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호

조선의 아버지들

“진정한 孝는 經世濟民” 실천으로 불 밝힌 實學

‘모두의 아버지’ 이익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6-05-02 08: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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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당파 싸움은 밥그릇 싸움이다. 벼슬자리는 적은데, 한자리 하고 싶은 사람은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사상도 이념도 다 중요하지만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는 옛 말씀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치가 깃들어 있다. 이익은 그 이치를 자신의 삶에 적용했다. 세상을 운영하는 근본 가치로도 이해했다.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이익은 누구보다 꼼꼼하고 알뜰하며 부지런한 살림꾼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일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백성의 생계를 걱정했다. 훗날 다산 정약용은 이익을 사숙(私淑)해 실학을 집대성했다. 그런 점에서 이익의 뜻이 세상으로부터 영영 버림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꼿꼿하고 단정한 풍모

    이익의 언행을 전하는 글은 여럿이다. 조카 이병휴가 쓴 ‘가장(家狀)’도 있고, 제자 윤동규의 ‘행장(行狀)’도 있다.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의 ‘묘갈명(墓碣銘)’ 등도 전한다. 이런 글들을 두루 참고해 ‘아버지 이익’의 모습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보자.

    “경기지방의 관찰사가 되어 여러 군현(郡縣)을 순행하게 되자, 나는 길을 돌아서 첨성리(瞻星里, 현재의 경기 안산시)에 있는 선생의 댁을 방문했다. 당시 선생은 81세셨다는데, 처마가 낮은 허름한 지붕 아래 단정히 앉아 계셨다. 선생의 눈빛은 형형하여 쏘는 듯했고, 성긴 수염은 길게 늘어져 허리띠까지 닿을 듯했다.”



    노년에 이르기까지 이익은 이처럼 누구보다 건강하고 단정한 학자였다. 채제공의 방문기는 이어진다.

    “절을 올리기도 전에 내 마음속에는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서 모습을 뵈었더니, 화평하고 너그러우셨다. 경전(經傳)에 관해 설명하실 때는 고금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내가 전에 알지 못한 말씀을 해주셨다.”(채제공 ‘묘갈명’)

    어릴 적부터 이익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조카 이병휴의 말에 따르면 “선생은 얼굴이 반듯하고 키가 훤칠했다”고 한다.(이병휴 ‘가장’) 유달리 눈이 컸고, 살찐 편도 아니었다. 노년에도 이익은 자세가 늘 꼿꼿해 굽은 데라곤 조금도 없었다고 한다.

    이익이 평생 스승으로 여긴 이는 16세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이다. 이익도 이황처럼 밥을 먹을 때 수저 소리가 나지 않게 했고, 세수할 때도 물방울 하나 튀지 않게 조심했다. 서찰엔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그는 퇴계의 저서를 샅샅이 검토하고 그 언행을 조사해 ‘이자수언(李子粹言)’이라는 책자로 만들어두고 일일이 실천에 옮겼다(이병휴 ‘가장’).

    이익은 키가 크고 몸이 날씬했고, 서글서글하면서도 광채가 나는 눈동자를 지녔다. 그 언행은 퇴계 이황을 그대로 닮아 조그만 빈틈도 없었다(윤동규 ‘행장’). 한눈에 대학자의 기상이 절로 드러나는 큰 인물이었다.



    黨禍로 집안 초토화

    그럼에도 이익은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당쟁 때문이었다. 그의 부친 이하진은 숙종 때 사헌부 대사헌까지 지냈다. 남인의 중진이던 이하진은 남인의 영수 허목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데 연로한 허목이 조정을 떠나자 위기가 찾아왔다. 반대파인 노론은 이하진을 평안도 운산군으로 유배 보냈다. 1681년 이익은 그 유배지에서 출생했는데, 안타깝게도 부친은 곧 병사했다.

    이익이 스물다섯 살 되던 해(1706) 또다시 집안에 불운이 닥쳤다. 둘째 형 이잠은 한 장의 상소를 올려 경종(당시엔 세자)의 보호를 주장했다. 그러자 노론은 사건을 확대시켜 이잠을 역적으로 몰았다. 이잠은 혹독한 고문 끝에 죽고 말았다. 결국 이익은 당쟁으로 말미암아 의지할 곳을 모두 잃어버렸다.

    아버지를 여읜 데 이어, 어린 시절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던 형마저 잃자 이익은 절망했다. 그는 온종일 집안에 머물며 근신하고 은거할 뿐,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다(윤동규 ‘행장’).

    멸문지화를 입었으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집안을 재건할 책무를 느꼈다. 처음 결혼한 고령 신씨는 곧 사별했고, 재혼한 사천 목씨는 그의 뜻에 잘 맞았다. 그들 부부는 살림에 힘써 집안의 질서를 잡았고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맹휴(1713~1751)는 이익에게 큰 보람이었다.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맹휴는 30대에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학문에도 출중해 이익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명이 짧았던지 3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아들의 사후, 이익은 조카 이용휴와 어린 손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이미 그가 노년에 한참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젊은 시절부터 이익은 유달리 살림살이에 마음을 썼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가난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살림살이를 돌보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었다. 그래서 한번 빈곤의 늪에 빠지면 영영 헤어나지 못했다. 이익은 이런 세태를 수긍하지 못했다.

    둘째 형 이잠까지 목숨을 잃자 집안 살림은 몹시 궁핍해졌다. 그러자 20대 중반의 이익은 스스로 집안 경영을 떠맡았다. 그는 어머니 안동 권씨에게 살림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 애썼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그것이 이익이 생각하는 효성이었다.

    이익은 집안에 규약을 정해두고 타인의 물건을 빌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도움 요청에 함부로 따르지도 않았다. 오직 자신의 땅에서 농사지어 얻은 수확량을 헤아려, 많든 적든 그것을 안배해 자급자족했다(윤동규 ‘행장’).



    규약 정하고 살림 일으켜

    그는 농사일에 익숙한 노복(老僕)에게 논과 밭을 전적으로 맡겼다. 살림 밑천인 노복을 학대하지 않았고, 정해둔 규칙대로 대우했다. 그러자 노복들도 힘을 다해 부지런히 일했다. 경영에 효과가 났던 셈이다. 이런 식으로 한 해 두 해 지낸 결과, 이익의 살림살이는 만년에 이르러 상당히 넉넉해졌다. 그는 가난을 극복하고, 생계의 안정을 회복했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 수십 년을 출입했지만, 노복을 꾸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선생은 노복을 형제나 친척과 똑같이 어루만지고 보살피셨다. 부지런히 일하고 충성을 다한 노복이 사망하자 찾아가서 곡을 하셨다. 또한 집에서 기르는 개가 죽으면 묻어주게 하셨다. 매사에 내 마음의 인(仁)을 확대하여 남에게까지 닿게 하시는 법이 이와 같으셨다.”(이병휴 ‘가장’)

    이익은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사 외에도 뽕나무를 심어 기르고 목화 농사도 지어 옷감을 자급했다. 과일나무를 심어 제사 용도에 충당했다. 그는 시장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모든 살림살이에서 사치는 극도로 배격됐다. 평소 밥상에 올리는 반찬 가짓수도 규칙을 정해 최소로 줄였다. 제사상에 올리는 제물도 소량의 깨끗한 음식으로 충분했다. 기름지고 넉넉한 상차림은 용서되지 않았다. 제아무리 귀한 손님이 찾아와도 반찬을 더 놓지 않았다. 손님의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상차림은 늘 똑같았다. 특별한 이유  없이 닭과 개를 잡아먹는 일도 없었다. 부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익의 집안에선 닭을 많이 쳤다. 그는 틈틈이 닭에게 모이도 주고, 그들이 자라는 모양을 자세히 살피기도 했다. 그는 닭에게서 ‘인간의 도리’를 재발견하기도 했다. 이익의 문집을 보면, 닭에게서 관찰한 진정한 어버이의 사랑과 효도, 우애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실학자의 눈으로 바라보면 동물의 일상에서도 배울 점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외눈박이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새끼를 기르는 것은 작은 생선 삶듯이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교란시키는 것은 금물이다.” 부모 노릇의 요체는 무조건 호의호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조심스레 품어주는 데 있다는 말이다. 이익은 이렇게 말했다. “닭을 기르면서 그 덕분에 자식 기르는 법을 배웠다.”



    근검과 절약의 미덕

    그는 왜 그토록 절약에 힘썼을까. “벼슬 없는 선비는 어려서부터 익힌 일이 책에 적힌 문자에 불과하다. 농사 짓거나 장사를 하려 해도 힘이 감당하지 못한다.”(이익 ‘삼두회 서’) 절약하지 않을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어려서 자주 듣기로, “양반의 살림은 규모가 제일”이라 했다. 이익이 그러했듯,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는 것이 으뜸이라는 뜻이었다.

    구두쇠와도 같은 그가 오락을 멀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쓸데없이 돈이 들어가는 흡연도 당연히 반대했다. 당시엔 담배 피우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익은 끽연에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날마다 독한 연기로 신명(神明)이 깃든 몸을 쐬다니, 틀린 일이다. 담배를 반드시 끊어야 한다.”(이병휴 ‘가장’) 그 집안 식구들은 물론이고, 제자들도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장기, 바둑, 담배를 멀리했다.

    이익은 깨끗하고 정갈한 의복에 만족했다. 음식도, 조악할망정 허기를 면할 수 있으면 충분했다. 집안의 모든 비용은 모두 한 해의 수확으로 충당했다. 실오라기 하나라도 남에게 빌려 쓰지 않았다. 이런 뜻으로 그는 ‘입검설(入儉說)’을 지어 당대의 사치 풍조를 비판했다.

    나아가, 이익은 절약과 검소의 철학을 중시한 나머지 당대에 널리 유행하던 예학(禮學), 곧 예의에 관한 학설까지도 크게 바꿨다. 번다한 여러 학설을 배격하고 단순명료하게 정리했다. ‘정성’이란 미명 아래 사치와 낭비로 흐르던 예법을 고쳐 가난한 대다수 선비의 실생활에 맞게 뜯어고쳤다.

    1763년(영조 39), 향년 83세로 그가 별세하자 자손들은 부엌 찬장에 있던 음식으로 전(奠)을 올렸다. 염(殮)을 할 때도 베가 아니라 종이를 사용했다. 명정(銘旌)도 값비싼 비단 대신 종이를 썼고, 관 역시 옻칠을 하지 않고 송진을 발랐다. 그의 상례에 사용한 물품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은 모두 이익이 생전에 정해놓은 그대로였다.



    콩죽 讚歌

    이익은 값은 싸도 영양이 풍부한 콩을 가장 귀한 식품으로 여겼다. 흉년이 들면 스스로 콩을 갈아 죽을 끓여 먹었다. ‘반숙가(半菽歌)’를 지어 콩의 미덕을 찬미할 정도였다. 한번은 친족을 모이게 하여, 콩죽 한 그릇에 된장 한 종지 그리고 콩기름에 버무린 겉절이 한 접시를 나눠주며 밤새워 환담했다. 이익은 그 모임을 ‘삼두회(三豆會)’라고 했다.

    “어른과 아이가 모두 모여 배불리 먹고 모임을 마쳤다. 비록 음식은 박했어도 정의는 돈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익의 자평이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검약에 힘썼음을 후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훗날 창고에 남은 곡식이 많다 할지라도, 반드시 1년에 한 번은 이런 모임을 마련하라. 보름이나 열흘간은 아침이나 저녁을 이런 식으로 먹어라. 대대로 법식으로 삼아 대대로 전하여 그만두는 일이 없기 바란다.”(이익 ‘삼두회 서’)

    이익은 자신과 직계가족의 근검절약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한마을에 사는 모든 친척도 절약에 힘쓰길 바랐다. 그리하여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도 늘 굶주리지 않고, 간소하지만 정성스레 예법을 실천하며 살기를 당부했다.

    벼슬이 있든 없든 이익과 그의 가족은 조선 사회의 지배층인 양반이었다. 사족(士族)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던 그에게 효도란 남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성껏 부모님을 봉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세상을 구하는 것이었다. ‘자식을 훈계하는 여덟 가지 조목[訓子八條]’에 이익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1. 항상 마음이 몸을 떠나 있는지 잘 살펴라.

    2. 온유함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라. 작은 잘못을 용서하고, 정말 잘못이 있는지를 잘 살펴라.

    3. 함부로 성내지 말라. 하리(下吏)에게 죄가 있더라도 너그럽게 대하라.

    4. 부로(父老, 동네의 나이 많은 남자)를 불러 고충을 들어보라.

    5. 상관을 부형(父兄)처럼 섬기라.

    6. 소송이 있을 때는 반드시 거짓말하는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두라.

    7. 서리(胥吏)들의 잘못이 명백하지 않을 때는 함부로 꾸짖지 말라. 조용히 관찰해보라.

    8.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마음을 써라. 집안일을 걱정하지 말라. 나라를 저버리지 않는 이가 효자다.



    세상 구제가 책무

    나중에 아들 이맹휴는 벼슬길에 나아가 남쪽 고을의 수령이 됐다. 임지에서 아들이 음식물을 보내왔다. 그러자 이익은 모두 돌려보내면서 편지를 보내 꾸짖었다. “백성에게 물건을 거두는 것은 열에 여덟아홉이 그릇된 것이다. 이것으로 어버이를 봉양하다니 안 될 말이다. 나는 고향집에 남아서 제철에 내 밭을 경작해 굶주림과 추위를 면할 수 있다.”(이병휴 ‘가장’) 이익에겐 아들 덕분에 호사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선비, 요샛말로 지식인이란, 자신의 몸은 비록 초야에 있더라도 온 세상을 염려해야 한다. 이익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젊은 시절부터 묵묵히 국가의 폐단을 연구하고 바로잡을 대책을 궁리해 ‘곽우록(藿憂錄)’을 지었다. 이익의 문집에 실린 ‘잡저(雜著)’와 허다한 서찰에도 국가의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만들 방도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익은 역사상의 폐단을 3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임금만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는 폐단인데, 진시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둘째는 인재를 등용할 때 지나치게 문벌만 숭상하는 경향이다. 이는 조조(曹操)로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셋째는 문장으로 과거시험을 치게 하는 폐단인데, 수나라 양제 때 시작됐다고 봤다. 이익은 이 3가지 재앙을 없애야만 올바른 정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익이 가장 중시한 문제는 과거제도의 폐단이다. 당나라 때 논의된 ‘효렴과(孝廉科)’ 또는 중종 때 조광조가 시행한 ‘현량과(賢良科)’를 바탕으로 그는 인재 등용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가 지식 위주의 고시 및 공무원 시험에 얽매인 사실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초야에 있으면서도 세상 구제를 자신의 책무로 삼았던 이익. 그의 사상은 지배층의 이익을 줄여 민생을 살리는 것이 핵심이었다. 비록 당대엔 시행되지 못했으나, 후세가 본받을 일이었다.



    삶 자체로 모범이 되다

    이익의 학문은 넓고 풍부했으나 번거롭지 않고 초점이 뚜렷했다. 스스로에게 늘 엄격하고 절검(節儉)을 숭상했으나, 타인에겐 언제나 온화하고 너그러웠다. 자제들과 제자를 가르칠 때면 평이하게 가르쳐 어진 사람은 물론이고 어리석은 사람도 마음껏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벼슬길이 막혀 높은 뜻을 제대로 시험해보지 못했다. 게다가 굳게 믿은 아들마저 일찌감치 세상을 뜨는 바람에 한스러움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익은 팔순의 고령에 이르기까지 많은 책을 저술해 후학에게 등불을 환히 밝혔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보다 앞서간 이맹휴만 아들이 아니다. 이익을 존경하는 우리 모두가 그 아들이 아닐까.

    아버지란 결코 입으로만 가르치는 이도 아니고, 핏줄이 직접 통해야만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삶 자체로 모범이 되는 이가 진정한 아버지다. 누구보다 이익을 마음 깊이 존경한 정약용. 그는 충청도 금정도의 찰방으로 부임하기 무섭게 선비들과 함께 이익의 문집을 읽고 교열했다. 1795년 봉곡사에서 이병휴의 아들 이삼환과 함께한 그 작업이 없었더라면, 실학의 집대성은 한동안 더 미뤄졌을 것이다.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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