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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로 풀어쓴 현대사

펑펑 오일머니 종착역은 중동 아닌 美·유럽

세계경제 뒤흔든 오일쇼크 ‘흑역사’

  • 조인직 | 대우증권 동경지점장

펑펑 오일머니 종착역은 중동 아닌 美·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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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쇼크 음모론

걸프전과 중동 분쟁으로 인해 유가 변동성이 커지는 것을 두고 미국 오일 메이저와 산유국 부자들 간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음모론이 한때 인터넷에 확산됐다. 결과론으로만 보자면 그럴듯한 주장이다. 원유 가격 인상으로 막대한 돈을 챙긴 산유국 오일머니의 종착역(혹은 주차장)은 결국 미국 금융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배럴당 OO리얄(사우디 화폐)’ 이라고 하지 않고 ‘OO달러’라고 하는 걸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산유국들이 아무리 달러로 돈을 많이 벌어도 자국에는 그만한 자금 수요가 없기 때문에 그 달러를 돌려서 추가로 운용수익을 낼 안정적인 예금처는 당시 미국 은행만한 곳이 없었다. 요즘처럼 자유화한 세계 자본시장에서 아부다비투자청(ADIA) 같은 정부계 국부펀드(SWF·Sovereign Wealth Fund)가 알아서 해외 각국에 투자하며 자산 운용을 하던 시대가 아니었기에 주요 글로벌 대출처를 꿰고 있던 미국 은행의 위상이 막강하던 시절이었다.

또한 미국 본토 은행은 아니더라도 유럽계 은행에 달러를 예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로 인해 이른바 ‘유로 달러 시장’도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오일머니가 넘쳐난 미국 은행들이 주시한 곳은 한창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며 개발투자자금을 구하고 있던 중남미와 동유럽, 아시아 지역이었다. 미국 은행과 유로 달러 시장 자금은 융자 혹은 유로본드 등의 증권화 상품을 통해 개발도상국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국, 유럽, 일본의 주요 은행들이 대상 국가나 프로젝트의 리스크를 낮추려고 공동 협조 융자를 일으키는 신디케이트론(Syndicate Loan)도 이 무렵 본격적으로 태동했다.



이들 오일머니, 오일달러가 가장 강력한 번뇌의 씨앗을 낳은 곳은 지금도 누적 국가 부채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중남미 지역이다. 수출보다는 투자를 받아 개발하는 대신, 각종 소비재 등은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체제가 많았다. 처음엔 달러를 싸게 공급받다가 종내에는 미국이 출구전략을 가동하자 대출금리가 상승, 부채 이자를 갚지 못해 디폴트(Default · 채무불이행)를 선언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채무국 처지에서는 고금리와 더불어 고유가에 따른 에너지 비용 상승, 이로 인한 무역수지 악화, 외화준비금 감소 등이 겹치게 된다. 양적완화 종료에 맞춰 올해 하반기로 예상되는 미국의 금리 상승 때문에 벌써부터 세계의 많은 유동자금이 ‘떨고’ 있는데, 40여 년 전에도 비슷한 패턴이 발생한 것이다.

무너진 ‘브라질의 기적’

요즘은 ‘신흥국(Emerging Countries)’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1970~80년대에는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ies)’이나 ‘발전도상국(Less Developed Countries)’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경제 우등생 국가가 많았다. 이들 중엔 한강의 기적만큼이나 급성장한 국가들도 있지만, 두 차례의 오일쇼크 및 이에 따른 부산물인 ‘잉여 달러’를 제어하는 미국의 금융정책에 휘둘리면서 대부분 몰락했다. 한국처럼 50년 이상 ‘중단 없는 전진’을 한 국가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브릭스(BRICs)의 대표 국가인 브라질은 원래 1968~73년 ‘브라질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연평균 두 자릿수대의 경이적인 성장률을 시현했다. 수출은 19억 달러에서 62억 달러로 늘었고, 외화준비금은 2억5000만 달러에서 64억 달러로 26배나 증가했다. 같은 기간 대외채무가 38억 달러에서 125억 달러로 늘었지만, 이 같은 외화준비금 여력에 힘입어 해외 은행들이 평가한 신용도는 훨씬 높았다.

브라질 경제 역시 자원무역 외에는 외자를 투자받아 자동차나 가전 등 내구재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내수형 경제’를 통해 몸집을 불려나갔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 밀려든 오일머니 차관은 한번 더 경제성장을 펌프질할 수 있는 마중물로 보였다. 실제로 1974~78년 5년간 연평균 8%대 경제성장률을 유지했다. 문제는 이 기간 동안 대외채무가 435억 달러로 3배 이상 치솟은 것. 결국 1979년 2차 오일쇼크 이후 수입물가가 폭등한 데 이어, 미국 FRB에서 단기금리를 20% 수준까지 인상하자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1978년 27억 달러에 불과하던 이자 지출이 1982년에는 4배가 넘는 113억 달러로 팽창했다.

결국 당시 중남미 발전도상국들의 롤모델이던 브라질은 1983년 디폴트를 선언하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신규 차입을 받는 한편, 국제은행단과 기존 채무에 대한 경감 및 재조정(rescheduling)을 요청하게 된다. 물론 브라질보다 한발 앞서 1980년에는 스리랑카·볼리비아·페루, 1981년에는 폴란드·루마니아·중앙아프리카공화국, 1982년에는 멕시코·아르헨티나·에콰도르·나이지리아·터키가 디폴트 선언을 했다. 그리고 1983년에는 브라질 외에도 칠레, 파나마, 필리핀, 모로코, 잠비아,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이 비슷한 길을 따랐다.

OPEC 국가들이 벌어들이는 오일달러의 존재감은 1980년대부터는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다.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이 아니더라도, 오일쇼크에서 파생된 교훈을 체득한 선진 경제권에서 아랍권의 자원민족주의에 맞설 수 있는 대체에너지 개발 및 위험회피 금융기법 등을 서둘러 도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2015년 현재 오일달러 총액은 약 3조6000억 달러로 추산되는데, 이는 중국의 외환보유고(3조8000억 달러) 및 전 세계 헤지펀드(3조 달러) 등과 비견되는 규모다.

유가는 숨 고르기 중

다만 OPEC와 ‘맞장’ 뜰 수 있는 선진국이나 대형 자본이 아닌, 개별 국가로 들어가면 사안은 1970년대 오일쇼크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막대한 유전을 보유한 OPEC이 미국 오일 메이저 세력에 비교우위의 자신감을 느끼는 순간 다시 유가 상승은 이어질 것이고, 비산유국의 물가 상승 및 경상수지 적자 등도 뒤따를 것이다. 신흥국의 부채는 다시 한 번 악화할 것이고, 디폴트를 막기 위한 미국 중심의 국제기구 개입도 불가피하다. 그리스, 포르투갈 등 남유럽의 재정건전성 취약 국가 중심으로 신용도 하락 및 국채 투매 현상이 벌어지면 또 다른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오일은 죽지 않았다. 다만 가격 하락을 통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신동아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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