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김정은 집권 후 北 고위급 망명 全無

‘평양판 엑소더스’의 진실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7-23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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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간급 간부 ‘최소 4명’ 한국行 수준
    • 황장엽·이한영급 ‘망명공작’ 이뤄져야
    • ‘망명자’ 아닌 ‘유령’ 갖고 분석한 격
    김정은 집권 후 北 고위급 망명 全無
    2009년 탈북한 K씨는 북한 노동당 양강도당 간부로 일했다. 양강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제1비서. 원래 성의 이니셜이 S로 시작하는데, 한국에서는 K로 시작되는 새 이름을 쓴다.

    5월 11일 사석에서 만난 그는 노동당 관료 출신답게 반듯했다. 아는 것은 안다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했다. 할 말, 못할 말을 구분했다. 한국의 한 예비역 장성이 그를 소개하면서 고위급 탈북자라고 밝혔으나 중앙당을 기준으로 삼으면 ‘중간급 간부’다. K씨는 이렇게 말했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돼 찬양 노래 ‘발걸음’을 교육할 때 탈북했다. 김정은의 얼굴을 알지는 못할 때다. 북한에서 고위 간부가 되려면 고되게 일해야 한다. 직급이 높아질수록 긴장이 더욱 심해진다. 군에 복무할 때 노동당에 입당해 승승장구했다. 북한 정권이 오래 못 간다고 봐 탈북했다.”

    K씨도 ‘고되게’ 일했으나 당으로부터 비판받는 일에 휘말렸다. 북한 당국은 탈출한 K씨를 ○○죄 등으로 수배했으나 그는 한국 망명에 성공했다. K씨처럼 젊은 시절부터 출세 가도를 달린 인물이 탈북해 한국에 망명하는 일은 흔치 않다.

    L씨는 김정일 집권 시기에 마지막으로 한국에 망명한 노동당 출신 인사다. 2011년 7월 북한을 탈출해 두 달 뒤 한국에 들어왔다. 그해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하면서 김정은 집권이 시작됐다. L씨처럼 북한에서 나름대로 잘나가던 이들은 ‘평양에서 온 사람’이라는 데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L씨는 지난 1월 2일 이렇게 말했다.



    “평양에서 온 사람 얼마나 만나봤어요? 노동당 출신 망명 인사가 아닌 사람이 하는 북한 분석은 웬만하면 관심도 갖지 않는 게 좋아요. 한국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얘기만 지어내서 하거든요.”

    탈북자 수가 2만7000명을 넘어섰으나 노동당에서 일하다 망명한 이는 극소수에 그친다. 탈북자 대부분은 함경도를 비롯한 변방에서 탈출한 ‘생계형 망명자’다.

    北 39호실 ‘과장’ 입국

    7월 2~9일 북한 고위급 인사가 탈출해 한국에 망명했다는 보도가 쏟아져 나왔다. ‘고위급 간부’ ‘인민군 장성’이 탈북해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통치자금을 관리하는 노동당 ‘39호실 부부장 3명’이 망명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7월 2일 한 일간지가 ‘김정은 공포 통치에 탈출 러시가 인다’고 보도하면서 망명설이 연거푸 터져 나온 것이다.

    잇따른 망명 보도만 보면 ‘평양판 엑소더스’가 벌어졌으며, 북한이 크게 흔들리는 것처럼 분석할 수밖에 없다. 사실이라면 분단 이후 전례 없는 역대급 망명 행렬이다. ‘불안정성’ ‘이상징후’ ‘붕괴조짐’이라는 해석이 과하지 않다. 노동당 핵심 중 하나인 39호실의 부부장 3명이 탈출했다면 1997년 황장엽 망명에 버금가는 일대 사건이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망명자’가 아닌 ‘유령’을 붙잡고 북한의 현 상황을 들여다보는 형국이다. 김정은이 집권한 후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망명한 ‘고위급 인사’는 아직껏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정일 집권 시기 군부 실력자 중 하나인 박재경 대장 망명설이 돌더니 박승원 상장의 이름도 등장했다. 그러나 통일부 당국자는 7월 9일 “고위 장성 탈북과 박재경, 박승원 망명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공식으로 확인했다. 한 인사는 “북한군 총정치국 부국장을 지낸 82세의 박재경이 탈북했다면 그것은 평양이 뒤집힐 일대 사건”이라고 말했다.

    부부장 3명이 서울에?

    지난해 말 북한을 탈출해 올해 한국에 망명한 39호실 출신 인사가 잇따른 망명설 보도의 실마리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인사의 이름은 이○○인데, 현재는 다른 이름을 사용한다. 아내, 자녀와 함께 한국으로 탈출했다. 그를 만난 복수의 인사는 “가져온 돈이 있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전했다.

    북한 노동당 출신 탈북자는 국정원 산하 연구기관에서 일하면서 한국에 정착하는 사례가 대부분인데, 이 인사는 기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서울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다보니 망명 사실이 밖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씨는 50대 후반으로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후 망명한 노동당 간부 중 고위직으로 분류되지만 ‘고위급 인사’라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노동당에서의 직급이 ‘과장’이기 때문이다. ‘중간급 간부’ 혹은 ‘중상급 간부’라는 표현이 적확해 보인다. 북한 노동당은 제1비서(김정은)-비서(부총리급)-부장(장관급으로 비서가 겸직하기도 함)-부부장(차관급으로 제1부부장을 두기도 함)-과장(실·국장급)-책임부원-부원 순서로 구성된다. 일부 언론은 ‘과장급’인 이씨를 부부장급으로 ‘과장해’ 보도했다.

    또 다른 39호실 망명설의 주인공은 윤○○ 씨다. 러시아에서 일하다 지난해 가족과 함께 사라졌다. 윤씨는 39호실 산하 조선대성은행의 러시아 극동지역 책임자로 일했다. 이른바 ‘혁명자금’ 500만 달러를 갖고 잠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수의 인사는 “윤씨가 한국에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윤씨는 앞서의 과장급 이씨보다 북한에서의 직급이 낮다.

    “노동당 39호실 부부장급 간부 3명이 국내에 들어와 있다”는 보도도 나왔는데, 39호실 과장 이씨와 39호실 산하 조선대성은행 윤씨의 사례가 확대·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혁명자금이라고 부르는 통치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의 부부장급 3명이 한국으로 망명했다면 공작기관으로서는 쾌거라고도 할 만큼 엄청난 일이다.

    “새삼스럽게 의미 부여하기엔…”

    북한 내각 소속으로 대외경제 관련 일을 하던 인사도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 인사는 내각의 국장급으로 노동당 직급으로는 과장급인데, 집안 배경이 상당히 좋은 것으로 알려진다. 핵심 기관 소속으로 해외에서 일하다 망명한 인사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소 4명의 중간급 간부가 한국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한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보이는 인사의 공통적 특징은 핵심 기관의 중간급 간부인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했으나 한국에 아직 들어오지 않은 인사를 포함하더라도 ‘평양판 엑소더스’가 벌어진다고 평가하기에는 시기상조인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 때 정보 당국에서 일한 인사는 “중간급 북한 간부 망명은 과거에도 꾸준히 이어졌다. 새삼스럽게 의미를 부여할 성격의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7월 3일 ‘신동아’와 만난 노동당 중간급 간부 출신 망명 인사는 “외부에 등장하지 않으면서 가져온 돈으로 풍요롭게 사는 망명 인사들도 있다”고 전했다.

    국정원은 5월 13일 현영철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총살 첩보를 공개하면서 김정은 집권 이후 처형된 간부급 인사가 2012년 3명, 2013년 30여 명, 2014년 31명, 올해 현재까지 8명으로 총 70여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공포정치 탓에 평양의 관료집단이 얼어붙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북한 고위급 인사의 ‘탈출 러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정보 당국의 망명공작 성과가 미미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한 정보 관계자는 “황장엽(노동당 비서), 이한영(김정일 처조카)급의 망명자가 나왔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망명공작이 더욱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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