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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 분석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역사 왜곡해 친일파 몰고 사진 합성해 ‘플레이보이’ 비하

  • 이정훈 기자 | hoon@donga.com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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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이 침략하자 조선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민족반역자, 그 사이에 대다수의 민중이 있었다.…일본은 친일파를 앞세워 땅과 쌀과 이름과 말(언어), 심지어 그들을 전쟁에 동원해 생명까지 빼앗았다. 이에 맞서 독립운동세력은 해외로 나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을 조직했다”라며 이승만을 콜라보로 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승만을 바로 친일파로 모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한국에 온 미군정 세력은 친일파를 앞세워 자주독립 세력을 짓밟기 시작했다”라고 우회한다.

미군정 세력이 친일파를 앞세웠다는 대목도 찬찬히 살펴보자. 미국은 핵무기까지 써가며 일본과 치열하게 싸워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 미국이 친일파를 썼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판사 위폐사건과 대구폭동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정판사 위폐사건 재판.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흔들 목적으로 위폐를 인쇄 유통시킨 사건이다.

‘두 얼굴’이 ‘미군정은 자주독립 세력을 짓밟기 시작했다’고 한 것은 미국이 친일파 처벌법을 인준하지 않은 것, 독립정부를 세운 후 제헌의회가 만든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것을 섞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미군정이 책임져야 하지만, 뒤의 것은 미군정이 아닌 우리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광복 후 순수 미군정을 받던 우리는 1946년 12월 12일 의회에 해당하는 ‘과도입법의원(議院)’을 개원하고, 1947년 6월 3일엔 ‘남조선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갖게 된 것이다. 과도정부 출범 직후인 1947년 7월 20일 과도입법의원은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해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 처단 특별법’을 통과시켰으나 미군정의 인준을 받지 못해 공포되지 못했다.

일본과 전쟁까지 치른 미군정이 이 법을 인준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좌우 대립 때문이었다. 친일파일지라도 전향을 했다면 그들을 이용해야 할 만큼 좌익과의 싸움이 심각해진 것이다.

광복 직후 박헌영이 재건한 조선공산당은 대일 항쟁기에 조선은행권을 인쇄했던 서울 소공동의‘정판사(精版社)’ 건물에 입주해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했다. 그리고 정판사를 통해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인쇄해 유통시키다 과도정부 출범 전인 1946년 5월 경찰에 적발됐다. 경찰은 조선공산당이 남조선 경제를 교란하고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폐사건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경찰에 쫓기던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은 북조선으로 도주했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대한민국을 부정한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이 본격적인 좌우갈등에 들어섰다는 징표였다.

이 사건 5개월 전인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외무장관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이승만과 김구를 필두로 한 한국인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박헌영도 반대했다. 그런데 그 직후 북한에 가서 김일성,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온 로마넨코 민정담당 부사령관, 폴리얀스키 서울주재 총영사 등과 회의를 하고 돌아온 박헌영이 1946년 1월 2일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모스크바의 결정을 맹종한 것이다.

그 결과 민족진영의 반탁, 공산주의자들의 찬탁 시위가 경쟁적으로 터져 나왔다. 신생 독립국에서 불거지는 노선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하자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친공(親共)은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런 기로에 정판사 위폐사건이 터졌으니 미군정은 좌익 척결을 시급한 문제로 볼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 처벌이냐, 좌익 척결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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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말 박헌영이 북한에 다녀온 후 공산 계열은 찬탁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미군정은 공산 세력과의 싸움에 방점을 찍게 된다. 일제는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반공을 표방했다. 이 때문에 일제에 고용된 조선인 순사 출신들이 대공(對共) 수사에 투입됐다. 미군정이 이들을 경찰관으로 채용한 것이다.

정판사 위폐사건 5개월 뒤인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좌익이 일으킨 폭동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대됐다(대구폭동). 미군정은 미군 부대와 조선인 경찰부대를 출동시켜 무력 진압했다. 이 폭동으로 경북에서는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김종필 전 총리의 장인) 씨 등 64명이 사망했다. 전국적인 사망자 수는 집계조차 되지 못했다. 정판사 위폐사건과 대구폭동 등을 겪은 뒤 과도입법의원이 친일파를 척결하자는 법을 만들었으나 , 친일 경력을 가진 경찰관으로 좌익과 맞서야 했던 미군정은 이 법을 인준하지 않았다. ‘친일파 척결’은 찬탁을 했던 공산 세력이 민족 세력보다 더 강하게 외치던 구호였다.

이승만과 관련된 친일파 척결은 독립정부 수립 후인 반민특위 활동이다. 이 문제도 좌익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보인 태도를 염두에 두고 살펴봐야 한다. 독립정부를 세우려면 헌법이 있어야 하고 헌법 제정을 제1의 목표로 만든 초대 의회를 ‘제헌의회’라고 한다.

미군정기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을 제헌의원을 뽑는 투표일로 정하고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그러자 좌익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가장 격렬했던 것은 4월 3일 제주도 봉기였다. 좌익들이 주요 관서를 습격해 사망자가 나왔다(제주도4·3사건). 이에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대응해 또 양쪽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혼란으로 제주도의 선거는 무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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