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제철 생멸치로 ‘홈메이드 앤초비’ 만들기

김민경 ‘맛 이야기’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0-05-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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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고 통통한 생멸치.

    크고 통통한 생멸치.

    올해는 유난히 봄과 여름 사이 간격이 멀게 느껴진다. 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 같은데, 여름은 확실히 아니다. 이맘때면 엄마와 나는 할머니의 텃밭으로 불려가기 일쑤였다. 나는 하염없이 서성거리고, 엄마는 ‘그만하고 가자’는 말을 돌림노래처럼 하면서도 날렵하게 고랑을 옮겨 밟으며, 이랑에 난 풀을 메고 흙을 돋우고 푸성귀를 뜯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우리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할머니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죽장아찌와 콩잎 반찬을 상에 올리고, 보리 섞인 쌀밥을 큰 사발에 퍼주시면 나는 할머니 보리차를 자작하게 부어 밥을 말았다. 이 시간을 위해 텃밭에서의 지루함을 버틴 것이다. 건더기 빡빡하게 넣고 끓인 된장찌개와 김장김치가 등장하더라도 나의 젓가락은 오로지 가죽과 콩잎만을 향한다. 지금도 그 낡고 작은 밥상이 눈에 훤하고, 짭조름한 국물을 뿜어내는 푹신한 가죽, 비닐처럼 미끈하게 곰삭은 콩잎은 방금 먹은 듯 생생하다. 20년이 지났지만 한동안 주말마다 먹은 가죽과 콩잎은 여전히 내 몸 어딘가에 맛있게 저장돼 있다.

    계절을 담아 만드는 저장 요리

    맛을 저장하면 다른 맛이 생겨난다. 시간과 온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혀 새로운 면모가 나타나는 것이다. 숙성도 되고, 발효도 되기 때문이다. 메주,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젓갈, 치즈 등은 저장 단계로 보면 숙련된 경험이 필요한 부류다. 누구라도 처음은 있겠지만 그 처음을 위해 주도면밀하게 자료를 찾고, 재료를 준비하고, 때를 기다렸다가 만드는 게 장이나 김치다. 내가 즐기는 것은 흘러가는 계절을 병 안에 꼭꼭 잡아두는, 한결 쉬운 저장요리다. 어느 날 슈퍼마켓에서 딸기 세 바구니를 한 바구니 값에 판매하면 기꺼이 이고지고 와서 잼을 만든다. 또 어떤 날은 양파 한 망을 등에 업고 와서 장아찌를 만든다. 가만 보니 양파만 절이기 심심해 청홍 고추를 사러 나갔다가 이참에 통마늘 장아찌도 만들자 싶어 마늘 1kg를 또 들고 온다. 

    황경신 작가가 쓴 ‘위로의 레시피’라는 책을 보면 ‘언젠가 한 번 화려했던 것들은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제철 재료는 언젠가 한 번 화려할 때 재빠르게 갈무리해두면 화려했던 계절의 맛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 

    특히 봄, 여름은 저장할 것들로 넘쳐난다. 쌉사래한 맛과 향을 품으며 억세게 자란 봄 채소, 초여름에 풍성하게 자라는 마늘과 양파 같은 향신 채소, 두루두루 쓸모 있는 토마토 그리고 딸기, 참외 같은 달콤한 과일, 저장의 하이라이트인 매실까지 갈무리할 제철 재료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1. 소금에 멸치를 절인다. 2. 염장 멸치의 살만 바른다. 3. 식초와 와인에 담가 멸치를 가볍게 절인다. 4. 수분을 최대한 뺀다.

    1. 소금에 멸치를 절인다. 2. 염장 멸치의 살만 바른다. 3. 식초와 와인에 담가 멸치를 가볍게 절인다. 4. 수분을 최대한 뺀다.

    나는 우선 봄 멸치의 끝물을 놓치지 않고, 기장에서 생멸치를 구해 서울에서 받았다. 애써 노력한 건 아니다. 포털 사이트만 검색하면 누구라도 금방 찾을 수 있다. 멸치는 손질 정도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통멸치, 내장을 뺀 것, 대가리와 뼈, 내장을 모두 제거한 것. 나는 서양식 멸치절임인 앤초비를 만들 계획이라 내장만 뺀 것을 택했다. 맨들맨들한 살만 삭히는 것보다 뼈가 곰삭으며 나는 감칠맛이 확실히 다르다. 통통하고 신선한 멸치만 준비되면 앤초비 만들기의 절반은 성공이다. 

    멸치가 누울 수 있는 길이의 밀폐용기를 준비해 멸치를 한 줄로 눕힌다. 소금을 뿌려 하얗게 뒤덮는다. 소금 위에 멸치를 한층 깔고 다시 소금을 덮는다. 이 과정을 반복해 소금층이 맨 위에 오면 뚜껑을 덮어 냉장실에서 10~15일 정도 둔다. 멸치 살이 단단해지면 소금에서 꺼내 살살 배를 갈라서 대가리, 뼈, 꼬리지느러미를 떼어낸다. 두 장으로 나뉜 멸치 몸통은 화이트 와인과 식초를 1:1로 섞은 절임물에 담근다. 식초는 맛이나 향이 너무 센 것을 피하고 사과나 와인 식초 같은 것을 사용하자. 여러 멸치를 손질하는 동안 절임물에 담가둔 멸치는 소금이 녹으며 몸통이 깨끗해지고, 살은 더 단단해진다. 이때 살집을 찢어 맛을 보면 짠맛 가운데 고소하고 기름진 맛이 진하게 퍼진다.

    감칠맛 넘치는 앤초비 요리법

    마늘, 고추, 허브 등과 함께 오일에 저장한다.

    마늘, 고추, 허브 등과 함께 오일에 저장한다.

    이대로 잘게 썰어 기름에 볶아 여러 요리에 써도 손색이 없겠다. 절임물에 담갔던 멸치는 체에 걸러 수분을 뺀 다음 미리 소독해둔 병에 차곡차곡 담는다. 이때 통마늘, 마른 고추 또는 페페론치노(이탈리아에서 많이 쓰는 아주 작고 매운 마른 고추), 허브(로즈마리, 세이지, 오레가노, 파슬리) 등을 함께 넣어도 된다. 병에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 오일을 가득 부어 채운다. 큰 병에 한꺼번에 담지 말고 작은 병 여러 개에 나눠 담아야 오래 두고 먹기에 좋다. 하루빨리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적어도 일주일은 가만히 뒀다가 꺼내 먹으면 된다. 

    앤초비는 낯선 식재료일 수 있지만 생각보다 쓸모가 많다. 잘게 썬 앤초비를 브로콜리, 애호박 또는 주키니호박, 당근,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같은 채소와 함께 볶아 먹는다. 앤초비를 조금만 넣고 심심하게 볶으면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더운 채소 요리로 한 끼를 대신할 수 있다. 앤초비로 간을 하되 채소를 살캉살캉하게 볶으면 스테이크 같은 고기 요리와 곁들이기 좋다. 


    완성된 앤초비. 그대로 먹어도 맛있다.

    완성된 앤초비. 그대로 먹어도 맛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시저드레싱의 핵심 재료가 바로 앤초비다. 앤초비에 마늘, 달걀, 레몬즙,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를 넣고 만드는데, 집에서 하려면 오일과 달걀을 수없이 저어 유화시켜야하므로 상당히 번거롭다. 대신 앤초비에 머스터드, 다진 마늘, 레몬즙, 소금과 후추 등을 넣어 시저드레싱과 닮은꼴로 만들 수 있다. 맛을 보면서 머스터드, 마요네즈, 설탕이나 꿀 양을 조절하면 된다. 시저드레싱은 상추, 로메인, 셀러리, 당근, 오이 등과 두루 잘 어울린다. 새우나 닭고기를 삶아 곁들이거나, 구운 빵을 찍어 먹어도 맛있다. 

    앤초비는 피자나 오픈 샌드위치에 루콜라, 겨자잎과 같이 올려 먹어도 맛있다. 감자를 도톰하게 썰어 올리브 오일과 소금, 후추를 뿌려 오븐에 구운 다음 앤초비 조각을 올려 먹는 방법도 있고, 알배추를 3~4등분 해 오븐에 구워 함께 먹으면 달고 짠맛이 잘 어울린다. 오븐이 없다면 팬에 자작하게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익히면 된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메뉴는 앤초비 파스타다. 오일에 마늘을 볶다가 잘게 썬 앤초비를 넣고 달달 볶아 삶은 파스타를 넣고 버무려 먹는다. 페페론치노나 올리브 등을 곁들여도 좋지만 부재료가 없어도 감칠맛에 부족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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