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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허난성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豫 ‘모든 것이 시작된 곳’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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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조조가 허난의 쉬창(許昌)을 근거지로 삼은 이유도 중원을 기반으로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군웅할거 시대에 중원은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조조는 그 누구보다 많은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북쪽의 원소와 오환·선비족, 동쪽의 유비와 여포, 남쪽의 원술과 유표, 서쪽의 장로와 마초 등 주변의 강적을 모두 평정하자 조조는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압도적인 세력을 구축하게 됐다.

하·상·주부터 송까지 중원은 명실상부한 천하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다. 북방 유목민족이 득세하고 강남이 개발되며 중국의 중심은 동쪽으로 옮겨갔다. 원(元) 이후 동북부 베이징은 정치의 중심, 동남부 강남은 경제의 중심이 됐다.

중원의 영광이 사라지고 오욕의 역사가 시작됐다. 명판관 포청천이 활약하던 북송의 화려한 수도 카이펑은 2700년 동안 전쟁과 천재지변으로 118번 진흙탕을 뒤집어썼고, 궁성까지 진흙 속에 파묻힌 것이 일곱 차례나 된다. 전쟁, 수재, 가뭄, 정부의 수탈, 기근…이 모든 일이 ‘종합선물세트’로 터진 사건이 있다. 바로 1942년의 대기근이다.



“人肉 먹은 자도 굶어 죽었다”

중일전쟁에서 밀리던 장제스는 1938년 허난 화위안커우(花園口)의 제방을 비밀리에 폭파했다. 물로 병사를 대신한다는 작전이었지만, 일본군의 진격을 막지도 못했고 허난 주민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89만 명이 사망했고, 800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1250만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더욱이 허난의 비옥한 농토 8000㎢가 황폐화하며 더욱 큰 후폭풍이 몰아닥쳤다. 수재에 가뭄, 노동력 부족이 겹쳤다. 방치된 땅에서 엄청난 메뚜기떼가 날아들어 간신히 키운 작물을 먹어치웠다.



여기까지라면 그나마 대참극은 피했을 것이다. 국민당의 부정부패는 상황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국민당은 허난성을 구제하기는커녕 오히려 수탈했다. 허난성은 징병수 전국 1위(260만 명), 곡물 징수 전국 2위였다.

곡물 징수 1위인 쓰촨은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불릴 만큼 물산이 풍부하고 후방인 데다 날씨도 좋아 농사에 문제가 없었음을 감안하면 허난이 얼마나 가혹하게 수탈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부사령관 탕언보의 착취가 가장 심해서 허난인들은 ‘수해, 가뭄, 메뚜기, 탕언보’를 4대 해악으로 꼽았다. “적군에게 불타 죽는다 해도 탕언보 부대가 들어오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허난이 현지 사정을 탄원하자 파견 된 국민당 관료는 현지조사를 하고도 중앙의 뜻을 전했다. “허난성에 재난이 닥친 것은 사실이지만, 군용 식량은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 어떤 관료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주민이 죽더라도 땅은 여전히 중국 땅이지만 군대가 굶어 죽으면 일본군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다.”

대기근의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전 밀과 좁쌀은 한 근에 0.6위안이었지만, 1943년 봄에는 300위안으로 뛰었다. 집안의 모든 물건을 내다 팔고도 “먹을 것이 없던 사람들은 배추를 팔 듯 자식을 팔았다.” 너도나도 사람을 팔자 사람값이 옷이나 가구 값만도 못했다. 나중에는 팔려 해도 팔리지 않자 어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떻게든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그냥 버리고 갔다. 허난에서 희망을 잃은 주민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기러기 똥을 먹고, 흙을 먹고, 가죽을 끓여 먹고, 사람 고기를 먹은 자들도 결국 모두 굶어 죽었다.” 허난 대기근은 일본군이 점령한 40여 군데 현을 제외한 국민당 통치지역 통계로만 300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대참사다. 그러나 이런 아비규환 속에서 허난성 정부는 우수한 ‘곡물 및 현물 징수’ 실적으로 중앙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이때 헐값에 땅과 사람을 사들여 더 부자가 됐다.

‘허난상보’ 관궈펑 기자는 1974년 태어난 허난 토박이인데도 대기근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다가, 2009년 말 홍콩 인터넷에 올라온 당시의 기록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아 ‘1942 대기근’을 썼다. 국민당의 큰 오점이라 선전에 활용하기 좋았을 텐데, 왜 공산당은 이 사건을 언급하지 않았을까. 자연재해로 시작했지만 정부의 실책으로 확대된 인재(人災)성 대기근이라는 점에서 공산당 최대 실책인 대약진운동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인류가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은 인간이 역사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헤겔의 독설이 씁쓸하게 떠오른다.



지구인 60명 중 1명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룽먼산 룽먼석굴.

나는 숱하게 중국을 찾아가 길게도, 짧게도 머물며 이 나라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국이 편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 말마따나 ‘더럽고 시끄럽고 황당한 중국’은 한 달만 지내도 매우 피곤해진다.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치는 수준 낮은 중국인들은 중국에 정이 뚝 떨어지게 만든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고막이 찢어질 듯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사람을 마구 밀쳐대며 버스를 탄다. 정말 넌덜머리가 난다.

버스의 2인용 좌석에 앉아 있는데 한 중국인이 옆에 앉았다. 그가 버스 안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게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바지에 음료수를 엎질렀다. 그러나 그는 내게 사과하기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자기 자리만 닦았다. 그때는 정말 ‘화났다’거나 ‘짜증났다’는 점잖은 말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빡쳤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저토록 웅장한 만리장성을 건설하고 정교한 보물을 만들었는지 의아했다.

그러다가 기차여행을 했다. 옆자리에 꾀죄죄한 초로의 아저씨가 앉았다. 아저씨는 자면서 코를 엄청 골아댔다. 한밤중에 달리는 기차 안에서 시끄럽게 코 고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진저리치던 중국인과 수준 높은 중국 문화가 사실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냄새가 나는 것은 씻을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코를 시끄럽게 고는 것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도외시하고 자기만 챙기는 것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겹기 때문이다. 저 많은 인민이 여유를 박탈당하고 헐값에 온갖 고난을 감수하기에 비로소 중국의 놀라운 경제발전,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중국의 눈부신 발전이 놀라운가. 그 화려함을 떠받치는 수많은 중국 민초를, 그들의 험난한 삶을 보면 세상만사엔 공짜가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중국의 성장을 일궈낸 농민공들은 말한다. “우리들은 닭보다 먼저 일어나고, 고양이보다 늦게 잔다. 당나귀보다 힘들게 일하고, 돼지보다 나쁜 음식을 먹는다.”

가장 많은 농민공을 배출한 곳이 바로 허난성이다. 허난은 중원답게 인구가 많은 인구대성(人口大省)이다. 2013년 기준 허난 인구는 9410만 명으로 중국 내 3위다. 1위 광둥성(1억430만 명)과 2위 산둥성(1억 명)은 모두 개혁·개방 정책의 수혜로 인구가 유입된 연안경제권이고, 허난은 그다지 수혜를 보지 못해 인구가 유출된 내륙 지역임에도 근소한 차이로 3위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허난이 단연 1위였다. 중국인 13명 중 1명, 지구인 60명 중 1명은 허난인이다.

이처럼 인구가 많으니 국내총생산(GDP)도 만만치 않다. 2014년 기준 허난의 명목 GDP는 5687억 달러로 중국 내 5위이며 스웨덴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스웨덴 인구는 1000만 명이 채 안 돼 1인당 GDP가 5만 달러인 반면, 허난은 5000달러에 불과하다. 중국 내 31개 지역(홍콩, 마카오, 대만 제외) 중 27위이고, 중동의 요르단 수준이다.

가진 것이 몸뚱이뿐인 많은 허난인은 외지에 나가 일자리를 찾았다. 가난이 죄라고, 허난인들은 중국 안의 이주노동자 신세였다. 더욱이 일을 시켜놓고 임금은 주지 않고 도망가는 ‘먹튀’ 사업가들이 생겨나자 허난 농민공들은 뼈 빠지게 일해놓고도 굶어 죽을 판이었다. 이들이 생계형 범죄자가 되거나 거지가 되자 사방에서 성토가 쏟아졌다. “베이징과 톈진 거지는 대부분 허난 사람이다” “불과 도둑과 허난 사람은 막아라”….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옛 뤄양의 모습을 잘 보전한 뤄양노성(老珹)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베이징부터 후베이 우한까지 대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한복판에 허난이 있음을 보여주는 정저우 2·7광장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북송 시대 수도 카이펑의 운하. 이 운하를 통해 강남의 곡식을 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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