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호

역사 발굴

울도(蔚島) 전투

한반도에서 벌어진 태평양전쟁

  • 권주혁 | 남태평양연구소장, 국제정치학박사

    입력2016-07-27 16: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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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2월 8일 일본 해군기동부대가 항공모함 6척을 앞세워 미국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태평양함대를 기습하면서 발발한 태평양전쟁은 태평양 전역을 전장으로 만들었다. 함재기(艦載機)를 이용한 진주만 기습에서 대성공을 거둔 일본군은 전광석화처럼 홍콩, 필리핀,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반도, 미얀마, 중부 태평양(괌 등)을 잇달아 점령했다. 전사(戰史)에 유례가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B29, B24의 한반도 폭격

    일본군은 인도 동부지역에 진입했고, 호주의 주요 항구를 폭격했다. 호주 북쪽의 뉴기니 섬 대부분과 솔로몬 군도 일부도 점령했다. 미드웨이 섬과 하와이 제도를 점령하고자 함대를 파견했으며, 북태평양의 미국 영토인 알래스카 남쪽의 알류산 열도 일부도 차지했다. 또한 동태평양의 미국 영토인 사모아 섬을 공격한 데 이어 파나마 운하를 폭격해 미군의 수송력을 떨어뜨리려 했다.

    미군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전기를 마련했으며 같은 해 8월부터 남태평양에서 반격에 나섰다.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 전투에서 일본 육군에 처음으로 승리한 후 뉴기니, 필리핀, 중부 태평양을 탈환했다. 그러고는 일본 영토인 오키나와(沖繩), 이오지마(硫黃島)를 점령하고 장거리 폭격기로 일본 본토를 폭격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태평양전쟁은 종결됐다.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태평양 전역에서 3년 9개월간 이어졌으나 한반도에선 미일 양국 간 직접 전투가 거의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요역사연구회가 지은 ‘제국 일본의 하늘과 방공’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일어난 미일 간 전투는 1945년 6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한 후 이곳에서 발진한 미군기들이 1945년 7월 11일~8월 14일 한반도를 폭격한 것이다. 이 기간에 미군기는 18회에 걸쳐 한반도에 위치한 일본군의 군수시설과 공장, 해상의 선박을 폭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미군의 첫 한반도 폭격은 4발 프로펠러 엔진 중(重)폭격기 B29가 부산, 나진을 폭격한 것이다.



    필자는 태평양전쟁을 연구하고자 지난 3, 4월 두 차례에 걸쳐 도쿄의 방위연구소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뜻밖의 사실을 파악했다. 미국 해군 항공대 소속 B24 중(重)폭격기(B29 중폭격기보다 약간 작다)가 1945년 5월 6일, 제주도 서쪽 해상과 서해안 울도(蔚島) 인근에서 일본군 함선, 선박과 전투를 벌였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B24는 ‘해방자(Liberator)’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폭격기다.



    제주도 서해 日 수송선 겨냥

    필자는 4월 25, 26일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72㎞ 떨어진 울도를 방문해 조사했다. 울도는 행정구역상으로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울도리에 속해 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울도로 직접 가는 선박은 없다. 일단 덕적도(德積島)로 간 후 그곳에서 울도로 향하는 배로 갈아타야 한다. 덕적도를 출발한 페리선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문갑도(文甲島), 굴업도(掘業島), 백아도(白牙島)를 거쳐 울도에 도착했다.

    면적 2.06㎢, 해안선 길이 12.7㎞의 울도에는 주민 68명이 거주한다. 대다수가 노인으로 새우, 우럭, 꽃게 잡이 등 어업에 종사한다. 섬은 남북보다 동서로 길다. 섬의 북쪽은 천연의 양항(良港)이며, 섬 중앙 남쪽에 당산(231m)이 솟아 있다. 섬에는 평지가 거의 없다. 조선시대에는 울도(鬱島)라는 이름이었으나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울도(蔚島)로 이름을 바꿨다. 광복 이전까지 일부 일본인도 울도에 거주했다.

    1945년 5월 6일 오전 6시 50분 오키나와 비행장을 이륙한 미국 해군 항공대 제118 비행대대 소속 B24 폭격기가 한반도 서해안으로 기수를 돌렸다. 제118 비행대대는 ‘늙은 까마귀(Old Crow)’라는 별칭을 가졌다. 폭격기에는 기장 러새터(J.A. Lasater) 대위를 포함해 승무원 12명이 탑승했다. 원래는 B24 2대가 출격할 예정이었는데 러새터 대위의 폭격기만  출격했다. 러새터 대위는 제주도 서쪽 19㎞ 해상에서 일본군 수송선 3척이 항해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고도 60m까지 내려와 해수면과 거의 평행을 이룬 뒤 수송선에 225㎏ 폭탄을 투하했다(Aircraft Action Report, US Navy, 25 May 1945).

    B24는 3척의 수송선 중 가장 큰 1만t급 수송선에 225㎏ 폭탄 3발을 명중시키고 폭격기에 장착된 구경 12.7㎜ 중(重)기관총으로 사격해(B24에는 12.7㎜ 기관총 10문이 장착됐다) 침몰시켰다. 3000t급 수송선도 225㎏ 폭탄 1발을 맞고 침몰했다. 남은 1척의 수송선은 225㎏ 폭탄을 맞고 기관총 사격을 받아 크게 부서졌으나 간신히 침몰은 면했다.

    대형 폭격기는 속도가 느리고 움직임이 민첩하지 못해 대개 적군의 대공포화를 피하고자 높은 고도로 수평비행하면서 폭탄을 투하한다. 그런데 러새터 대위는 물수제비뜨기 폭격법(Low Level Skip Bombing, 프로펠러가 해면에 닿을 정도로 낮게 비행하면서 폭탄을 물 위에 투하해 이 폭탄이 물에서 튀어 적함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게 하는 폭격법)을 시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B24, 울도 해상 추락

    전투는 오전 10시 30분에 시작돼 11시 35분에 끝났다.  B24가 투하한 폭탄이 일본군 수송선에 명중될 때 생긴 파편이 조종실 창문을 뚫고 들어와 러새터 대위가 부상을 입었으나 상태가 심각하지 않아 폭격기를 조종할 수 있었다. 러새터 대위는 북상해 오후 12시 30분 울도 상공에 도달했다.

    B24는 울도 서남쪽 2.8㎞(동경 125도 59분 2초, 북위 36도 59분 3초) 해상에서 일본 선박 2척을 발견하자마자 저공비행으로 공격에 들어갔다. 상선 호에이마루(豊榮丸)와 834t 유조선 제7호에이마루였다. B24는 이때도 고도 60m까지 내려와 두 선박을 공격했다. B24가 공격해오자 일본 선박들은 대포로 응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미국, 일본 등 교전국의 민간 선박도 대포나 기관총을 장착했다.

    B24는 제7호에이마루에 피해를 입혔으나 일본 선박이 쏜 대포에 맞은 후 전투 시작 10분 뒤(12시 40분) 울도 서남방 해상에 추락해 승무원 전원이 전사했다. 제7호에이마루도 화염을 내뿜었다. 이 배는 5월 7일 울도 동북쪽 10㎞에 위치한 선갑도(仙甲島) 남쪽 5.5㎞ 해상에서 결국 침몰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호에이마루는 그해 7월, 제주도와 목포 사이 해상을 항해하다 미군기의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러새터 대위의 B24가 어느 선박에서 발사한 포탄에 맞아 격추됐는지는 알 수 없다. 전투가 끝난 후 일본 선박 두 척의 선원들은 각각 자신들의 배가 미군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전투가 벌어질 때 울도에 파견돼 있던 일본 경찰이 산 위 초소에서 쌍안경으로 전투 장면을 목격했다. 울도분교에 근무하던 교직원과 섬 주민 30~40명도 B24가 비행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는 분교가 산 중턱에 있었다고 씌어 있으나 필자가 울도를 방문해 확인해보니 분교는 해안에 있었다. 섬에서 가장 연로한 정광성(80), 정현희(79) 씨에게 물어보니 자신들이 어릴 적에 다니던 학교는 산 중턱에 있었다고 했다.

    옛 학교 건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엔 조개와 생선을 건조하는 공간이 있었다. 섬에서 가장 높은 당산(등대가 있는 곳)에서 능선을 따라 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일제강점기 일본군(또는 경찰)이 만들어놓은 감시초소가 있는데, 현재는 초소의 기초 부분인 붉은 벽돌만 남아 있다. 이곳에서 일본 경찰이 망원경으로 전투 장면을 목격한 것으로 추측된다.

    1945년 5월 7, 8일 인천에서 파견된 일본 경찰과 헌병대원이 울도에 도착해 B24가 추락한 해상을 수색했으나 짙은 안개와 험한 파도, 강한 해류 탓에 수색 작업을 포기하고 인천으로 돌아갔다.

    일본 자료는 B24 폭격기가 울도 인근 상공을 저공비행하며 일본 선박과 전투하는 장면을 목격한 섬 주민 중에 김동옥(10여 년 전 울도에서 사망), 김공순(15년 전 울도에서 사망) 씨 등이 있다고 밝힌다. 앞서 언급한 울도 주민 정광성 씨는 11세 때(1947년) 인근 섬에서 울도로 이주해 B24 폭격기의 전투 장면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으나 김동옥 씨로부터 선갑도 남쪽 해상에서 일본 배가 연기를 내뿜었으며 미군 비행기가 선갑도에서 울도 바로 북쪽에 있는 지도 상공을 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국가의 치욕

    일본 본토가 미군의 대규모 폭격을 받을 때인 1945년 4월 15일 일본군 대본영은 제주도에 미국이 상륙하는 것을 격퇴하고자 ‘결(決) 7호 작전’을 준비했다. 본토 방위를 위해 외곽 방위선인 제주도에 제58군 사령부를 설치하겠다는 것이었다.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군이 일본과 만주를 잇는 전략적 위치에 있는 한반도의 일본군을 타격 목표에 넣는 것은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한반도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대(大)편대를 동원해 일본을 폭격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미약했다. 당시 미군의 폭격 목표가 가능한 한 많은 일본인을 살상하고 군사·산업시설을 초토화해 일본 군부 및 국민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강제노동, 강제징집, 강제위안부로서 일제의 전쟁에 동원된 사실은 대부분의 국민이 알고 있지만, 미국과 일본의 직접 전투가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라가 힘을 잃으면 타국에 주권을 빼앗기는 치욕을 당하며, 남의 나라 군대가 우리 국토를 마음대로 휘젓는다는 사실을 울도 해상 전투를 연구하면서 새삼 실감했다. 한국에서도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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