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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의 심心중中일一언言

“이혜영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연기를 잘했나요?”

‘메디아’로 돌아온 연극여왕

  • 글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사진 지호영 기자|f3young@donga.com

“이혜영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연기를 잘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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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파탈의 끝판왕

“이혜영 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연기를 잘했나요?”

명동예술극장에서 팜파탈의 끝판왕으로서 메디아의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이혜영

신화의 껍질을 벗겨내고 ‘리얼리티 쇼’에 가깝게 구성된 연극은 내용만 보면 웬만한 아침드라마 뺨치는 ‘막장드라마’의 위용을 과시한다. 연출은 이 작품이 ‘싸구려 멜로드라마’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몇 가지 장치를 준비했다. 하나는 관객을 대신해 분노하고 슬퍼하고 경악하고 비난하는 코러스다. 이들은 상주를 위해 대신 울어주는 곡비(哭婢)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코러스는 관객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일을 대신 맡는다. 대신 관객은 저 잔혹한 복수극의 한 꺼풀 뒤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는 ‘매의 눈’을 갖게 한 것이다.

두 번째 장치는 속도감이다. 연출은 등장인물의 숫자를 줄이고 시적이면서도 유장한 대사를 다 걷어내 가며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120분 넘게 공연될 작품을 80분으로 압축했다. 관객의 감정이 서서히 숙성될 시간을 주지 않음으로써 냉철한 시선을 유지하게 만든다.

메디아 역의 이혜영은 극의 몰입을 막는 이런 장치 속에서 복수를 위해 모성애마저 버린 신화적 존재를 현실 속 여인의 이야기처럼 연기해내야 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구름 위에 떠 있던 신화를 끔찍한 내 자신의 이야기”로 바꿔야 했다.

“메디아 출연 제의를 거의 1년 전에 받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신화 속에 푹 빠져 살았어요. 그리스비극은 물론 그리스신화까지 쌓아놓고 읽고 또 읽었어요. 메디아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혈통이기에 반신(半神)이었죠. 그래서 꿈을 꿔도 제우스 삼촌과 와인을 마시거나 헤라 고모와 구름 속에서 수다를 떠는 꿈을 꿨죠. ‘그런 끔찍한 배역을 연기하는 데 괜찮으냐’는데 저는 아무 걱정이 없었어요.

그리스비극은 모두 신의 계획 아래 이뤄진 일이니까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거든요. 알폴디를 만나기 전까지 내 애를 죽여야 한다는 그 끔찍한 일에 죄책감도 못 느낀 채 구름 위에서만 살았던 거죠.”



알폴디의 일성은 그런 환상을 단박에 박살 냈다. “러브스토리로 가겠다.” 신의 계획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치정극이라고? 그럼 원작에 등장하는 신들은 어떡하지? “신들은 다 빼버리겠다.” 그럼 메디아가 수레를 타고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나는 메디아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여인으로 그릴 거다. 그래서 죽여버릴 셈이니 수레도 없을 거다.”

두 아이의 엄마인 이혜영은 그제야 뼛속까지 공포를 체험했다. “제가 연기해야 하는 메디아가 신화 속 인물이 아니라 현실 속 인물이 돼야 함을 깨달았죠. 소름이 끼쳤어요. 내가 내 손으로 내 아이들을 죽여야 한다고?” 사실 이혜영이 소화해온 배역 중에 만만치 않은 팜파탈이 많다.

사랑하는 남자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 종으로 태어나 요염함 하나로 조선을 훔친 장녹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엘리트 남성들을 파멸로 몰고 가다 자살하는 헤다 가블러가 그러하다. 그런 그에게도 메디아 역은 “내 연기 인생 일생일대의 도전”이라고 했다.



“내 연기 인생 일생일대의 도전”

“알폴디는 메디아를 죽어 마땅한 여자로 그리겠다는데 그 여인을 연기해야 하는 나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내가 나 자신을 ‘죽어도 싼 악녀’라고 생각하면서 연기할 수는 없다,  나 자신부터 납득시키고 관객에게도 설득력 있게 다가서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그 배역을 연기할 수 있느냐고 했죠. 이해한다곤 했지만 중간중간 제가 눈물을 좀 짜거나 관객의 감정에 호소할라치면 여지없이 차단해버리더라고요.”

이번 무대가 힘겨웠던 것은 이런 감성의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육체적 부담도 컸다. 게다가 완벽하게 준비한 채 무대 위에 오르던 과거의 자신과 달리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첫 공연에 들어갔다고 털어놨다.

“캐릭터 강한 여성을 많이 연기했지만 실제론 소리 한번 질러본 적이 없어요. 화가 나도 한풀 딱 꺾어서 대사를 치지 고함을 지르진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제가 등장도 하기 전에 무대 밖에서 온몸을 쥐어짜내는 비명을 계속 질러야 해요. 첫 연습 때 아홉 차례나 되는 비명을 지르고 등장했는데 이미 목이 쉬어서 ‘나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사라지고 진이 다 빠지더라고요.

그랬더니 ‘이제 겨우 대본의 8페이지밖에 안 했는데 이러면 어떡하냐’는 거예요. 연출이 스피드와 소리의 볼륨을 워낙 중시하다보니 내 감정이야 되든 말든 정신없이 좇아가기 바빴죠. 연습기간도 말이 6주지 하루 딱 4시간에 일주일에 하루를 꼬박꼬박 쉬니까 얼마나 걱정이 되던지. 저는 언제나 ‘레디~’ 하고 완벽하게 준비된 단계에서 무대에 올라가 ‘이 정도면 나 잘했지?’하는 마음으로 연기했는데 이번처럼 준비가 안 된 공연은 처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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