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호

명사에세이

치킨 중독

  • 김주욱 소설가

    .

    입력2020-03-09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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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밤 뜨끈한 안방 아랫목에서 자다 눈을 떴다. 기름진 닭고기 냄새와 시큼한 무 냄새가 났다. 거실에서 아버지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퇴근길에 술 한잔 걸친 아버지가 전기구이 통닭을 사오셨다. 이불을 박차고 거실로 나갔다. 기름이 스민 하얀 종이봉투에 담긴 전기구이 통닭이 막 해체되기 직전이었다. 나를 왜 깨우지 않았냐느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덕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통닭 다리 한쪽은 내 차지가 됐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은지 술 냄새를 풍기며 형과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한 손에 닭다리를 들고 고기를 더 먹겠다고 형과 다투느라 정신없었다. 형제간의 우애가 제일 소중하다는 아버지의 연설은 엄마의 싸우지 말라는 잔소리에 묻혀버렸다.

    아르바이트생 누나

    전기구이 통닭은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 하면 떠오르는 것은 모여서 무엇을 먹는 장면이다. 우리 가족은 축하할 일이 있으면 시내에 있는 영양센터에 갔다. 영양센터 환풍기로 뿜어져 나온 고소한 기름 냄새가 골목 입구부터 풍겼다. 전기구이 기계 속의 통닭들이 꼬챙이에 가득 꿰어져 회전하며 땀 같은 기름을 흘렸다. 나와 형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통닭을 뜯었고 아버지와 엄마는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삼계탕을 먹었다. 

    중학생이 돼서는 통닭과 멀어지고 치킨과 가까워졌다. 토종 패스트푸드 매장에서 유니폼을 입은 아르바이트생 누나를 보러 가서 그녀가 튀겨주는 치킨을 즐겨 먹었다. 엄마가 가끔 재래시장에서 펄펄 끓는 가마솥에 튀겨낸 통닭을 사 왔지만 잘 먹지 않았다. 입맛이 변해 전기구이 통닭도 잘 먹지 않았다. 아무리 바싹 구운 전기구이라 해도 튀김가루를 발라 튀긴 치킨의 바삭함을 따라가지 못했다. 

    고등학생이 돼서는 하얀 양복을 입은 할아버지 집에 자주 갔다. 켄터키에서 온 할아버지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물렁물렁한 치킨을 몰고 왔다. 켄터키프라이드치킨 매장에는 예쁜 아르바이트생이 많았다. 아르바이트생을 훔쳐보며 치킨과 짭짤한 비스킷에 딸기잼을 발라 먹으면 아이스크림처럼 녹았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대학생 때는 매운맛에 중독됐다. 차가운 소주와 매운맛은 잘 어울렸다. 맛있는 음식은 거의 다 매운맛이었다. 치킨도 매워졌다. 매콤함과 달짝지근함이 공존하는 양념을 버무린 치킨이 등장했다. 새로 나온 양념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닭고기의 품질이 다소 떨어져도 양념이 보완해 주었다. 서민 대다수가 그러했듯이 나도 주말이면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려온 테이프로 영화를 보면서 양념치킨을 배달시켜 먹었다.



    치킨게임

    군대에서 먹고 싶은 것은 짜장면이나 피자가 아니라 양념치킨이었다. 휴가 나왔을 때 친구들은 호프집에서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을 시켰지만 나는 프라이드를 시키고 양념을 따로 달라고 해서 찍어 먹었다.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를 한꺼번에 고기튀김에 붓지 않고 따로 찍어 먹는 친구에게 배운 방식이다. 따로 찍어 먹어야 많이 먹어도 느끼하지 않고 바삭거리는 튀김옷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회식 때 동료들과의 2차 안주는 언제나 호프집 프라이드치킨이었다. 2002년 호프집에 가면 온통 빨강의 물결이었다. 사람들은 월드컵 대회 기간에 1년치 치킨을 한꺼번에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류인플루엔자가 연이어 발생했지만 치킨의 존재를 위협하지 못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프라이드치킨의 트랜스지방이 웰빙 바람에 휩쓸리는 동안 오븐 치킨이 등장했다. 기름이 쫙 빠진 치킨이 반짝 인기를 끌었으나 프라이드치킨을 물리치지 못했다. 

    골목상권을 지키는 소상공인을 위협하는 통큰치킨이 나타났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라졌다. 몇 년이 흐른 뒤 통큰치킨은 가격을 올려 그냥 큰 치킨으로 부활했다. 골목상권에서는 가격을 놓고 치킨게임을 벌였다.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들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신메뉴를 앞세워 치킨게임을 벌였다. 언제나 기본에 충실한 프라이드치킨이 승자였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치킨을 먹으면서 그냥 학교에 다녔고 그냥 회사에 다녔다. 경영 악화로 명예퇴직 당했을 때 전문기술이나 돈벌이가 될 만한 자격증은 없었다. 경제신문에 치킨버블에 대한 특집기사가 나왔다. 너도나도 대출을 받아 치킨집을 개업하는 통에 빚을 갚지 못하는 자영업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남이 안 하는 분야를 개척하라고 했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고 생각했다. 치킨을 가지고 치킨게임할 생각은 없었다. 경쟁자가 넘볼 수 없는 독특한 치킨을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은행에 가서 집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중독

    매일 다른 브랜드의 치킨을 먹으며 연구했다. 처음에 집중한 것은 튀김옷이었다. 입안에서 바스러지는 정도에 따른 맛을 분석하고 튀김옷 속 닭 껍질의 바삭한 정도도 분석했다. 그다음 고소함, 짭짤함, 달콤함, 매콤함의 비율도 분석했지만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중독성이 있는 치킨 소스를 개발하기로 했다. 찾아간 곳은 생로병사연구소의 K박사였다. 박사는 인체에 무해한 독을 활용해 인생의 쓴맛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나의 제안을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개발비가 만만치 않았다. 은행에 가서 추가 대출을 신청했다. 치킨집 사장에서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가로 발전했다. 아내의 걱정이 커질수록 각오를 다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공부를 제법 한다. 아들을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 

    내가 원한 치킨 소스는 중독되면 신체적 심리적 원인에 의해 끊임없이 치킨을 먹게 되는 증상이 나타나게 만드는 것이다. K박사는 뇌의 보상중추 영역을 건드리기로 했다. 치킨을 먹고 난 후 느끼는 만족감을 뇌의 해마 편도체에 새기는 것이다. 치킨을 한 번이라도 먹고 만족한 적이 있다면 뇌는 더 큰 만족감을 위해 치킨을 더 많이 먹으라고 명령할 것이다. K박사는 착수금을 달라고 했다. 은행에선 추가 대출을 거절했다. 나는 요즘 지인들을 찾아가서 치킨 프랜차이즈 사업 투자 설명을 한다. 큰 욕심 없다. 전국에 딱 100개 매장이 목표다. 

    ✽이 에세이는 손바닥 장(掌)자의 장편(掌篇) 소설 형식을 빌렸다.


    김주욱
    ● 1967년 출생
    ● 경기대 회화과 졸업, 방송통신대 대학원 문예창작콘텐츠학 석사
    ● 제5회 천강문학상 소설대상, 제23회 전태일문학상
    ● 저서 : 장편소설 ‘표절’ 단편소설집 ‘미노타우로스’ 중ㆍ단편소설집 ‘허물’ 미술과 문학의 컬래버레이션 단편소설집 ‘핑크 몬스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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