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NL호객꾼, ‘성(聖)스러운 위안부 마케팅’ 좌판 걷어치우라

  • 나연준 제3의 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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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2020-06-1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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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인, ‘잠수함 속 토끼’는 없고, 꼬리 자르는 도마뱀만 설쳐

    • 왜 피해자가 거부하는 이름을 덧씌우는가

    • 수많은 위안부의 실존을 단일한 서사에 포획

    • 입맛에 맞지 않는 견해에는 ‘역사수정주의’ 딱지

    • NL(민족해방)운동권은 위안부 운동에서 손 떼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 [뉴시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 [뉴시스]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잠수함은 산소가 부족해지면 해면으로 떠올라 산소를 채워야 했다. 그런데 당시 기술 수준으로는 산소 공급의 적정 시점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토끼를 잠수함에 실었다. 인간보다 약한 토끼가 산소 부족으로 죽어갈 즈음 선원들은 다가올 위험을 인지하고 잠수함을 수면으로 몰았다.

    닥쳐올 위험 경고하는 잠수함 속 토끼

    5월 27일자 ‘한겨레’ 양현아 칼럼.

    5월 27일자 ‘한겨레’ 양현아 칼럼.

    토끼는 생명을 통해 위험을 경고한다. 그래서 잠수함 속 토끼는 지식인의 대명사로 통하기도 한다. 지식인이야말로 자신을 걸고 대중에게 닥쳐올 위험을 경고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이후 정의연에 대한 갑론을박이 여론을 달구고 있다. 위안부 연구자와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지식인 중 잠수함의 토끼와 같은 사람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다. 이들은 위안부 운동의 과오가 마치 자신과 관계없는 것처럼 발언하고 있다. 그래서 살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잘라내는 도마뱀을 닮았다. 잠수함 속의 토끼가 지식인의 이상이라면, 도마뱀은 이들의 현실이다. 

    가장 첨예한 논의는 ‘피해자 중심주의’일 것이다. ‘미투’는 이 용어가 대중적으로 각인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성폭력 의혹이 일어나면, 여성계는 ‘피해자의 말이 곧 증거’라는 구호를 앞세웠다. 여기에 어떤 의문을 제기하면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발 심리 및 행동) ‘2차 가해’와 같은 낙인을 찍어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때 피해자 중심주의는 전가의 보도였다. 

    위안부 운동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위안부의 증언과 기억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운동 자체를 ‘성역화’했다.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견해는 ‘여성혐오’ ‘역사수정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여론 재판에 내던졌고, 어떤 연구자는 사법부에서 자신의 연구를 ‘심판’받았다. 이때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역’을 만드는 데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러나 이용수의 폭로 이후 일부 위안부 연구자들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이런저런 주석을 달아가며 스스로 ‘수정주의’의 길을 가고 있다. 양현아는 5월 27일 한겨레신문 기고(‘피해자를 대변한다는 것: 그 많던 ‘할머니’는 다 어디로 가셨을까’)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 성역화’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강성현 역시 피해자가 다양한 욕망의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성역화를 경계하자고 했다(‘정의연 ‘30년 운동사’, 위안부 ‘피해자중심주의’를 다시보다’, 노컷뉴스 5월 30일자).

    토템은 성역의 표지

    정의연 후원금 유용 의혹을 폭로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가 5월 25일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호영 기자]

    정의연 후원금 유용 의혹을 폭로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가 5월 25일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지호영 기자]

    하지만 누구나 알듯이 피해자 성역화는 위안부 운동 그 자체였다. 최근 한겨레신문 인터뷰(‘30년 위안부 인권운동, 기로에 서다’, 5월 27일자)에서 현재 위안부 운동에 비판적 입장을 취한 연구자 두 명이 익명으로 견해를 밝혔다. 연구자가 연구 대상을 실명으로 비판하지 못하는 분위기, 이것이 위안부 운동이 성역이라는 방증이다. 다른 연구 분야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아울러 소녀상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도 성역화를 보여준다. 소녀상은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겨울철엔 털목도리를 두른다. 소녀의 발밑에는 간식과 음료가 놓여 있다. 심지어 경찰은 인력을 동원해 소녀상을 ‘경호’하고 있다. 이쯤 되면 ‘토템’이다. 토템은 성역의 표지다. 

    나아가 양현아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대상화가 아닌 주체화라고 강변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전국 130여 개 소녀상을 보자. 이것이야말로 가장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대상화가 아닌가. 10대 초반 소녀의 무표정한 얼굴이야말로 “순결한 소녀가 성노예로 전락했다”는 위안부 서사를 시각적으로 정형화하는 작업이자, 수많은 위안부의 실존을 단일한 서사로 포획하는 장치다. 

    기고문에서 양현아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을 준비하기 위해 많은 증언을 수집했다고 했다. 그는 증언을 취합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연구자의 예민함을 이렇게 주문했다. 피해자의 언어 안에는 “망설임,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체험, 침묵, 불명확한 기억, 감정과 욕망의 지대”가 존재하므로, 이러한 “비언어적 지대, 정동(affect)의 지대를 언어의 행간에 표현”하는 일은 고민과 책임이 따르고, “‘그 인간’을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자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더니…

    이렇게 예민한 연구자가 얼마나 존재할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아름다운 말이다. 문제는 이들이 과연 그렇게 해왔다고, 그러한 지향을 가졌다고 자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2004년 무궁화회 위안부들은 정대협을 “역사의 무대에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온 악당들”이라며 날 서게 비판했다. 이 명징한 언어 앞에서 위안부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앞서 나열한 그 ‘예민함’을 발휘했는가. 어찌하여 그 예민함은 자신을 향한 비판 앞에서는 한없이 무뎌지는가. 

    정의연은 무궁화회 소속 위안부 심미자의 이름을 ‘기억의 터’(서울 중구) 조형물에서 삭제했다. 위안부의 ‘망설임’과 ‘침묵’까지 공감하며 ‘그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한 양현아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위안부의 표정마저 놓치지 않으려는 그 절절한 예민함은 위안부의 삶 자체를 삭제하는 정의연의 행태를 어떻게 보는가. 그저 “과보다 공이 많다”고, 아니면 “가슴이 아프다”며 적당히 눙치고 말 것인가. 

    아울러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웠던 정의연은 피해자에게 자의적으로 이름을 붙였다. 정대협에서 정의연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그녀들’의 이름은 ‘정신대’에서 ‘위안부’로, ‘위안부’에서 ‘성노예’로 불렸다. 이름은 인식과 실천의 집약이다. 그러므로 명명(命名)은 그 자체로 지식권력이다. 위안부 운동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바로 여기서 권력이 됐다.

    왜 피해자가 거부하는 이름을 덧씌우는가

    5월 30일자 시사저널 노혜경 칼럼.

    5월 30일자 시사저널 노혜경 칼럼.

    조민아는 한 매체의 칼럼(‘이용수 선생의 발언과 정의연 : 넘어서야 할 것과 거리를 두어야 할 것’, 뉴스앤조이 5월 26일자)을 통해 명칭의 변천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정대협 출범 당시 ‘피해자’들이 위안부라는 용어에 거부감을 느껴 정신대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조민아의 입장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위안부가 모멸감을 주는 명칭이라면, 정대협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위안부를 앞세운 운동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위안부조차 꺼리는 ‘위안부’라는 용어를 정신대 여성에까지 뒤집어씌웠기 때문이다. 

    ‘성노예’라는 명칭은 더욱 문제다. 조민아 스스로 밝혔듯이 위안부는 성노예라는 명칭을 불편해했다. 그런데 정의연은 현재 ‘성노예’라는 명칭을 전면화해 운동을 하고 있다. 도대체 왜 ‘성노예’라는 명칭을 고집하는가. 왜 피해자가 거부하는 이름을 덧씌우는가. 언어가 주는 비극성과 선정성을 극대화해 관심과 지지를 유도하기 위함이 아닌가. 결국 성노예는 선전·선동에 용이한 정치 마케팅 언어다. 아울러 자신이 이만큼 심각한 주제를 연구 중이라는 자아도취의 주문이기도 하다. 대관절 피해자의 이름마저 제멋대로 부르는 피해자 중심주의도 있다던가. 

    노혜경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칼럼(‘진주댁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몰랐지만’, 시사저널 5월 30일자)에서 피해자 중심주의에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는 “할머니의 말을 자구대로 잘 들어주는 것” “피해자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오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정의연이 그 오해의 본거지다. 정의연은 위안부의 기억을 절대화해 스스로 금기가 된 것을 넘어, 위안부를 AI(인공지능)로 박제하려고 했다(‘AI 할머니’를 제작해 증언을 영원히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다). 이것이야말로 정의연이 ‘자구대로’ ‘하자는 대로’ 위안부를 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연출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피해자 민족주의 서사

    일부 연구자들은 민족주의와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 조민아는 이용수의 폭로 이후 “무겁고 거대한 피해자 민족주의 담론에 균열이 생기면서 터져 나오는 굉음”이 일고 있다고 평했다. 그런데 본인이 인정하듯이 정의연은 피해자성과 민족주의의 결합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더욱 분명히 하자. 솔직히 정의연은 민족주의와 결합한 것도 아니다. 위안부 운동은 “무겁고 거대한 피해자 민족주의” 그 자체다. 담론 시장에서 위안부의 존재만큼 피해자 민족주의를 강렬하게 환기하는 서사가 있었던가. 

    조민아는 정의연이 민족주의를 극복해 나아가는 중이라고 주장하며, 그 예로 우간다와 콩고 등지로 보낸 나비기금을 들었다. 그러나 우간다에 설립하겠다던 김복동센터는 사실 내전피해여성쉼터였다. 즉 국내에서 모금 명분과 현지 지출처가 달랐던 것이다. 우간다 현지 주관 단체 ‘골든위민비전인우간다(Golden Women Vision in Uganda·GWVU)’의 아찬 실비아 대표는 이 사실을 알고 “역겹다(disgusted)”는 표현까지 써가며 정의연의 행태를 비판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국가의 자존에 먹칠하는 것이 ‘탈민족주의 운동’이란 말인가. 귤이 강을 건너 탱자가 됐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운동’이 대륙을 넘어 ‘역겨움’이 됐다는 소리는 들어본 바가 없다. 

    무엇보다 위안부 운동과 민족주의는 단순히 담론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의연에서 민족주의는 조직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의연으로 들어간 기부금이 다수의 NL(민족해방) 성향 운동단체로 흘러갔다. 심지어 탈북자의 재입북을 권유하는 자금으로 쓰였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정의연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시민단체들은 반일주의 구호를 외치며 요새 유행하는 말로 ‘쉴드’를 쳤다.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면서도 정작 정의연은 조직 내부에 NL 성향 구성원을 인적 청산한 적이 있는가. 하다못해 내부투쟁이라도 해봤는가. 솔직히 정의연 편을 드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NL운동권은 위안부 운동에서 손을 떼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무슨 민족주의를 극복하자는 말을 할 수 있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

    어제까지 민족주의 담론과 조직에 편승했으면서, 오늘은 거리를 두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본인들의 모순적 태도를 마치 학술적 고민인양 포장하는 행태, 이것은 학문의 탈을 쓴 ‘내숭’에 불과하다. 

    이제 와서 일부 위안부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피해자 중심주의에 별스러운 주석을 달아봤자, 민족주의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내숭을 떨어봤자, 앞서 본 것처럼 본인들의 언사는 본인들의 과거를 조준할 뿐이다.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잘라내면 담론 시장의 발언권을 계속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누구나 조금만 찾아보면 곳곳에 당신들이 과거로부터 도망가며 잘라낸 꼬리를 발견할 것이다. 

    꼬리가 잘려서인지 기본적인 방향 감각마저 상실한 사람들도 보인다. 노혜경은 윤미향에 대한 비판을 “역설적으로 윤 당선인이 얼마나 껄끄럽고 무서운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나비가 깨어졌다’, 시사저널 5월 16일자). 하긴 나도 윤미향이 무섭다. 타인의 비극을 자신의 권력으로 환전하고, 여기서 제기된 각종 의혹을 뭉개며 국회로 갔으니 말이다. 이런 국회의원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껄끄럽고 무서운 일이다. 한편 노혜경은 ‘윤미향 깨기’가 백래시와 여성혐오 등을 조장할 것이라고 우려했다(‘백만송이 장미를 그대에게’, 시사저널 5월 23일자). 그러나 정작 백래시와 여성혐오는 ‘윤미향 깨기’가 아닌 ‘이용수 깨기’에서 등장했다. 이용수의 행보가 국회의원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라는 우상호 민주당 의원 발언이 백래시다. 이용수의 발언에 기억의 ‘왜곡’을 운운하는 우희종 민주당 의원과 변덕처럼 치부하는 변영주 감독이 하고 있는 것이 백래시다. 이용수를 향해 ‘대구할매’라는 둥, ‘창녀’라는 둥, ‘일본인과 결혼했다’는 둥 하며 욕만도 못한 발언을 쏟아내는 여권 지지자가 댓글창을 백래시와 여성혐오로 물들이고 있다. 노혜경의 걱정은 진영만 바꾸면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그가 윤미향을 비판할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성(聖)스러운’ 마케팅… 좌판을 걷어치우라

    위안부 운동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정의연의 ‘돈 문제’를 회피하거나 검찰 수사를 기다리자면서 신중론을 편다. 예컨대 정희진은 “‘돈’ 문제는 검찰이 맡으면 된다”고 주장한다(‘군 위안부 논란, 돈 문제가 아니다’, 경향신문 5월 27일자). 

    틀렸다. 돈 문제는 중요하다. ‘성역’이 돈이 됐기 때문이다. 정의연의 운동은 한국 시민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성(聖)스러운’ 마케팅이다. 위법 여부는 물론 성역을 자본으로 이용한 모든 행태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도대체 위안부 인권을 위해 그렇게나 빈번한 모금과 기부가 필수적이었나. 운동을 위해 130여 개 소녀상과 수많은 굿즈 판매가 필요한가. 

    무엇보다 검찰 수사를 기다리자는 신중론에 동의할 수 없다. 이들이 사회적 이슈, 특히 성폭력 의혹에 대해 언제 한번 신중한 자세로 사건을 바라본 적이 있었나. 비판자의 위치에서 확증편향에 사로잡히고, 비판받는 처지에서 회의주의자가 됐다. 공론장에서 조증과 울증을 반복하는 행태야말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난치병이자 전염병이다. 당신들은 여기에서 가장 자유로울 수 없는 부류다. 

    이용수의 기자회견과 연이은 언론의 문제 제기는 위안부 운동의 본질을 폭로했다. 일부 위안부 운동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자신이 만든 성전(聖殿)에서 자신이 착복하는 좌판을 벌였다. 민족주의와 반일주의는 좌판의 흥행을 보증하는 호객의 구호였다. 그리고 관련자 다수는 여기에 눈을 감았다. 이러한 문제를 정조준하지 않는 이상, 당신들의 발언은 공허할 뿐이다. 

    당신들은 자문해야 한다. 자기가 지은 성전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는가? 스스로 그 좌판을 걷어찰 수 있는가? 좌판 옆에서 피해자 민족주의 재담을 흘리는 NL호객꾼을 쫓아버릴 수 있는가? 할 수 없다면 침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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