 특허를 매집해갈 수 있다는 점이다. 국경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기술의 가치를 충분히 평가해주는 업체에 기술을 판매하는 것이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국가적 관점에서는 분명한 손실이다.

    사업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고전하는 우리 벤처·중소기업에 특허관리회사는 특허괴물이 아니라 특허천사로 비칠 수 있다. 벤처·중소기업들이 제대로 된 투자를 받거나 금융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기술가치 평가서만으로는 부족하고 사업상 성공 가능성을 입증할 그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특허관리회사들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행동한다. 이들은 ‘소송’을 통해 가치를 획득하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사실은 매우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가지고 있다.

    앞서 특허전쟁 시대에 우리 기업들은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진 국내외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는데, 한 가지 공통점을 찾는다면 어느 전선에서든지 벤처·중소기업의 권리가 경시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MP3 플레이어의 사업화 실패 사례는 벤처·중소기업들이 세계적인 기술을 가지고도 국내시장에서 실패하고, 결과적으로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매우 착잡한 제도적 현실을 보여주었다.

    여러 가지 대응책도 논의되고 있다. 정부 주도로 설립한 공익 목적의 특허관리회사가 우리 벤처·중소기업들에 특허 수호자 역할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해외의 대형 특허관리회사들의 사업 모델을 분석해 역량 있는 국내 특허관리회사들을 적극 양성하는 것도 중요한 대응책이 될 수 있다.

    지식재산의 거래시장을 활성화하고, 그 담보가치를 활용한 금융상품을 개발해 벤처·중소기업들이 기술을 근거로 보다 쉽게 투자를 유치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필요도 있다.

    실패 반복 안 하려면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기업 생태계 내에서 벤처·중소기업들이 권리 행사를 충분히 할 수 있고, 대기업을 포함한 경쟁 기업들도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문화가 조성되도록 특허 관련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다. 우리나라는 특허침해소송의 승소 가능성이 20% 정도로 매우 낮고, 설령 승소하더라도 손해배상액이 턱없이 낮아 권리 행사에 투자한 비용을 회수하기 어렵다. 또 특허 무효율도 높아 과감하게 특허권 행사를 하지 못한다.

    애플보다 무서운 ‘특허괴물’에 대비할 때
    박성필

    1969년 광주 출생

    서울대 법대, 노스웨스턴 로스쿨 졸업

    미국 미시간주 변호사

    카이스트 지식재산대학원 교수

    저서 : ‘지식재산전략’(공저), ‘지식재산경영’(공저) 등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기업들끼리 경쟁업체의 권리를 경시하는 모럴 해저드도 만연해 있다.

    글로벌 시장의 특허 전선은 벤처·중소기업이 발을 들이기도 무서운 별들의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다. 피땀 흘려 개발한 기술을 어렵게 상용화해 수출해도 감당 못할 규모의 특허 소송에 휘말려 파산하거나, 마땅한 투자자나 금융기관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소중한 기술을 해외 특허관리회사에 넘겨주는 기업이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은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다.

    삼성-애플 특허소송 美배심원 평결 톺아보기

    애플이 하면 혁신, 삼성이 하면 모방?!


    미국에서 애플이 삼성전자에 대해 특허 소송을 제기한 것은 2011년 4월이다. 애플은 소장에서 삼성전자가 자신의 특허(utility patent), 디자인(design patent),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 등을 침해한 데 대해 25억 달러(약 2조8000억 원)의 배상을 요구했다. 삼성전자는 반소(反訴)를 통해 유럽 차세대이동통신표준인 UMTS(Universal Mobile Telecommunications System) 등을 비롯한 자사 특허들이 애플에 의해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최근 뜨거운 이슈가 된 8월 24일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 배심원 평결은 애플의 3개 특허, 4개 디자인, 4개 트레이드 드레스, 그리고 삼성전자의 5개 특허에 대한 것이었다. 배심원단은 애플은 삼성전자의 특허를 하나도 침해하지 않았지만 삼성전자는 애플의 상당수 특허, 디자인, 트레이드 드레스를 의도적으로 침해했다고 평결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트레이드 드레스 관련 부분이다. 배심원단은 애플이 등록한 트레이드 드레스가 유효함이 자명한데도 삼성전자가 갤럭시S, Fascinate, 바이브런트 제품으로 애플 제품의 식별력을 의도적으로 희석(dilution)했다고 판단했다.

    트레이드 드레스란 제품의 고유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색채, 크기, 모양 등을 의미한다. 코카콜라 병(contour bottle)과 같은 제품 포장이 대표적인 예다. 식당의 인테리어, 흘러나오는 음악, 직원 유니폼, 벽에 진열해둔 특징적인 물건 등도 총체적으로 트레이드 드레스가 될 수 있다.

    트레이드 드레스는 특허나 디자인과 달리 소비자가 특정 제품을 보고 그 출처, 곧 제조업체를 식별할 수 있는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지식재산권이다. ‘Look and feel’이 트레이드 드레스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다. 트레이드 드레스는 상표법을 근거로 해 보호되기 때문에 10년마다 갱신만 해준다면 사실상 영구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막강한 권리다. 반면 우리나라는 상표법과 부정경쟁방지법에 입체상표, 색채상표 등이 산재할 뿐, 미국처럼 포괄적인 트레이드 드레스 개념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

    아이폰과 깻잎 통조림

    트레이드 드레스는 상표 역할을 하므로 다른 제품과 구별되는 식별력(distinctiveness)을 요구한다. 특허와 디자인이 모방을 넘어선 상당 수준의 혁신을 보호하는 지식재산권이라면 트레이드 드레스는 소비자 입장에서 해당 제품과 그 생산자를 연결시킬 수 있을 만큼 식별력이 있을 때 부여되는 지식재산권이다. 따라서 ‘예전에도 있었던 직사각형 모양의 기기에 왜 특허를 인정하는가’ 혹은 ‘모서리가 둥근 제품으로는 깻잎 통조림도 있는데 애플이 무슨 특허를 가졌단 말인가’ 하는 비판은 최소한 트레이드 드레스만 놓고 볼 때 타당하지 않다. 이미 존재했던 것이라도, 즉 그다지 혁신적이지 않은 것이라도 상표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모서리가 어느 정도로 둥근지, 몇 대 몇 비율로 직사각형인지 정교하게 대조해 보는 것은 그닥 중요하지 않다. 소비자가 어떻게 느끼고 판단할 것인지가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허와 디자인에 대해서는 ‘깻잎 통조림’을 증거로 제출 못하리란 법도 없다. 신규성과 진보성 판단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규성이란 출원 시점까지 알려진 지식과 선행 기술에 비추어 새로운 발명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진보성이란 해당 기술 분야에서 통상의 지식을 가진 자가 용이하게 발명할 수 ‘없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투어진 4개 디자인은 상당 부분 트레이드 드레스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3개의 특허도 트레이드 드레스와 실질적인 보호 범위가 상당히 중복된다.

    즉, 상당한 혁신을 요구하는 특허 및 디자인 영역에 대한 판단이 굳이 혁신적일 필요가 없는 트레이드 드레스 영역의 판단에 의해 영향 받은 것이다. 애플의 주장은 지식재산권의 각 영역이 교차하는 지점에 관한 것이었고 제품의 기능성, 디자인, 브랜드, 가치를 포괄하는 트레이드 드레스 침해가 소송의 핵심에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그런 배심원 평결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태양 아래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특허의 대상이다(Everything under the sun that is made by man is patentable).”

    1980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이렇게 선언했다. 인간의 창작활동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하느님의 창조와 다르다. 이미 존재하는 지식과 기술을 관찰하고 이를 응용, 발전, 개선함으로써 새로운 발명이 나온다. 혁신과 모방은 ‘정도의 차이’를 의미할 뿐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이와 관련해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1980년대 컴퓨터 매킨토시를 개발할 때 제록스가 개발한 컴퓨터 제록스 스타(Xerox Star)의 GUI(Graphical User Interface)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하면서 피카소의 말을 빌려 “좋은 예술가는 베끼지만, 훌륭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고 말했다.

    “Great Artists Steal”

    애플보다 무서운 ‘특허괴물’에 대비할 때

    갤럭시S2(왼쪽)와 아이폰4.

    그의 걸작 아이팟(iPod) 초기 모델 디자인 역시 애플 고유의 것이 아니었다. 이 디자인은 영국 발명가 크레이머(Kane Kramer)와 캠벨(James Campbell)이 1979년 발명한 디지털 오디오 플레이어 ‘IXI’에서 차용한 것이다. 이 기기는 영국과 미국에서 특허등록까지 했다. 하지만 이사회의 불화로 특허 유지를 위한 연차료를 납부하지 못해, 이 특허와 디자인은 누구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맨 처음 포착해 손질해서 만든 회사가 바로 애플이다.

    애플 기술자 사이에는 두 사람의 얼굴을 합쳐놓은 듯한 맥파인더(Mac Finder) 아이콘도 피카소의 1934년 작품 ‘두 인물(Two Characters)’의 한 부분과 너무 흡사하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애플은 혁신적인 기업임에 틀림없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혁신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하다.

    그렇다면 ‘재빠른 2등(fast second)’ 전략으로 IT산업에서 급부상한 삼성전자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삼성전자는 혁신 기업 애플이 스마트폰과 태블릿PC 신시장을 형성해가는 과정에 재빠르게 진입하더니 어느덧 애플의 아성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두 회사 모두 모방에 기초하고 있다. 애플은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고, 삼성전자는 ‘유사 제품’ 수준으로만 발전시켰다. 삼성전자가 애플 제품을 모방한 것은 소송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배심원단이 소비자 마음 사로잡기와 특허 및 디자인 제도가 요구하는 혁신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트레이드 드레스의 판단자인 소비자가 이제 특허와 디자인도 판단하게 된 형국이다. 설마 이마저 이 소송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위대한 예술가’의 전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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