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호

[윤채근 SF] 차원이동자(The Mover) 10-3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지막 탱고

  • 윤채근 단국대 교수

    .

    입력2020-07-13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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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월한 이야기꾼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SF 소설 ‘차원 이동자(The Mover)’를 연재한다. 과거와 현재, 지구와 우주를 넘나드는 ‘차원 이동자’ 이야기로,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는 이 소설 지난 회는 신동아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편집자 주>

    1

    세자르의 셋방은 꼭대기 층이었다. 힘겹게 계단을 올라 방문을 연 순간 인기척을 느낀 세자르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곧이어 방문 옆에서 튀어나온 괴한 둘이 그를 제압하려 했지만 복싱으로 단련된 세자르는 유연한 동작으로 이를 피했다. 왼쪽 덩치의 명치에 레프트 어퍼를 꽂아 넣은 그가 허리 회전을 이용해 잽싸게 오른쪽 꺽다리에게 훅을 날리려던 찰나 강한 타격이 옆구리에 날아들었다. 바닥에 고꾸라진 세자르가 신음하듯 물었다. 

    “너희들 누구냐?”

    2

    자기 방 중앙에 놓인 의자에 결박된 세자르의 머리 위로 두건이 씌워졌다. 그 상태로 두 시간 남짓 지나자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몇 분의 정적이 흐른 후, 사무적이면서도 단단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독일어를 한다니 독일어로 말하겠다. 스페인어가 편한가?” 

    세자르가 고개를 가로젓자 상대가 다시 독일어로 말했다. 



    “부하들이 폭력을 쓴 건 사과한다. 나부터 소개하겠다. 난 지몬 비젠탈이다. 들어봤나?” 

    세자르가 또 고개를 저었다. 비젠탈이 조금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도피한 독일 전범은 날 나치 사냥꾼이라 부르지.” 

    고개를 끄덕인 세자르가 물었다. 

    “그럼 당신들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이요?” 

    세자르 앞에 더욱 바싹 다가선 비젠탈이 대답했다. 

    “맞다. 피의 복수를 맹세한 이스라엘 형제단이라고 해두자.” 

    “내게 왜 이러는 거요?” 

    대답 대신 한숨 소리가 울리고 나서 세자르의 두건이 벗겨졌다. 날카로운 목소리와 달리 비젠탈은 풍만한 몸매에 학자풍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날 속이진 못한다. 명심해라. 지금부터는 대화를 녹음하겠다. 만약 네가 거짓말로 일관한다면 즉결 처분하겠다.” 

    다가온 꺽다리가 비젠탈에게 녹음기를 넘겨줬다. 비젠탈이 녹음기 버튼을 누르자 덩치가 세자르 주변에 비닐을 깔고 권총에 소음기를 끼우기 시작했다. 비젠탈이 말했다. 

    “여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1960년 5월 10일. 시간은 오후 9시 35분. 난 지몬 비젠탈로, 사령관을 대신해 심문한다. 성명은?” 

    세자르가 멍한 표정을 짓자 비젠탈이 다시 물었다.

    “성명은?” 

    “세자르 구티에레즈.” 

    “독일군 출신인가?” 

    “아니요.” 

    “그럼 왜 클레멘트에게 접근했나? 네가 독일군이었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날 도청한 거요?” 

    “질문에 대답만 해라.” 

    고개를 숙인 채 이마를 찡그린 세자르가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다. 

    “리카르도 클레멘트의 정체는 아돌프 아이히만이요. 그를 체포하려 접근했소.” 

    천천히 팔짱을 낀 비젠탈이 음산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우린 아이히만 주변을 두 달 넘게 감시해 왔다. 최종적으로 신분이 확인된 게 불과 일주일 전이다. 이 작전을 아는 나라는 지구상에 이스라엘뿐이고. 내가 알기론 세자르 구티에레즈란 이름의 모사드 정보원은 없다. 소속은?” 

    비젠탈을 한참 응시하던 세자르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독자적으로 움직인다면 믿겠소? 난 혼자 놈을 쫓던 중이요.” 

    덩치가 세자르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자 비젠탈이 손짓으로 제지했다. 버튼을 눌러 녹음을 중단한 그가 부하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은 비젠탈이 의자를 가져와 세자르 앞에 놓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힘 빠진 목소리로 세자르가 물었다. 

    “난 놈을 아주 오래 추적해 왔소. 오늘 와인 바에선 내게 경계를 푼다는 걸 느꼈고. 모사드 쪽에서 날 이용하면 어떻겠소?” 

    비젠탈은 대답 없이 세자르의 두 눈을 끊임없이 탐색했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문 그가 라이터를 켜며 물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나치 전범이 아주 많지. 아이히만은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데려가 재판에 회부할 거야. 그런데…, 내가 노리던 목표는 따로 있어. 요제프 멩겔레!” 

    “죽음의 천사 말이요?” 

    “그래. 겉은 친절한 의사였지만 수없이 많은 유대인을 생체실험 도구로 활용한 악마였지. 난 그 악마를 잡고 싶어.” 

    세자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연기를 내뿜은 비젠탈이 말을 이었다. 

    “난 멩겔레를 잡고 그다음에 아이히만을 잡으려 했어. 네가 망쳐놨지.” 

    “내가…, 이 세자르가 말이요?” 

    “맞아. 교활하고 민첩한 놈은 너무 민감해서 사소한 변화만 느껴도 바로 사라져. 몰랐나? 얼마 전 아이히만을 찾아온 늙은 사업가가 멩겔레였어. 우린 원거리에서 끈질기게 관찰만 해왔거든. 근데 네가 나타난 거야. 누가 봐도 모사드처럼 굴면서 말이지.” 

    “나 때문에 멩겔레가 사라졌다고?” 

    “그래. 네가 몇 주 전부터 아이히만을 감시했잖아? 멩겔레가 그걸 눈치챈 거야. 이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벗어났어. 놈을 잡으려면 또 한 세월 낭비해야 한다고! 빌어먹을!” 

    “미안하오.” 

    다시 담배 연기를 뿜어내던 비젠탈이 냉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어쩔 수 없어. 아이히만이라도 잡을 거야. 근데 너 말이야. 나치 전범을 뒤쫓는 미국 끄나풀이 아니라면 도대체 정체가 뭐지? 아이히만을 노리는 이유가 따로 있나?” 

    결박된 몸을 조금 비틀어 여유 공간을 만든 세자르가 힘겹게 대답했다. 

    “당신이 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난 외계에서 온 추격자요.”

    3

    꽃집에 들러 가족에게 줄 장미를 산 클레멘트는 와인 바 앞을 지나다 전날 사귄 복서 세자르와 눈이 마주쳤다. 환하게 미소 지은 클레멘트는 두 손을 번쩍 들어 독일어로 인사한 뒤 세자르 앞자리에 앉았다. 장미꽃 다발을 테이블 위에 놓은 그가 와인을 주문하고 고개를 앞으로 길게 빼더니 교활한 표정으로 웃으며 속삭였다. 

    “하일 히틀러!” 

    상대를 그윽이 노려보던 세자르가 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눈치챈 건가?” 

    자기 잔에 와인을 따르며 클레멘트가 대답했다. 

    “어젯밤 멩겔레 전화를 받았어. 낯선 사람이 다가올 거라더군. 뭐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어.” 

    자기 잔에 와인을 따라주는 상대를 노려보며 세자르가 다시 물었다. 

    “멩겔레가 두더지인가?” 

    와인 한 모금을 마신 클레멘트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히틀러에서 멩겔레로 갈아타고 여기로 와 있더군. 난 뭐 갈아탈 필요가 없었어. 베를린 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가짜 여권을 만들었지. 아르헨티나는 나치들 천국이야. 탱고 춰봤나?” 

    세자르가 고개를 젓자 와인 한 잔을 더 마신 클레멘트가 말했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 탱고를 추고 싶은데. 기다려줄 거지?” 

    고개를 끄덕인 세자르가 맞은편 골목길 모퉁이에 서 있던 비젠탈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간파한 클레멘트가 가는 목소리로 재빨리 속삭였다. 

    “누가 또 있군? 그렇지? 누구지? 파동이 강한데. 아무래도 마지막 탱고는 다음에 춰야겠어. 빨리 쫓아와.”


    윤채근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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