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공사 중인 스웨덴국립미술관. 2018년에 재개관한다.[사진제공·최성표]](https://dimg.donga.com/a/660/0/90/5/ugc/CDB/SHINDONGA/Article/5a/05/09/2c/5a05092c096ad2738de6.jpg)
한창 공사 중인 스웨덴국립미술관. 2018년에 재개관한다.[사진제공·최성표]
그런데 미술관에 도착해서 황당한 일을 겪을 때도 있다. 꼭 보고 싶던 소장품이 다른 미술관에 대여 중이거나 공사 중이라 전시장 일부가 폐쇄돼 아주 적은 작품만 볼 수 있을 때엔 실망이 클 수밖에 없다. 나는 스웨덴국립미술관(Sweden Nationalmuseum)에 큰 기대를 안고 스톡홀름을 찾아갔는데, 미술관이 아예 폐쇄돼 있었다. 2013년부터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공사가 시작돼 2018년에 새롭게 개관할 것이라고 한다. 미리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이 크지만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스톡홀름은 파리나 런던과는 달리 작정하지 않는 한 방문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국립미술관을 보지 못하고 스톡홀름 시내만 둘러보려니 매우 허전했다. 그러한 중에도 다행스러웠던 건, 미술관의 중요 작품이 시내의 다른 건물에 전시돼 있다는 점이었다.
미술관 건물은 공사를 위해 가림막이 설치돼 있긴 했으나 건물 전체의 윤곽을 파악할 수는 있었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대리석 건물이다. 미술관 바로 앞은 툭 트인 바다라 풍광도 매우 아름답다. 어차피 그림은 없는 미술관. 아름다운 주위 풍광이나 실컷 보고 가자는 생각에 건물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 미술관 건물은 처음 지어진 후 150여 년 동안 거의 수리하지 못했고, 이번 공사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할 것이라고 한다.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이 한계에 다다라 대대적인 공사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공사 후엔 안전성, 온·습도 조절, 방화시설, 미술품의 운반과 보관, 전시 공간 등에서 국제적 수준의 시설을 완벽하게 갖출 것이라고 한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은 항구도시이자 14개 섬으로 구성된 바다의 도시다. 인구는 220만 명 정도. 가까운 섬끼리는 다리로 연결돼 있고, 거리가 먼 섬은 배를 타야 한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같은 분위기다. 국립미술관은 다운타운에서 걸어갈 수 있는 위치라 찾아가기는 편했다. 미술관 옆 부둣가에서 맥주 한잔으로 미술관을 보지 못한 씁쓸한 입맛을 달랬다.
오늘날 스웨덴은 거의 모든 면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의 앞 순위에 꼽힌다. 그에 비해 미술관은 뒤처진 편이다. ‘미술관 척도’로는 결코 선진국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래서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왕의 컬렉션에서 출발
스웨덴국립미술관의 역사는 꽤 오래됐다. 국가 전성기인 1792년 구스타프 3세 왕(Gustav III·1746~1792)이 사망하자 그를 기념하기 위해 왕립미술관(Royal Museum)을 만들었다. 스톡홀름의 궁궐에 마련된 왕립미술관이 이곳의 출발이었다. 현재 건물은 독일 건축가의 설계로 북이탈리아 르네상스식 양식을 따른다. 1844년 공사가 시작돼 1866년 완공됐다. 이때부터는 왕립 대신 국립미술관(Nationalmuseum)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9세기 후반에는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왕권이 약해졌고 ‘왕립’이 ‘국립’으로 바뀌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 미술관도 그 흐름 안에 있었던 것이다. 계몽주의 사상과 시민혁명의 영향이었다.미술품 컬렉션은 16세기부터 시작된 스웨덴 왕립 컬렉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컬렉션을 처음 시작한 왕은 구스타프 바사(Gustav Vasa·1496~1560)다. 17세기 스웨덴은 주변 국가와의 전쟁에서 상당한 승리를 거두는데, 이때 전리품으로 미술품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18세기에는 테신(Carl Gustaf Tessin·1695~1770)이라는 아주 중요한 컬렉터가 등장한다. 그는 파리 주재 대사를 지낸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파리에서 많은 그림을 수집했다. 그의 컬렉션은 곧 왕립 컬렉션에 합류되었고 훗날 국립미술관의 중요한 소장품이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스웨덴 출신 화가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됐다. 그 덕분에 국립미술관은 스웨덴 미술사의 중요 작품을 많이 소장할 수 있게 됐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작품도 많은데, 렘브란트 작품은 이 미술관의 자존심이다. 18세기 작가인 프랑스의 부세(Francois Boucher)와 샤르댕(Jean-Baptiste-Sime′on Chardin) 작품도 중요 소장품으로 분류된다. 미술관은 프랑스 인상파 작품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은 중세부터 1900년대까지의 판화 및 드로잉 50만 점을 보유한다. 여기에는 테신이 수집한 2000점 이상의 걸작도 포함돼 있다. 회화와 조각 작품은 1만6000여 점이다. 중세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작품인데, 18·19세기 스웨덴 그림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17세기의 네덜란드 작품과 18세기 프랑스 작품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것들이다.
디자인 등 응용예술 분야에선 14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작품 3만여 점을 소장한다. 3분의 1이 세라믹이고, 나머지는 섬유·유리·금속·가구·서적 등이다. 스웨덴 포함 노르딕 작품에 우선권을 두고 수집한다. 여타 국가 작품은 디자인 발달사에서 중요성을 고려한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미술관은 예술도서관도 운영한다.
서유럽에 뒤지지 않는 스웨덴 화가들

Alexander Roslin, ‘The Lady with the Veil’, 1768
스웨덴은 스칸디나비아 3국 중 가장 크고 앞선 나라다. 면적도 가장 넓고 인구도 가장 많다. 산업화의 역사도 오래고 공업도 발전했다. 문화예술의 역사도 두 나라보다 더 오래됐다.
한국과도 문화 쪽으로 특수한 인연이 있다. 1926년 일본을 방문 중이던 황태자 구스타프 공작이 경주의 서봉총 발굴에 참여한 것이다. 그때 신라금관이 출토되는데, 고고학자인 황태자가 손수 채집했다. 이 금관에 세 마리의 봉황 모양이 장식돼 있기 때문에, 스웨덴[瑞典]의 ‘서(瑞)’자와 봉황의 ‘봉(鳳)’자를 따서 이 왕릉을 ‘서봉총(瑞鳳冢)’이라고 했다.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가 워낙 걸출해 스칸디나비아에서는 노르웨이의 미술이 가장 앞선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스웨덴 화가들이 일찍부터 국제 무대에 알려졌고 그 숫자도 많다. 스웨덴에는 17세기에 이미 서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받은 작가가 있었고, 18세기부터는 유럽 화단에 이름을 알린 화가들도 속속 나왔다.
다비드 클뢰커(David Klo‥cker Ehrenstra˚hle·1628~1698)는 17세기에 이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화가 수업을 받았다. 스웨덴으로 돌아와 궁정화가로 임명됐을 뿐 아니라 귀족 칭호까지 받았다. 스웨덴 미술 역사가 서유럽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웨덴 미술사에서 클뢰커 이후의 대표적 작가를 열거하면 알렉산더 로슬린(Alexander Roslin), 요한 세젤(Johan Tobias Sergel), 카를 힐(Carl Fredrik Hil), 에른스트 조셉슨(Ernst Josephson), 카를 라슨(Carl Larsson), 앤더스 조른(Anders Zorn) 등이다. 모두 서유럽 작가들만큼이나 유명한 인물이다.
국립미술관이 가장 자부심을 가지는 작품은 스웨덴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화가, 로슬린(1718~1793)의 ‘면사포 여인(The Lady with the Veil)’이다. 로슬린이 1768년 자기 부인을 그린 초상화다. 이 그림은 누가 보아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그림도 예쁘고, 그 속의 여인도 예뻐서 저절로 눈이 간다. 검은 면사포를 쓰고 있어서인지 밝게 그려진 얼굴과 가슴이 더욱 돋보이고 매혹적이다. 접이식 부채를 든 것도 특이하다.
로슬린은 당대 유럽 최고의 초상화 작가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재적인 소양을 보여 전문가로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16세 때 궁정화가의 조수가 돼 수많은 초상화 작업에 참여했다. 29세 때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곳 대가들의 작품을 직접 접했고, 34세 때 파리로 옮겨가 거기서 평생을 살았다.
로슬린은 파리에서도 곧 두각을 나타냈고, 마흔한 살 때(1759) 16세나 어린 파스텔 화가 마리-수잔(Marie-Suzanne Giroust)과 결혼했다. ‘면사포 여인’은 그로부터 9년 후에 그린 그림이다. 당시 로슬린은 쉰 살로 화가로서 최고의 기량과 개성을 발휘할 때였다.
‘스웨덴의 행복’

Carl Larsson, ‘Breakfast under the Big Birch’, 1896
1772년 부인이 죽자 로슬린은 2년 후 잠시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고국에서 그는 왕립예술원 회원으로 뽑혔고, 머무는 동안 스웨덴 왕가의 초상화와 유력 정치인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여황제 예카테리나와 그곳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예카테리나는 로슬린에게 러시아에 머무르라고 설득했지만, 그는 사양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에서 최고의 부자 화가로 등극했다.
로슬린은 1753년부터 파리살롱에 작품을 18회나 전시했다. 1725년부터 시작한 파리살롱은 정부 주최 미술전으로 당대 유럽 최고의 미술 행사였다. 그는 인물의 옷과 장식물을 아름답게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 세계까지 정확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였다.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도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면 그 인물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
카를 라슨(1849~1919)은 스웨덴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작가다. 특히 그의 작품 ‘큰 버치나무 아래서의 아침식사(Breakfast under the Big Birch·1896)’는 행복한 가족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스웨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생활용품 등에 많이 패러디되고 있다. 크기는 32×43cm로 자그마한 수채화지만 그 속에 많은 것이 그려져 있고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집 뜰 버치나무 아래에 피크닉 테이블이 놓여 있고, 그곳에서 온 가족이 함께 아침식사를 한다. 라슨은 그림을 그리느라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그의 자리는 비어 있다. 강아지까지 함께 식사한다. 어린 막내딸은 그림 그리는 아빠를 쳐다본다. 그림 그 자체가 가족의 행복이다. 라슨은 가족을 모델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라슨은 매우 곤궁한 유년기를 보냈다. 스톡홀름 최악의 빈민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자서전에서 “몸과 영혼이 황폐해졌다”고 표현했다. 막노동꾼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에 분노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라슨은 아버지로부터 언어 학대를 받았다. 어머니가 온종일 세탁부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라슨은 열세 살 때 빈민학교 선생의 주선으로 왕립예술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유년기의 상처 때문에 어려운 적응 시기를 거쳤으나 점점 두각을 나타냈고, 나중에는 누드 드로잉 대회에서 1등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한동안 잡지와 신문에 캐리커처를 그리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가족을 부양할 정도의 수입이 생겼다.
스물넷(1877)의 라슨은 파리로 건너가지만 거기서는 좌절의 시간을 보낸다. 당시 파리는 인상주의라는 미술 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였는데,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급진적인 변화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밀레 등이 주도하는 예술촌인 바르비종에도 머물러보았으나 자신의 취향은 아니었다. 대신 파리 교외에 스웨덴 화가들이 만든 예술촌에서 그들과 함께 작업했다. 거기서 부인 카린(Karin Bergoo)을 만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라슨은 그동안의 유화 작업을 접고 유화 기법과는 아주 다른 수채화에 몰두했고, 많은 명작을 남긴다. 부인 카린은 인테리어 디자이너였는데, 라슨 작품 속에 나오는 인테리어는 카린의 작품이다.
라슨은 독일에서 출간한 화집이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경제적으로도 크게 여유가 생겼다. 이 화집은 2001년까지 40판 이상을 찍었다.
라슨은 가족의 행복을 매우 중요시했다. 가족과 집은 오랜 시간 작품의 소재였다. 이들 작품에는 가족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벽 하나가 뭐 길래

Carl Larsson, ‘Midwinter’s Sacrifice’, 1915
라슨은 국립박물관 중앙 홀의 모든 벽 중 한쪽 벽만 빼고 모두 장식하도록 의뢰받았다. 그러나 라슨은 의뢰에서 제외된 그 벽도 자신이 맡기를 원했다. 그는 그 벽 옆에 걸린 자신의 작품 ‘Gustav Vasa enters Stockholm 1523’과 완벽하게 대비될 수 있는 또 하나의 대작을 구상했다. 그것이 ‘Midvinterblot’이다.
‘Midvinterblot’은 1915년 완성됐지만 화단의 파벌 싸움으로 국립미술관에 걸리지 못했다. 여러 번의 스케치를 거쳤지만 여기저기서 트집을 잡았고, 그림의 전체 구성에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라슨은 결국 이 작품이 벽에 걸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벽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고, 그림은 다른 곳에 보관되었다.
1983년에야 이 그림은 스톡홀름에서 전시될 기회를 갖게 됐다. 전시 후 그림의 소유자는 국립미술관이 본래 계획됐던 그 벽에 이 작품을 건다면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제안하지만 미술관은 거절한다. 결국 그림은 1987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 출품되고 일본인 컬렉터가 낙찰받았다. 버블경제기 일본이 전 세계 명화를 휩쓸어 갈 때의 일이다.
1992년 국립미술관은 설립 2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카를 라슨에게 헌정하는 전시회를 개최한다. 이때 일본인 소유자가 이 그림을 미술관에 대여했고, 미술관은 문제의 그 벽에 그림을 전시했다. 30만 명의 관람객이 찾아와 그림을 감상했고, 스웨덴 국민 사이에 새로운 여론이 조성됐다. 국립미술관은 1997년 일본인 컬렉터로부터 이 그림을 구입해 라슨이 원했던 바로 그 자리에 항구적으로 설치했다.
미국 대통령을 그린 스웨덴 화가

Anders Zorn, ‘Midsummer Dance’, 1897
조른은 15세부터 스톡홀름의 왕립예술학교에 다녔는데, 선생들이 모두 그의 재능에 감탄했다고 한다. 스톡홀름 상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초상화 작가가 됐고, 그 인연으로 부자 유대인 상인의 사위가 되었다. 그의 아내도 예술문화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조른은 초상화 작가로 성공하면서 부를 쌓았고, 그 덕에 스웨덴 내에서는 물론 외국 여행을 다니며 좋은 작품을 수집했다. 조른 부부는 자신들의 수집품을 전부 국가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국립미술관은 당연히 조른의 작품을 많이 소장한다. 그중 ‘한여름의 춤(Midsummer Dance)’은 아주 토속적인 그림이다. 한여름 밤의 축제에서 마을 사람들이 춤을 추면서 노는 풍경을 담았다. 스웨덴의 여름밤은 자정까지 대낮인 백야다.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어우러져 노는 것은 평화와 행복 그 자체다.
최정표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한국 재벌사 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前 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