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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은소금 하얀 햇살 속 그리운 아버지여

전남 보성

  • 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은소금 하얀 햇살 속 그리운 아버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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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은 애써 걸음을 삼가는 버릇을 가진 나그네이지만, 보성까지 와서 그 유명하다는 차밭을 가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익히 봐왔던 녹차밭 풍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욕심도 없지 않았다. 보성은 예부터 한국 차의 명산지로 잘 알려져왔다. 한반도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면서 바다와 가까워 기후가 온화할 뿐만 아니라 습도와 온도가 차 재배에 적당하다는 환경적인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읍에서 남쪽 율포 바다 쪽으로 가다가 만나는 보성 녹차밭. 보성읍 봉산리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산록에 자리 잡은 이 농원은 30여만 평이나 되는 드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차밭으로 가는 길가에는 아름드리 삼나무들이 도열해 청량감을 더하는데, 이윽고 만나는 산등성이의 차밭이 장관이다. 눈이 먼저 시원해지고 이내 가슴이 상쾌해진다. 바람결에도 차 향기가 전해지는 기분이다. 봄 햇살을 튕겨내는 푸르른 차밭 한가운데 서 있노라면 금세 온몸에 찻물이 배어드는 느낌마저 가질 수 있다.

새순 하나를 따서 입 안에 넣어보는 때는 문득 수년 전 둘러보았던 중국 무이산(武夷山)의 대홍포 차밭을 떠올렸다. 거대한 바위산 골짝과 절벽에 층층으로 조성해놓은 차밭이었는데 그 규모와 기이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마저 자아내게 했다. 입지가 얼마나 험했으면 사람 대신 원숭이를 시켜 찻잎을 따게 했다는 얘기까지 있을까. 그런데 보성 차밭에서 갖는 감회는 그때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부드러움과 넉넉함에서 가질 수 있는 평안과 안도가 좋았다. 아무튼 차 맛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가 그 가꾸고 키우는 이들의 수고는 뒷전에 둔 채 녹색 농장의 풍경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사치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싱그러운 차밭과 일림산 철쭉

이곳 차밭 구릉지 뒤편의 팔성산과 연결되는 산이 등산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일림산이다. 호남정맥이 제암산(779m)과 사자산(666m)을 거쳐 남해로 들어가기 직전에 솟구친 산이다. 정상 근처의 습지대에서 흘러내린 물이 산 아래 바위 암반의 골짝에서 한순간 폭포를 이루는데 그것이 곧 용추폭포다. 이 물줄기는 보성 땅을 가로지른 뒤 주암호에 들었다가 마침내 섬진강과 합류하는 보성강의 시원이 되기도 한다. 특히 해발 664m의 일림산은 철쭉 군락지로 이름나 있는데, 매년 5월이면 100만여 평(330만여 m2)의 군락지가 붉은 꽃으로 뒤덮여 온 산에 꽃불이 번지는 듯한 장관이 연출되기도 한다. 정상 어귀에 형성된 산죽 군락지며 억새밭 또한 철 따라 독특한 경관을 빚어내면서 보성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산 정상에서 마주하는 조망은 호쾌하다. 맞은편 장흥의 천관산 바위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 듯 다가들 뿐만 아니라 북서쪽의 사자산 제암산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오며 먼 데 무등산마저 호형호제하듯이 가깝게 다가든다. 그뿐인가. 남동쪽 산 아래로는 여기저기 한가하니 섬들이 떠 있는 보성만 바다와 그림 같은 해안 풍경이 펼쳐진다. 산과 바다를 죄 아우르는 한 폭의 산수화를 이 산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녹차의 약 40%가 이 산자락에서 생산된다. 향기롭고 맑은 차가 소리를 만드는 것처럼 산 아래 마을에서는 서편제 명창이 많이 배출된 것으로도 소문이 나 있다.

녹차밭을 나와 남쪽으로 달리다가 다다르는 뭍의 끝, 율포솔밭해변은 보성이 자랑하는 해변 관광지다. 수령 40~50년의 소나무들이 해변에 숲을 이루고 고운 모래가 깔려 있는 곳. 득량만의 바닷물이 쉼 없이 모래밭을 적시는 이 천혜의 자연에 이제 사람들은 온갖 시설물을 갖춰 놓고 손님들을 끌고 있다. 서구풍의 콘도와 펜션들, 솔숲의 녹차 풀장…. 오락과 휴식을 위한 이런 편의시설이 요긴해 보이기는 하지만 적적하니 바다 구경이나 하고 솔바람 소리나 듣겠다고 찾아온 나그네한테는 되레 거추장스럽게만 여겨지기도 한다. 보성 여인숙이 있는 읍 거리와는 사뭇 이질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하여 나는 차라리 북쪽으로 걸음을 돌린다. 보성읍 노동면 명봉리에 있는 작은 기차역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제는 역원 한 명 배치되지 않은 이름 그대로의 시골 간이역이지만 어느 TV 드라마의 촬영지로 소문이 나면서 나름의 유명세를 타고 있다는 역이다.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하루 쉰 명 남짓인데 역 구경 오는 사람이 그보다 훨씬 많다니 TV 드라마의 위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탤런트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나 같은 이가 그런 시속을 따를 까닭은 없다.

아직도 은소금 하얀 햇살 속에 서 있겠지

서울 가는 상행선 기차 앞에

차창을 두드릴 듯

나의 아버지

저녁 노을 목에 감고

벚나무들 슬픔처럼 흰 꽃 터트리겠지

지상의 기차는 지금 막 떠나려 하겠지

아버지와 나 마지막 헤어진 간이역

눈앞의 빙판길

미리 알고

봉황새 울어 주던 그날

거기 그대로 내 어린 날

눈 시리게 서 있겠지요.

-문정희 시 ‘명봉역’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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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 │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hakbong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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