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호

윤채근 SF 소설

차원이동자(The Mover)_3

소설가 김시습, 고독한 영혼

  •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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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19-12-02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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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팩션 ‘고전환담’을 통해 ‘신동아’ 독자의 큰 사랑을 받은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들며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주>

    1

    김돈중의 목을 벤 정중부는 칼에 묻은 핏물을 시냇물에 흘려보냈다. 해 질 무렵의 급습이었지만 상대는 언제나처럼 간발의 차이로 현장을 벗어나버렸다. 빠르고 유연했다. 칼집에 검을 회수한 중부는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의 몸이 몇 차례 부르르 떨렸고 감악산에 어둠이 내렸다. 

    정중부에서 파동으로 전환된 추격자는 이탈자가 블랙홀을 생성하며 일으켰을 가속흔을 찾아 주위를 맴돌았다. 가속흔이 분진처럼 남아 있는 지점에서 멈춘 추격자는 문득 스스로를 의심했다. 흥왕사에서 마주치자마자 상대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었다. 조금 전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이탈자가 숙주의 육체를 빠져나가기 전 가속을 막고 파동을 흡수해 소멸시켰다면 이 오랜 추격전이 끝날 수도 있었다.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린 그는 자신이 육화에 중독됐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변절은 흔한 일이었다.

    2

    15세기로 이동한 이탈자는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했던 계유년을 선택했다. 재미있는 시대였다. 1455년 계유년 봄의 조선 시공간에 내려앉은 그는 여러 육체를 전전하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흥미로운 숙주를 발견했다. 김시습이었다. 

    한양 도성에서 꼬마 천재로 명성이 자자하던 시습은 어엿한 스물한 살 청년이 돼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습의 육체를 점거하고 기억마저 자기 파동에 맞춘 이탈자는 주변 환경부터 검색했다. 추격자가 따라붙기 전 실컷 놀아야 했다.

    3

    수양대군이 조카의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팔도로 퍼져나갔다. 분연히 책을 불사르고 삭발까지 한 시습은 계를 받고 승려가 됐다. 승려와 차원 이동자의 삶은 서로 제법 잘 어울렸다. 운수승 행각을 한 그는 조선 산하를 정처 없이 떠돌았고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며 수군거렸다. 



    무분별한 기행과 방랑의 여정이 멈춘 건 서른한 살 되던 1465년이었다. 경주 금오산에 틀어박힌 그는 세상을 완롱하는 소설을 짓기 시작했다. 차원 이동자들은 훌륭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들은 다양한 예술 양식을 통해 자신이 해당 시대를 다녀갔음을 기념하곤 했다. 

    소설을 탈고한 시습은 금오산 아래 어둠에 잠긴 경주 도심을 바라보며 문득 외로워졌다. 우주를 아무리 주유해도 남는 건 고작 한 줌 글이나 음률일 뿐, 그마저 행성이 늙어 붕괴되면 모두 사라져버렸다. 아름다운 시와 웅장한 건축물이 해변의 모래성처럼 시간의 포말 속으로 흩어지고 나면 참을 수 없는 나른한 권태가 뒤미처 찾아왔다. 

    세조 치세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힌 성종 2년, 시습은 상경해 경기 땅에 정착했다. 간혹 스치듯 들르던 한양은 이미 그를 잊은 지 오래였고 절의를 굽힌 많은 벗이 벼슬을 찾아 강호를 떠난 뒤였다. 수락산에 아담한 정사를 지은 그는 농작물을 손수 재배하며 은자처럼 조용히 살았다.

    4

    가속흔을 단서 삼아 이탈자가 도착한 시공 좌표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운이 없으면 엉뚱한 시공간에서 헤매기 일쑤였다. 이탈자를 포착한다 해도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적당한 착지점을 고르는 건 더욱 어려웠다. 조금씩 시공간대를 좁혀가며 접근하는 게 요령이었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이탈자의 시공간대와 조우했는데 이때 즉시 물러나지 않으면 예민한 상대는 추격을 따돌리고 바로 사라져버렸다. 이 단계에서 추격자는 즉시 육화돼야 했다. 

    추격자는 여러 차례 미세한 시간 이동을 거쳐 계유년에 도착했다. 이탈자의 육화 흔적을 쫓던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서 김시습을 찾아내자마자 신속히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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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격자는 시습과 연계될 인물들 가운데 홍유손을 선택했다. 유손은 한양 서남쪽 바닷가인 남양 땅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이탈자가 감지할 수 있는 범위 밖이었다. 재빨리 유손의 몸에 잠입한 추격자는 시습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았다. 숙주 몇 개를 징검다리처럼 갈아타며 목표물에 다가갈 수 있었지만 번거로운 데다 노출되기 십상이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숙주를 조금씩 움직여 접근하기로 결정했다. 

    총명한 유손은 한미한 중인 출신이었다. 남양 고을 향리 일을 보던 그의 아비는 아들에게 직업을 물려줄 생각이었지만 아들의 꿈은 그보다 훨씬 컸다. 어린 유손은 향역 잇기를 거부하고 사대부들처럼 과거 공부를 시작했다. 초인적인 학습 능력 덕분에 그는 자신의 열악한 환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극복해버렸다. 무슨 책이건 닥치는 대로 외웠고 의문점이 생기면 퇴직한 동네 유림들을 찾아 문의했다. 

    유손의 꿈은 1455년에 깨졌다. 계유년이던 그해 단종이 왕위를 빼앗겼다. 세상은 도를 잃었고 그 역시 배움의 명분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시습이 삼각산에서 책을 불태울 무렵 그 역시 과거를 포기하고 무명의 향리로 살리라 결심했다. 추격자가 그에게 빙의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유손은 향리 업무를 익히는 틈틈이 한양에 들러 명사들과 교유했다. 탁월한 학식과 달변 덕분에 재야인사 대부분을 친견할 수 있었지만 그가 그토록 만나길 열망하던 시습과는 이상하게 인연이 없었다. 시습이 한양에 올라와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상경해보면 번번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뒤였다.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 

    유손은 꽤 먼 훗날에서야 무질서하게 사는 것 같던 시습이 실은 한양에선 매우 체계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습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인물들은 절묘하게 피하면서 여항에 은둔한 재야 고수들하고만 조직적인 유대를 맺고 있었다. 시습이 한양을 떠난 게 아니라 도성 안 은밀한 공간으로 잠적해버린 것이다. 

    어느덧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를 이어 남양 고을 향리가 된 유손은 자신을 시습에게 안내해줄 연줄로 남효온을 점찍었다. 약관의 나이에 강개한 지사로 정평이 나 있던 효온은 시습의 망년지우였고 한양의 재야 조직을 움직이는 핵심 세력의 일원이었다. 유손은 효온과의 교제에 공을 들여 마침내 그의 소개로 시습과 마주칠 수 있었다. 임금이 바뀌며 정치적 불순분자들에 대한 감시도 잦아들고 있던 성종 2년, 수락산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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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락산의 초라한 정사에서 푸성귀로 나물 반찬을 만들던 시습은 멀리서 다가오는 두 개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벗인 남효온과 그가 모임에 새로 영입했다는 낯선 인물이었다. 술잔으로 쓸 사기그릇과 탁주가 든 호리병을 앉은뱅이 밥상에 배치한 시습이 마당으로 둘을 마중 나갔다. 효온이 큰 소리로 외쳤다. 

    “어이 형님! 여긴 전에 말씀드린 남양 처사 홍유손이요.” 

    한눈에 봐도 촌티 흐르는 상대가 손을 모으며 인사한 순간 시습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너무 늦은 상봉이었다. 1455년 삼각산 중흥사에서 육화됐을 때 이미 그는 추격자의 존재를 깨닫고 있었다. 비록 놀라운 순발력으로 후퇴해 사라졌지만 그건 분명 추격자가 만든 파동 에너지였다. 그때부터 시습은 추격자와의 접촉 가능성을 최소화하며 살아왔다. 그 때문이었는지 이번엔 여유롭게 세상 구경하는 낙을 누릴 수 있었건만 이제 그것도 끝나려 하고 있었다. 시습이 물었다. 

    “너무 늦었군? 진작 만나야 했을 운명인데 말이지?” 

    시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손이 태연히 대답했다. 

    “이번 세상 놀이는 어떠셨나? 사람으로 사는 거 지겹지 않은가?” 

    빙그레 미소 지은 시습이 마루로 먼저 오르며 대답했다. 

    “세간에 머무는 것이 보살행의 기본 아냐? 가만 보니 너도 이번 생을 좀 즐겼나본데? 어때? 우리 헤어지기 전에 이 몸뚱이로 한번 즐겨보는 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효온이 당황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달사들끼리의 만남은 놀랍습니다그려. 광대한 기상이 우주를 넘나드는군요?” 

    효온의 말을 무시한 유손이 시습을 따라 마루 위로 오르며 말했다. 

    “의미 없는 숨바꼭질 여기서 멈추면 어떨까?” 

    상대가 앉기를 기다려 앞에 놓인 술잔에 술을 따르던 시습이 대답했다. 

    “실은 이게 내 새로운 즐거움이지. 쫓기는 아슬아슬한 삶. 그런데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중독이야?” 

    얼굴을 찌푸린 유손이 말없이 잔을 들이켜고 나서 마당의 효온을 손짓해 불렀다. 

    “꼬마도 이리 와 앉지? 우리 때문에 조금 놀랐나?” 

    평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효온은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접근해와 시습을 회면하고 싶다 부탁할 때까지 유손이 보인 태도는 전형적인 지방 향리의 그것이었다. 조심스럽고 투박했으며 사대부에 대한 공손함까지 잘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유손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비집고 앉은 효온이 유손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이 만에 하나 대궐에서 보낸 세작(간첩)이라면 용서 못 해.” 

    효온에게도 술을 따라 권하며 시습이 말했다. 

    “진정하게, 추강. 이 사람은 내 오랜 벗이야. 전생에 여러 번, 아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만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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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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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효온은 술에 취해 방 안에 늘어졌고 시습과 유손은 마당 한쪽씩 차지한 채 마주 서 있었다. 시습이 천천히 물었다. 

    “단숨에 날 소멸시킬 마음은 아니었던 거지?” 

    유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하다. 꼭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도대체 왜 떠도는 것인가? 무슨 목적으로?” 

    “글쎄. 이미 알고 있잖아? 육화에 한번 중독되면 벗어나기 힘들어. 영혼으로만 산다는 거, 그 평화, 아무 동요 없는 영겁의 삶이 난 싫어. 생명이 우글대는 이런 행성에서 부대끼며 살고 싶어. 진짜 이 행성 생명체인 양 희로애락을 연기하다 보면 가끔 내가 누군지 까먹기도 해. 어느 게 진짜 삶인지 헷갈려. 난 이것도 진짜라고 믿지. 실은 아주 재밌어. 널 보낸 자들처럼 파동으로만 지내는 것도 어차피 연극이지 않나? 사건 하나 없는 엄청나게 지루하고 절대 끝나지 않을 무료한 연극 말이지.” 

    “너의 그 놀이 때문에 생명체가 죽지 않나? 김돈중을 생각해 봐. 그 육체는 너만 아니었다면 더 살 수 있었다.” 

    “아닐 수도 있어. 내가 침투해 보살핀 덕에 더 살았을지도 몰라. 암 환자들 기억해? 내가 깃들었다 나오며 완치되기도 했어. 다 운명 아냐? 우주에 어디 선과 악이 따로 있나?” 

    “넌 우주에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어. 당장 멈추지 않으면 그것들이 쌓여 재앙을 몰고 올 것이다.” 

    “가장 한심한 게 그 헛소리야. 우주는 어차피 언젠가 붕괴해. 차원이동이 없어져도 다른 방식으로 질서는 무너져. 그 또한 이 시공간의 질서야. 파동 상태로 진짜 무한하게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해. 뭐가 두려워 즐거움을 포기하고 그런 비참한 상태를 견뎌야 하지? 솔직히 너도 육화 맛을 봤잖아? 육체의 기쁨이 왜 죄냐고?” 

    유손은 대답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심스레 부엌으로 들어간 시습이 장검 두 자루를 가지고 돌아왔다. 유손이 미소를 흘리며 물었다.
     
    “오늘 끝장을 보자는 건가? 어차피 파동력은 육화 횟수가 적은 내가 더 강하다. 날 이기지 못한다.” 

    “속도는 내가 훨씬 빠르지. 넌 날 못 잡아. 경험치란 건 쉽게 따라잡을 수 없거든.” 

    “보아하니 곧 도주할 듯한데, 쓸데없이 검 따위는 왜 가져온 건가?” 

    “검술로 겨뤄본 지 꽤 됐지 않나? 조금 놀자고.” 

    고개를 끄덕인 유손이 장검 하나를 집어 날을 달빛에 비춰보았다. 서늘하게 반사된 빛이 시습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나머지 검을 쥔 시습이 말했다. 

    “당나라에서였지? 종남산인가? 내가 널 거의 벨 뻔했어. 그거 알아? 넌 좀 느려.” 

    두 손으로 검을 쥐고 초식을 밟으며 상대에게 다가가던 유손이 대답했다. 

    “네가 들어갔던 몸이 검선 여동빈이었던가? 그 신출귀몰한 검법, 다시 볼 수 있겠군.” 

    높이 솟구쳐 유손의 머리를 향해 활강하며 시습이 외쳤다. 

    “바로 천둔검법(天遁劍法)이지.” 

    사선으로 비켜 간신히 검을 피한 유손이 횡으로 반격하다 자신도 모르게 파동을 일으켰다. 시습의 몸이 마당 구석으로 날아가 곤두박질쳤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시습이 말했다. 

    “파동을 쓴다면 난 이만 떠나겠어. 재미없거든.” 

    검을 고쳐 쥐며 유손이 말했다. 

    “실수였다. 널 여동빈인 줄 착각했다. 제대로 운검해보아라.” 

    검으로 허공에 획을 그어 음양팔괘를 형상화한 시습이 대답했다. 

    “더는 여동빈 같은 검선이 아니지만 천둔검법은 아직 저장돼 있어.” 

    부드러운 동작으로 상대에게 진격한 시습이 연속 세 번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앞선 두 차례 공격은 몸을 피해 방어했지만 마지막 공격을 회피하지 못한 유손이 검을 부딪쳐 겨우 목숨을 지켰다. 순간 천둔검법 운행으로 인해 시습의 검이 저 혼자 신들린 듯 유손을 공격해 왔다. 할 수 없이 파동으로 방어한 뒤 유손이 외쳤다. 

    “파동은 쓰지 않기로 했거늘 장난이 심하군.” 

    검을 자기 손에 회수한 시습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천둔검법을 다시 보고 싶다며? 그리고 파동은 네가 먼저 쓴 거야.” 

    대련을 마친 둘은 마루에 나란히 앉았다. 유손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육화의 기쁨은 나도 잘 알겠다. 이번 생은 추격하지 않겠지만 다음엔 자비가 없을 것이다.” 

    파동으로 변화해 육신을 벗어나려는 상대의 손을 움켜쥔 시습이 말했다. 

    “잠깐만. 뭐가 그리 급해? 기왕 이리 된 거 너도 더 즐기지 그래? 한 번이라도 맘껏 세상을 노닐어보라고.” 

    시습의 손을 떼어낸 유손이 마당 한가운데까지 걸어가 등진 채 섰다. 그가 가만히 말했다. 

    “생각해보겠다.” 

    조금 멀어진 유손의 육체는 차츰 어둠과 섞여 사라져버렸다. 추격자가 사라진 정사엔 괴괴한 정적이 밀려들었다. 한숨을 내쉰 시습이 달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광막한 우주 속에 난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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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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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뒤인 1481년 초, 남양 고을 사또로 서른 초반의 채수란 인물이 새로 부임했다. 잠시 실세했으나 조정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남아 있던 그는 관무엔 뜻이 없어 행락만 일삼았다. 그의 눈에 고을에서 흥미로운 존재는 딱 하나, 관아 출납 업무를 맡은 홍유손이었다. 

    쉰 살 나이에도 총기가 뛰어난 유손은 산술은 물론이고 사서육경을 비롯해 온갖 잡서에까지 달통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단둘이 마주 앉은 채수가 물었다. 

    “이보오, 홍녹사. 내 관상 봐줄 수 있나?” 

    채수는 자신보다 한참 연상인 호방 홍유손을 한양 경아전 최고 직급인 녹사로 호칭하곤 했다. 유손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낮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쇤네가 즐겨 하는 일인뎁쇼.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유손 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채수가 말했다. 

    “내 이 고을을 언제쯤에나 벗어나려나? 아버님께서 한때 원 노릇하시던 곳이라 정붙이고 살고 있네만 답답함이 이만저만 아닐세.” 

    사또 얼굴을 지그시 노려본 뒤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며 역수를 셈하는 시늉을 하던 유손이 살며시 얼굴을 들이밀며 대답했다. 

    “올해 안에 조정으로 돌아가십니다. 품등이야 좀 그렇지만 어쨌든 복귀하실 겝니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수가 궤안에 팔꿈치를 기대고 물었다. 

    “근데 홍녹사의 비범함은 어디서 온 겐가? 배워서 될 일은 아닌데. 신선이라도 만났던가?” 

    몸을 뒤로 물리며 소매에 양손을 집어넣은 유손이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믿지 않으실진 모르겠사오나 실은 쇤네,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뭐라? 그럼 어느 세상 사람인고?” 

    “뭐랄까. 다른 차원이지요. 불교로 말하자면 다른 법계 출신입니다.” 

    유손을 멀뚱히 바라보던 채수가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며 웃었다. 따라 웃는 유손을 향해 급히 정색을 한 채수가 물었다. 

    “재미있는 사람일세, 자넨. 그럼 언제 돌아가는가? 그 다른 법계로?” 

    “이번 생엔 돌아가지 않을 작정입니다. 인간세에서 충분히 즐겨보고자 마음먹었거든요.” 

    웃음기 가신 얼굴로 침묵하던 채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믿지 않겠지만 난 그 말을 믿네. 천지 우주가 본디 가상 아니던가? 기왕 속세에서 놀 거라면 제대로 놀아야지? 이번에 조정으로 돌아가게만 되면 내 자네 향역을 풀어주겠네.” 

    놀랍게도 몇 달 후 한양 내직으로 임명돼 상경하게 된 채수는 지체 없이 유손의 향리 신분을 해제해 줬다. 갑자기 자유로워진 유손은 문득 시습의 삶이 궁금해졌고 채수를 따라 한양으로 발길을 옮겼다.

    9

    유손이 남효온과 마포나루에서 상봉한 건 1481년 가을이었다. 세곡창 인근 주점에서 해후한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다 김시습에 관한 얘기에 이르렀다. 효온이 말했다. 

    “홍처사. 실은 나 그날 밤 다 봤소.”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유손을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관찰하던 효온이 말을 이었다. 

    “동봉 형님과 처사께서 겨루던 광경 말이요. 그때 소란통에 잠이 퍼뜩 깼거든. 천둔검법을 쓰던 분도 놀라웠지만 그걸 받아내는 처사의 기량은 숨 막힐 지경이었소. 두 분 정체를 깨닫고야 말았지.” 

    유손이 긴장으로 숨을 멈췄다. 고개를 옆으로 누인 효온이 천진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여동빈의 검법을 최치원 선생이 당에서 배워 왔다는 전설은 귀가 닳도록 들었소. 그 오래된 비전을 시습 형님께서 사사하셨을 줄이야. 근데 홍처사께선 혹 시습 형님의 수제자 아니셨소? 틀어졌던 사제가 오랜만에 만나면 겨루기를 하는 게 강호의 습속임을 나도 잘 아오만.” 

    유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잔을 비웠다. 효온은 그날 자신의 스승이자 사림의 영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소개해주겠노라 호언장담했다. 마침내 유손은 영남에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점필재를 찾아가 늦은 나이에 제자가 됐다. 비록 짧은 세월이었지만 성리 공부에 몰두했던 그는 두류산에서 개인 수양을 마친 뒤 한양에 돌아와 시습을 찾아 떠돌았다. 

    점필재 문하생이라는 건 한양 선비 사회에선 꽤 큰 명예였다. 그건 사육신을 따라 절의를 숭상했다는 표지이자 자신 역시 정통 사림임을 드러내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의 주변엔 재야 인사가 몰려들었고 그들과 은밀히 선이 닿아 있던 시습과 재회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조정을 장악한 기득권층인 훈구권신을 비판하는 것으로 날을 새우던 어느 날, 시습은 바람처럼 유손 앞에 출현했다. 시습이 물었다. 

    “여태 머물러 있었군? 세상 재미가 어때?” 

    멋쩍게 웃음을 머금은 유손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 정도 재미로 변절하진 않아. 너의 속도를 파해(破解)할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껄껄 웃어젖힌 시습이 유손의 어깨 위로 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생과 사는 한 가지요 만물과 나는 한 몸이라. 만상 속을 부유하듯 떠도는 우리 신세가 가련하지 않나? 금생엔 친구 먹기로 했으니 놀아보자고.” 

    그날로부터 근 10년, 시습과 유손은 한양 사림과 죽림의 계를 맺고 속세를 벗어난 풍류에 몸을 실었다. 그사이 환속한 시습은 재취를 했지만 결말이 썩 좋진 않았다. 병으로 아내를 잃은 그는 다시 방랑길을 떠나 강원 땅에서 소식이 끊겼다.

    10

    시습 없는 한양은 즐겁지 않았다. 즉시 육체를 벗어나려던 유손은 망설였다. 한 번 더 시습을 보고 싶었다. 전국 사찰을 떠돌던 유손은 1493년 봄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마침내 시습을 발견했다. 초라한 승방에 병들어 누워 있던 시습은 반색하며 일어나려 했지만 그럴 기력마저 상실한 상태였다. 파리하게 말라 간신히 숨만 쉬던 그가 유손의 손을 움켜쥐고 말했다. 

    “어땠지? 이번 생애 말이야. 즐거웠어?” 

    상대의 고통스러운 표정에 눈살을 찌푸린 유손이 대답했다. 

    “인간의 삶이 무언지 조금 알게 됐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리 힘들게 버티는 건가? 빨리 몸에서 빠져나오면 되지 않나?” 

    희미하게 웃음을 만든 시습이 입술을 가늘게 떨며 말했다. 

    “넌 인간의 삶을 아직 몰라. 죽음으로 건너가는 이 고통 또한 삶의 일부야. 이렇게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게 이 육신에 대한 예의 아냐?” 

    상대를 멍하니 바라보던 유손이 급히 물었다. 

    “자네가 버리고 갈 이 육신, 어떻게 처리하면 좋은가?” 

    시습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냥 잘 묻어줘. 그리고 곧바로 날 쫓진 마. 넌 그 몸의 수명만큼 더 살아.” 

    “그럴 순 없다. 그 정도로 육화에 중독되진 않았다.” 

    “아니, 아니. 그런 얘기 아냐. 잘 들어. 너에게 선물을 주는 거야. 난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충분히 쫓을 수 있는 거리에서.” 

    유손은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보고만 있었다. 시습이 다시 말했다. 

    “기억해? 난 이 숨바꼭질 즐거워. 너 없이 이 지루한 우주에서 무슨 재미로 떠돌겠어? 네가 필요해. 다음번엔 부디 더 멋지게 쫓아와.” 

    “두렵지 않은가?” 

    “늘 두려워. 그러니까 재밌지. 난 아마도…. 지나치게 육화에 중독됐나봐.” 

    말을 마친 시습은 절명했다. 물끄러미 시신을 내려다보던 유손은 조용히 일어서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절의 승려들에게 김시습이 입적했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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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유손은 아흔아홉 해의 생을 살았다. 그는 무오사화가 벌어진 1498년에도 끈질기게 버티며 살아남았다. 연산군 4년이던 무오년, 훈구권신 유자광은 실록청의 사초에서 이미 죽은 김종직이 생전에 지어둔 ‘조의제문’을 발견했다. 초나라 항우가 조카인 의제를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사실을 통해 세조를 풍간한 글이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연산군은 미쳐 날뛰었다. 

    훈구파는 유자광을 뒤에서 조종해 김종직과 연루된 사림들을 대역 죄인으로 몰아 모조리 주륙했다. 문파 하나가 아예 사라져버렸지만 남효온은 다행히 이미 세상을 하직한 뒤였다. 분이 덜 풀린 연산군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토막 냈고 작은 혐의점이라도 발견된 자라면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향리 출신으로 실직을 가진 적 없던 홍유손조차 한때 김종직 문하생이었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돼 노비로 살아야 했다. 8년 동안 모진 매를 맞고 주린 배를 걱정해야 했지만 유손은 가혹한 노역을 다 견뎌냈다. 그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축출된 1506년이 돼서야 일흔다섯의 나이에 해배됐다. 뭍으로 되돌아온 유손은 이듬해 노구의 몸으로 늦장가 들어 아들까지 낳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여든 살이던 1511년, 그는 자기 향역을 면제해준 채수와 우연히 다시 상봉했다. 조정 대신으로 떵떵거리던 채수는 귀신이 등장하는 윤회소설 ‘설공찬전’을 지었다가 파직돼 우울해하고 있었다. 유손은 이렇게 말해 채수를 다시 한번 기쁘게 했다. 

    “대감께선 곧 복직하십니다. 쇤네가 누굽니까?” 

    불과 몇 개월 뒤에 복직된 채수는 입궐할 때마다 홍유손의 영험함을 두루 칭송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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