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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청마 유치환 50주기

  • 김종길 | 고려대 명예교수·시인

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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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 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단 말인가!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67년 2월 13일 밤 부산의 어느 밤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망연자실의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다 어느 신문사의 청탁으로 쓴 조시(弔詩)가 ‘청마선생 추도(靑馬先生 追悼)’이다.



슬픔과 적막(寂寞)은

끝내 용렬한 우리의 것,

살아서 생각하신 바로 그대로



당신은 예보(豫報)도 없는 바람처럼 가셨습니다.

한없는 다정(多情)과 겸손(謙遜)어린 안경 너머로

당신은 엄청나게 큰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지없이 소탈한 사투리 속에

당신은 엄청나게 큰 성량(聲量)을 간직하셨습니다.

인간을 끔찍이도 사랑하셨기에

당신은 즐겨 비정(非情)을 노래하셨고,

삶의 허무(虛無)를 사무치게 깨달으셨기에

당신은 삶이 허무할 수 없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슬픔과 적막(寂寞)은

끝내 용렬한 우리의 것,

1967년 2월 13일 밤 아홉시 반,

당신은 동양(東洋)의 고전(古典)의 한 이름이 되셨습니다.

내가 청마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6월 6일 저녁 서울 종로의 YMCA 강당에서 열린 ‘청년문학가협회’ 주최 시낭독회에서였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만남은 아니었다. 다시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은 6·25전쟁 중의 피란지 대구에서였다. 그분의 고향은 경남 통영이고, 당시 직장도 경남에 있었지만, 대구에 피난 온 문인이 많아서였는지, 대구에 자주 나타나곤 했다.

그분이 대구에서 문인들과 어울리는 곳은 대구역에서 멀지 않은 향촌동 일대의 다방이나 술집들이었다. 그분과 나 사이의 연령차는 18년으로, 그분은 나에게는 거의 아버지뻘이었지만 우리 사이는 거의 숙질 간이나 사촌 간처럼 친숙했다. 그분이나 나나 무심하고 말수가 적고 술을 좋아해 우리 사이는 특히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던 중 그분과 나는 한때 경북대 문리과대학에서 함께 교편을 잡은 적도 있다.

그때 그분은 국문과 전임강사였고 나는 영문과의 전임강사였다. 당시엔 대학의 강의시간이 90분이었는데, 한번은 내가 청강 인원이 많은 ‘문학개론’ 강의를 마치고 교수휴게실로 돌아오니까, 거기서 혼자 계시던 청마 선생이 “뭐가 그리 할 말이 많노. 나는 50분을 채우기도 힘이 드는데” 하는 것이 아닌가. “할 말이 많은 게 아니고, 이것 저것 지껄이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지요” 라고 받아넘기곤 했다. 그러던 중 청마 선생은 경주고 교장으로 초빙돼 갔다.

우리가 들은 바로는 그분은 경주로 옮긴 다음에도 그곳의 기관장들과 어울리는 자리엔 얼굴도 비치지 않으시고 혼자 교외의 유적이나 둘러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던 모양이다. 그분은 소탈하고 대범해 보였지만 정사(正邪)의 구별에는 엄격하고 단호했다. 그리하여 당시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나 묵과도 허용치 않았다.

그런 강직한 성품은 그의 가족관계에서도 드러나곤 했던 모양이다. 그 무렵 그가 서울걸음을 할 때는 유명하고 유복하던 형님 유치진 선생 댁에는 들르지 않아도, 언덕배기 빈민촌에 사는 누이 집에는 반드시 들렀다가 온다는 말이 돌았다. 그는 허무의 신을 믿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정이 많고 정의감에 불타는 휴머니스트였다.

이와 같이,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사상적으로는 확신에 찬 허무주의자여서 허무를 신격화해 ‘허무의 신’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바람’으로써 그것을 형상화했다. 나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 1974년 여름호에 기고한 ‘청마 유치환론’을 다음과 같이 끝맺은 바 있다.

‘게다가 그의 허무의 인식은 그의 특색인 사유의 규모를 넓히는 구실을 또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청마의 생래의 순정과 다정은 그 자신의 허무주의적 회의를 거침으로써 그로 하여금 거대한 시력(視力)을 얻게 했고, 또한 자유에 대한 강렬함, 즉 삶에 대한 열애(熱愛)를 지속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그는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거대하고 꾸준하고 열렬한 도덕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에 이른 운구행렬

청마 선생은 경주고를 거쳐 부산에서 경남여고 교장으로 근무했다. 나는 그분이 경주와 부산에서 고등학교 교장 노릇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나, 그분 밑에서 근무한 교사들은 그분의 시인으로서의 권위와 인품을 우러러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분이 사고로 작고한 뒤 부산시 인근에 있는 공동묘지로 운구가 이뤄질 때 그 행렬의 길이가 2㎞에 가까웠다는 이야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의 유해는 그 뒤 고향인 거제도 둔덕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곳을 고 김춘수 씨를 비롯해 몇몇 시인과 함께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분의 성품처럼 아늑하고 고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마 선생은 그분의 선장(先丈)이 통영에서 한약국을 운영했기에 통영에서 자랐지만 소년 시절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부잔(豐山)중학을 1년간 다닌 적이 있고, 한동안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한 적도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 말기에는 북만주에 가 농장을 경영한 적도 있다. 그러고 보면 청마 선생은 청년 시기에 해당하는 일제강점 말기를 방랑생활로 일관한 느낌이다. 그 무렵 그분이 북만주 소도시의 네거리에 걸려 있는, 처형된 비적(匪賊)의 머리 두 개를 보고 쓴 처절한 작품 ‘수(首)’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혹은 너의 삶은 즉시

나의 죽음의 위협을 의미함이었으리니

힘으로써 힘을 제(除)함은 또한

먼 원시에서 이어온 피의 법도로다

내 이 각박한 거리를 가며

다시금 생명의 험렬(險烈)함과 그 결의를 깨닫노니

끝내 다스릴 수 없던 무뢰한 넋이여 명목(暝目)하라!

아아 이 불모한 사변(思辨)의 풍경 위에

하늘이여 은혜하여 눈이라도 함빡 내리고지고.



청마 선생이 만주에서 돌아온 것은 광복 이듬해, 즉 1946년에 들어서인데 귀국 후에는 문단 활동과 교편생활을 병행했다. 생각해보면 그분의 고향인 통영은 국내 중소도시로는 예술가를 유난히 많이 배출한 곳이다. 문학 분야에서는 청마 선생을 위시해 시에 김춘수, 시조에 김상옥, 소설에 박경리가 있고, 연극에는 유치진, 미술에선 전혁림, 음악에선 윤이상이 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말이 있지만 통영은 풍광뿐 아니라 사람이 아름다운 곳이다. 게다가 그곳은 옛날부터 말총으로 갓을 만들고 조개껍데기로 나전칠기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한 곳이기도 하다.

통영은 ‘극동의 나폴리’라는 말을 듣는다. 이탈리아 서남부에 위치한 미항 나폴리에 비견한 표현이다. 그러나 실제 나폴리를 가보면 항구도시로서 특별히 아름다운 것 같지는 않다. 그곳 앞바다의 카프리 섬과 ‘폼페이 최후의 날’로 유명한 베수비오 화산과 폼페이 유적 같은 관광지로 연결되는 요지인데다 맛난 음식으로 더 유명해진 게 아닐까 한다. 오히려 나폴리는 풍광이면 풍광, 인재면 인재에서 통영을 못 따라가지 않나 싶다.

돌이켜 보면 나는 평생 교편생활을 하면서 과작(寡作)이지만 시작(詩作)을 계속해왔다. 그러는 동안 내가 특히 가까이 지낸 선배 시인들이 연령순으로 청마, 목월(木月·박목월) 그리고 지훈(芝薰·조지훈)이었다. 이 세 시인은 시도 좋지만 인품도 좋았다. 그러나 그분들의 인품은 그들의 시가 그렇듯 서로 확연히 달랐다. 청마가 대범한 데 대해 목월은 자상하고, 지훈은 준엄했다고 할까. 인품만큼이나 그들의 시도 확연히 구별된다.



청마 목월 지훈을 기리며

세 분 중에 내가 제일 처음 사귄 사람은 지훈이다. 1946년 초가을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혜화전문학교(동국대의 전신) 학생이었는데 그해 여름 당시 을유문화사에서 발행하던 ‘주간 소학생’의 동시 현상모집에 내 작품이 당선됐다. 당시 종로에 있던 을유문화사에 상금을 받으러 가서 윤석중 선생과 당시 그곳에서 근무하던 박두진 선생을 알게 돼 이따금 근처를 지나다가 들르곤 했는데 거기서 지훈을 처음 만난 것이다. 우리는 거기서 나와 근처 다방에서 얘기를 나눴는데 그가 내 나이를 물었다. 그래서 병인생(1926년생)이라고 했더니 ‘말을 놓게’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북 안동이 고향이고 그의 고향은 경북 영양이어서 서로 세교(世交)가 있는 가문임을 알아채고 하는 말이었다. 그 뒤 우리는 6년이라는 연령차를 아랑곳하지 않고 허물없는 사이가 됐다.

목월은 1916년생으로 나보다는 10년 위다.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1947년 여름, 같은 청록파 시인 지훈을 통해서였다. 우리 둘은 광교 근처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목월이 곧 대구에서 올라온다는 것이었다.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서 들어선 목월은 여위고 초라해 보였으나 웃는 모습이 앳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것은 6·25전쟁 중 대구에서였다. 나는 그때 영국군 공병부대 통역으로 근무했는데 그 부대 주둔지와 가까운 공평동에 목월의 사무실이 있었다. 그래서 자주 뵙다가 그분이 먼저 서울로 옮겨가셨고 1958년 9월 나도 고려대로 옮겨가면서 다시 서울에서 계속 교유하게 됐다.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신 세 분과의 교유는 애틋했다. 지훈이 존경하는 친구(외우·畏友)였다면 목월은 다정한 형님과 같았다. 그리고 청마는 외경(畏敬)했던 스승이란 생각이 든다. 청마의 50주기를 맞아 그를 회고하는 자리에서 목월과 지훈에 관한 회고까지 곁들이게 된 것을 지하의 청마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 종길의 초대로 그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된 것을 흔쾌하게 여기시리라. 한국 현대시의 큰 별인 세 분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빌며 붓을 놓는다.  



김 종 길

● 1926년 경북 안동 출생.
● 시인.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 수상 : 목월문학상, 청마문학상, 만해대상, 인촌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수상
● 저서 : ‘20세기 영시선’ ‘詩에 대하여’ ‘성탄제’ ‘하회에서’ ‘달맞이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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