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호

미국의 대영박물관 꿈꾼 ‘영국 양반’의 자존심

보스턴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입력2015-07-24 1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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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턴 미술관은 45만 점 이상의 소장품에 이미지 자료 35만 점이 넘는 세계 최대의 미술관 데이터베이스를 자랑한다.
    • 미국 주요 작품뿐만 아니라 유럽 인상파 작품, 일본의 회화와 도자기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이 예술의 보고(寶庫)는 영국 청교도 후손들의 자존심이다.
    미국의 대영박물관 꿈꾼 ‘영국 양반’의 자존심
    미국 동부 보스턴은 영국 청교도들이 만난(萬難)을 극복하며 대서양을 건너와 세운 ‘미국 속 영국 도시’다. 그런 만큼 보스턴 사람들은 자신이 ‘미국 상놈’이 아니고 ‘영국 양반’이라는 자존심을 뼛속 깊이 간직한다.

    이런 양반들이 일찍부터 미술관을 만들지 않았을 리 없다. 예술이야말로 양반의 놀이 문화이고 선진 시민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런던 대영박물관을 능가하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까. 보스턴의 이러한 선민의식이 낳은 것이 바로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이다.

    재정난 극복하려 소장품 대여 자구책

    보스턴 미술관은 미국 최고라 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같은 해에 건립됐다. 1870년 미술관 법인이 정식 발족됐고, 미국 독립 100주년이 되는 1876년에 개관했다. 첫 건물은 보스턴 명소 코플리 광장(Copley Square)에 벽돌로 화려하게 지어졌다. 그후 30여 년이 지난 1907년 헌팅턴 애비뉴(Huntington Avenue)의 현재 위치에 새 건물을 짓는 미술관 이전 계획이 마련됐다.

    이전 계획에 따라 당시 최고의 건축가 가이 로웰(Guy Lowell)이 100년 앞을 내다보는 마스터플랜을 설계했는데, 그 플랜이란 대영박물관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리석으로 지은 거대한 궁궐 같은 건물이었다. 1909년 첫 공사가 끝나고 미술관은 새 건물로 이전했다. 이후 단계별로 추가 건물이 신축돼 현재와 같은 대규모 미술관이 됐다.



    보스턴 미술관은 45만 점 이상을 소장한 종합 미술관이다. 연간 방문객은 100만 명 이상. 미술관은 예술대학도 운영하고, 부속 도서관은 32만 권이 넘는 미술 관련 장서를 갖췄다. 또한 온라인으로 35만여 점 소장품 자료와 이미지를 공급해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관 데이터베이스(DB)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미술관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돈을 받고 소장품을 빌려준다. 예컨대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에 전시된 많은 명품은 1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보스턴 미술관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런 자체적인 수익이 있고, 기부금도 끊임없이 들어오기에 조만간 미술관 재정 상태가 호전될 것이라고 무디스 투자사(Moody′s Investors Service)는 평가한다.

    미국 부자들에게는 ‘philanthropist(자선사업가)’라는 명칭이 항상 따라붙는다. 돈 버는 이유가 자선사업을 하기 위해서라고 할 정도다. 미술관 설립이나 미술관에 대한 기부는 미국 부자들이 선호하는 자선사업의 주요 형태 중 하나다.

    미국의 터줏대감이라고 자부하는 보스턴 부자들 역시 보스턴 미술관을 그냥 두지 않았다. 공공 미술관이지만 많은 부자가 수많은 작품을 기증하고 돈을 기부했다. 미술관은 1915년 현재 건물의 2단계 공사를 완료하는데, 100만 달러가 넘는 공사비 전액을 보스턴 부호 로버트 에반스(Robert Evans)의 부인이 기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술관 가보지도 않고 기부

    미국의 대영박물관 꿈꾼 ‘영국 양반’의 자존심
    이보다 더 ‘화끈한’ 부자들도 있다. 역시 보스턴 거부인 카롤릭 부부다. 미국 작품 수집에 집착한 부부는 수집품을 세 차례에 걸쳐 대량으로 미술관에 기증했다. 1939년에는 18세기 미국 작품, 1945년엔 19세기 미국 회화, 그리고 1962년에는 19세기 미국의 수채화와 드로잉을 기증했다.

    카롤릭 부부와 보스턴 미술관의 인연은 부부 사이의 묘한 사랑에서 시작됐다. 직업 오페라 가수이면서 미술품 애호가이던 맥심 카롤릭(Maxim Karolik·1893~1963)은 보스턴 최고 부자 가문의 딸 마사(Martha Karolik·1858~1948)와 결혼했다. 마사는 미국 역사상 첫 번째 백만장자로 기록된 보스턴 거상의 증손녀로 그의 취미도 미술품과 골동품 수집이었다.

    마사는 맥심보다 35세나 많았다. 1928년 결혼할 때 신랑은 35세, 신부는 70세였다. 요즘 시각으로 봐도 이상한 결혼인데, 하물며 100년 전이야 어땠을까. 세인들의 입방아가 끊이지 않은 가운데 이들의 결혼생활은 마사가 90세로 별세할 때까지 20년 동안 지속됐다. 세인의 시선이야 어쨌건 부부는 서로 사랑했고, 미국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공유했다. 미국 작품을 수집하면서 보스턴 미술관의 자문을 구했고, 이렇게 수집한 작품들을 보스턴 미술관에 기증했다. 미술관 기증을 전제로 작품을 수집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뉴욕의 유명 변호사 포사이드 윅스(Forsyth Wickes)는 800점이 넘는 유럽 명품을 기증했다. 특기할 점은, 그가 한 번도 보스턴 미술관에 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 큐레이터의 설득을 흔쾌히 받아들여 기증을 결심했다고 한다. 보스턴 미술관의 진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윅스의 수집품은 미국의 10대 명(名)수집품에 든다. 그의 소장품은 1965년 보스턴 미술관으로 옮겨졌는데, 이를 전시하기 위해 미술관은 40년 만에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벌였다.

    테오도라 윌보라는 여인도 가본 적 없는 보스턴 미술관에 많은 작품과 70만 달러를 기부했다. 화가이자 하버드대 미술사 교수 덴먼 로스도 무려 1만1000여 점의 수집품을 기증했다. 로스의 기증품은 지역적으로 유럽 및 아시아를 망라할 뿐만 아니라, 회화에서 도자기까지 전 예술 영역을 아우른다. 로스는 보스턴 미술관 이사회 멤버로도 40년 이상 봉사했다.

    모네 팔아서 산 남성 누드

    미국의 대영박물관 꿈꾼 ‘영국 양반’의 자존심


    보스턴 부자들은 유럽 인상파 그림도 열성적으로 수집했다. 이 그림들 역시 보스턴 미술관으로 향했다. 보스턴 미술관이 그런대로 인상파 그림을 많이 소장할 수 있었던 이유다.

    보스턴 미술관엔 아시아 작품이 유난히 많다. 중국은 물론 한국 작품도 상당수다. 특히 일본 작품이 아주 많아, 일본 나고야에 보스턴 미술관의 자매 미술관까지 세웠을 정도다. 이런 ‘특수관계’에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1800년대 말 보스턴 출신의 세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가 근대화 정책을 자문하면서 일본의 다양한 예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훗날 모두 보스턴 미술관에 기증했다.

    동물학자 에드워드 모스는 1877년 해양동물을 조사하러 일본에 갔다가 일본 도자기에 매료돼 6000점이 넘는 도자기를 체계적으로 수집했다. 모스의 추천으로 1879년 일본으로 건너간 어니스트 페놀사도 도쿄대에서 철학과 정치학을 가르치며 일본 그림 2000여 점을 수집했다. 윌리엄 비겔로는 모스의 강의를 들은 인연으로 그와 함께 1882년 일본에 갔다. 비겔로는 일본에서 1만5000여 점의 그림, 조각, 기타 장식물을 수집했고 1만여 점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 드로잉, 삽화책 등도 사들였다.

    보스턴 미술관이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1882년,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의 수집품이 궁극적으로는 보스턴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리고 1890년 미술관에 공간이 마련되자 일본 예술품을 모두 미술관에 기증했다.

    인상파 화가들이 그린 여자 누드는 많다. 그러나 남자 누드는 극히 드물다. 당시에는 남성의 육체를 화폭에 담는 것이 일반적인 도덕률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구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는 목욕을 마치고 타월로 등을 닦고 있는 근육미 넘치는 남성 누드를 대담하게 그렸다. ‘목욕실 남자(Man at His Bath)’다. 뒷모습이긴 해도 남성 누드의 진가가 한껏 발휘됐다.

    1884년 카유보트는 이 그림을 벨기에 브뤼셀에 전시했는데, 남자 누드에 대한 거부감이 거세 철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은 카유보트가 죽은 뒤 그의 상속자들에게 넘겨졌다가 1967년 스위스의 한 개인 수집가에게 팔렸다. 보스턴 미술관은 이 그림을 빌려와 전시했는데, 소장하고 싶은 욕망이 간절했다. 하지만 살 돈이 없었다. 남자 누드 그림을 사라며 돈을 기부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결단을 내렸다. 다른 그림들을 팔기로 한 것. 이런 방식은 다른 미술관들도 가끔씩 구사한다. 대어를 건지고자 ‘송사리’ 몇을 포기하는 것이다. 미술관은 소품 8개를 팔기로 했다. 그런데 그 소품이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리, 고갱 등 인상파 최고 작가의 작품으로 독지가들로부터 기증받은 것들이었다. 당연히 비판이 거셌다. 이들이 카유보트보다 더 유명한 작가들인 데다 기증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목욕실 남자’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논란 속에서 미술관은 2011년 11월 소더비 경매에서 8점을 팔아 2200만여 달러를 마련했다. 그리고 1500만 달러 이상을 지불하고 카유보트의 그림을 사들였다. ‘목욕실 남자’는 보스턴 미술관이 확보한 첫 인상파 누드 작품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카유보트는 파리의 상류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변호사이자 엔지니어였을 정도로 재능이 많았다.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도 상속받았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한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본격적으로 그림에 입문해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했다. 1876년 2회 인상파전 때 8점의 그림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

    그는 34세에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정원 가꾸는 일과 요트 경기 등에 몰입했다. 예술, 문학, 철학, 정치학 등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결혼은 하지 않고 11세 아래 하층계급의 여자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녀에게 많은 재산을 남기고 45세의 짧은 생을 마쳤다.

    카유보트는 오랫동안 화가로서보다는 예술가 후원자로 더 많이 기억됐다. 1950년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그의 작품을 팔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사망한 지 70년이 지나고서야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예술적 재능을 재평가했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는 보스턴 미술관의 대표 소장 작품 중 하나다. 1897년 타이티에서 그린 대작(139×375cm)으로, 고갱은 그림 왼쪽 위에 이 세 가지 질문을 불어로 직접 써넣었다. 고갱은 유년 시절 가톨릭 학교에서 선생으로부터 이 질문을 들었다고 한다.

    고갱은 1891년 프랑스령의 남태평양 타이티 섬으로 건너갔다. 이 그림을 그린 1897년경은 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시절이었다. 그해 사랑하는 딸이 죽었고 빚에도 허덕였다. 자살 시도도 여러 번 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철학적 사상에 빠져들면서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작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인생의 세 단계가 묘사됐다. 맨 오른쪽 세 여인과 한 아이는 인생의 시작을 나타낸다. 중간에는 어른들의 일상생활을 그렸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다. 맨 왼쪽에는 종착역에 도달해가는 인생 여정을 나타냈다. 이 그림은 후기 인상파로 나아가는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고갱은 1898년 이 그림을 파리로 보냈고, 미술상 볼라르의 손에 들어갔다. 그림을 공개한 전시는 성공적이었고, 볼라르는 1901년 2500프랑(2000년 가치로 1만 달러)에 한 수집가에게 팔아넘겼다. 이후 이 그림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1936년 뉴욕의 한 화랑에 입수됐고, 바로 그해 보스턴 미술관이 이 그림을 사들였다.

    미국의 대영박물관 꿈꾼 ‘영국 양반’의 자존심
    못다 이룬 사랑, 누드화로 남다

    미국의 대영박물관 꿈꾼 ‘영국 양반’의 자존심
    보스턴 미술관에는 또 한 점의 독특한 누드 작품이 있다. 한 쌍의 연인이 발가벗은 채 부둥켜안고 춤추는 그림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의 ‘누드 연인(Two Nudes(Lovers))’으로 그림 속 남녀는 화가와 그의 애인이다(하지만 코코슈카는 정작 표현주의 방식의 초상화 풍경으로 유명한 작가다).

    상대 여인은 오스트리아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 알마 말러. 코코슈카는 1913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빈에서 알마에 대한 사랑의 징표로 이 그림을 그렸다. 당시 빈은 두 사람의 스캔들로 꽤 떠들썩했는데, 그림에는 그런 사랑의 환희가 그대로 녹아 있다.

    알마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의 유명 화가였다. 알마는 피아노 작곡가로 성장했고, 그런 재능 덕인지 스물세 살인 1902년 당대 최고의 음악가 말러와 결혼했다. 말러는 알마보다 19세나 많았다. 알마는 타고난 미모와 활달한 성격으로 뭇 남성들을 사로잡으며 빈 사교계를 심심치 않게 했다. 화가, 음악가 등 많은 예술가가 그녀의 상대로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독일 종합미술학교 바우하우스를 만들고 교장까지 지낸 건축가 월터 그로피우스와의 염문도 유명하다.

    남편 말러가 1911년 심장병으로 사망한 이후 알마의 연애 상대가 바로 코코슈카였다. 1914년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코코슈카는 군에 징집돼 둘은 헤어지게 됐고, 알마는 이미 군에 가 있던 옛 애인 그로피우스와 재회하고 1915년 그와 결혼했다. 5년 후 이혼한 그녀는 이번엔 프라하 태생의 시인이자 작가 프란츠 베르펠과 동거하다 1929년 결혼했다. 프랑스에 살던 이 부부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베르펠이 유대인인 까닭에 1940년 미국으로 탈출,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미국의 대영박물관 꿈꾼 ‘영국 양반’의 자존심
    최정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저서 :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코코슈카는 한평생 알마를 흠모했다고 한다. 화가이자 시인이고 극작가이던 그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Allos Makar’라는 시 또한 남겼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으로 탈출해 그곳에서 오래 산 그는, 새 남편과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떠나버린 알마를 언제까지나 떠올리며 그리워했을까. 비록 그림만이라도 그녀가 있는 미국 땅에 있다는 사실이 코코슈카에게 위안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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