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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구이저우성

天·地·人 다 가난해도 욕망은 넘쳐난다

貴 마오타이酒의 고향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天·地·人 다 가난해도 욕망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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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이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이곳 주민들이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속 편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열풍은 구이저우인에게 욕망을 선물했다. 도로도 나기 전에 너나없이 자동차를 사들이는 바람에 성도(省都) 구이양은 베이징 다음으로 자동차 구매 제한 도시가 됐다.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구이저우(貴州)성 구이양(貴陽)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오후 5시에 출발, 다음 날 새벽 6시에 도착하는 밤기차였다. 저녁을 못 먹어 도시락 판매원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저녁 6시쯤 되자 승무원들이 도시락을 들고 지나다녔다. 한 여성 승무원에게 “도시락을 어디서 사요?”라고 묻자 뭔가 말을 했는데 중국어가 아닌 듯했다. 내가 멍하게 있으니 표준어로 말했다. “이건 승무원 도시락이에요.”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하는 게 꼭 외국인이 구사하는 중국어처럼 들렸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의 그녀는 구이저우 소수민족 출신일까. 구이양에 가는 사람은 구이저우 사람밖에 없다고 여겨 그곳 방언을 썼을까.



낙오자의 땅 ‘그레이저우’

구이저우성의 약칭은 ‘귀할 귀(貴)’자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아주 가난한 땅이다. 이곳에선 오히려 ‘모든 것이 귀하다’고 해야 할까. 구이저우엔 “하늘은 3일 맑은 날 없고, 땅은 3리 평탄한 곳이 없으며, 사람은 3푼 돈도 없다(天無三日晴,地無三里平,人無三分銀).” 천(天)·지(地)·인(人)이 모두 가난하다. 인구도, 면적도 보잘것없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중국에서 가장 낮다. 오지를 좋아하는 서양 여행자들조차 흐린 날씨에 넌덜머리가 나는지 ‘구이저우(Guizhou)’ 대신 ‘그레이저우(Greyzhou, 잿빛의 주)’라고 한다.
광시(廣西)의 습한 공기가 구이저우의 아열대 고원에서 비와 구름으로 변해 이곳 날씨는 대체로 흐리다. 강수량은 많으나 땅속으로 사라지는 물이 많아 수리시설을 잘 갖추지 않으면 사용할 물이 풍족하지 않다. 무엇보다 평지가 3%밖에 안 된다. 농사짓기가 힘들다. 드넓게 펼쳐진 카르스트 지형은 자못 아름답지만 윈난(雲南)·광시의 명성에 밀려 관광객도 적다. 국경지대가 아니라 교역의 이점도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버려진 땅이었다. 소외된 땅은 소외된 이들의 안식처가 됐다. 한족에게 내몰린 이민족들, 주류에게 밀려난 낙오자들이 이 땅에 모였다.
구이저우는 중원의 당·송과 윈난의 남조·대리 사이에 끼인 땅으로 힘의 공백지대였다. 이 균형은 원나라가 등장하며 무너진다. 원나라는 남송과 대리를 정복하며 구이저우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그러나 중앙집권세력이 있어 지배층만 교환하면 되는 윈난과 달리 구이저우엔 이렇다 할 중앙집권세력이 없었다. 정복하기는 쉬웠지만 관리하기는 까다로웠다. 원은 일단 지역 유지들에게 관직을 주고 중앙 조정으로 포섭하는 토사(土司) 제도를 실시한다.
원·명·청 700여 년에 걸쳐 구이저우는 중국에 소화된다. 토사 제도로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한 후 토착 세력인 토사를 중앙 조정에서 파견한 유관으로 바꿨다. 이를 개토귀류(改土歸流)라 한다. 친중국 토착세력을 통한 간접지배에서 직접통치로 전환한 것. 토사 지역과 중국 내지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한인(漢人)은 경계를 넘지 않고, 만인(蠻人)은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던” 지역에 한인이 대거 유입됐다. 개토귀류 전 구이저우에는 극소수의 한인만 있었으나, 교류가 확대되면서 결국 한인이 주류 거주민으로 변했다. 오늘날 3000만 구이저우 인구의 62%가 한족이다.



끈질긴 저항, 끝없는 반란

말은 간단해 보여도 통합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먼저 대규모의 주둔군이 배치됐다. 오늘날 구이저우에서 비교적 유명한 도시 중에는 군사도시로 출발한 곳이 많다. 후난과 윈난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전위안(鎮遠), 칭옌구전(青岩古鎮), 안순(安順)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안순의 천룡둔보(天龍屯堡)는 명 태조 주원장이 파견한 30만 둔전병 가운데 현지에 눌러앉은 이들이 만든 마을이다. 툰바오인(屯堡人)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한족이기는 하지만, 600여 년이나 명나라의 말과 옷,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바람에 현대 중국인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툰바오인은 중국의 ‘57번째 민족’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강압적인 지배와 수탈에 항거하는 소수민족의 반란이 이어졌다. 큰 반란만 꼽아보자. 먀오족(苗族) 토사 양응룡의 반란은 임진왜란, 몽골족 보바이의 반란과 함께 명 만력제의 3대 전쟁(萬曆三大征)으로 꼽힌다. 건륭제가 갓 즉위한 1735년의 반란 진압 때 청 조정의 집계로 1만8000여 지방민이 학살되고, 1224개 마을이 불에 탔다. 1795년의 먀오족 대반란은 청의 상당한 전력을 소모시켰고, 연달아 일어난 백련교의 난 이후 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구이저우의 반란은 명·청 양대 제국의 쇠퇴기를 이끈 도화선이었다.
호락호락하지 않고 단결력이 높은 먀오족은 대중매체에서 곧잘 희화화된다. 영화 ‘쉬즈더원(非誠勿擾)’의 주인공 진분은 돈을 벌자 짝을 찾기 위해 연달아 인터넷 미팅을 한다. 그가 만나는 별의별 여자 중에서도 가장 희한하게 나오는 게 먀오족 여자다. 은장신구를 치렁치렁 단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서 결혼하면 진분이 무조건 데릴사위로 자기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집에 어떻게 가요?”
“일단 비행기로 쿤밍에 도착해서 버스로 24시간 거리인 몽자에 간 다음 다시 차를 바꿔 타고 병변까지 가요. 거기서 다시 하루 종일 경운기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면 집이에요.”
“혹시 살다가 사이가 안 좋아지면 이혼은 가능하겠죠?”
“오빠가 선생님 다리를 분질러놓고 말 거예요.”
코믹 영화라 악의 없이 만든 장면이겠지만, 먀오족이 낙후한 오지에 살고, 희한한 전통을 고집하며, 야만적이라는 전형적 이미지를 근거로 한 연출이다.
그러나 한족이 먀오족의 습속을 비웃는 건 부조리하다. 먀오족이 왜 오지에 살까. 한족에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왜 은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까. 한족이 침략할 때 쉽게 피난 가기 위해서다. 먀오족은 한족에게 밀려 계속 피난을 가야 했다. 피난 때마다 짐을 챙기기 힘들어 먀오족은 전 재산을 은장신구로 만들어 늘 걸치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든 제 한 몸만 건사해서 피난 가면 되니까.

먀오족과 한족의 투쟁 역사는 장장 3000년에 달한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중원의 황제(黃帝)는 동쪽의 치우(蚩尤)를 격파하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다. 중원의 한족이 동이(東夷) 세력을 몰아냈음을 의미한다. 치우가 죽으며 피를 단풍나무에 쏟아 매년 가을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게 된 후 먀오족은 기나긴 이주의 역사를 시작한다. 동북쪽에서 정반대편인 서남쪽까지의 긴 여정, 황하와 장강을 건너고 숱한 산을 넘었다. 정착해서 살 만하면 한족들이 와서 다시 밀려나고, 또 이주해서 살 만하면 다시 밀려나는 삶이 반복됐다.





오지 중 오지

밀려나고 밀려난 끝에 정착한 곳이 구이저우성이다. 그중에서도 산골짜기에 먀오족 최대의 마을인 ‘시장 천호 먀오족 마을(西江千戶苗寨)’이 있다. 시장은 구이저우 동남부의 중심지 카이리(凱里)에서 직선거리 20km에 불과하지만, 총알택시로도 1시간이나 걸렸다. 굽이굽이 산길을 빙빙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포장도로가 잘 깔린 지금도 이 정도니 길도 제대로 없던 옛날에는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을 것이다. 더 이상 외부 세력에 시달리지 않고 피난도 가지 않으려고 이토록 산속 깊숙이 콕 박혀 살았을까.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란 만만찮다. 구이저우 소수민족들의 문화에선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먀오족은 은이나 나무로 된 소뿔 혹은 큰 모자를 써서 머리를 커 보이게 한다. 조상인 치우가 전쟁의 신으로서 머리에 소뿔이 있었다는 전설도 있지만, 실용적인 면에서 보자면 숲 속에 사는 동물을 쫓기 위해서였다.
제한된 자원으로 살아남아야 하기에 소수민족의 삶은 매우 생태친화적이다. 환경과 인간의 삶이 균형을 이루며 지속가능한 생활을 이어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둥족(侗族)의 삶을 잘 그려낸 영화 ‘군라라의 총(滚拉拉的枪)’을 보자. 바사(岜沙) 마을의 둥족은 멜대 한 짐만큼만 나무를 베서 나를 수 있다. 소년 군라라가 수레로 나무를 옮기자 촌장은 일장 훈시를 한다. “수레로 나무를 나르다보면 트럭으로 나르고 싶어지고, 트럭으로 나르다보면 결국 기차로 나무를 나르고 싶어질 게다. 그렇게 욕심이 커지면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내 결국 우리 삶의 보금자리인 숲이 사라지고 말 게야.” 군라라는 첩첩산중 산골에서 읍내까지 멜대로 나무를 지고 걸어서 운반한다. 그 대가로 고작 5위안을 받는다. 전통을 따르는 소수민족의 삶은 이처럼 고단하다.
그나마 이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잔리(占里) 마을의 둥족은 대대로 철저하게 산아제한을 실시해왔다. 전통사회에서는 보통 노동력을 투입하는 만큼 살림이 나아지기에 다산을 장려하지만, 잔리 마을은 가용자원이 너무 모자라 700명이 좀 넘는 인구를 부양하기 힘들다. 맬서스의 덫이 불과 700명부터 작동하기에, 이들은 ‘160호 700명’의 인구 제한을 지키기 위해 피임과 낙태술을 발전시켰다.
잔리마을의 서사시에 따르면 이들은 원래 광시에 살았다. 인구가 점차 늘자 “총각들이 골목에 가득 차고 처녀들이 마을에 가득 차게 됐다.” 인구가 늘어 식량이 부족해지자 안으로는 분쟁, 밖으로는 전쟁이 일어났다. 피난 끝에 잔리에 정착한 이들은 오늘도 “아들 많으면 경작할 논이 없으니 며느리 얻지 못해, 딸 많으면 은이 없으니 시집 못 보내지…”라고 노래하며 작은 마을을 지키고 있다.



전통과 정체성의 미래


그러나 환경이 열악할수록 힘을 합해야 할 필요도 커진다. 없는 살림에도 단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단적인 예가 먀오족의 흘고장(吃牯臟) 행사다. 흘고장은 13년에 한 번 열리는, 지역 마을들의 연합 제사다. 적게는 30~40마리, 많게는 200~300마리 소를 잡고 조상에게 “여기 당신의 자손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디 보호해주세요”라고 부탁한다. 이때 먀오족은 전통의상을 입고 여러 먀오족을 만나며 먀오어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모두 같은 조상의 후손이잖아요”라며 사이좋게 쇠고기를 나눠 먹는다. 제사를 주관한 마을은 경제적으로 크게 휘청거릴 지경이지만, 먀오족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문화를 보존하며 평소 흩어져 살던 다른 먀오족들과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중요한 행사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아름답지만 얼마나 지속될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외부의 압력, 중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 강요 등도 있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인간의 욕망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정치, 종교, 철학, 사회규범 등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제어했다. 그러나 생산력이 발달한 자본주의 체제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없던 욕망도 갖게끔 부추긴다. 갈증이라는 ‘본능’을 코카콜라라는 ‘상품’을 소비하는 욕구로 전환시키는 게 자본주의의 요체 아닌가.

전통가옥은 나무집이다. 주변에서 가장 조달하기 쉬운 건축자재가 나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집은 화재에 취약하다. ‘군라라의 총’에서 군라라는 여행 중 화재가 난 집을 본다. 사람들은 불을 끌 생각을 전혀 못한다. 물이 없기 때문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살림살이 몇 가지만 옮긴 뒤, 정든 집이 무너져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뿐이다. 실제로 디먼 둥족 마을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마을의 중심인 고루(鼓樓)를 비롯해 상당 부분이 전소됐다. 전통 방식의 나무집을 지으면 정부 보조금이 나오지만 마을 주민들은 벽돌집을 짓고 싶어 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내구성, 안전성, 생활편의성이 나무집과 비교할 수가 없는데.



‘딸’ 관광업, ‘어머니’ 전통문화

2008년 디먼을 방문한 미국 작가 에이미 탠은 두 10대 소녀가 둥족 서사시를 배우기 싫어하는 것을 본다. “그 노래는 지루해요. 할 일도 많은데 싫어하는 것까지 어떻게 배워요?” 민족의 유래를 담은 서사시는 소중한 문화유산이지만, 소녀들의 관점에선 시험에도 안 나오고, 만화처럼 재밌지도 않고, 가요처럼 신나지도 않은 옛날 노래일 뿐이다. 당시 디먼 주민 2372명 중 절반이 넘는 1200명이 이미 외지에서 일하고 있었다. 소녀들에게는 서사시를 외우는 것보다 외지에서 더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지식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현지 문화는 지역 환경에서 가장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온 결정체다. 현지인들이 그저 아름답기 때문에, 외부인들 보기 좋으라고 문화를 고수한 게 아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했다. 소를 치고 농사를 짓는 것보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편이 훨씬 편하고 수입도 좋다.
중세 천문학자 케플러가 “딸인 점성술이 빵을 벌어오지 않았다면 어머니인 천문학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라고 했듯, 현대사회에서는 딸인 관광업이 돈을 벌지 않으면 어머니인 전통문화는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동도서기(東道西器) 운동은 당초 주창자들의 예상과 달리 단순히 서양의 기술만을 수입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서양의 문화, 정신, 사회제도까지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늘날 소수민족 역시 생활용품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외부인의 눈에는 색다른 전통의상이지만, 현지 아이들은 촌스럽다고 여긴다. 인구 통제를 엄격히 해온 잔리 마을에서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성의 손도 잡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청소년들은 TV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사춘기 때부터 연애하고 싶어 한다.
2007년 ‘오마이뉴스’ 기자는 12세 둥족 소녀를 만난다. 멋진 옷을 입고 첨단 전자기기를 갖고 다니는 관광객을 부러워한 소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가출해서 광둥성 식당에서 일하다 아버지에게 끌려온 경험이 있다. “내년에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다시 광둥에 가서 돈을 벌어 원하는 물건을 모두 살 것”이라던 소녀는 이제 20대 처녀가 됐으리라. 그녀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원하던 대로 광둥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 멋쟁이 처녀가 됐을까.



가난하지만 비싼 도시

많은 관광객이 구이저우를 여행하고서 이곳 주민들을 일컬어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속 편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사람이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삼국시대 오나라의 마지막 군주 손호는 정치를 돌보지 않고 사치에 열을 올렸다. 가혹한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상류사회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선망했다. 화핵은 당시의 망국적 세태를 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세상은 점점 더 빈곤해져 가는데, 사람들은 더욱 부유해지려는 욕망에 발버둥칩니다. 집에는 쌀 한 항아리 없는데 밖에서는 비단옷을 입고 쓸모없는 장식을 하는 등 사치에 매달립니다.” 1800년 전이나 현재나 사람의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2014년 구이저우의 1인당 GDP는 4297달러. 남미의 파라과이, 몽골과 비슷한 수준이고, 태평양의 작은 섬 통가 왕국, 아프리카의 튀니지보다도 떨어지며, 톈진의 25%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성’이라는 낙인은 구이저우인에게 큰 열등감을 안긴다. 가난하기에 사치에 대한 욕망이 오히려 더욱 크고, 변두리에 있기에 외지에 대한 선망이 더욱 크다.
성도 구이양 사람들은 ‘소득은 아프리카 수준, 소비는 유럽 수준’이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3000위안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30위안의 비싼 커피를 보란 듯이 마신다. 자동차, 명품백 같은 사치재 소비 열풍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 2010년 구찌(Gucci) 구이양 매장이 첫 오픈한 날 400만 위안의 매출을 올려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도로가 확충되기도 전에 자동차 구매가 폭증해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구이양은 베이징에 이어 중국에서 두 번째로 자동차 구매 제한 도시가 됐다.
스스로 ‘구이저우의 베이징’이라 여기는 구이양 사람들은 베이징과 같은 생활을 꿈꾼다. 2004년 월마트가 구이양에 문을 열었다. 당시 토착 상점인 다창룽(大昌隆)은 월마트보다 가격도 쌌고 교통도 편리했지만, 월마트에만 사람이 몰리는 바람에 영업을 중지할 상황에 이르렀다. 이유를 묻자 시민들은 답했다. “월마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라 베이징, 상하이 지역에 일찍이 들어왔다. 지금까진 구이양이 가난해서 들어오지 않았는데, 마침내 구이양에도 들어왔으니 물건을 안 사고 그냥 가서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사치하지 않는다면 살림이 나아질까. 2015년 10월 구이양에 처음 와서 쇠고기면(牛肉麵)을 먹었을 때 다소 놀랐다. 싼 음식의 평균가가 10위안 정도로 시안이나 청두 등 쟁쟁한 대도시와 차이가 없었다. 1인당 GDP가 낮으니까 물가가 쌀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나중에 현지인에게 들으니 구이양은 소득은 적어도 물가는 결코 싸지 않았다. 이 식당에서 만난 활달한 종업원이 맘에 들어 SNS 웨이신 친구를 맺었다. 그녀는 얼마 뒤에 웨이신에 이런 글을 썼다. “며칠 뒤면 생일이다. 그렇지만 손안에 마오 할아버지가 없다.” ‘세종대왕님이 지갑에 없다’는 말처럼 ‘돈이 없다’는 뜻이다. 그녀는 한 달 내내 부지런히 일해봐야 맘에 드는 옷 한 벌 사기에도 빠듯하다며 삶의 고충을 털어놨다.
구이저우의 저력은 뭘까. 산이 많은 만큼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경제개발이 늦은 탓에 자연과 소수민족의 전통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관광업에 유리하다. 구이양은 시내 공원에서도 원숭이를 볼 수 있을 만큼 삼림이 풍부하고, 여름에 에어컨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선선해서 중국 제1의 피서도시로 손꼽힌다. ‘산림지성 피서지도(森林地城 避暑之都)’라는 별명도 얻었다.
황과수 폭포는 일찍이 대여행가 서하객이 “흰 물이 저절로 하얀 꽃으로 변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직포기도 없이 수놓아지네”라고 찬탄한 아시아 최대의 폭포다. 남미의 이과수, 북미의 나이애가라, 아프리카의 빅토리아와 함께 세계 4대 폭포의 반열에 든다.
75km의 마링하 대협곡은 너비 50~150m, 절벽 높이 150~200m의 웅장한 위용을 자랑한다. 두 봉우리가 유방 같은 쌍유봉(雙乳峰)은 ‘대지의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방’이라는 별명을 지녔다. 거리와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져 “도로변 관봉정에서 보면 20대 여인의 유방처럼 단단해 보이고, 300m 거리에서 보면 30~40대 유부녀의 성숙한 유방처럼 보이고, 500m 거리에서 보면 60대 할머니의 유방처럼 보인다.” 매년 9월에 가슴왕 선발대회도 연다.



마오타이酒 닮은 운명

다양한 민족문화와 축제로 이벤트 달력도 풍성하다. 랑더(郎德) 먀오족 마을은 ‘1년 중 100일이 축제’로 유명하며, 포의족은 장탁연(長桌宴)을 벌인다. 짧게는 몇 m, 길게는 200m에 이르는 긴 탁자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는 축제다. 개를 즐겨 먹어 “포의족의 말소리가 들리면 개가 도망간다”는 속담도 있다. 둥족 마을은 ‘시의 고향, 노래의 바다(詩之鄉,歌之海)’로 유명하다. “말할 줄 알면 노래하고, 걸을 줄 알면 춤을 춘다”고 할 만큼 춤과 노래를 즐긴다. 젊은 남녀들의 목소리가 청량하고 높아 ‘하늘의 퉁소 소리처럼 들린다(天籟之音)’는 명성을 얻었다.
구이저우의 가장 유명한 특산물은 단연 마오타이주(茅台酒)다. 1972년 마오쩌둥이 닉슨과 중미수교조약을 맺을 때 마신 ‘국주(國酒)’로 유명하다. 마오쩌둥은 대장정 때 마신 마오타이주를 못 잊어 국가 행사에서 마오타이주를 쓰게 했다. 선조가 임진왜란 피난길에 먹은 도루묵을 못 잊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그가 마오타이주를 즐긴 건 그저 술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오쩌둥은 대장정 중 구이저우의 쭌이(遵義)에서 비로소 당권을 장악했으니, 그에게 마오타이주를 마시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의 순간을 돌이켜보는 것이었을 게다.
속사정이야 어쨌건 마오쩌둥 덕분에 마오타이주는 명성을 얻게 됐으며, 비싼 값에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 됐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구이저우의 마오타이 판매점에서 80년산 한 병이 12만 위안인 것을 보고 반문한다. “한 병에 1700만 원짜리 술, 누가 마시는 것일까?”
마오타이주는 뇌물과 재테크 수단으로 변질됐다. 부패 척결 과정에 중국군 장성의 집에서 1만 병의 마오타이주가 발견되자 시진핑은 진노했다. “전쟁 준비에 이런 물자가 필요한가?” 2012년 이후 사정(司正)의 된서리를 맞아 마오타이 가격이 폭락했다. 주위의 여론에 따라 좌지우지된 마오타이의 운명은 고향 구이저우와 묘하게 닮아 보인다.



김 용 한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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