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곽재식의 괴물여지도

금두꺼비 : 강원 홍천, 평남 양덕, 충북 청주 등

“금두꺼비 얻은 뒤 시름시름 앓다 사망” 〈지봉유설〉

  •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입력2019-08-09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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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에서 금두꺼비는 부귀영화의 상징이다. 중국인들은 일찍부터 금으로 두꺼비상을 만들어 주술적 의미로 사용하곤 했다. 반면 우리 옛 기록 속 금두꺼비 전설 중에는 그와 좀 다른 것이 많다. 금두꺼비가 막대한 부와 명예를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재앙을 일으키는 전조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5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옛 무덤 쌍영총 벽에는 두꺼비를 닮은 동물 모양이 그려져 있다. 윤곽이 흐릿한 이 그림을 보고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바로 알아채는 건 어렵다. 얼핏 개구리 같아 보이는 정도다. 그런데 학자들은 꼭 집어 두꺼비라고 말한다. 달(月)이 같이 그려져 있어서다.

    달에 사는 두꺼비 ‘창어’

    중국에는 달에 사는 두꺼비에 대한 유명한 신화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먼 옛날 세상을 구한 영웅인 예(羿)가 아름다운 부인 항아(姮娥)와 함께 신선 복숭아를 찾아 나섰다. 이 마력의 복숭아를 하나 먹으면 지상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신선처럼 살 수 있다. 두 개를 먹으면 지상 세계를 벗어나 완전히 다른 천상 세계로 갈 수 있다. 부부는 이 복숭아 두 개를 구했다. 각각 하나씩 나눠 먹었다면 둘이 같이 지상에서 신선처럼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항아가 호기심 때문인지 욕심 때문인지 복숭아 두 개를 혼자 다 먹어버린다. 그 결과 천상 세계인 달로 가게 됐다. 또한 괘씸하다는 이유로 벌을 받아 겉모습이 두꺼비로 변해버렸다. 

    이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유행했다. 고대 중국 서적 ‘회남자’ ‘포박자’ 등에도 이런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중국 사람들은 두꺼비로 변한 항아를 달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여겼다. 올 1월 달의 뒷면에 착륙한 중국 달 탐사선 이름 ‘창어 4호’도 바로 이 신화에서 유래했다. 창어는 항아의 다른 표기인 상아(嫦娥)를 중국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고구려 쌍영총 벽화에서 달과 함께 어떤 동물이 있으니, 학자들은 그것을 두꺼비라고 본 것이다. 이 벽화의 두꺼비 그림 바로 옆에는 해(日)가 그려져 있다. 그 안에 다리 셋 달린 까마귀가 들어 있는 해다. 다리 셋 달린 까마귀는 두꺼비와 더불어 중국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 요즘 우리 사극을 보면 다리 셋 달린 까마귀를 고구려의 고유한 상징처럼 활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달 속의 두꺼비와 더불어 중국에서 전래됐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중국에서는 두꺼비가 풍요와 명예를 상징했다. 그 배경에는 요나라 사람 유현영의 일화가 있다. 두꺼비 섬(蟾)자가 들어간 해섬자(海蟾子)라는 별명을 지닌 유현영은 젊은 시절 높은 벼슬을 지냈고 부와 명성을 누렸다. 그러다 술법에 관심을 기울여 신선이 됐다고 한다. 바로 그가 두꺼비를 타고 다니거나 두꺼비를 데리고 놀았다. 조선 후기 화가 심사정의 작품 ‘하마선인도’는 이 고사를 그린 것으로, 한 남자가 두꺼비와 놀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중국 사람들은 두꺼비를 좋아했다. 금을 녹여 두꺼비 모양으로 만드는 풍습이 유행했다. 중국에서는 금두꺼비가 주술적 의미도 가졌다. 금두꺼비를 갖고 있으면 재물이 들어오거나 풍수지리상 부족한 부분이 있는 집이 보완이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중국에 금두꺼비 조공

    심사정의 하마선인도(蝦磨仙人圖)(왼쪽)와 백제 무령왕릉 허리띠의 두꺼비 장식. [간송미술관 소장, 한국콘텐츠진흥원 제공]

    심사정의 하마선인도(蝦磨仙人圖)(왼쪽)와 백제 무령왕릉 허리띠의 두꺼비 장식. [간송미술관 소장, 한국콘텐츠진흥원 제공]

    우리나라에서도 금두꺼비를 패물로 만든 역사는 꽤 길었던 것 같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허리띠 장식 중에 두꺼비로 보이는 것이 있다. 조선시대 문헌에도 금두꺼비 모양 장식품을 만들었다는 대목이 종종 보인다. 눈에 띄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명나라가 조선에 금두꺼비를 선물로 보내도록 요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런 내용이 한 번도 아니고, 꽤 여러 번 등장한다. 즉 조선 사람들에게 금두꺼비는 강대국의 환심을 사고자 만들어 보내야 하는 보물이었다. 당시 조선에 금이 많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람들은 금두꺼비를 부유함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밖으로 빠져나가는 재물로 여겼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조선 중기 이후 기록에는 금두꺼비에 대한 불길한 이야기가 적잖이 실려 있다. ‘지봉유설’에 수록돼 있는 심눌이라는 사람과 금두꺼비에 얽힌 고사를 살펴보자. 심눌은 광해군 시대에 벼슬살이를 한 사람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이 궁전을 짓는 등 토목 사업을 할 때 필요한 목재를 구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임금의 눈에 들었다. 한편 ‘지봉유설’에는 심눌의 신분이 본래 미천했다는 점이 기록돼 있다. 원래는 벼슬살이를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목재 구하는 능력을 교묘히 이용해 벼슬을 얻었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어쨌든 심눌은 지금의 평남 양덕군을 다스리는 관리가 됐고, 거기서 은을 캘 수 있는 광산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은을 화폐처럼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은이 생기면 조선은 무역이나 외교 활동에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심눌로서는 큰 재물을 얻을 기회를 잡은 셈이다. 

    그런데 이 광산에서 은을 캐는 도중 커다란 바위 하나를 깨뜨렸더니 그 안에 금두꺼비가 있었다. 매우 커서 커다란 거북만 했다고 한다. 뒤에 심눌이 이것을 보관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걸 보면, 살아 움직이는 짐승이 아니라 두꺼비 모양의 커다란 금덩어리였던 것 같다. 

    심눌은 이것을 얻은 뒤 그만 겁이 덜컥 났던 듯하다. 그것을 어디에 팔거나 누구한테 헌납하지 않고 나무로 만든 상자에 넣어 가만히 간직하기만 했다. 그러다 얼마 뒤 갑자기 병이 나 벼슬에서 물러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이후 금두꺼비는 어디론가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지봉유설’에서 금두꺼비는 막대한 재물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얻게 된 사람을 몰락시키는 존재처럼 묘사됐다. 

    나는 평남 양덕이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임을 감안해, 심눌의 금두꺼비가 오래전 멸망한 고구려 왕족의 보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침공을 받고 황급히 달아나야 했던 시기, 가장 값나가는 물건을 어떤 구덩이에 묻은 것인지 모른다. 역사를 보면 고려시대에도 평양에서 전투가 수차례 벌어졌다. 그때 누군가 빼돌려 산속에 묻은 금두꺼비를 조선시대에 이르러 심눌이 발견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심눌의 몰락은 전쟁에서 패한 사람이 남긴 물건의 저주 때문 아닐까. 이런저런 상상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에는 살아 움직이는 금두꺼비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온다. 광해군 시절 편찬된 ‘응천일록’이라는 일기 형태의 책에 실린 내용이다. 서기 1616년 음력 10월경 강원도 홍천에 사는 이방좌라는 사람의 첩이 나이 60에 괴이하게도 임신을 했다. 더 신기한 것은 배속의 태아가 말을 한다는 점이었다. 이방좌의 첩은 그해 3월경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금두꺼비가 천녀(天女), 즉 천상 세계에 사는 여성 두서넛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이때 천녀 중 한 명이 태어난 지 두어 달 된 여자아이를 건네줬고, 그 후 임신이 됐다고 한다. 

    어쨌든 이방좌의 첩이 ‘말하는 태아’를 잉태하면서, 백성들 사이에는 ‘이 아기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임금이 된다’는 풍설이 돌았다. 그 이야기가 서울에까지 퍼졌다. 꿈 내용대로라면 이 아기는 여자아이로, 곧 세상을 구할 여왕이 태어난다는 얘기가 된다. 

    ‘응천일록’에 따르면 이 소문에 조선 조정은 발끈했다. 춘천부사를 보내 이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 가뒀다. 즉 금두꺼비는 신성한 운명을 정해주면서, 한편으로는 태아가 말을 하는 기괴한 현상을 일으키고 반란·역모 등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옛 문헌에서 조금이나마 밝은 분위기의 금두꺼비 기록도 하나 찾아봤다. 조선 전기 문신 남효온이 쓴 ‘귀신론’이라는 글에는 김시습이 들려줬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다. 주인공은 승려다. 어느 날 밤 이 승려는 화장실에 가다가 뭔가 물컹한 것을 잘못 밟아 터뜨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낮에 금두꺼비를 얼핏 본 적이 있는 걸 떠올리고, 자신이 금두꺼비를 밟은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에 빠진다. 그날 밤 승려의 꿈에 죽은 금두꺼비가 나타난다. 금두꺼비는 염라대왕에게 소장을 접수하고, 그 죄로 승려는 지옥에 끌려가 잔혹하고 무서운 온갖 형벌을 당한다.

    부귀영화와 저주

    한국 옛이야기 속 금두꺼비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품고 있다. [shutterstock]

    한국 옛이야기 속 금두꺼비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품고 있다. [shutterstock]

    아침에 잠을 깨어 나가 보니 자신이 무엇인가를 밟았던 자리에 실은 깨진 참외가 하나 있었다는 이야기다. 저승이나 전생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을 조롱하는 소품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서도 금두꺼비가 마냥 유쾌한 소재인 건 아니다. 금두꺼비는 조심히 대해야만 할 신령스러운 짐승이면서, 주인공이 죄악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나타낸다. 

    옛 기록 속 금두꺼비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면서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품고 있다. 이 점이 한국 금두꺼비의 독특한 매력인지 모른다. 사실 두꺼비는 우둘투둘한 피부에 독액이 흐르는 짐승이다. 그것이 매혹적인 황금빛을 내뿜는다는 금두꺼비의 설정 자체가 옛이야기와 통하는 면이 있다.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를 비롯해 우리나라 금융가 곳곳에는 황소 동상이 크게 서 있다. 미국 월가(Wall Street)에 설치된 대형 황소상을 본뜬 것이다. 그러나 황소 동상보다는 금두꺼비 동상이 더 한국적인 것인지 모른다. 투자자들이 더 많은 돈을 벌도록 해주면서, 동시에 잘못된 정책이 어두운 저주가 될 수 있음을, 혹은 재물이 잘못 쓰이면 흉측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경고하는 상징으로 쓰기에 좋을 것이다.


    곽재식 | 1982년 부산 출생. 대학에서 양자공학, 대학원에서 화학과 기술정책을 공부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교양서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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