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곰삭은 감칠맛과 새콤달콤의 끝 장아찌 만들기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0-07-07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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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친하던 친구가 15년 전 미국 LA로 이주했다. 어느 날 그가 전화기에 대고 울먹이며 “여기는 모든 게 다 있는데 계절이 없어. 여름뿐이야. 유리창에 서리가 하얗게 낀 주점에 앉아서 이가 시리게 차가운 소주에 매운 닭발을 먹고 싶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사계절은 당연하다. 

    • 봄, 가을이 종이 인형처럼 얄팍하게 지나가는 것 같지만 어쨌든 존재한다. 짧게라도 제몫을 다하고 팔랑팔랑 사라진다. 이 계절이 다하기 전에, 찬란함을 꼭 붙들어둘 저장음식을 만들 때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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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봄과 여름 사이, 이맘때가 오면 나는 엄마와 함께 할머니 텃밭으로 불려가기 일쑤였다. 나는 하염없이 서성거리고, 엄마는 “그만하고 가자”는 말을 돌림노래처럼 하면서도 날렵하게 고랑을 옮겨 밟으며, 이랑에 난 풀을 매고 흙을 돋우고 푸성귀를 뜯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할머니 댁에 도착하면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죽(참죽나무의 여린 잎)장아찌와 콩잎 반찬이 상에 올라오고, 할머니가 보리 섞인 쌀밥을 큰 사발에 퍼주시면 나는 보리차를 자작하게 부어 밥을 말았다. 이 시간을 위해 텃밭에서의 지루함을 버틴 것이다. 건더기 빡빡하게 넣고 끓인 된장찌개와 김장김치가 등장하더라도 나의 젓가락은 오로지 가죽과 콩잎만을 향했다. 지금도 그 낡고 작은 밥상이 눈에 훤하고, 짭조름한 국물을 뿜어내는 푹신한 가죽, 비닐처럼 미끈하게 곰삭은 콩잎이 방금 먹은 듯 생생하다. 20년이 지났지만 한동안 주말마다 먹은 가죽과 콩잎은 여전히 내 몸 어딘가에 맛있게 저장돼 있다.

    기장멸치로 ‘홈메이드 앤초비’ 만들기

    1 크고 통통한 생멸치.
2 멸치를 소금으로 덮는다.
3 염장 멸치의 살만 바른다.

    1 크고 통통한 생멸치. 2 멸치를 소금으로 덮는다. 3 염장 멸치의 살만 바른다.

    4 식초와 와인에 담가 멸치를 가볍게 절인다.
5 수분을 최대한 뺀다.
6 마늘, 고추, 허브 등과 함께 오일에 저장한다.

    4 식초와 와인에 담가 멸치를 가볍게 절인다. 5 수분을 최대한 뺀다. 6 마늘, 고추, 허브 등과 함께 오일에 저장한다.

    맛을 저장하면 다른 맛이 생겨난다. 숙성도 되고, 발효도 되기 때문이다. 시간과 온도의 영향을 받아 재료의 새로운 면모가 나타나는 것이다. 메주,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젓갈, 치즈 등은 저장 단계로 보면 숙련된 경험이 필요한 부류다. 주도면밀하게 자료를 찾고, 재료를 준비하고, 때를 기다렸다가 만드는 게 장이나 김치다. 내가 즐기는 것은 흘러가는 계절을 병 안에 꼭꼭 잡아두는, 한결 쉬운 저장요리다. 

    슈퍼마켓에서 딸기 세 바구니를 한 바구니 값에 판매하면 기꺼이 이고지고 와서 잼을 만든다. 또 어떤 날은 양파 한 망을 등에 업고 와서 장아찌를 만든다. 가만 보니 양파만 절이기 심심해 청홍 고추를 사러 나갔다가 이참에 통마늘 장아찌도 만들자 싶어 마늘 반 접을 또 들고 온다. 

    황경신 작가가 쓴 ‘위로의 레시피’라는 책에는 “언젠가 한 번 화려했던 것들은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제철 재료는 언젠가 한 번 화려할 때 재빠르게 갈무리해 두면 시간이 흐른 뒤에도 화려했던 계절의 맛을 고스란히 즐길 수 있다. 



    특히 봄, 여름은 저장할 것들로 넘쳐난다. 쌉싸래한 맛과 향을 품으며 억세게 자란 봄 채소, 초여름에 풍성하게 자라는 마늘과 양파 같은 향신 채소, 두루두루 쓸모 있는 토마토 그리고 딸기, 참외 같은 달콤한 과일, 저장의 하이라이트인 매실까지 갈무리할 제철 재료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우선 부산 기장에서 생멸치를 구해 서울에서 받았다. 애써 노력한 건 아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면 누구라도 금방 찾을 수 있다. 멸치는 손질 정도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통멸치, 내장을 뺀 것, 대가리와 뼈·내장을 모두 제거한 것. 나는 서양식 멸치절임인 앤초비를 만들 계획이라 내장만 뺀 것을 택했다. 맨들맨들한 살만 삭히는 것보다 뼈가 곰삭으며 나는 감칠맛이 더해져 확실히 다르다. 통통하고 신선한 멸치가 준비되면 앤초비 만들기의 절반은 성공이다. 

    이제 멸치가 누울 수 있는 길이의 밀폐용기를 준비해 멸치를 한 줄로 눕힌다. 소금을 뿌려 하얗게 뒤덮는다. 소금 위에 멸치를 한층 깔고 다시 소금을 덮는다. 이 과정을 반복해 소금층이 맨 위에 오면 뚜껑을 덮어 냉장실에 10~15일 정도 둔다. 멸치 살이 단단해지면 소금에서 꺼내 살살 배를 갈라서 대가리, 뼈, 꼬리지느러미를 떼어낸다. 두 장으로 가른 멸치 몸통은 화이트 와인과 식초를 1:1로 섞은 절임물에 담근다. 식초는 맛이나 향이 너무 센 것을 피하고 사과식초나 와인식초 같은 것을 사용하자. 절임물에 담가둔 멸치는 소금이 녹으며 몸통이 깨끗해지고, 살은 더 단단해진다. 이때 살집을 찢어 맛을 보면 짠맛 가운데 고소하고 기름진 맛이 진하게 퍼진다. 이대로 잘게 썰어 기름에 볶아 여러 요리에 써도 손색없다.

    감칠맛 넘치는 앤초비 요리법

    좀 더 두고 먹으려면 멸치를 체에 걸러 수분을 뺀 다음 미리 소독해 둔 병에 차곡차곡 담는다. 이때 통마늘, 마른 고추 또는 페페론치노(이탈리아에서 많이 쓰는 아주 작고 매운 마른 고추), 허브(로즈메리, 세이지, 오레가노, 파슬리) 등을 함께 넣어도 된다. 병에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유를 가득 부어 채운다. 큰 병에 한꺼번에 담지 말고 작은 병 여러 개에 나눠 담아야 오래 보관하기에 좋다. 하루빨리 먹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적어도 일주일은 가만히 뒀다가 꺼내 먹으면 된다. 

    앤초비는 낯선 식재료일 수 있지만 생각보다 쓸모가 많다. 잘게 썬 앤초비를 브로콜리, 애호박 또는 주키니호박, 당근, 아스파라거스, 토마토 같은 채소와 함께 볶아 먹는다. 앤초비를 조금만 넣고 심심하게 볶으면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더운 채소 요리로 한 끼를 대신할 수 있다. 앤초비로 간을 하되 채소를 살캉살캉하게 볶으면 스테이크 같은 고기 요리에 곁들이기 좋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시저드레싱의 핵심 재료가 앤초비다. 앤초비에 마늘, 달걀, 레몬즙, 올리브유, 소금, 후추를 넣고 만드는데, 집에서 하려면 올리브유와 달걀을 수없이 저어 유화시켜야 하므로 상당히 번거롭다. 대신 앤초비에 머스터드, 다진 마늘, 레몬즙, 소금과 후추 등을 넣어 시저드레싱과 닮은꼴로 만들 수 있다. 맛을 보면서 머스터드, 마요네즈, 설탕이나 꿀 양을 조절하면 된다. 시저드레싱은 상추, 로메인, 셀러리, 당근, 오이 등과 두루 잘 어울린다. 새우나 닭고기를 삶아 곁들이거나, 구운 빵을 찍어 먹어도 맛있다. 

    앤초비는 피자나 오픈 샌드위치에 루콜라, 겨자잎과 같이 올려 먹어도 맛있다. 감자를 도톰하게 썰어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를 뿌려 오븐에 구운 다음 앤초비 조각을 올려 먹어도 좋고, 알배추를 서너 등분해 오븐에 구워 함께 먹으면 달고 짠맛이 잘 어울린다. 오븐이 없다면 팬에 자작하게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익히면 된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메뉴는 앤초비 파스타다. 기름에 마늘을 볶다가 잘게 썬 앤초비를 넣고 달달 볶아 삶은 파스타를 넣고 버무려 먹는다. 페페론치노나 올리브 등을 곁들이면 좋지만 부재료가 없어도 감칠맛에 부족함이 없다.

    제철 재료로 만드는 채소 장아찌

    이 계절, 잊지 말고 저장해야 할 것이 또 있다. 땅이며 나뭇가지 끄트머리마다 가득한 초록색 먹을거리들이다. 냉이, 달래, 씀바귀, 민들레, 원추리, 돌나물, 보리싹, 쑥, 머위, 미나리, 당귀, 두릅과 엄나무 순, 가죽, 여러 가지 취나물, 부추, 쑥갓, 풍성한 상추 등 다 쓰기 숨찰 만큼 많다. 우리는 이것들을 생으로 먹고, 데쳐서 나물로 먹고, 전으로 부쳐 먹고, 튀겨도 먹으며 밥도 짓고 국도 끓인다. 때로는 차를 만들고, 술도 담근다. 끝물의 잎과 순은 대체로 장아찌로 담가 그 향과 쌉싸래한 맛을 오래 즐긴다. 

    장아찌를 담글 때는 이파리 하나하나 깨끗이 씻어야 맛과 향이 잘 보존되고, 무르지도 않는다. 간장 절임물은 만드는 사람 마음이다. 간장, 식초, 설탕, 물을 같은 비율로 넣고 끓이라는 지침이 많은데 그렇게 하면 내 입에는 너무 달고 시다. 단단하고 두께 있는 뿌리채소나 오이, 파프리카 같은 것은 달고 신 장아찌로 해도 나쁘지 않지만 봄채소는 그저 짭짤하고 씁쓸한 맛이 나며 향이 진한 게 좋다. 설탕과 식초를 간장 양의 3분의 1 정도로 넣고, 물이나 채소국물은 간장의 1.5~2배 정도 부어 간을 본다. 설탕 대신 매실청을 쓰면 식초 양을 줄여야 한다. 

    입맛에 맞게 만든 절임물을 한소끔 끓여 식힌 다음 차곡차곡 담아놓은 봄채소 위에 살살 부어 맛을 들인다. 처음에는 채소 부피가 많아 보여도 금세 납작해지니 맛이 들면 작은 통으로 옮긴다. 중간에 절임물만 받아 한 번 더 끓여 식힌 다음 다시 부어주면 오래 두고 먹을 때 안심이 된다. 

    나물을 건져 먹고 남은 절임물은 마른 반찬 볶을 때나 조림 요리 만들 때 맛간장처럼 쓰기에 좋다. 청양고추를 잔뜩 다져 절임 간장을 자작하게 부어 달달 볶아두면 이 또한 훌륭한 양념이 된다. 비빔밥, 비빔국수 양념을 만들 때, 멸치나 어묵 볶을 때, 햄을 잔뜩 썰어놓고 볶음밥을 할 때도 조금씩 넣으면 맛있다.

    활용도 만점 토마토 저장법

    토마토장아찌. [GettyImage]

    토마토장아찌. [GettyImage]

    된장이나 고추장에 채소를 절일 때는 재료를 소금물에 먼저 담가 삭힌 다음 물기를 싹 빼고 절여야 무르지 않는다. 물기를 빼려고 잎채소를 한 장씩 널어 말리기도 한다. 다소 번거로워 된장이나 고추장에 담그는 장아찌는 주로 더덕, 도라지, 순무처럼 덩어리 채소를 활용하는 편이다. 

    봄채소 갈무리가 끝나면 참외와 토마토 순서다. 참외는 단단하고 작은 것을 사서 껍질을 깨끗이 씻고 속은 파낸다. 소금에 말랑하게 절였다가 하루 정도 말려 간장 절임물을 부으면 된다. 잘만 익으면 오이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여름 반찬이 된다. 

    토마토는 장아찌로 담그려면 풋토마토를 골라야 하는데, 그래도 오래 두고 먹지는 못한다. 제철 토마토를 오래 즐기고 싶다면 완숙 토마토를 골라야 한다. 깨끗이 씻은 완숙토마토 꼭지를 파내고 커다란 냄비에 넣는다. 이때 손으로 마구 주물러 터뜨려야 한다. 그리고 푹 끓인다. 절반 정도로 양이 줄 때까지 뭉근하게 끓여 뜨거울 때 소독한 병에 담아둔다. 껍질을 건져내기도 하는데, 나는 그냥 모두 먹는다. 초간단 토마토 병조림인데, 주스나 수프로 먹어도 되고, 마늘을 기름에 볶아 토마토 병조림을 넣고 소스를 만들어도 된다. 여기에 베이컨, 간 고기, 해산물 등을 넣고, 허브라도 한 줌 더하면 풍미 좋은 소스를 쉽게 만들 수 있다. 매콤한 국물 요리를 할 때 토마토 병조림을 두어 스푼 넣으면 감칠맛이 살아나고, 서양식 갈비찜처럼 푹 끓이는 요리를 만들 때도 넉넉히 부어 뭉근히 끓이면 구수한 맛이 차오른다. 남은 소스에 밥을 비벼 먹어도 맛있고, 면을 삶아 한소끔 볶아도 된다. 

    방울토마토는 꼭지를 떼고 반으로 갈라 올리브유를 넉넉히, 소금과 후추는 조금만 뿌려 섭씨 100~110도 오븐에서 4~5시간 구워 말린다. 소독한 병에 넣고 올리브유를 채워 보관한다. 샐러드와 오픈 샌드위치, 술안주로 몇 알씩 꺼내 먹기 딱 좋은, 봄날 만들어두는 비상 식품이다.


    설탕 하나로 묶어두는 계절의 맛

    갖가지 과일, 채소로 만드는 당절임은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GettyImage]

    갖가지 과일, 채소로 만드는 당절임은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GettyImage]

    토마토에 이어 오이, 통마늘, 양파도 장아찌 차례를 기다린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재료이니 오늘은 잠깐 접어두자. 다만 한 가지! 통마늘은 쪽 사이가 벌어지면 마늘이 너무 매울 수 있다. 쪽마늘이 틈 없이 꽉 붙어 있는, 작고 단단하고 껍질이 바싹 마른 것을 골라 장아찌로 만들자. 

    소금과 간장을 신나게 사용해 풋풋한 향 채소와 알싸한 마늘과 매운 고추 저장을 마쳤다. 이제는 아차하면 무르거나 상하는 여름 과일로 당절임을 만들어보자. 다양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 비법 소스가 된다. 

    당절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역시 잼일 것이다. 대체로 먹다 남은 무른 과일로 잼을 만드는데, 생생한 과일로 만들어야 산뜻한 향이 들고, 고유한 맛도 진하며, 오래 보관해도 쉬 상하지 않는다. 

    나처럼 적은 식구의 먹을거리를 담당하는 사람에게 수박은 버거운 과일이다. 아무리 조각으로 사도 남아돈다. 게다가 두툼한 껍질은 많이도 나온다. 이럴 때 만드는 게 수박잼이다. 검은 줄무늬가 있는 진한 초록 껍질은 얇게 벗긴다. 연한 초록과 흰 부분은 과육과 함께 깍두기처럼 썬다. 귀찮더라도 씨는 보일 때마다 걷어낸다. 물이 많고 워낙 달콤한 과일이니 설탕은 수박 무게의 8분의 1 정도만 준비해도 된다. 이후 방법은 다른 과일 잼 만드는 것과 같다. 수분이 많기에 약한 불에서 오래 저어가며 끈기 있게 끓여 잼 농도를 맞추는 일이 다를 뿐. 이렇게 잼을 만들면 껍질 부분 과육이 살아 있어 씹는 맛이 느껴진다. 뜨거울 때 잘 보관해 두면 12월에도 수박 맛 잼을 빵에 발라 먹을 수 있다.

    무궁무진 당절임의 세계

    제철 복숭아도 훌륭한 잼 재료가 된다. [GettyImage]

    제철 복숭아도 훌륭한 잼 재료가 된다. [GettyImage]

    매실은 청으로 주로 만들지만 잼도 해볼 만하다. 매실 꼭지를 따서 준비하는 것까지는 같다. 냄비에 매실을 넣고 설탕을 매실 양의 반 정도 붓고 골고루 섞어 30분 정도 둔다. 불을 켜고 매실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저어가며 졸인다. 그대로 차게 식혀 씨를 일일이 건져낸다. 씨가 큼직해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과육만 남은 냄비를 다시 불에 올려 약한 불에서 잼 농도가 나도록 끓여 뜨거울 때 병에 담아 보관한다. 무르익은 황매실로 만들면 당연히 더 맛있다. 

    여름 복숭아도 놓칠 수 없다. 복숭아는 부드럽고 달콤한 과육을 그대로 살려 먹도록 하자. 껍질 벗긴 복숭아는 씨를 피해가며 큼직큼직하게 썬다. 냄비에 복숭아가 잠길 정도의 물을 붓고, 물 양 3분의 1 정도 설탕과 레몬즙 조금을 넣고 아주 약한 불에서 뭉근하게 과육이 무르지 않도록 15~20분 동안 끓인다. 뜨거울 때 병에 담아 뚜껑을 덮어 뒤집어서 식힌다. 잼이라기보다는 과육을 즐기는 ‘콩포트’라고 할 수 있다. 

    살구는 반 갈라 씨를 뺀 다음 매실과 비슷한 방법으로 잼을 만들면 된다. 나는 살구나 복숭아처럼 부드러운 과육으로 잼을 만들 때 마른 크랜베리나 건포도를 함께 넣고 끓인다. 쫄깃하게 씹는 맛과 새콤함을 더해준다. 

    감귤류로 청을 만들 때는 껍질째 얇게 씨만 발라내고 차곡차곡 설탕과 함께 재우는 게 일반적이다. 이렇게 하면 과즙과 과육 알갱이가 설탕 국물에 녹아들며 맛이 밴다. 이보다 한결 쓸모 있게 당절임하는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레몬을 준비했다면 길이로 한 번 썰고, 다시 그것을 길이로 반 썰어 두툼한 반달 모양 네 조각을 만든다. 이것을 소독한 병에 잘 담는다. 청은 대체로 설탕과 물 비율이 1:1이지만 이번에는 설탕을 물의 3분의 2 정도로 줄여도 된다. 설탕과 물을 섞어 냄비에 넣고, 설탕이 녹을 정도로 한소끔 끓여 뜨거울 때 레몬 위에 천천히, 골고루 끼얹어 한 김 날아가면 바로 뚜껑을 덮고 뒤집어서 그대로 식힌다. 이렇게 뜨거운 시럽으로 청을 만들어두면 국물뿐 아니라 껍질째 썰어 먹는 과육 맛까지 볼 수 있다. 청의 맛도 설탕을 천천히 녹여 만든 것보다 한층 깊고 은은하다. 뜨거운 설탕물을 끼얹은 청을 살펴보면 과육 표면이 조금씩 투명하게 익어간다. 일반 청처럼 중간에 과육과 국물을 분리하지 않아도 되니 한편으로는 편리하다.

    껍질 먹는 청을 만들려면 감귤류보다는 레몬, 자몽, 오렌지 등이 좋다. 수입 과일은 껍질에 묻은 농약이 다소 걱정되니 제주산 레몬과 팔삭, 탱자 같은 국산 과일을 활용한다. ‘제주 자몽’으로 불리는 팔삭은 껍질 벗기기가 쉽지 않고, 과육 맛이 끝내주지도 않는다. 큼직한 팔삭이야말로 끓인 설탕물에 재워 익혀 먹기 딱 알맞은 과일이다. 약재로 많이 사용하는 탱자 역시 과일 자체로 먹는 경우는 드물다. 탱자는 알이 작으니 반으로 잘라 청을 만들면 된다. 팔삭과 탱자 모두 제철에는 싼값에 많은 양을 구입할 수 있다.

    나는 올해 이른 봄 구한 제주산 팔삭으로 담가 둔 청을 가지고 푸성귀 샐러드를 실컷 해먹는 중이다. 팔삭청 국물은 단맛만 진한 게 아니라 쌉싸래한 맛과 향까지 있어 입맛을 돋우기에 그만이다. 팔삭청 국물에 소금을 넣어 짭짤하게 간을 맞춘다. 잘 익은 팔삭 덩어리를 꺼내 껍질째 얇게얇게 썰어 넣는다. 마지막으로 양파를 굵직하게 다져 넣고 냉장실에서 서로 맛이 어우러지게 한두 시간 동안 둔다. 샐러드를 먹기 전 식초 두어 숟가락, 식물성 기름 너덧 숟가락을 넣고 열심히 저어 드레싱으로 먹는다. 이때 식초는 맛이 세지 않은 사과식초, 와인식초 등을 추천한다. 양파를 넣을 때 먹고 남은 토마토, 사과, 참외 같은 재료를 큼직하게 썰어 같이 재웠다가 샐러드에 끼얹어 먹어도 맛있다.

    당절임을 위한 재료가 따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 계절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당절임은 무궁무진하다. 껍질을 넣을지 말지 정하고, 재료가 가진 수분 양을 감안해 설탕 양을 정하며(맛이 달지 않고, 물이 많이 생기지 않으면 끓이는 중간에 설탕을 넣어도 된다), 다른 재료 혹은 계피 같은 향신료를 곁들일지 말지 등 몇 가지만 골똘히 생각해 보면 된다.


    여름 입맛 돋우는 청 활용법

    과일뿐 아니라 양파·당근·파프리카·토마토·생강도 잼이 되며, 밤·고구마·단호박·땅콩 등은 달콤하고 농후한 스프레드로 변신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두면 빵이나 크래커에 발라 먹을 뿐 아니라 요거트와 아이스크림에 얹어 먹고, 파이나 구운 과자를 만들 때 사용하고, 드레싱과 소스, 고기를 재울 때, 발효 치즈와 햄의 토핑, 음료를 만들 때 등 참으로 다채롭게 활용할 수 있다. 

    달콤한 당절임으로 입맛을 돋웠다면 이번엔 새콤한 피클을 만들어볼 때다. 집에서 피자를 먹고 나면 피클 한두 팩이 꼭 남는다. 피클 국물에 푹 전 오이는 아삭거림이 덜하고, 지나치게 달고 신맛에서도 산뜻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집어 먹기엔 별로인데, 다른 요리에 활용하기에는 꽤 쓸모 있다. 

    피클 오이를 잘게 썰고, 양파도 비슷한 양을 준비해 잘게 썬다. 길쭉한 소시지에 칼집을 넣은 다음 버터에 데굴데굴 굴려가며 표면이 툭툭 터지도록 굽는다. 핫도그 빵 가운데 소시지를 끼우고, 양파와 오이 피클을 듬뿍 얹고, 그 위에 케첩과 머스터드를 쭉 뿌린다. 마지막으로 후추까지 솔솔 흩뿌리면 아재도 아이도 좋아하는 핫도그가 뚝딱이다. 마요네즈로 버무려 만드는 감자달걀샐러드에 물기 꼭 짠 피클을 다져 섞으면 새콤달콤함이 더해져 맛에 재미를 더한다. 

    피클은 새콤함이 도드라지는 초절임이다. 소금과 설탕으로 맛의 균형을 잡고, 피클링 스파이스나 다른 향신 재료를 넣어 독특한 향을 더하면 시판 피클보다 훨씬 산뜻한 피클을 만들 수 있다. 피클링 스파이스는 피클 하면 떠오르는 복합적이며 오묘한 향을 만들어주는 혼합 향신료를 말한다. 회향, 겨자, 코리앤더(고수), 후추, 월계수 잎, 계피, 정향, 생강, 딜, 메이스 같은 여러 가지 향신료를 섞은 것으로 시중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피클링 스파이스로 일관된 향을 내기보다는 피클을 만드는 주재료에 따라 월계수 잎, 후추, 계피, 생강, 허브 등을 조금씩 바꿔가며 개성 있게 만들어보는 재미가 더 좋다. 

    피클은 장아찌나 잼보다 재료의 폭이 넓다. 간장에 짭조름하게 조려 반찬으로 즐겨 먹는 우엉과 연근은 아삭아삭한 맛 덕분에 피클 재료로 아주 좋다. 쌉싸래하며 깨끗한 맛이 나는 재료니 월계수 잎과 통후추 몇 알만 넣어 은은하게 향을 내는 게 좋다. 밥반찬으로 산뜻하게 먹고 싶다면 마른 고추나 청양고추를 넣고, 양식 요리에 곁들일 계획이라면 로즈메리처럼 향이 진한 허브를 넉넉히 넣어도 된다. 연근과 피클은 잘게 다져서 유부초밥이나 주먹밥 만들 때 조금씩 넣으면 아삭한 맛이 나고, 새콤달콤하게 입맛을 돋우기 좋다. 우엉피클은 가늘게 썰어 단무지 대신 꼬마김밥 재료로 활용해도 잘 어울린다.

    재료를 가리지 않는 피클의 포용력

    아스파라거스 피클. [GettyImage]

    아스파라거스 피클. [GettyImage]

    강원도에서 풍작이 난 아스파라거스도 피클로 만들어 먹기 좋은 재료다. 먼저 아스파라거스의 딱딱한 밑동을 잘라낸다. 잘라낸 밑동은 버리지 말고 물에 넣고 푹 끓여 채소국물을 만든다. 콩나물국, 조개탕, 어묵탕 등을 끓일 때 사용하면 시원한 맛이 한결 살아난다. 대가 굵은 아스파라거스는 껍질이 단단할 테니 필러나 칼로 살짝살짝 벗겨낸다. 손질한 아스파라거스에 소금을 뿌려 20분 정도 절인 다음 물에 살짝 헹궈 물기를 닦는다. 절이지 않고,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아스파라거스를 20초 내로 데쳐 찬물에 헹궈 준비해도 된다. 원하는 배합으로 만든 피클 주스를 뜨거울 때 아스파라거스에 부어 2~3일 맛을 들인 다음 먹는다. 

    아스파라거스와 셀러리, 오이 등을 섞어 피클로 만들어도 잘 어울린다. 가느다란 미니 아스파라거스를 구했다면 밑동과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소금에 절일 필요도 없이 피클 주스만 부어 맛을 들여도 충분하다.

    콜라비, 서리태로 만드는 여름 피클

    나는 종종 섬유질이 풍부하고 비타민과 단백질까지 있는 건강한 채소 콜라비를 야심만만하게 구입하곤 한다. 무 같은 맛이 나면서 아삭하고,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 적은 이 단단한 채소는 그러나 결국 냉장실 안에서 굴러다니기 일쑤다. 콜라비는 피클 재료로 딱이다. 보통 막대 모양으로 잘라 피클을 만들지만 얇게 썰어서 만들면 훨씬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가느다랗게 채를 치거나, 쌈용 무처럼 넓고 얇게 썰어도 된다. 피클이 된 콜라비는 피클이 된 무보다 훨씬 매력이 넘친다. 샌드위치 만들 때 끼워 넣어도 좋고, 토르티야나 타코를 만들 때 듬뿍 얹으면 상큼하고 시원한 맛과 식감을 선사한다. 

    이외에 검은콩(서리태)을 불려 볶은 다음 피클로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 고구마와 단호박처럼 단단한 채소는 살짝 쪄서 피클로 즐긴다. 가지도 살짝 볶거나 말려 피클로 만들고, 버섯은 마늘 향 밴 기름에 볶아 피클로 만들어 먹는다. 양파와 파프리카는 마른 팬에 말랑말랑하게 구워서 피클을 만들면 달착지근하고 부드러운 곁들임 채소로 활용할 수 있다. 

    채소만이 아니다. 청포도, 참외, 수박의 초록색 부분, 사과, 배, 레몬, 오렌지 등도 피클로 만들 수 있다. 과일 피클을 만들 때는 소금을 넣지 않고, 식초와 설탕으로 맛을 내며 생강이나 계피, 정향처럼 단맛과 잘 어울리는 향신료를 넣어 개성을 더한다. 과일 피클은 기름진 고기 요리와 곁들이면 입가심하기에 더없이 좋다. 한두 쪽씩 건져 팬케이크나 토스트에 잼 대신 얹어 먹어도 맛있다. 과일 피클은 채소보다 쉽게 무를 수 있으니 조금씩 만들어 맛있게 빨리 먹을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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