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사욕에 찌든 ‘배신의 정치’를 경계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와 망국(亡國)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입력2015-07-22 10: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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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정치가 혼돈에 빠져들었다. 여당은 친박과 비박으로, 야당은 친노와 비노로 갈려 권력투쟁에 혈안이다. 진정한 리더가 안 보이는 이런 시기에 거짓과 권모술수는 국가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사욕에 찌든 ‘배신의 정치’를 경계한다
    지난 연말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사기(史記)’에 나오는 ‘지록위마(指鹿爲馬)’를 선정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진실과 거짓을 제멋대로 조작하고 속이는 언행을 비유한 말이다. 전문가들은 “2014년은 수많은 사슴이 말로 바뀐 한 해였다”며 “온갖 거짓이 진실인 양 우리 사회를 강타했다. 사회 어느 구석에서도 말의 진짜 모습은 볼 수 없었다”고 선정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세월호 참사, 대통령 주변 인물의 국정 개입 의혹 등을 보면 정부가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2000년 넘게 인구에 회자돼왔을 만큼 정치적 함의가 큰 ‘지록위마’가 이 시대에 새삼 등장한 이유는 뭘까. 이 고사성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秦)나라의 멸망과 관계가 깊다. 진나라는 통일 후 15년 만에 망했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은 지 불과 5년 만이다. 진나라가 이렇게 단명한 데는 진시황의 뒤를 이은 그의 작은아들 호해(胡亥 · 기원전 230~207)의 무능함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사람 많이 죽이면 ‘충신’

    호해가 큰아들을 제치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조고(趙高)라는 환관 덕분이다. 호해는 어려서부터 중거부령(中車府令) 벼슬에 있던 조고에게서 형법을 배웠다. 진시황 37년(기원전 210) 진시황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조고는 승상 이사(李斯)를 설득해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하고, 호해를 2세 황제 자리에 앉혔다. 또한 조작한 유서를 내세워, 진시황이 죽기 전 후계자로 지목한 큰아들 부소(扶蘇)를 자살하도록 압박했다.

    조고 덕분에 즉위한 호해는 자식이 없는 진시황의 후궁 모두 진시황을 따라 죽게 하는 한편 여산(驪山)에서 진행 중이던 아버지 진시황의 무덤 공사를 재촉했다. 호해는 여러 왕자와 대신들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조고와 짜고 몰래 법률을 바꿔 왕자와 공주 20여 명, 진시황의 측근 대신, 그리고 자살한 큰아들 부소의 측근인 몽염(蒙恬), 몽의(蒙毅) 형제까지 모조리 죽였다. 이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고는 호해를 부추겨 진시황 때의 무리한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게 했다. 진시황릉과 아방궁(阿房宮) 공사를 계속 추진했고, 건장한 병졸 5만 명을 징발해 함양을 지키게 하는 한편 활쏘기와 군견, 군마, 금수를 조련케 했다. 그러나 먹어야 할 사람은 많은데 식량이 모자라 각 군현에 식량과 사료를 징발해 보급토록 하니 세금과 부역의 부담은 점점 심해졌다.

    호해 재임 직후인 기원전 209년 7월, 변방 수비를 위한 인원 징발이 극심해진 와중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봉기가 터졌다. ‘반진(反秦)투쟁’은 순식간에 관동 지역을 석권했다.

    그러나 호해의 정책은 더욱 가혹해졌다. 세금을 많이 거두는 신하를 유능한 관리로, 사람을 많이 죽이는 자를 충신으로 여겼다. 형벌을 받은 자가 길거리 곳곳에 널브러졌고, 저잣거리엔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호해는 간신 조고의 헛된 말을 듣고는 좌승상 이사를 죽이고 우승상 풍거질(馮去疾)과 장군 풍겁(馮劫)을 핍박해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조고를 중승상에 앉혀 조정을 멋대로 주무르게 하니 민심은 떠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민심 이반과 반란에 관한 보고서가 잇따라 올라왔지만 호해는 철저하게 무시했다. 심각한 보고를 올리면 벌을 줬고, 거짓으로 반란을 진압했다는 보고를 올린 자에게는 상을 내렸다. 관리들은 호해에 입맛에 맞는 보고만 올렸다. 그 결과 호해는 나라에 관한 중요한 정보와는 철저하게 차단됐다.

    사욕에 찌든 ‘배신의 정치’를 경계한다


    망국 재촉한 정치 술수

    천하가 통일된 뒤 불과 10여 년 만에 제국의 기반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팎으로 위기를 느낀 조고는 호해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다음 기회를 봐서 호해마저 제거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 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조고가 꾸민 사건이 바로 저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다. 당시 상황을 사마천은 이렇게 전한다.



    조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 먼저 시험을 해보기로 하고는 사슴을 갖고 와서 2세(호해)에게 바치며 “말입니다”라고 했다. 2세는 웃으며 “승상이 잘못 안 것 아니오?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군”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신하들 일부는 아무 말이 없었고, 일부는 말이라 하며 조고의 비위를 맞췄고, 일부는 사슴이라 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몰래 죄를 씌워 처벌했다. 이후 신하들 모두가 조고를 겁냈다. (…) 함곡관 동쪽 대부분이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후들에게 호응했고, 제후들은 자신들의 군대를 이끌고 서쪽을 향해 밀려들었다. 패공이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무관을 함락시킨 다음 사람을 보내 조고와 사사로이 접촉했다. 조고는 2세가 노하여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겁이 나서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진시황본기’

    ‘지록위마’라는 정치적 술수를 통해 조정 대신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조고였지만, 점점 더 조여드는 봉기군의 위세에 불안했다. 사마천은 ‘지록위마’에 이어 봉기군들의 기세에 눌린 조고가 패공(유방)과 접촉해 모종의 협상을 벌였다고 기록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전후맥락으로 보아 조고 자신의 신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접촉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호해 즉위 3년(기원전 207년) 7월, 장한(章邯)과 왕리(王離)가 이끄는 진나라의 주력군이 항우와 유방에게 투항했고 봉기군은 무관(武關)을 공격했다. 이에 조고는 자신의 죄가 탄로나 처벌을 받을까봐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사위 함양령 염락(閻樂)과 함께 모의해 호해가 망이궁(望夷宮)에 나간 틈을 타서 거짓으로 조서를 꾸미고 정변을 일으킨 뒤 궁을 포위하고 호해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호해의 형(부소로 추정)의 아들인 자영(子영)을 후임으로 앉혔다.

    정통성 없는 정권의 국력 낭비

    자영은 즉위하자마자 조고를 없앴으나 멸망의 길로 치닫기 시작한 진의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영은 결국 함양으로 진격해온 유방에게 나라를 내놓고 항복한다. 기원전 206년, 통일제국 진나라 15년차였다.

    최초의 통일제국이 환관 조고의 손에서 농락당하다가 불과 15년, 호해 즉위 5년 만에 무너져 내리는 과정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조고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인 ‘지록위마’ 장면은 어처구니없이 어설픈 ‘정치 쇼’로 보인다. 진시황의 유서까지 조작하고 치밀한 논리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사를 설득한 조고와 ‘지록위마’라는 유치한 정치 게임을 벌인 조고가 정말 같은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순시 도중 사구(沙丘)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통일제국의 운명이 느닷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지척에서 진시황을 모시던 조고는 진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채 비밀공작에 착수했다. 조고는 호해와 이사를 설득해 유서를 조작했다. 대권 장악에 걸림돌이 될 태자 부소와 군부의 명망가 몽염에게 자살을 명하는 공문을 띄우고, 서둘러 함양으로 돌아와 진시황의 죽음을 알렸으며, 작은아들 호해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공개했다. 이렇게 해서 통일제국의 전권은 일단 호해, 조고, 이사 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

    쿠데타는 성공한 듯했지만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우선 부소와 몽염을 죽이고 호해를 즉위케 하라는 진시황의 유서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의혹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호해와 조고는 진시황 시절의 대신과 혈족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해 입을 막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에 대한 억압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진시황 사후 중단된 아방궁 축조를 재개한 것도 이런 내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보려는 졸렬한 시도였다. 국력 낭비가 초래된 것은 물론이다. 이는 정권의 정통성이 의심을 받으면 흔히 나타나는 반응이었고, 이에 따라 호해 정권은 더 큰 의심을 사게 됐다.

    욕심의 크기, 권력의 크기

    즉위 이듬해부터 터지기 시작한 각지의 봉기군을 대처할 능력도 문제였다. 진승의 봉기를 진압하고 항량(項梁, 항우(項羽)의 숙부)을 정도(定陶) 전투에서 사살하는 등 제국의 군대는 여전히 막강했다. 하지만 명망 높은 장수를 여럿 잃은 진나라 군대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호해와 조고가 이 동요를 수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강압적인 명령에만 의존하다보니 결국 군부가 제국의 통제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통일제국의 시스템과 정책 입안자였던 당대 최고의 경륜가 이사와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하지 못하는 우도 범했다. 조고는 명망가 몽염과의 경쟁관계를 자극해 이사를 쿠데타에 동참시키기는 했지만, 이사의 경륜을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꼭두각시 호해를 이용해 이사를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어냈다. 부귀영화에 목을 맨 출세 지상주의자 이사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호해에게 여러 차례 문제점을 지적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고에 의해 차단당했다. 이런 이사를 조고가 살려둘 리 만무했다.

    사욕에 찌든 ‘배신의 정치’를 경계한다


    사욕에 찌든 ‘배신의 정치’를 경계한다
    더 크고 심각한 문제는 절대 황제 진시황이 남긴 통일제국 그 자체였다. 그 규모, 즉 통치 영역의 확대에 따른 통치 방식의 획기적 전환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전례가 없는 광활한 통치 영역과 새로운 시스템을 통치는커녕 통제할 역량도 없는 인물들이었다.

    진시황이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단행한 각종 통일정책과 정치 · 경제 · 군사 · 문화를 아우르는 교통망 정비가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작용했다. 단적인 예로 진시황이 닦아놓은 도로망은 봉기군이 진의 수도인 함양으로 진격하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루트가 됐다.

    진시황의 거대한 야심으로 형성된 제국, 갑자기 만들어진 각종 통일정책과 시스템을 따라잡기에 호해와 조고의 역량은 턱없이 모자랐다. 게다가 통일 이전의 습속에 길든 백성들의 ‘관성력(慣性力)’이 새로운 통일제국을 향한 ‘향심력(向心力)’으로 전환되기도 전에 제국의 선장이 쓰러졌고, 후임 선장은 전혀 신뢰감을 주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통일제국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이심력(離心力)’이 ‘저항력(抵抗力)’으로 바뀌어 격렬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제국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에 이르렀다.

    조고는 정략과 정치적 술수에는 능했을지 몰라도 권력관계를 조절하는 균형감각은 갖추지 못했다. 정적을 제거할 줄만 알았지 이용할 줄은 몰랐다. 최고권력자를 자신의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줄만 알았지 제국과 백성을 위해 활용할 줄은 몰랐다.

    호해는 현장 경험이 거의 없는 평범한 왕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보통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권력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조고가 던진 무한권력을 덥석 떠안았다. 준비되지 않은 리더였고, 리더십이랄 것도 없었다. 욕심만으론 감당할 수 없는 크기의 제국을 이끌 ‘조타수’란 어불성설이었다.

    권력의 크기와 통치 규모의 크기는 결코 정비례하지 않는다. 더욱이 욕심의 크기와 권력의 크기가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 욕심의 크기와 통치 규모의 크기가 비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권력을 뒷받침하는 리더십의 질적 심화 없이는 크기를 감당할 수 없다. 과도한 부담,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 영역을 호해는 제대로 인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력자, 이른바 측근이 필요했다. 호해는 갈수록 조고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규모의 정치 구역과 새로운 시스템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과도 통한다. 형제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과 이사의 제거는 그 단적인 예다. 신하들과의 소통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당연했다. 거대한 통일제국을 이끈 아버지 진시황은 호해에게는 오를 수 없는 산이었다. 그래서 호해는 아버지를 극복하는 대신 통치 스타일을 그저 원숭이처럼 흉내 냈다.

    문제는 그나마 이 스타일을 유지할 만한 최소한의 통치 철학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칼을 쥐고 있다고 다 무사(武士)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작정 칼을 휘두르는 자는 무사가 아니라 무부(武夫)에 지나지 않는다. 이사와 장군 풍겁 등이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의 와중에 엄청난 인력과 재정이 드는 아방궁 축조를 중지해달라고 건의하자 호해는 이렇게 답했다.

    천하를 차지한 고귀한 사람은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군주는 엄하게 법령을 밝혀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나쁜 짓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다. (…) 지금 짐이 즉위한 이후로 2년 동안 도적이 일어났는데도 너희들은 막지 못하였다. 게다가 선제의 업적마저 내버리려 하니, 이렇게 해서는 위로는 선제에 보답할 수 없고 아래로는 짐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러고도 무엇을 믿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단 말인가.

    통치의 본질에 無知

    진시황이 남긴 통일제국은 그때 막 개혁의 시작 단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통일정책은 전례가 없는 획기적인 정책들이었고, 방대한 교통망은 통일된 각 지역 간의 전방위 교류를 위한 최상의 네트워크였다. 진시황의 정책이 시간을 갖고 백성들로부터 당위성을 인정받고 공감대를 끌어냈더라면 제국의 향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문제는 역량과 경륜이 전혀 뒷받침되지 않은 호해와 조고 따위가 제국을 떠맡았다는 것이다.

    통치 영역이 확대되거나 새로운 시스템이 들어서면 그에 따른 보다 더 정교한 시스템 장착, 리더의 무분별한 결정을 저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갖추는 일이 급선무다. 2세의 자질이 떨어질 때는 더욱 그렇다.

    진시황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불로장생에 대한 지나친 욕망과 죽음이란 단어조차 혐오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집착은 결국 후계자 문제를 미리 정리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이어졌다. 진시황이 조금만 일찍 후계 문제를 대외적으로 공표했다면 조고는 쿠데타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선 진 제국 조기 퇴장의 궁극적 책임은 진시황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물론 능력 밖의 영역을 탐한 조고, 호해, 이사의 책임 또한 진시황 못지 않다. 통치의 방식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통치의 본질을 인지하는 최소한의 자질마저 이들은 갖추지 못했다. 어쩌면 이 역시 전혀 새로운 제국의 시스템이 이들의 자질을 질식시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패한 정치인들이나 사이비 언론들은 흔히 ‘지록위마’와 같은 행태로 국민을 편 가르고 상식을 뒤틀고 판단력을 흐트러뜨리려 한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의미는 그런 사악한 의도를 비판하는 역사적 차원에 놓여 있다. 나아가 고의로 진상을 가리고 시시비비를 뒤바꾸는 행태, 자기 편과 그렇지 않은 편을 확인하려는 비열한 술수를 꼬집는다. 지금 우리 정치가들과 정치판이 벌이고 있는 자기기만적 정치 쇼가 ‘지록위마’와 하등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기로에 선 정치

    큰 정치가들이 사라지고 사욕에 찌든 지역 패권주의자들이 펼치는 ‘배신의 정치’만 넘쳐나는 우리 정치판의 한계가 이제 임계점에 다다른 느낌이다. ‘지록위마’의 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벌써 혹자는 최고통치자에 대한 ‘탄핵’을 염두에 둔 발언을 쏟아내고, 신당 창당을 비롯한 정계 개편 바람이 꿈틀거린다.

    조고가 연출한 ‘지록위마’가 한 나라의 멸망을 암시하는 정치 쇼였다면, 지금 그리고 앞으로 수도 없이 벌어지고 벌어질 우리 정치판의 ‘지록위마’는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 국민은 저들이 말이라고 가리키는 사슴의 실체를 똑똑히 봐야 한다. 자칫 저들의 술수에 말려들면 민심은 찢기고 국론은 분열될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국가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다. 우리 정치는 지금 기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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