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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쌉사래, 은은한 단맛...헝가리 할머니의 밀크티

김민경 ‘맛 이야기’㉓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고소, 쌉사래, 은은한 단맛...헝가리 할머니의 밀크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또렷해지는 기억이 있다. 어제 점심에 뭘 먹었는지, 거래처에 간다고 한 날이 수요일인지 목요일인지, 지금 제작 중인 책의 날개 너비가 100mm인지, 110mm인지는 매번 까먹으면서 말이다. 게다가 기세가 꺾이지 않는 전염병, 잔뜩 화가 난 지구가 쏘아대는 기이한 날씨, 추풍낙엽 같은 회사 매출, 통나무를 닮아가는 몸 모양,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 골똘히 빠지는 요즘, 문득문득 옛 기억이 자주 튀어나온다. 그럴 때면 차 한 잔 앞에 두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기억에 남은 차(茶)의 시간들

좋은 보이차는 떫지도 쓰지도 않으면서 개운하고 향긋한 맛을 낸다. [GettyImage]

좋은 보이차는 떫지도 쓰지도 않으면서 개운하고 향긋한 맛을 낸다. [GettyImage]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곡차(술)와 차를 마셨는지 헤아릴 수 없다. 내 손이 내 몸으로 길어 올린 수많은 잔 중에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다. 

학교 선배를 졸졸 따라 경남 합천 해인사에 간 적이 있다. 등산과 산사 둘러보기를 좋아한 아빠 덕에 어릴 때부터 절에 자주 ‘놀러’다녔던 터라 사찰 분위기에 익숙해 가볍게 따라나섰다. 선배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해두는 ‘장경각’을 돌보는 스님과 아는 사이였다. 마침 공부하는 학생들이 쓰는 방 한 칸이 비어 하루 묵울 수 있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선배와 스님 거처에 들렀다. 어렵고 어색해 입을 앙다물고 두 분 이야기에 끄덕끄덕, 배실배실 웃기만 했다. 스님은 묵은 나무껍질 같은 차를 작은 다관에 가득 넣고, 넘치게 물을 부어, 진하게 우린 차를 내주셨다. 고동색을 띄면서도 잔 바닥이 보이도록 맑은 차는 혓바닥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입안이 풍선을 문 것처럼 가득 채워지고, 녹진하고도 생생한 나무 향이 났다. 떫지도 쓰지도 않은데 입은 개운해지고, 먼 여행에 노곤했던 몸이 바르게 서는 기분이 들고, 관자놀이부터 눈까지 쨍하게 맑아졌다.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 보이차다. 

한 모금 겨우 되는 차를 홀짝홀짝 마시니 스님도 쉼 없이 잔을 채워주셨다. 그 밤 해인사 계곡에 흐르는 물과 바람 소리를 들으며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상한 것은 ‘불면’의 고통이 없었다는 점이다. 티끌 하나 없는 맑은 유리 같은 정신으로 즐겁게 밤을 보냈다. 물론 오전 3시에 일어나 새벽 예불에 동참했으니 밤이 길진 않았지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마신 밀크티

우유의 고소함과 차의 쌉싸래함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밀크티. [GettyImage]

우유의 고소함과 차의 쌉싸래함이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밀크티. [GettyImage]

두 번째 기억에 남는 차는 살면서 제일 무서웠던 밤으로 꼽히는 날 마신 밀크티다. 때는 집 떠나면 인터넷도 손쉽게 사용할 수 없던 1999년 여름이다. 헝가리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승무원에게 여권과 유레일패스를 빼앗겼다. 내가 유레일패스에 메모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그 패스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어리석게도 패스와 여권을 순순히 내준 나와 친구는 이미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아오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승무원이 요지부동. 결국 1인당 100달러씩 벌금을 내는 이상한 방식을 통해 여권과 패스를 돌려받았다. 국제 미아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은 공포에서 풀려난 순간이다. 



부다페스트 역에 내려 역무원에게 항의했지만 ‘나쁜 승무원을 만난 불운의 여행객’이라는 위로만 돌아왔다. 여행 경비의 커다란 부분을 빼앗기고 마음은 불안함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던 그날은 마침 한국의 추석이었다. 여행 절반에 다다랐지만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이유없이 무서운 밤길을 걸어 숙소에 도착했는데 버터처럼 노르스름하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을 곱게 묶은 할머니가 우리를 맞았다. 잔뜩 풀이 죽은 우리를 보며 ‘무슨 일이 있냐’ 물으시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헝가리식 소고기 스튜인 굴라시 두 그릇과 작은 주전자 가득 끓인 밀크티를 차려주셨다. 얼마나 놀랬느냐, 다른 일은 없었느냐, 집에 전화는 했느냐, 돈은 남았느냐, 다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등 서로 아는 만큼의 영어를 써가며 밤이 늦도록 차와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 먹던 밀크티는 우유도, 차도 아주 진하고 달아서 한 잔이면 물리곤 했다. 헝가리 할머니의 밀크티는 밀도와 농도가 성긴 맛, 그럼에도 은은한 향, 고소함과 쌉싸래함이 부드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연하게 단맛도 돌아 바짝 말라버린 입에 편안한 여운을 남겼다. 한 잔 두 잔 마시니 경직된 몸이 풀리고, 마음의 불안도 점점 지워졌다. 도무지 잠들지 못할 것 같은 날이었는데 눈 감은 기억도 없이 잠에 푹 빠졌다.

언젠가 마실 쑥차 덩어리

연두와 노랑 중간색을 띠는 쑥차에서는 향긋한 봄 쑥 내가 난다. [GettyImage]

연두와 노랑 중간색을 띠는 쑥차에서는 향긋한 봄 쑥 내가 난다. [GettyImage]

집에 아주 오래 묵은 차 뭉치가 하나 있다.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열성 팬이었던 아빠가 손수 채취하고 덖어 만든 쑥차다. 한동안 쑥차 만들기에 빠진 아빠는 봄 산, 좋은 자연 속으로 여행만 갔다 하면 보들보들 연한 털이 난 어린 쑥 찾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깨끗한 곳에서 딴 어린 쑥을 집에서 데치고 말리고 여러 번 덖는 일을 봄 내내 하셨다. 완성된 쑥차는 덩어리 덩어리 지어 한지에 곱게 싸 선물도 하고 가족이 함께 마셨다. ‘아무리 일이 바빠도 차 한 잔 마시는 시간은 꼭 가지라’며 딸 가방에도 작은 덩이를 늘 넣어주셨다. 여행 책을 쓰느라 밤새우기를 밥 먹는 것보다 자주 하던 때라 여러 밤을 쑥차와 함께 했다. 

다기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프렌치 프레스(커피 추출 도구)에 잘 마른 쑥차를 듬뿍 넣고 따끈한 물을 부어 잠깐 우린다. 연두와 노랑 중간색을 띤 쑥차는 향긋한 봄 쑥 내가 나고, 맛은 어린 잎 녹차에 고소한 맛, 쌉싸래한 맛을 조금씩 더한 것 같다. 마실수록 향은 묵직해지고 맛은 보드라워진다. 밤을 새우면 으레 배가 부글부글하는데 쑥차를 마시면 속이 편하고, 손발도 덜 붓는 기분이 들어 밤마다 곁에 두며 눈에 진물이 나도록 일했던 기억이 난다. 

수 년 간 ‘쑥영감’으로 불리던 아빠 건강이 악화되면서 쑥차 제조는 멈췄다. 집에 한 덩어리가 있는데 감히 풀 생각을 못한다. 지금은 몇몇 차 도구를 갖추고 보이차, 홍차, 대홍포(우롱차의 한 종류) 등을 척척 내려 먹지만 아빠가 남겨 둔 쑥차는 살면서 제일 좋은 날 마시고 싶어 미루고 미루는 중이다.



신동아 2020년 9월호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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