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금동반가사유상 ‘라이벌’ 국보의 양보 없는 대결

[명작의 비밀] 국보 78호·83호… 완벽한 쌍벽, 치열한 자존심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0-06-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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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생 구제’ 미륵보살의 고뇌 고스란히…

    • 높이 93.5㎝ 국보 83호는 시각적 안정감

    • 백제說, 통일신라說…국적 미스터리

    • 비교하고 싶은 대중의 행복한 고민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왼쪽).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왼쪽).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과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 국보 78호를 언급할 때면 83호가 빠지지 않고, 국보 83호를 언급할 때도 78호가 빠지지 않는다. ‘쌍벽(雙璧)’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2004년과 2015년 두 불상이 국립중앙박물관의 한자리에서 전시된 적이 있다. 마니아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일부 호사가들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어느 쪽이 더 맘에 들어?” “어느 쪽이 더 비쌀까?” 

    아, 한국 최고의 불교문화재를 놓고 우열을 가리려 하다니. 무례하고 속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대중은 비교하고 싶어 한다. 쌍벽의 불가피한 운명이라고 할까.

    사색에 빠진 두 미륵보살

    2004년 7월 경복궁 중앙박물관 마지막 특별전에 국보 78호(오른쪽)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함께 나왔다. 두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선보인 것은 1986년 8월 박물관의 중앙청 이관 기념전 이후 처음이었다. [동아DB]

    2004년 7월 경복궁 중앙박물관 마지막 특별전에 국보 78호(오른쪽)와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함께 나왔다. 두 반가사유상이 나란히 선보인 것은 1986년 8월 박물관의 중앙청 이관 기념전 이후 처음이었다. [동아DB]

    한쪽 발을 올려놓았다고 해서 ‘반가’,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사유’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은 포즈가 똑같다. 한쪽 다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사색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오른뺨에 살짝 갖다 댄 손에서 사유의 분위기가 깊이 전해 온다. 두 반가사유상은 사색에 빠진 미륵보살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가 입멸(入滅)하고 56억7000만 년이 흐른 뒤 이 세상에 찾아와 부처가 되고 많은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을 말한다. 그렇다 보니 책임감이 막중하다. 도솔천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음을 위해 고뇌하고 사유하는 까닭이다. 어떻게 하면 이 땅의 중생을 불교의 가르침으로 이끌 것인지.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높이 80㎝)은 태양과 초승달이 결합된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다. 몸에 걸친 천의는 경쾌하다. 전체적으로 여성적이면서 장식이 화려하다. 미소는 신비롭고 그윽해 여운이 깊다. 보관에 등장하는 태양과 초승달, 새의 날개, 꽃잎 등에서 페르시아 분위기가 풍긴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높이 93.5㎝)은 봉우리가 셋인 산의 형상을 한 보관을 쓰고 있다. 목에 두 줄의 목걸이만 있을 뿐 78호 반가사유상에 비해 별다른 장식이 없다. 단순해서 더 부드러운 힘을 보여준다. 치마 주름이 사실적이고 입체적이다.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은 서울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들은 독립된 전시실에서 서로 교대로 전시된다. 그 전시실에 들어서면 심오한 사색의 분위기가 단연 압권이다. 이곳은 어둑어둑하다. 전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엔 반가사유상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잠시 후 반가사유상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곧이어 진열장 유리벽에 비쳐 사방팔방에서 반가사유상의 모습이 나타난다. 깨달음이라고 할까. 환상적인 체험이 아닐 수 없다. 그 한없는 적요함과 무념무상 분위기에 푹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을 들렀다 나가는 관람객들의 얼굴에는 만족감과 풍요로움이 충만하다. 외국인들에겐 특히 더 충격적인 감동일 것이다. 

    두 반가사유상은 국립중앙박물관의 간판 중 간판이다. 그렇다 보니 독립된 전시실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두 불상을 함께 전시하지는 않는다. 하나를 전시하면 다른 하나는 수장고에서 휴식을 취한다. 물론 한 점이 해외에 나가면 다른 한 점이 전시실로 들어온다. 교대로 전시하는 것은 최고 문화재에 대한 예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두 점을 한 자리에 전시한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2004년 경복궁 시대를 마감하면서 기획한 고별 특별전에서였다. 또 한 번은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이전 10주년 기념 ‘고대불교조각대전’에서였다. 눈 밝은 사람들에겐 흔치 않은 호사를 누리는 기회였다. 

    두 반가사유상이 함께 전시될 때, 호사가들은 두 불상을 열심히 비교 감상했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반가사유상 가운데 무엇이 더 매력적일까.” 

    이런 궁금증이 많았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우문(愚問)이라고 할 것이다. 한국의 대표 문화유산에 서열을 매기려 하다니, 무례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문이고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대중은 계속 묻는다.

    국보 83호의 뉴욕 출품 논란

    2013년 10월~2014년 2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서 ‘황금의 나라, 신라’ 특별전이 열렸다. 신라인들이 황금으로 만든 금관과 장신구, 불상, 토기, 공예품 등 신라의 문화재 13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신라의 많은 문화재가 관람객들을 사로잡았지만 단연 압권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었다. 미국 언론은 이 반가사유상을 두고 “세계적 수준의 세련미, 그 아름다움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전시를 앞두고 이런 일이 있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에 출품할 것인지를 놓고 찬반 논란이 일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박물관에 우리 문화재를 출품해 그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찬성론과 “해외 전시가 너무 잦아 훼손의 우려가 크다”는 반대론이 맞섰다. 

    국보나 보물이 해외 전시에 나가려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당시 문화재위원회는 “미국으로 나가는 우리의 국보, 보물 건수가 너무 많은데다 빌려주는 기간도 너무 길다”는 이유로 반출 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러자 국립중앙박물관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한 해 600만 명이 찾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박물관이다. 이곳에 국보 83호를 내보내는 것은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해외 반출을 승인해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다. 문화재위원회는 “유물 운송과 포장에 관한 서류를 보완하고 앞으로는 장기간 혹은 대량으로 해외에 반출하는 것은 자제한다”는 조건으로 반출을 승인했다. 국보 83호 반출 논란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그 무렵 새로 부임한 변영섭 문화재청장이 문제를 제기했다. 변 청장은 이렇게 말했다. 

    “해외 전시가 잦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밖으로 나갈 수 없다. 2008~2009년에도 4개월 10일간이나 벨기에로 해외 전시를 다녀온 적이 있다. 국보 83호처럼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반가사유상 걸작이 해외 전시를 위해 수시로 짐을 풀고 싸는 일을 반복해선 안 된다.” 

    돌발 상황이었다. 급기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청와대에 “국보 83호를 꼭 보내달라”는 출품 탄원 편지까지 보냈다. 이어 문화체육관광부가 중재에 나섰고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전시에 나갈 수 있었다. 흥미로운 논란이었다. 그런데 반출을 허가하자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 모두 근본적인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한국미를 대표하는 걸작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2013년 논란의 쟁점은 한국 문화재의 대표작인 국보 83호가 너무 자주 외국에 나간다는 것이었다. 자주 나가다 보니 안전 문제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쟁점은 또 있었다. 왜 우리 것만 나가야 하느냐는 점이었다. 이제 우리의 국력도 크게 신장했는데, 우리의 명품을 보려면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었다. 

    국보 83호는 1960년 이후 7번에 걸쳐 2255일 동안 해외 나들이를 했다. 사실, 상당히 오래 외국에 나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국보 78호는 단 2회에 366일 동안 해외 전시에 참가했다. 국보 78호의 해외 전시도 그리 짧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국보 83호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 또한 궁금한 점이 아닐 수 없다.

    베일에 싸인 반가사유상 ‘국적’

    두 반가사유상은 어느 시대 불상일까. 아쉽게도 제작 시대나 국적은 정확하게 단정할 수 없다. 연구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78호는 6세기 후반, 83호는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본다. 

    국적이 베일에 가려 있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출토지 또는 전래 경위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보 78호는 1912년 조선총독부의 데라우치(寺內) 총독이 일본인으로부터 입수했고 이후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했다. 그것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이어진 것이다. 경북 안동 지역에서 발견됐다는 얘기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국적에 관해선 고구려설, 백제설, 신라설로 나뉜다. 현재로서는 삼국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작 시기는 균형 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 주름, 명상에 잠긴 깊고 그윽한 얼굴 표정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이 성숙기에 접어든 6세기 후반에 제작됐을 것이란 견해가 많다. 

    국보 83호는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인들이 경주에서 약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그 후 서울로 옮겨놓았고 이것을 1912년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으로부터 2600원을 주고 구입했다. 그것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으로 이어졌다. 국보 83호의 출토지에 대해선 “경주의 오릉 근처에서 출토된 것” “경주 남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 전한다. 충청도라는 말도 있고, 경북 안동 지방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 전언일 뿐 구체적인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국보 83호의 국적에 관해선 신라설이 가장 우세하다. 경북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신라의 반가사유상(상체는 사라졌고 하체 부분만 남아 있음)과 양식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에 신라 불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다. 각종 증언이나 화랑도와의 연관성을 근거로 신라 불상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백제설과 통일신라설도 있다. 백제설은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에는 삼국 가운데 국보 83호 같은 걸작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백제밖에 없다는 견해다. 최근 등장한 통일신라설은 다소 파격적이다. 

    “한국의 반가사유상 발전 과정에서 7세기 초반엔 이같이 진보된 반가상이 제작됐다고는 도저히 생각하기 어렵다. 국보 83호는 삼국 통일 후 백제의 장인들이 경주 조각계에 편입되면서 제작한 반가사유상이다.” 

    백제설에 뿌리를 둔 통일신라설이라고 할 수 있어 흥미롭다. 이렇게 국적과 관련해 무엇이 명쾌한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아쉽지만, 영영 그 비밀을 밝혀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비밀이 두 반가사유상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준다.

    국보 83호와 일본 고류지 반가상

    일본 고류지 목조 반가사유상. [일본 고류지(광륭사) 소장]

    일본 고류지 목조 반가사유상. [일본 고류지(광륭사) 소장]

    2005년 10월 서울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새로 문을 열었을 때,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영문 설명문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논란을 초래한 문장은 “This statue has remarkable similarities with a wooden statue at the Koryuji in Kyoto, Japan”이었다. 이 문장을 해석하면 “이 불상은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고류지(廣隆寺) 목조 반가사유상과 놀랍도록 흡사하다”란 뜻이다. 

    이를 놓고 일부 관람객이 “한국의 불상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외국인들이 오해할 수 있다”면서 중앙박물관 측에 정정을 요구했다. “고류지 목조 반가사유상은 한국에서 만들었거나 한국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렇게 설명을 해놓는 건 곤란하다”는 지적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처음에 “두 불상이 흡사하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소개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래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얼마 후 영문 설명문을 수정했다. 

    사실 많은 사람은 일본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과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한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류지 반가사유상의 재료가 한반도에는 많지만 일본에는 별로 없는 붉은 소나무, 즉 적송(赤松)이라는 점,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623년 신라의 사신이 불상과 금탑 등을 가져와 불상을 하테데라(秦寺·고류지의 다른 이름)에 안치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점 등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이 근거만으로 고류지 반가사유상이 한반도에서 제작됐다고 보기에는 다소 부족하다. 적송은 일본에도 있으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그 불상이 지금의 고류지 반가사유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6, 7세기 한국과 일본의 불상 제작 기법 및 수준이나 문화 교류 양상으로 볼 때 일본이 독자적으로 고류지 반가사유상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일본의 반가사유상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한국과 일본 전문가 대부분의 견해다. 어쨌든 일본이 자랑하는 고류지 반가사유상은 우리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대중 사이의 화제는 국보 78호보다는 국보 83호에 집중되는 것 같다. 그렇기에 해외 진출을 더 많이 하게 되고 스토리도 더 축적되는 것 아닐까. 게다가 외국인들은 국보 83호와 일본의 고류지 반가사유상을 연결해 보려는 경향도 강하다. 우리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세계도 인정하고 일본도 인정한다. 그래서 국보 83호를 외국에서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행복한 우열 논쟁

    그러던 차에 최근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에 비해 훨씬 더 발전된 기술로 제작됐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민병찬, ‘금동반가사유상의 제작 방법 연구’, 미술자료 89호, 국립중앙박물관, 2016). 국보 78호와 83호 모두 밀랍주조법으로 만들었지만 국보 83호의 완성도가 국보 78호보다 높다는 것이다. 국보 78호는 주조틀에 청동 쇳물을 부을 때 공기가 밖으로 제대로 빠져나오지 못해 주조상의 결함이 나타났다고 한다. 물론 다시 수리하고 표면에 도금을 해 지금의 우리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다. 반면 국보 83호는 좀 더 발전한 기술력으로 주조를 마무리해 결함이 거의 없다고 한다. 주조 기술상의 이러한 차이는 국보 83호가 국보 78호보다 후대에 제작됐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기회에 두 반가사유상을 좀 더 들여다보자.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국보 78호의 허리는 다소 가늘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비해 83호는 좀 더 안정적이고 조화로운 것 같다. 국보 78호는 높이 80㎝이고 국보 83호는 높이 93.5㎝이다. 국보 83호가 더 크다 보니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상대적으로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는 말이다. 

    어쩌다 보니 국보 78호에는 송구한 말이 돼버렸다. 그러나 국보 78호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모두 아름답고 종교적이다. 실물의 매력은 대단하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얼굴의 미소다. 이 대목에 이르면, 비교할 수는 있지만 국보 78호와 83호의 우열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아름다움과 종교성을 판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 지극히 주관적이다. 사람마다 스스로의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럼에도 대중은 묻고 비교하고 싶어 한다. 그 또한 불가피한 일일지 모르지만 어찌 보면 두 명작을 갖고 있는 우리의 행복한 고민이기도 하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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