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호

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조공 질서 부활 꿈꾸는 中…韓은 사면수적(四面受敵)

自强 의지 없으면 미래도 없다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입력2018-12-0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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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중이 대립하는 현재 동아시아 구조는 한민족 생존에 불리하다. 중국의 흡인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앞두고 숨을 몰아쉬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 있다. 우리가 살길은 독자적 세계관과 외부 침공을 방어할 군사력,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내부 통합이다. 내부를 통합해야 민족 통합도 이룰 수 있다. 우리가 자강(自强)을 이뤄낼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인구 100만에 불과한 칭기즈칸의 몽골이 유라시아를 제패했다. 인구 10여만에 불과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만주를 통합하고 거대한 명나라를 쓰러뜨렸다. 고주몽이 이끌던 예맥인(濊貊人) 수천 명이 수·당에 맞선 대제국 고구려를 세웠다.

    2008년 4월 27일 베이징 올림픽을 맞아 서울에서 성화봉송 당시 중국 학생들이 모여서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뉴시스]

    2008년 4월 27일 베이징 올림픽을 맞아 서울에서 성화봉송 당시 중국 학생들이 모여서 국기를 흔들고 있다. [AP=뉴시스]

    중국 지배권을 놓고 벌인 국민당과의 축록전(逐鹿戰·패권 다툼)에서 승리한 공산당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北京)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했다. 중국 공산당은 신(新)중국 수립을 전후해 신장과 티베트를 유혈 점령했으며 6·25전쟁에도 개입했다.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은 전통 중원 왕조의 후계자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8500만 한민족(韓民族)은 22.1만㎢ 면적의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고유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산다. 한민족과 달리 한때 동아시아를 주름잡은 흉노(匈奴), 선비(鮮卑), 티베트계 저·강(氐·羌), 위구르, 거란, 만주족은 한족(漢族)에 동화됐거나 동화되고 있다. 한국, 북한과 북간도(北間島)에 삼분된 채 살아가는 한민족이 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오랜 세월 고구려와 발해·거란(요)·여진(금)·몽골(원)·만주(청)가 한족의 영향력이 한반도로 넘어오는 것을 저지한 데 있다.

    한족의 팽창과 시진핑의 一帶一路

    기원전 1046년 황하 상류 ‘빈(豳)’의 유목 부족 주(周)가 황하 중류 ‘은(殷·安陽)’을 중심으로 한 동이계(東夷係) 상(商)을 정복·통합함으로써 한족의 원형인 화하족(華夏族)이 탄생한 이후 지금까지 한족은 마을에서 고을로, 고을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확장했다. 중국이 현재 추진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도 한족의 정치·경제·사회적 팽창이라는 측면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

    주(周)와 춘추전국(春秋戰國), 진(秦)의 유산을 물려받은 한나라는 한족의 고향이 됐다. 서한(西漢) 무제는 기원전 2세기 말 북방 흉노 정벌을 추진했다. 서한은 대(對)흉노 전쟁의 일환으로 기원전 107년 흉노의 동쪽 날개인 랴오허-다링허 유역의 조선을 정복했다.

    한(漢)과 위(魏)에 제압당한 흉노·갈, 선비·오환족 등은 삼국-서진 분열기를 틈타 한족과 북방민족 간 경계지대로 대거 남하했다. 산시(山西)에 주로 거주하던 흉노가 남하해 뤄양을 수도로 하던 서진을 정복(316년 영가의 난)했다. 1000만 명 이상의 한족이 흉노·갈(匈奴.羯), 선비, 저·강 등에게 쫓겨 창장(長江) 이남으로 이주했다. 남방으로 이주한 한족은 그곳 소수민족과 혼화돼 난징을 중심으로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을 세웠다.



    흉노의 중원 정복은 우리의 고대 국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장기간 계속된 중원 전란의 결과 한족과 선비족 일부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유입됐다. 흉노에 이어 중원을 점령한 선비족은 한족과 섞여 북위(北魏)와 북주(北周)·북제(北齊), 통일왕국 수(隋)·당(唐)을 세웠다. 우문씨(宇文氏)의 북주는 북제를 멸해 화북을 통일했다. 보륙여씨(普六茹氏)의 수나라는 궁정 쿠데타를 통해 북주를 대체했다. 수나라는 곧 강남의 진(陳)을 정복해 중국을 통일했다. 이로써 저(氐), 선비, 거란을 비롯한 비한족(非漢族)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를 융합해 호한(胡漢)체제라는 독특한 정치·사회·문화체제를 만들어내는 등 중국 문명을 동아시아로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조공체제 아래 무기력한 평화 누린 조선

    중국 베이징 자금성. 명대부터 청대까지(1420~1912) 중국 황실 궁궐이었다. [위키피디아]

    중국 베이징 자금성. 명대부터 청대까지(1420~1912) 중국 황실 궁궐이었다. [위키피디아]

    4세기 말 저족 출신 전진(前秦) 황제 부견과 한족 출신 재상 왕맹에 의해 틀을 갖추기 시작한 호한체제는 북주의 창업자 선비족 우문태(宇文泰)와 한족 관료 소작(蘇綽)에 의해 완성돼 수·당 대에 결실을 보았다.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해 663년 백제-왜 연합세력을 제압하고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몽골고원의 돌궐도 제압했다. 당나라는 톈산산맥을 넘어 키르기스-우즈베키스탄을 흐르는 탈라스강과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다리야는 투르크어로 강을 의미)까지 영향력을 넓혀 세계제국으로 발전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세계의 중심이 됐다.

    고구려의 멸망은 만주의 핵심 랴오허 유역과 한반도 간 제1차 분절(分絶)을 의미한다. 10세기 초 몽골계 거란이 퉁구스계 발해를 정복한 것은 한반도와 만주 간 연계가 더욱 약화되는 계기가 됐다.

    당나라는 755년 중앙아시아 출신 안록산-사사명의 봉기와 몽골고원 최후의 투르크계 제국 위구르의 압박, 역시 투르크계인 사타돌궐(沙陀突厥)의 남하, 황소(黃巢)의 난 등으로 인해 멸망했다. 당 멸망 뒤 중원에는 5대(五代), 강남과 산시(山西)에는 10국(十國) 왕조가 세워졌다. 사타돌궐, 거란, 탕구트, 한족 등이 몽골과 만주, 중원, 신장을 분할해 점령했다. 사타돌궐은 화북에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3개 왕조를 세웠다.

    시씨(柴氏)의 후주(後周)를 계승한 한족 출신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북송(北宋)은 10세기 초 화북을 근거로 중국을 통일했다. 북송의 중국 통일은 북방의 강국 거란에서 내분이 일어났으며 동쪽의 고려가 거란을 견제해줬기에 가능했다. 이 무렵 티베트계 민족이지만 알타이(선비)계 언어를 사용한 탕구트족 서하가 중국 서북부를 점령했다.

    중원은 여진족 아쿠타가 북만주에서 세운 금나라와 몽골족 칭기즈칸이 세운 원나라 손에 차례로 넘어갔다.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몽골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축출하고 중원을 장악한 14세기 말이 돼서야 한족은 다시 중국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몽골의 침공으로 쇠약해진 고려는 몽골 지방군벌 출신 이성계가 세운 조선에 자리를 내줬다. 조선 건국의 분수령이 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1388)은 중국 중심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조선의 철저한 신복(臣服)을 뜻한다. 송시열 등 조선 성리학자 대다수는 위화도 회군을 극찬했다.

    명나라의 중국 지배가 17세기 중엽 끝났다. 랴오둥에서 일어난 만주족 아이신고로 누르하치를 시조로 하는 청(淸)나라가 중국 전체를 점령해 20세기 초까지 지배했다. 일본이 굴기한 16세기와 만주가 흥기한 17세기, 명나라 중심 조공체제하에서 무기력한 평화를 누리던 조선은 차례로 일본과 만주의 침공을 받아 등뼈가 꺾이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20세기 초 일본에 병탄당하고 말았다.

    한민족은 9세기 당나라 혼란기, 14세기 원·명 교체기, 15세기와 16세기 두 차례에 걸친 몽골의 베이징 포위 시기 등 여러 차례 압록강-두만강 너머로 진출할 기회가 있었으나, 단 한 차례도 대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명나라 전성기 같은 조공 질서 구축 꿈꾸는 中國

    일본군의 만주 침공. 일본군이 1931년 9월 18일 선양 을 행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일본군의 만주 침공. 일본군이 1931년 9월 18일 선양 을 행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20세기 이후 중국은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대기근(大飢饉)과 전쟁 등 거듭되는 위기를 극복하고 몸집을 계속 불렸다.

    한족이 탄생한 서한(西漢)부터 만주족의 청(淸)에 이르기까지 2000여 년 긴 세월 동안 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은 800년 정도밖에 안 된다. 한(西·東漢), 송(宋), 명(明)이 장기 존속한 한족 왕조다. 한족은 20세기 초 중국 지배권을 회복하지만 중국은 19세기 초·중엽부터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imperialists)의 침략을 받아 누더기와 같은 상태였다.

    19세기 말 시작된 일본의 중국 침공은 한족이 겪은 큰 위기 중 하나다. 일본은 타이완과 관동주(뤼순·다롄)를 병합하고 만주를 위성국화했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일본이 미국과 타협했다면 만주는 한반도와 함께 일본 영토가 됐을 공산이 크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했기에 한족이 부흥할 수 있었다.

    중국은 1978년부터 개혁·개방을 추진했다. 개혁·개방 32년 만인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이 됐다. 1978년 이후 지금까지의 성장 속도(연평균 9.5%)에 비춰볼 때 중국이 신(新)냉전으로까지 간주되는 미국과의 무역전쟁에도 불구하고 2030년대에는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서구 열강과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의 열등감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되찾은 중국은 ‘중국몽(中國夢)’이라는, 명나라 전성기와 같은 조공 질서 구축을 꿈꾸고 있다. 1인 우위 체제를 구축한 시진핑의 중국몽은 한족 중심 중화제국 구현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워크(framework)로 해석된다.

    2006년 11월 중국 관영 CCTV는 ‘대국굴기(大國崛起)’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오스만투르크 등이 강대국으로 성장한 원인을 객관적 시각으로 분석했다. 이는 중국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말해준다.

    △초대국 중국 △세계제국 미국 △군사강국 러시아 △해양강국 일본은 한반도 남쪽만을 겨우 차지한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굴기에 대응해 돌궐과 백제, 왜(倭)를 적절히 활용했듯, 우리도 인근 강대국의 대외정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


    중국이라는 太陽 중심으로 돌아간 行星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영유한 고구려가 신(新), 동한(東漢), 위(魏), 오(吳), 공손연(公孫燕), 서진(西晉), 연(前·後燕), 북제(北齊), 수·당(隋·唐) 등과 줄기차게 싸운 것처럼, 한반도 남쪽의 우리도 싫든 좋든 같은 민족 북한은 물론 인근 강대국과 부대끼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북한 및 강대국들과 부대끼면서도 우리가 자주독립을 유지해나갈 길은 현재의 국제정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동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손오병법(孫吳兵法)에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란 말이 있다.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현재를 더욱 잘 알고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서다. 동아시아의 과거에 대해 잘 알아야 현재 동아시아 질서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중국 중심 동아시아 질서는 19세기 말 아시아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그 이전 긴 세월 몽골, 만주, 한반도, 베트남, 일본, 서역 등의 행성(行星)은 중국이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중국 문명은 기본적으로 농경 문명이고, 수용적(受容的)이며, 내향적(內向的)이다. 한족이 거란(요)과 탕구트(서하), 여진(금) 등에 의해 굴복을 강요당한 남송(南宋) 시기에 탄생한 성리학(주자학)은, 몽골 지배기를 거쳐 한족 국수주의적이던 명나라 시대에 크게 발전했다. 성리학은 반동적(反動的) 성격을 띠고 있다.

    이황, 이이, 송시열, 권상하, 정약용, 최익현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성리학 사대부들은 한족의 명나라를 숭앙했다. 조선 사대부들의 명나라 맹종에 따라 자주 의식이 약화되고 결국 개화에 성공한 일본의 조선 병탄으로 이어졌다. 조선 사대부 지배층은 ‘그 어떤 민족도 교조적 원리에 묶여 있다면 진보할 수 없고, 생명력을 잃어 결국 사라지고 만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19세기 말 청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체제 내적으로는 조선, 일본, 베트남 등 소중화를 자처하던 세력의 급격한 이완·이탈 △체제 외적으로는 영국, 러시아,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국가들(imperialists)의 공격이 원인이다.


    흔들리는 美國의 동아시아 지배 체제

    1943년 11월 5일 대동아회의에 참가한 각국 수뇌부가 일본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바 마우, 장징휘, 왕징웨이, 도조 히데키, 완 와이타야쿤, 호세 라우렐, 수바스 찬드라 보스. [위키피디아]

    1943년 11월 5일 대동아회의에 참가한 각국 수뇌부가 일본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바 마우, 장징휘, 왕징웨이, 도조 히데키, 완 와이타야쿤, 호세 라우렐, 수바스 찬드라 보스. [위키피디아]

    일본은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중국 중심 동아시아 질서에 도전자로 등장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 베트남과 더불어 중국 중심 중화체제 내에서 중층적 소중화체제를 유지하던 일본은 19세기 말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체제 변혁에 성공했다. 일본은 영·미(앵글로·색슨)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의 남진을 막아냄으로써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했다. 이로써 일본의 시각은 베이징이 아닌 런던, 베를린 또는 워싱턴을 향하게 됐다.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 침공 이후 동아시아의 패자(覇者)가 됐다. 일본은 영·미의 간섭을 물리치고자 독일의 생활권(Lebensraum) 이론의 영향을 받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일본 주도 동아시아 건설을 추진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이 주변국 자원을 약탈하는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동아시아 차원으로 확장한 것이다.

    미국은 1853년 페리 함대를 도쿄만(東京灣)에 진입시킨 이후 동아시아의 주요 행위자가 됐다. 미국은 20세기 초 영국과 함께 일본을 지원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했으며, 만주에 대한 영향력 부식을 시도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후 한국, 일본, 타이완, 남베트남, 필리핀, 태국, 호주, 뉴질랜드 등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 자본주의 국가들로 구성된 위성국가군을 체제 내로 편입해 새로운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세계 최강 미제국(American Empire)은 새로운 지배 체제를 △자유·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확산 △시장 개방을 통한 경제적 이익 확보 △군사협력을 통한 동맹으로 발전시켰다. 미국은 이들 위성국에 미국식 체제 수용을 요구하는 한편,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전쟁 때에는 파병까지 했다.

    미국은 1990년대 초 시작된 탈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미제국이 동아시아를 성공적으로 통제해온 것은 압도적 우위의 군사력과 기축통화(Key Currency)로 상징되는 금융 지배력 외에 한국, 일본, 호주 등 위성국들의 강고한 지지와 함께 패권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도 가졌기 때문이다.

    미제국은 양자 간 동맹을 통해 간접 통제하는 체제 내 통합 방식을 채택하고, 세계 3위(2010년 이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을 수석위성국으로 삼아 영향력을 강화하는 전략을 추구해왔다. 미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이 추구하던 대동아공영권의 경제적 연계 네트워크를 부분적으로 부활하기도 했다.

    그런데 중국이 부상하면서 경제·군사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시대에 들어와 미국의 동아시아-서태평양 지배 체제는 더욱 동요한다.


    재정립된 중화제국과 위기의 한반도

    2017년 9월 8일 주한미군이 경북 성주 사드기지에서 발사대 배치 작업을 위해 차량을 이동하고 있다.

    2017년 9월 8일 주한미군이 경북 성주 사드기지에서 발사대 배치 작업을 위해 차량을 이동하고 있다.

    중국은 북방민족에 점령당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계속 팽창해왔다. 한족이 세운 서진(西晉)에 비해 선비족이 세운 수·당은 영토, 경제력 등에서 최소 2~3배로 커졌다. 흉노, 선비, 저·강, 사타돌궐,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 중원을 지배한 북방민족 국가는 중원 바깥에서 기원했지만 통치의 중심을 중원으로 옮기고, 한족 출신을 대거 기용하는 등 중원 왕조를 지향했다.

    특히 중국은 북방민족 지배 시기에 끊임없이 외부로 팽창했다. 탁발선비 북위(北魏)는 몽골고원의 유연(柔然)을 정복하고자 수십 차례 출격했으며, 호한(胡漢)체제의 수나라는 줄기차게 고구려와 돌궐 정벌을 추진했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돌궐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로 팽창했다. 몽골 지배기 중국은 북베트남과 티베트, 바이칼호 이북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원나라는 자바, 수마트라, 일본 열도 등 해양으로까지 손을 뻗쳤고, 만주족의 청나라는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 타이완, 사할린을 영토로 삼았다.

    중국은 청나라가 만들어준 영토 가운데 연해주 일대와 사할린, 타이완, 외몽골, 카자흐스탄과의 국경 지역인 일리강 유역 등 변경 일부 외연(外延)을 제외한 핵심부를 그대로 영유하고 있다.

    한족 민족주의는 청(淸) 멸망 이후 중화제국 개념으로 재정립됐다. 중화제국은 동으로는 만주, 서로는 타클라마칸, 남으로는 남중국해, 북으로는 고비(내몽골) 범위 내에 있는 모든 민족과 국가는 중화에 속한다는 정치·문화적 개념이다. 중국의 동북아공정, 랴오허문명탐원공정 역시 중화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공식 국경과는 무관하게 역사·문화·인종적으로 만주와 내몽골, 신장, 티베트 등은 중국과는 별개 권역에 속한다. 만주는 한민족이 포함된 퉁구스족의 땅이며, 내몽골은 몽골족, 신장은 투르크족, 칭하이-티베트 고원은 티베트족의 땅이다.

    시진핑 시대의 중국은 경제력을 활용해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이름으로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으려 한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 강력해진 중국 앞에서 한반도는 위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중국몽과 일대일로 정책은 중국의 유라시아 헤게모니 장악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민족의 위기를 한층 더 심화시킬 것이다.


    민족주의로 무장한 중국의 浮上

    중국 기업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축적한 기술·자본을 바탕으로 베트남, 캄보디아, 미얀마, 스리랑카, 파키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스, 헝가리, 세르비아,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지에 진출했다. 또한 미국과 독일 등 서방 첨단기업에도 투자해 이들이 확보한 과학기술을 흡수하려 한다.

    산업혁명 진전 단계를 분석해볼 때 중국의 부상(浮上)은 필연이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중국이 패해 경제가 경착륙할지라도 관리, 학자, 기업인, 전문가가 갖고 있는 노하우는 사장되지 않는다. 중국의 기술 발전 속도가 한국의 그것을 따라잡을 때 산업구조에서 한·중 관계가 역전된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중국 경제의 한 부분처럼 운용될 것이다. 최근 심화한 원화(圓貨)의 위안화(元貨) 동조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타이완 경제는 교역과 투자, 사회 교류 등 여러 면에서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이 심화돼 중국 경제에 통합돼버릴 상황이다.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앞으로 중국의 요구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잦아질 것이다. 중국과 동아시아 간 상호 의존 심화는 중국 우위의 동아시아 경제통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이, 유교적 가치관 등 동아시아 국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 체계로 스스로를 혁신할 경우 흡인력은 한층 커질 것이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들과 외교관들이 중국의 분열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긴 역사를 관찰해보건대 중국은 분열되든, 외부 세력에 정복당하든 내부에서 융합한 스스로의 에너지를 갖고 분열을 치유하고 정복 상태를 끝낼 힘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중국 위협론’은 음모론이 아니라 닥쳐올 가능성이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 현상이다. 민족주의로 무장한 중국의 위협은 물리적 위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군사적 점령은 단기간 내 끝날 수 있으나, 인종적 요소를 포함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진출은 저항할 수단이 빈약하다. 예방 불가능한 도전이 될 수도 있다.

    2006년 10월 완공된 칭하이-티베트 고산철도는 티베트를 중국화하고자 하는 중국의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시진핑 시대 중국은 쓰촨-티베트 고산철도도 건설하고 있다. 중국이 경제성장을 지속하든, 경제성장 정체에 기인한 격심한 혼란 끝에 국수주의(國粹主義)를 택하든 우리에게 위기로 다가올 것이다.

    패권국 미국이 도전자 중국과의 무역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은 국가 규모 측면에서 중국에 비해 열세다. 미국이 아니라 중국과 유럽연합(EU)이 무역자유화를 주장하는 것은 경쟁력이 약화된 미국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표적 사례다.


    중국 긴 그늘에서 벗어나려면 독자적 세계관, 군사력·경제력 갖춰야

    중국 광둥성 주하이와 마카오를 잇는 강주아오대교가 10월 23일 개통됐다. [신화=뉴시스]

    중국 광둥성 주하이와 마카오를 잇는 강주아오대교가 10월 23일 개통됐다. [신화=뉴시스]

    분단된 우리는 사면에 적을 맞은 사면수적(四面受敵) 상황에 처해 있다. 중국은 본토를 잇몸으로, 만주를 이빨로, 한반도를 입술로 본다. 우리가 진정한 자주독립을 확보하려면 중국이 더 부상하기 전에 적어도 남북 경제공동체를 수립해야 한다. 중화체제를 복구하고 난 중국은 만주의 울타리인 한반도마저 영향 아래 두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제스, 마오쩌둥 모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중 간 신냉전, 양극화(bi-polarization)는 한반도의 분단 고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통일로 가는 구심력 회복과 함께 외교 공간을 넓히는 것이다. 미·중이 대립하는 지금의 동아시아 구조는 한민족 생존에 불리하다. 대규모 전쟁만이 한 나라, 한 민족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서서히 진행되는, 비커 속의 개구리가 수온(水溫)이 서서히 높아져 몸이 익어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죽는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의 은근한 흡인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앞두고 급히 숨을 몰아쉬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히 준비해야 한다.

    동아시아 질서가 흔들릴 때 한반도는 항상 태풍의 눈 속에 들어갔다. 서한 무제의 흉노전쟁, 흉노의 서진 정복, 수·당의 중국 통일, 거란의 흥기, 몽골의 부상과 쇠퇴, 만주의 흥기, 일본의 굴기, 공산당의 중국 통일, 중국의 부상 등 큰 파도가 발생할 때마다 한반도는 피해를 입었다. 우리가 피해를 당한 것은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베트남, 타이완과 함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경계선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의 긴 그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유지해나갈 방법은 태평양 너머 최강대국 미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며, 지금까지의 북한과 같은 억압과 빈곤의 대외고립은 더욱이 아니다. 미·중 신냉전 시대를 맞이해 우리가 살길은 독자적 세계관과 함께 외부 침공을 방어할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내부를 통합하는 것이다. 내부를 통합해야 민족통합도 이룰 수 있다. 민족통합을 달성해야 중국, 일본 등과 진정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안정적인 평화도 누릴 수 있다.


    自强의 길

    우리가 자강(自强)을 이뤄낼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인구 100만 명에 불과한 칭기즈칸의 몽골이 유라시아를 제패했다. 인구 10여 만에 불과한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만주를 통합하고, 거대한 명나라를 쓰러뜨렸다. 고주몽이 이끌던 예맥인(濊貊人) 수천 명이 수·당에 맞선 대제국 고구려를 세웠다. “스스로 강해지려 하지 않는 나라에 밝은 미래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되새길 때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관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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