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위안부 비극을 돈과 권력으로 맞바꾼 정의연 파탄記

서사의 주체로 군림하면서 현실의 화폐 벌어들여

  •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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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20-05-27 15: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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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직의 지도부 내각과 국회로 진출

    • 수많은 위안부의 실존을 단일한 서사에 결박

    • 위안부 목소리에 자신들의 욕망 덧입혀

    • 무성(無聲)의 존재에 들러붙은 탐욕스러운 변사(辯士)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박영대 동아일보 기자]

    정의연 사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누구는 회계가 문제지만 30년 운동의 성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누구는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자에게 적절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질책한다. 양자는 정도 차이가 있지만 대개 ‘돈 문제’가 정의연 사태의 핵심이라는 입장을 공유한다. 

    만약 자금 집행이 투명했다면 정의연 활동은 사회적으로 지지받아야 하는 운동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회계 때문이 아니다. 정의연의 운동은 한국사회의 반지성적 행태의 결과물이며, 나아가 운동을 자기 조직의 돈과 권력으로 환전하는 마케팅이기 때문이다. 

    정의연의 운동은 ‘위안부 서사’라는 강력한 상징자본에 기반해 있다. 위안부 서사는 ‘순결한 처녀가 성노예로 끌려갔다’는 극단적 비극, 여기에 다시 ‘그녀들은 침묵을 깨치고 투사가 됐다’는 극적인 반전을 추가한다. 

    여기에 강한 흡입력이 있다. 우선 한국사회 특유의 반일주의와 ‘성노예’라는 비극이 결합했으므로 일반적이면서 폭발적이다. 또한 ‘고난-각성-투쟁(그리고 승리)’이라는 구조는 대중이 갈망하면서도 친숙함을 느끼는 서사다.

    수많은 위안부의 실존을 단일한 서사에 결박

    위안부 서사는 금기가 되고 권력이 되며, 정의연은 서사의 주체로 군림해왔다. 정의연 운동의 가장 큰 문제는 특정한 서사를 강요하고 우상으로서 숭배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지성적이며 반동적이다. 



    정의연은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당사자를 대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당사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폭력적으로 재단한 것은 오히려 정의연이었다. 1997년 정대협은 아시아 기금을 받으려는 위안부 출신 여성에게 “아시아 여성기금을 받는다면 자원해 나간 공창이 되는 것”이라고 떠들었다. 또한 정의연은 자신의 활동을 강하게 질타했던 위안부 심미자를 피해자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2004년 무궁화회 위안부 여성들은 정대협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이라고 비판했다. 2020년 이용수는 정의연 수요집회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하면서 조직의 해체를 주장했다. 

    이처럼 정의연은 수많은 위안부의 실존을 단일한 서사에 결박시키고 전시했다. 당사자가 거부하는 운동을 당사자의 이름으로 자행했다. 심지어 자기 필요에 따라 당사자를 삭제하기까지 했다.

    조직의 지도부 내각과 국회로 진출

    5월 11일 정의연은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들의 운동은 위안부 지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의연이 위안부의 서사를 독점하지 않았다면 다양한 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수많은 행사와 기념관을 통해 조직의 위상을 드높였고, 그 결과 조직의 지도부가 내각과 국회로 진출하지 않았는가. 

    그뿐이 아니다. 정의연은 그 서사를 상징자본으로 삼아 현실의 화폐를 벌어들이지 않았는가. 정부와 기업·시민들로부터 받은 돈은 동상이 됐고, 펜션으로 의심 받는 고급 쉼터가 됐으며, 운동권 자녀의 장학금이 됐다. 심지어 자식 유학 자금과 아파트 구입 대금의 출처라는 의혹마저 일고 있다. 

    결국 정의연은 타인이 겪은 비극을 자의적 서사로 가공·독점해 상징자본을 만들고, 이를 다시 자신의 부과 권력으로 환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조직을 살찌울 때 위안부 당사자는 어떠했나. 소녀상이 목도리와 우비를 둘렀을 때 살아있는 위안부는 온수매트 한 장이 없었다. 위안부를 모시기 위해 구매했다는 쉼터를 당사자는 언론을 보고 처음 알았다. 

    심지어 정의연은 죽은 위안부마저 운동의 연료로 소비했다. 위안부 AI를 만들어 자기 입맛에 맞는 서사를 재현하는 장치로 포획하고자 했고, 우간다에 실체 없는 김복동센터를 건립한다며 후원금을 모았다. 위안부 장례식에 지출한 기록은 있으나 돈을 받은 상조회사는 없다.

    위안부의 목소리에 자신들의 욕망 덧입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25일 대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미향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시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25일 대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윤미향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시스]

    결국 정의연은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가 되겠다고 공언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사자를 대변하는 운동이 아니라 당사자를 이용한 마케팅을 했던 것이다. 대신 위안부의 목소리에 자신의 욕망을 덧입혔다. 이들은 무성(無聲)의 존재에 들러붙은 탐욕스러운 변사(辯士)였다. 대변자가 아니라 복화술사였다. 

    상징자본으로서 위안부 서사는 ‘기억’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정의연은 이 기억을 절대화시켰다. 연구방법론으로서 구술이 갖는 한계를 무시했다. 그러면서 ‘피해자 중심주의’니, ‘피해자의 기억이 곧 증거’니 하며 사실과 논리의 영역을 감성과 구호로 바꿔치기 했다. 

    그런데 이용수의 기자회견 직후 정의연 및 여권 관련 인사들은 바로 그 ‘기억’을 문제 삼았다. 윤미향 당선자는 기억이 ‘왜곡’됐다고 했으며, 우희종 전 더불어시민당 대표는 기억을 ‘검증’받아야 한다고 했고, 영화감독 변영주는 기억을 동네 노인의 ‘변덕’ 쯤으로 취급했다. 

    위안부의 ‘기억’을 무기로 싸워왔던 정의연이 이제 그 ‘기억’을 부정했다. 어제까지 ‘투사’로 대접하던 이용수를 오늘은 기억이 가물가물한 ‘노친네’로 취급한 것이다. 운동의 자기 부정이자, 일관성에 대한 거부다. 운동의 기본 토대를 스스로 뿌리 뽑았다. 이런 단체가 무슨 운동을 지속한단 말인가.

    위안부 문제 ‘해결’ 거부해야만 생존하는 조직

    정의연은 항상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것은 운동의 목표가 아닌 존재의 알리바이다. 예컨대 2015년 위안부 생존자 34명과 사망자 유족 68명이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른 ‘화해·치유재단’의 기금을 수령했다. 당시 정대협은 이 합의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원만한 합의가 이뤄지면 자신이 존재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의연의 모순에 대해 2004년 김정란 박사는 학위논문에서 “생존자들이 국민기금을 수령하면 위안부 운동은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최근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도 이명박 정부 당시 한일 위안부 합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정대협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며 비슷한 입장을 내놓았다. 정의연은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외치지만, ‘해결’을 거부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조직인 것이다. 

    ‘사죄’와 ‘배상’이라는 구호의 실질적 목표는 위안부 문제 해결이 아니다. 끊임없이 ‘미해결’을 되뇌며 한국 사회 전반에 퍼진 ‘식민지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선동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여전히 ‘친일’이 청산되지 않았다며 식민지를 현재화하고, 이를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확보하고자 한다. 시민사회와 여당이 ‘친일세력 최후의 공세’를 운운했던 행태,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이 기자들을 향해 ‘한국사람 맞냐’며 쏘아붙인 언사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금기에 도전하겠다며 스스로 금기가 돼버려

    우리는 지금 정의연의 존재와 운동이 한국사회에 합당한지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정의연은 금기에 도전하겠다고 외쳤다. 그러나 스스로 금기가 되었다. 정의연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주장했다. 그러나 피해자를 이용하다 쓸모없으면 내버렸다. 정의연은 당사자 운동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당사자가 거부하는 운동을 지속했다. 정의연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미해결만이 조직의 생존을 보증한다. 

    정의연은 운동의 목적과 조직의 생존이 배치된 시민운동이다. 또한 트라우마를 자극해야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시민운동단체가 과연 필요한가.

    *필자는 전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중앙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제3의길’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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