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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봐요’ ‘질 좋은 하룻밤’ 초등생 웹소설 앱에 ‘버젓’

  • 김건희 객원기자

    kkh4792@donga.com

    입력2020-04-10 16:5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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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번방 사건’으로 국민 공분 큰 와중에…

    • 선정적 제목·표지·내용 강조한 웹소설 무분별하게 노출

    • 노골적 BL·GL 웹소설도 버젓이 메인 화면에 올려

    • 성관계로 시작해 연인으로 발전하는 줄거리가 대부분

    • “미성년에 왜곡된 性의식 심어준다” 지적

    10대들도 보는 J웹소설 사이트 메인 배너 광고에 걸
린 선정적인 웹소설 홍보물들.

    10대들도 보는 J웹소설 사이트 메인 배너 광고에 걸 린 선정적인 웹소설 홍보물들.

    초등학교 5학년 딸을 둔 주부 유은경(가명·39) 씨는 우연히 딸아이 스마트폰을 훑어보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딸이 웹소설 사이트에서 보고 있던 작품 제목에 ‘연하남이 위험한 이유’ ‘지금 이건 네가 덮치는 거야’ ‘호기심과 객기가 불러온 불장난 같은 만남’ 등 남녀 간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문구가 버젓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 작품 표지에는 반라의 남성과 검은색 슬립(slip·여성 속옷의 한 종류)을 입은 여성이 서로 몸을 맞대는 등 성행위를 암시하는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유씨는 “딸이 ‘같은 반 친구 중 절반가량이 이 웹소설 사이트를 이용한다’고 해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선정적 소설 소개, 어린이한테도 무차별 노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사는 40대 김철수(가명) 씨도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TV에서 ‘n번방’ 성착취 관련 뉴스를 보던 중학교 1학년 아들이 “10대 청소년이 볼 수 있는 웹소설 사이트에도 성착취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 많다”고 말한 것. 실제 아들이 언급한 웹소설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몸정이 마음정으로’ ‘그에게 속박되다’ 같은 제목과 문구를 내건 소설이 올라와 있었다. 상대를 힘으로 제압해 성관계를 맺어도 나중에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들이다. 김씨는 “아이가 웹소설 사이트를 통해 은연중에 그릇된 성 관념을 갖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고 혀를 찼다. 

    웹소설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연재하는 소설을 일컫는 용어다. 1990년대 중반 PC통신 게시판에서 시작됐고, 최근엔 하나의 장르 문학 대접을 받는다. 유씨와 김씨를 경악케 한 국내 유명 웹소설 플랫폼 회원 수는 최대 수백만 명에 이른다. 

    4월 4일 R웹소설 사이트를 방문해봤다. ‘빼지 말고 해요’ ‘엎드려 봐요’ ‘처녀의 덫에 걸리고 만 신수’ ‘다리 사이 풍경이 궁금합니다’ ‘질 좋은 하룻밤’ ‘방중술도 마다하지 않아요’ 등 노골적인 문구로 독자를 유혹하는 ‘작품’이 다수 업로드 돼 있었다. 회원 수 150만 명의 J웹소설 사이트 첫 화면에도 ‘대표님 안 돼요’ ‘합방, 어린 신부가 자라면’ 같은 제목의 소설이 노출돼 있었다. 성행위나 성기 접촉을 묘사한 표지 그림도 다수 보였다. B 웹소설 사이트 또한 ‘내겐 너무 거친 그대’ ‘시녀로 살아남는 법’ 등 선정적 제목의 작품을 눈에 띄게 배치한 상태였다. 

    웹소설은 원칙적으로 간행물윤리위원회(간윤) 심의 대상이다. 간윤은 웹소설의 선정성과 폭력성 등을 따져 ‘19세 미만 구독 불가’와 ‘전체 구독’으로 구분한다. 문제는 간윤이 ‘19세 미만 구독 불가’로 판정한 작품이라도 제목과 소개 문구 등은 해당 사이트 방문자에게 무차별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학부모 유씨는 “미성년자는 ‘19금’으로 분류된 작품 본문을 볼 수 없게 돼 있지만 제목 등은 제한이 없다. 이것이 오히려 10대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한다”고 우려했다. 



    웹소설 사이트는 전용 애플리케이션(앱)으로도 이용할 수 있는데, 앱을 내려 받을 때 성인 인증이 필요 없다. 앱 장터 ‘구글 플레이’에서 R웹소설 앱과 J웹소설 앱은 각각 ‘만 3세 이상’, B웹소설 앱은 ‘만 7세 이상’ 이용 가능 등급으로 분류돼 있다. 어린이도 해당 앱을 설치해 얼마든지 소설 제목과 관련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性착취 내용 담은 ‘전체구독’ 웹소설 수두룩

    상대의 성을 강제로 취하는 내용을 암시하는 듯한 웹소설 홍보 문구와 표지들.

    상대의 성을 강제로 취하는 내용을 암시하는 듯한 웹소설 홍보 문구와 표지들.

    일각에선 “웹소설 심의 기준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씨는 “‘전체 구독’으로 분류된 웹소설 중에도 선정적인 것이 많다. 등급 분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J웹소설 사이트에 ‘전체구독’ 등급으로 올라온 한 작품은 여자 주인공이 처음 보는 남자에게 갑작스럽게 입맞춤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그 남자의 전속 마사지사로 임명받아 만남을 거듭하다 훗날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한다는 줄거리다. R웹소설 사이트에 역시 ‘전체구독’ 등급으로 게시된 다른 작품은 남녀 주인공이 술에 취해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고, 그 후 여자 주인공이 계속 만남을 거부하는 데도 남자 주인공이 강제로 키스하는 등 스킨십을 이어가다 결국 두 사람이 연인이 된다는 내용이다. 

    웹소설 작가들이 소통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내용을 쓸수록 조회 수가 잘 나오고 수익도 많아진다. 웹소설 사이트는 물론 독자도 그런 스타일을 선호하기 때문에 작품 제목이나 표지에도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많이 올라와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웹소설이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미성년자에게 상대를 겁박해 성을 착취해도 괜찮다는 왜곡된 성 관념을 무의식중에 심어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대권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는 “남성이 여성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거나 성관계를 맺은 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 웹소설에 나오면 독자는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런 웹소설이 미성년자에게 미치는 영향은 압도적이다. 어린 아이들은 성범죄를 보편적인 현상이나 장난, 놀이 정도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웹소설 사이트에는 남성 동성애(BL) 또는 여성 동성애(GL)를 소재로 한 웹소설도 다수 올라와 있다. J웹소설 사이트에는 ‘BL은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다운 그들의 BOYS LOVE’라는 문구와 함께 두 남성이 상체를 노출한 채 서로 마주보는 그림이 배너 광고에 걸려 있었다. 한 남성이 다른 남성의 허벅지에 얼굴을 가져다 댄 그림과 함께 ‘너는 제 발로 저승을 찾아가야겠구나’란 문구를 쓴 소설 광고가 메인 화면에 올라와 있기도 했다. R웹소설 사이트에도 ‘형제로 생각한 적 없어’ ‘아저씨는 절대 나 못 버려’ 등 낯 뜨거운 제목을 붙인 동성애 웹소설이 메인 화면에 있었다.

    “웹소설 등급 분류 조정해야”

    이에 대해 간윤 관계자는 “최근 웹소설 선정성 문제 때문에 청소년 유해간행물 심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분류 등급이 ‘19세 미만 구독 불가’와 ‘전체 구독’ 두 개밖에 없어 어려움이 많다”며 “유해간행물 등급 분류를 세분화하려면 관련법을 개정해 나이별로 유해 정도 기준을 추가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관계자는 “학부모와 시민단체의 민원이 꾸준히 접수되면서 청소년 정서 발달에 맞춰 웹소설 등급 분류를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오래 전부터 나왔지만, 국회가 영화나 비디오 매체 등급 분류에만 초점을 두고 있어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영화나 비디오, 광고 등은 청소년 유해영상물 등급을 ‘전체 관람가’ ‘12세 관람가’ ‘15세 관람가’ ‘청소년 관람불가’ ‘제한상영가’ 등 다섯 가지로 촘촘히 구분한다. 최근 웹소설이 어린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이 커진 만큼 이 분야 또한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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